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 나의 이광수론
단대신문 강재철 교수 <문과대학·국어국문학전공> 단대신문(http://dknews.dankook.ac.kr)
Ⅰ. 나의 살던 고향과 반달
우리대학에는 한강이 굽어보이는 위치에 고풍스러운‘난파’음악관이 있다. 이곳에는 난파 홍영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유족이 기증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평소 음악도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홍난파 선생이 작곡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과 최초의 동요인 윤극영 선생의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되는 「반달」의 작곡가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인적자원부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제외시켰다. 작곡가가 친일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삭제한 것이다. 이는 현행 국어교육에서 작품은 작품이고 작가는 작가라는 작품과 작가의 분리를 전제로 한 예술지상주의를 기본으로 추구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시대 착오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Ⅱ. 문학으로 안내해준 「유정」
나는 중학교 때 이광수의 「유정(有情;1933)」을 읽고 한 없는 감동을 받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를 문학에로 안내한 유일한 계기가 된 작품이 「유정」이며 작가가 춘원 이광수였다. 이성에 예민했던 시절 교장 최석과 수양딸 남정임 사이의 사랑을 그린 「유정」은 소년기의 나를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큼 성숙케 했다. 그리고 풋풋한 나이에 접한 처음 겪은 문학적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고, 훗날 나를 국문학도가 되게 한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정신 없이 보내느라 작품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한 나는 국문과에 진학한 이후에도 「유정」의 남녀주인공들은 나의 뇌리 속에 잊을 수 없는 동경의 인간상이었고, 작자 이광수는 나의 유일한 우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공의 깊이를 더해갈 때 춘원 이광수가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창씨 개명 후 가야마 미쓰로오(香山光郞)으로서의 친일 행적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중학교 때 각인된 이광수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양의 전통적인 ‘문즉인(文則人)관념’, 즉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등식 관념을 말끔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논어」 한 구절을 대하고나서 이러한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군자는 말로써 사람을 기용하지 아니하며 사람으로써 말을 버리지 않는다(君子 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라는 공자의 말씀이었다. 진정한 군자라면은 말을 잘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들어 쓰지 않으며, 사람이 나쁘다 하여 그의 좋은 말까지 버리지 않는 법이다. 살인자의 말이라도 좋은 말이면 받아들이고, 존경 받는 사람의 말이라도 나쁜 말이면 버린다. 진시황을 도와서 분서갱유에 앞장서 많은 유학자들을 죽음에 몰아 넣은 사람인 이사(李斯)의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가 사람에 널리 회자되어온 『고문진보』에 지금도 전하지 않는가 !
사람이 나쁘다고 그의 좋은 말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는 없다. 친일파의 작품이라 하여 모두 버릴 필요는 없다. 나아가 ‘의(意)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 말라(惡其意 不惡其人)’는 말이 있듯이 친일파의 의(意)는 미워해도 사람까지 미워해서는 안된다. 아마도 성인들이 살아계신다면 인(仁), 자비(慈悲) 사랑의 정신을 발휘할 때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광수가 친일했다고 하여 그의 작품을 모두 버릴 필요는 없다. 친일한 뜻은 미워하되 인간 이광수까지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는 냉정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로서 서서히 압박해오는 완악(頑惡)한 야성(野性)마저 한몸으로 감싸 안으려 했던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가 아니었겠는가!
그는 누가 뭐라해도 한국의 대문호다. 한편 나에게는 사랑의 고뇌와 문학적 감동이 무엇인지를 최초로 심어준 더할 수 없는 유일무이의 작가다.
Ⅲ. ‘불이언거인 불이인폐언’
학생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간 대중의 정서를 순화시켜온 「고향의 봄」이나 「반달」이 교과서에서 삭제되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그토록 달달 외웠던 육당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문」이나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그리고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춘원 이광수의 「유정」도 친일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워서는 안된다’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침이 행여 있어서는 안된다.
공자의 “‘불이언거인’하며, ‘불이인폐언’하니라”라는 말씀을 오늘날 깊히 되새겨 봐야한다. 교육은 학생 정서만을 우위에 두어서 안됨은 물론이다.
[장정일 칼럼] 이광수 최남선은 안 되는 이유(2016) -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8191168397879
지난 8월 2일, 한국문인협회는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 제정 사실이 공표된 뒤 문학계 안팎의 역풍을 맞고 며칠 만에 백기를 들었다. 1만 3,000명의 문인이 모였다는 한국문협은 동네 반상회보다 못했다. 춘원과 육당은 서로 판박이나 같았던 대표적인 친일 문인이다. 그들의 이름으로 된 문학상을 제정하기로 작심했다면 친일 과오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기념되어야만 하는 문화 내적인 근거가 제시되어야 했다. 한국문협이 믿었던 것이라고는, 내년이 한국근대소설의 효시인 ‘무정’이 출간된 지 100주년째라는 상징적 위세밖에 없었다.
김동인과 서정주는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버젓이 등재되어 있지만, 1955년과 2001년부터 두 사람을 기리는 문학상이 만들어졌다. 동인문학상과 미당문학상을 받는 시인ㆍ소설가들은 두 사람의 문학적 성취와 정치적 과오를 기막히게 분리한 뒤, 문학적 성취와 상금만 선택해서 받는 모양이다. 포정해우의 솜씨다. 김동인 서정주는 되고 이광수 최남선은 안 되는 이유는, 전자는 문사 나부랭이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사회적 활동의 비중이 글쓰기보다 더 컸던 때문이다.
함석헌은 ‘새 시대의 전망’(백죽문학사,1959)이라는 제목으로 초간되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1979)라는 제목으로 재간된 책에서, 이승만 시절에 개최된 ‘육당ㆍ춘원의 밤’에 대한 감상을 적은 바 있다. 그는 무려 여덟명의 강사가 나섰던 육당ㆍ춘원의 밤을 실패한 강연회였다고 단정짓는다. 함석헌은 강당 문을 나오면서 “소금이 아니 들었구나!”라고 분개하고 “점잖음이 사람 죽이누나!”라고 탄식했다.
“강사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두 분이 다 문제를 가지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사료 편수관(최남선)이 됐고 학도병 나가라는 권유 강연(이광수)을 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이것을 잘했다 할 수는 없으니 말을 끄집어내면 그것에 대한 비판을 안 할 수 없고, 하면 고인에게 욕이 될 것 같고, 이러므로 될수록 그 문제는 건드리지 말자 해서 그 말은 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픈 데 건드리지 않고 고치는 의사는 어디 있으며 병 고쳐 주지 않고 인술이 어디 있나? 그것 하자고 연 밤에 그것 아니 했으니 무슨 의미인가?”
김현이 자신의 이광수론 첫머리에 써서 유명해진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와도 같다”던 말의 기원이 여기 있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그들은 참 잘 울었다”면서 육당과 춘원이 펴낸 잡지와 작품의 이름을 죽 열거한다. 그런 다음 “그것이 다 이 민족을 위해 울고 이 나라를 위해 슬프게 힘 있게 우렁차게 운 것 아닌가? 민중은 한때 그들 안에서 자기의 가슴에 사무친 불평을 시원이 울어낼 수 있었다. 육당ㆍ춘원 울라고 하늘이 천분을 주어 내보낸 울음꾼이 왜 마지막까지 울지 못했나?”라고 안타까워했다. 나머지는 독자들이 찾아 읽으시라.
원래 8월은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와 반일 정서가 분기탱천하는 달이다. 8월은 걸그룹(소녀시대)이 광복절 하루 전날 도쿄에서 공연한 것만으로 비난받는 달이고, 일본제국의 군기를 이모티콘으로 사용한 가수(티파니)를 연예계에서 영구퇴출시켜야 한다고 광분하는 달이다. 언론이 한국문협의 어설픈 계획을 폭로한 것도 8월이다. 함석헌은 “자기 발견의 정도가 낮은 민중일수록 우상적인 숭배에 빠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량 좁은 제재(制裁)를 한다. 그래 가지고는 사회는 건전한 발달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8월은 광복의 기쁨이 넘쳐나는 달이 아니라, 1년 동안 친일을 했던 죄의식을 정화하고자 서로를 밀고하는 달이다. 매일 제대로 ‘울었(깨어 있었)’다면 어쩌자고 속죄월(贖罪月)이 따로 필요할까. 모든 문인들이 저 상을 욕스럽게 여겼다면 애초부터 반대 운동을 할 필요도 없다. 모두들 안 받을 테니 그까짓 상 정도는 생겨도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거부할 것이 분명한 그 상을 ‘누군가는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춘원ㆍ육당 문학상 제정을 원천봉쇄 했다. 이 두려움은 어디서 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