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림다방에서 / 임보
대학병원에 들렀다가 모처럼 대학로를 어정거리고 있는데 낯익은 이름 <학림다방>이 보이기에 들어가 보았네
목조 마루에 목조 탁자 옛 배우들의 사진이 죽 걸려 있고 턴테이블에선 LP음반이 돌며 ‘목련꽃 그늘 아래서’를 흘리고 있네
창밖을 내다보니 도서관이 있던 옛 캠퍼스 자리에는 낯선 상전(商殿)들만 점령군들처럼 위풍당당 들어서 있고
40여 년 전 세느* 개천가에서 놀던 그 시절이 아슴아슴 다가오려 하는데 옆 테이블의 세 여자가 떠드는 소리 자꾸만 내 기억을 가로 막고 있네
검정색 작업복에 워커를 신고 쌍과부집에서 김치깍두기에 막걸리를 마시며 기고만장했던 그 친구들,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누비며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했던 4.19의 주역들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튀는 놈은 국회의원도 되고 소심한 놈은 교수도 되고 아니, 건달도 되고 놈팽이도 되고 그렇게 저렇게들 지내다가 성급한 놈은 서둘러 이미 떠나가고 이젠 다 늙다리들이 되어 병원이나 드나들고 있는 신세로세
* 세느 학교 앞에 흐르던 작은 개울을 우리는 ‘세느’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 밑에 묻히고 말았다.
매실주 / 임보
운수재(韻壽齋)엔 세 종류의 매실주가 있다 하나는 뜰의 매실을 따서 손수 담근 운수주, 또 하나는 아흔일곱의 장모님이 광주에서 보내온 무등주(無等酒), 또 하나는 세란헌(洗蘭軒)*의 우금실(雨琴室)* 주인이 담근 세란주다
운수재의 지하엔 큰 독이 여럿 있다 독의 30%쯤 매실을 넣고 35°의 소주로 나머지를 채운다 반 년쯤 두면 노랗게 우러나는데 그때 매실을 건져내고 숙성시킨 게 운수주다
무등주는 좀 쌉스름하다 늙은 사위의 건강을 염려해서 25°의 연한 소주에 매실을 많이 넣었기 때문! 입술을 뗄 때마다 “너무 과하게 들지 마시게!” 하는 장모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금실 주인은 요새 탁주로 돌리면서 손수 빚은 매실주 병을 내게 맡겼는데 35°의 술에 50%의 매실이 들어있어 운수재의 것보다는 좀 짙고 시다
나는 매일 저녁 반주를 하는데 첫 잔은 무등주, 둘째 잔은 세란주, 그리고 운수주로 마지막 입가심을 한다
금년에도 운수재의 매실나무가 주인의 뜻을 미리 짐작하고 이른 봄부터 꿀벌들을 열심히 불러 모으더니 한 일년쯤 버틸 수 있는 내 양식을 넉넉히 마련해 주셨다
* 세란헌 : 홍해리 시인의 당호. * 우금실 : 홍해리 시인의 별실 서재가 양철지붕이어서 비가 오면 요란하다. 그래서 내가 붙인 이름임. 천지람(天之藍) / 임보
양하남색경전(洋河藍色經典)은 술의 천국 중국 양하(洋河)에서 양질의 수수에 보리 밀 그리고 완두를 첨가해 잘 발효시켜 빚어낸 명주란다
난정(蘭丁)*이 <량허란써징디엔洋河藍色經典-하이즈란海之藍>이란 시에서 48°짜리 ‘해지람(海之藍)’ 한 병을 임보(林步)와 둘이 시수헌(詩壽軒)*에서 다 비우고 신발을 신은 채 쪽빛 바다를 흔들리며 건넜다고 자랑했다
이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동백 시인이 중국에 다녀오면서 ‘천지람(天之藍)’을 들고왔다 천지람은 해지람보다 배나 더 비싼 명주라고 하니 이놈을 마시면 쪽빛 하늘을 헤엄치는 기분일지 모르겠다
어느 길일을 잡아 이 천지람을 메고 시수헌에 가서 난정과 한나절 수작(酬酌)을 부리며 노닥거릴 작정이다 그런데 천지람 위에 또 몽지람(夢之藍)이 있다고 하니 어느 세월에 그놈들 다 만나 본다? 참 바쁘기도 하겠다!
* 난정 : 홍해리 시인 * 시수헌 : <우리詩>사랑방 민망주 / 임보 베트남을 다녀온 소정 시인이 술을 좋아하는 나를 생각고 ‘민망주’라는 술을 가져왔다 내게 건네 주면서 하는 말이― 대월국 제2대 황제 민망제(明命帝, 1791~1841)가 즐겨 마시던 술로 그의 이름을 상표로 하여 만든 명주란다 민 황제는 5척 단구인데도 수백의 비빈을 거느리고 기백 명의 자손을 생산해 낸 정력적인 인물인 바 그 힘의 비결이 이 술에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 술을 앞에 놓고 곰곰이 생각한다 한 잔 마셔봐? 그러다 정말 ‘민망’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쩐다? 37°짜리 과히 독한 술은 아니지만 미리 주눅이 들어 그냥 술병만 바라다보고 있다 - 임보 시집 <사람이 없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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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韻詩堂, 시를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
첫댓글 임보는 술타령만 하고 있다!
잘 보았습니다. 저는 술과는 인연이 없습니다.
서늘한 계절 늘 행복한 시간 이어 가시길 바랍니다.
지난 달 인터넷 글 독서 중에 유선생이란 애주가가 몽지람에 대해 쓴
술맛 비교라는 글을 읽은 적 있어요
덕분에 술 문화에 대해 이런 것도 있구나 했는데요 선생님 글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어제 오늘은 조석으로 쌀쌀합니다
선생님 건강한 가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