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홀로가 되어 새벽같이 나섰다.
사직(社稷) 창고(倉庫)가 있었다는 사창~장천면을 포기하고 구25번국도의 산동면소재지~
경운대학교~장천면 길을 택했다.
상주시 사벌면 하나로마트의 이상동의 걱정이 산동면 사창리 길이 아니었던가.
이 일대는 구미 제4산업단지가 점유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산동면(山東)에는 봉산리(鳳山) 4단지에 이어 적림리(積林:면소재지)에 5단지가 들어선단다.
농공단지까지 포함하여 온통 공단면이 되고 마나 보다.
게다가 인덕리에 선산CC까지 자리잡고 있으니 자투리 땅들이 사람 살만한 곳이 되겠는가.
땅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부자는 되겠지만...
이른 아침에 이 무슨 변고인가.
산동면 성수리(星水)앞 S형 도로를 막 돌았을 때 전방 좌측 갓길 경계선에 놓여있는 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접근하는 동안에는 덩치로 보아 역살(轢殺)당한 강아지 겠거니 했는데 야생동물이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차 바퀴에 깔린 흔적이 전혀 없다.
피도 흘리지 않았다.
정녕 횡단하려다가 차에 부딪혀 뇌출혈로 사망한 것이 아닐까.
야생 동물과 보양을 동의어처럼 여기고 닥치는 대로 잡아 먹는 보신주의자들의 눈에 띄기 전에
수로(水路)가에 묻었다.(아래 그림2)
어제는 義狗塚, 오늘은 義牛塚.
배은망덕하는 인간군을 부끄럽게 하는 의로운 가축들,
의구, 의우가 어찌 구미, 선산에 국한된 것이냐.
유사한 전설, 설화는 전국적이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짐승들을 통해 인간을 가르치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아
철저한 유교사상 주입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패륜은 끊이지 않았던 듯.
장천면 소재지를 막 벗어났는데 논에서 추수하던 한 중년이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며 걸음을 멈추게 했다.
커피를 사양했더니 홍삼드링크제를 권하며 장천 자랑에 들어간 49세의 이 사람,
김인수는 특히 오상고등학교를 내세웠다.
면 단위 학교인데 황금종(KBS의 도전골든벨 프로)을 울렸다니 지역민으로서는
자부심 가질 만도 하겠다.
아차, 조금 전에 그 학교 앞을 지나면서 교사(校舍)와 분위기가 안정감을 준다고
느꼈던 바로 그 학교구나.
교명과 교훈이 같아서(五常:仁義禮智信) 특이하다 생각했는데.
2005년 3월 8일 48번째로 골든벨(Golden Vell)을 울렸다.
그 결과 학교 위상이 높아졌고 인근 도시를 포함해 적잖은 타지역 학생들이 유학
(遊學)을 오고 있다니 골든벨 특수인 셈이다.
서울 강남이 8학군 특수지역(特需)이며 유명 학원가(街) 일대가 그런 것 처럼.
아듀(adieu) 구미!
구미시 장천면에서 구미와 칠곡을 가르는 한천(漢川)을 건너(장천교)
칠곡군(漆谷) 가산면(架山)으로 넘어가니까.
어느 새 가을이 불붙었는가.
한천 건너 칠곡땅에 접어드는데 온 산이 붉어가고 있다.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 <다부동전승비> (아래 그림1)
미 보병 제 27연대는 저 유명한 다부동전투에서 6. 25 동란사상 최초의 대(對)전차전
승리부대가 되었다.
적 탱그의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밀려 낙동강마저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 때, 그들이 다부동 방어선의 붕괴를 막아냄으로서 大反轉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전승비는 그 부대(연대장 John H. Michaelis대령)의 전공을 기리는 기념비다.
고개 옆, 우계산 기슭에도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있다.(아래 그림2)
달구벌(大邱)과 관문(鳥嶺關門)을 잇는 유일한 통로(영남대로)인 다부동고개는 지리적
으로 격전의 숙명적 요충지다.
왕건과 견훤의 혈투, 병자와 임진 양외란(兩外亂)을 비롯하여 민족 동란에 이르기 까지
숱한 격전의 장이었다.
특히 동족 상잔의 혈전에서는 참상이 극에 달하였다.
하루의 신병 투입이 무려 700명이었고 보충되는 소위는 참전은 고사하고 유학산 정상의
소대에 도착 여부가 문제였다니까.
이데오로기(Ideologie)가 만든 비극이었다.
그러나, 긴 역사의 시각에서 보면 이념적 갈등이나 반목이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동질성
보다 우월하지는 못한다.
시일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통일의 날이 올 것이다.
그 때 이 기념비, 기념관들의 이미지는 어떻게 될까.
그것들의 존재 의의는?
아마, 민족적 비극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산 교육장?
그렇다면 비문은 이념적 대결구도를 극복하고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교훈적 내용이 돼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도 이 비극은 강대국들의 극동아지역 지배력 강화를 위한 술수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그랬기에 이념을 빙자했으나 동족간 살륙의 참혹한 전투였을 뿐 우리의 전쟁은 아니었다.
우리 정치판의 극언적 요설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동일 민족인 한,
우리는 상처들을 후벼파는 일을 지양하고 치유를 위한 상호 노력과 보살핌이 우선돼야 한다.
강자 쪽에서 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