고방서예[3308]행초서=사가정(四佳亭)28, 正因寺 (정인사)
正因寺 (정인사)
- 사가정(四佳亭) 徐居正( 서거정)
木魚有響朝岑靜。목어유향조잠정
石馬無聲曉寢寒。석마무성효침한
珠樹鵑啼春寂寂。주수견제춘적적
鼎湖龍去月漫漫。정호룡거월만만
徐居正
자원(子元), 강중(剛中), 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 문충(文忠), 달성군(達城君)
원문=四佳詩集補遺三 / 詩類○輿地勝覽
사가시집보유 제3권 / 시류(詩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시
正因寺 (정인사)
木魚有響朝岑靜。石馬無聲曉寢寒。
珠樹鵑啼春寂寂。鼎湖龍去月漫漫。
목어 소리 울린 가운데 아침 산은 고요하고 / 木魚有響朝岑靜
석마는 소리 없어라 새벽 능침은 썰렁하네 / 石馬無聲曉寢寒
주수에 두견새 울어라 봄날은 적적하고 / 珠樹鵑啼春寂寂
정호에 용은 떠나고 달빛만 아득하구나 / 鼎湖龍去月漫漫
[주-D001] 정인사(正因寺) : 고양군(高陽郡)에 있던 절인데,
조선 덕종(德宗)의 능, 즉 경릉(敬陵) 동쪽에 있었다.
세조 3년(1457) 경릉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주-D002] 목어(木魚) : 불가에서 사용하는 불구(佛具)의 하나로,
나무로 긴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걸어 놓고 두드리는 법구(法具)이다
. 불경을 읽을 때나 승려들에게 식사 시간을 알릴 때에도 이것을 두드리는데
특히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까닭은,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상징하여 승려들에게 밤낮으로 잠자는 것을 잊고 도에 정진하도록
경계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주-D003] 석마(石馬) : 돌로 조각한 말의 형상을 가리키는데,
옛날 제왕(帝王)이나 고관(高官)의 능묘(陵墓) 앞에 흔히 이것을 세웠다.
[주-D004] 주수(珠樹) : 전설에 나오는 선경(仙境)의 나무를 가리키는데,
전하여 흔히 나무의 미칭(美稱)으로 쓰인다.
[주-D005] 정호(鼎湖)에 용은 떠나고 : 정호는 하남성(河南省) 형산(荊山) 아래에 있는
지명으로, 황제(黃帝)가 형산 아래서 솥[鼎]을 주조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제가 솥을 다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군신과 후궁으로 함께
따라 올라간 자는 70여 인이었고, 여기에 함께 따라가지 못한 소신(小臣)들은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8
徐居正( 서거정)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서거정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