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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늘 설교는 이번 수련회 강사이신 김영석 목사님께서 해 주시겠습니다. 설교 제목은 제자 베드로입니다. 이번 수련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참 컸습니다. 마지막 날인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께서 설교해 주시겠습니다.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환경이 좀 달라졌지만 우리 수련회의 마지막 예배로 준비하였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변화라고 하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서 다섯 인물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생겨지는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변하나요? 안 변하나요?
안 변합니다. 죽어도 안 변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재되어질 때 우리의 삶은 변합니다. 그 성령으로 인하여 변해야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처음 사울을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울이었지만 사람을 죽여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사울이었지만 복음 전도자로 바뀌었습니다. 그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사 삼갈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습니다. 함께하는 사람이 없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비록 가진 것은 소문은 막대기 하나였지만 그 막대기를 가지고 블레셋을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간을 생각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죄이지만 그 한 사람의 탐욕으로 인해서 공동체에 얼마나 큰 어려움을 가져왔는가라고 하는 자기의 탐욕으로 인해서 변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였던 아간 한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였습니다.
어제는 기억나시나요?
사사 3선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목숨을 다하여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그가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그 간구를 통해서 한 사람 삼손이었지만 그를 통해서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또 주일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기를 원하는 인물은 베드로입니다. 여러분들 베드로가 누구인가라고 하는 것 잘 아시죠?
12 제자 중에 수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의 이름을 대보세요. 그러면 가장 먼저 누구를 꼽습니까?
베드로를 꼽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은 몰라도 베드로 안들의 야고보,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은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12 제자의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 가시고 예수님이 따로 세우셨던 제자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항상 있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을 도와서 3년의 공생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곧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베드로입니다. 이 베드로 16장 16절에 보면 베드로가 남기고 있는 엄청난 신앙 고백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신앙 고백 위에 우리 하나님의 교회가 터전해 있습니다. 캐톨릭에서는 이 신앙 고백 곧 교황이 가지고 있는 그 고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 개혁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내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하는 그 신앙 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 고백을 남기고 있는 사람이요. 베드로입니다. 정말 베드로의 그 신앙 고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고, 베드로의 그 신앙 고백에 의해서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라고 하는 것을 고백할 때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내 삶의 구주로 오사 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본질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 사건이 있고 난 이후에 우리가 본문으로 봉독한 21절에서 26절까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내가 복이 있다. 너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는 그 예수님의 엄청난 고백을 들은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게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사역을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본문 16장 21절과 22절의 말씀, 제가 개적 개혁 성경으로 봉독해 드립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신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림하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역을 말씀하십니다. 죽는다는 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지만 다시 3일 후에 살아난다고 하는 말씀을 남기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항변하였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항변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를 찾아보면 예수님을 꾸짖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무슨 말씀하십니까?
이런 일은 예수님에게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거친 항의를 하고 예수님에게 거친 말로 예수님을 꾸짖을 정도의 항변을 하였다. 그 말로 원문에는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를 꾸짖고 그러면 안 돼 못 써 너 그러면 큰일 나라고 하는 그 정도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항변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말로 인하여 내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는 예수님이시지만 이 말씀을 듣고 이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아주 혹독한 말을 남기고 계십니다.
그것이 본문으로 봉독한 23절의 말씀이에요. 칭찬받고 수제자로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이 그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이야기하시면서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세요. 조금 전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베드로를 향한 야단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조금 전까지는 바요나 시모나 내가 복이 있다고 이야기하시면서 내 교회를 내 위에 세우겠다.
그 칭찬을 들은 베드로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본문에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돕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협력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는 평가로 예수님은 말씀을 남기고 계십니다. 16장 16절만 하더라도 예수님을 향한 아름다운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자기의 이야기의 고백이 아니라 성령의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성령의 하나님께서 일깨워 주신 고백, 저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하는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근데 몇 구절 지나지 않아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비난받고 야단 맞는 베드로의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 그런 얘기 들어보셨나요?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고 저는 해병대를 나오지 않았는데 해병대를 나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나이 상관없어요. 학력 상관없습니다. 몇 기야 물어서 기수가 빠르면 다 바로 경례 자해를 하면서 선배님으로 모시는 것이 해병대의 전통입니다.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기억하면서 우리 수련회의 주제였던 그 변화의 목표를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성령 충만함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성령 충만함의 은혜가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순간까지 고대로 충만한 대로 유지되어질까요?
내가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충만하였으니 내 살아있는 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동안 내 삶은 항상 성령 충만이요 말씀 충만이요 은혜 충만한 상태가 유지되는가라고 하는 질문이에요. 아니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업 다운 업 다운 하는 삶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예요. 마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처럼 어떤 때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중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세례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교회를 출석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들을 생각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성령 충만함의 모습으로 살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 성령 충만함 다 잊어버리고 내 고집과 내 편견을 가지고 사람의 일, 사람의 체면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해병대원들은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함은 영원한 성령 충만함이 충만한 때가 있으면 충만함을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 충만할 때가 있는가 하면 말씀 다 까먹고 내 지식과 내 편견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다는 이야기예요. 은혜 충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그 은혜 다 까먹고요. 내 고집과 편견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게 우리들의 삶의 순간이 순회를 거치면서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지 하나님 말씀 받았으니 성령 충만해서 그 성령 충만함으로 변화 받고 변화 받아서 이제 후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야지 우리 믿음으로 결단하였지 않습니까?
그 믿음의 결단을 가졌으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순간까지 그 결단이 변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변하지 아니하고 항상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한번 질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니요. 그 결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결단을 망각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치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하는 그 믿음의 결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항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세 번이나 부인하면서 나는 그 사람 모릅니다라고 하는 그 베드로의 모습처럼, 우리도 성령 충만의 순간이 있으면 그것을 망각하고 그것을 베어버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말씀 충만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그 말씀을 망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은혜에 충만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그 모든 은혜 다 망각해 버리고 내 고집과 편견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다는 이야기예요.
마태복음 9장,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참 재미난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말 못하는 귀신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2장 22절의 말씀을 제가 봉독해 드립니다.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심에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제가 묵상하고 또 묵상해 보았어요. 도대체 어떤 귀신이길래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만드는가라고 하는 실어증의 현상이 나타나요. 심리적이고 영적인 문제로 인해서 사람의 입을 열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어떤 생각을 해봤냐면 내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며 살아가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고, 전도해야 함에도 전도하지 못하는 입을 꼭 다물고 전도의 말을 전하지 못하는 내 삶은 과연 정상인인가 귀신 들린 자인가?
내가 사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라고 하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한 채 입 꼭 다물고 있으면 말 못하는 귀신이 내게 들어온 것은 아닌가라고 하는 질문이에요.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입을 떠나 나아가는 언어가 없다라고 하는 표현이기 이전에 내가 해야 할 말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적 세력이 내게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그 깨달음과 함께 본문의 말씀을 고민하며 생각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21년 생활을 하면서 대구 분들이 이야기가 굉장히 짧습니다. 뭐 길게 얘기 안 해요. 서울 경기 지방 사람들이 아 내가 미안한데 잘못했어. 다시는 내가 안 그럴게. 나를 용서해 주고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내 잘못을 나 용서해줘라고 하는 말을 대구 사람 경상도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됐다 고마해라 다 그 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됐다 고마해라 그 말 대신에 미안해라고 하는 말을 하면 되잖아. 고맙다고 하는 말 대신에 뭘 이런 걸 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표현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해요. 해야 할 말임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을 꼭 다물고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 있습니다. 내 양심은 내가 잘못한 것 알아요. 내가 먼저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해야 할 것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요.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요. 목사로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있는데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할 때가 있어요. 해야 할 말들을 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잖아요.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고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며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 그 의미와 함께 마태복음에 있었던 말씀 그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라고 하는 말씀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입을 가지고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지혜를 가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방금 예수님을 향해서 이런 일이 예수님에게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항변하는 것은 그가 해야 할 말이 아니에요. 그가 해야 할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따집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항변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6장 16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오늘 21절 이후에 나오는 베드로가 다른 사람인가요?
아니요. 같은 사람이에요. 같은 사람이고 동일한 사도 베드로이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고백할 때에 그 고백을 통하여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깨달음을 통하여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교회를 그 신앙고백 위에 세우는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 내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예수님 말씀하고 계세요. 근데 그 동일한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기분과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항변합니다. 따집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같은 사람이요. 같은 인물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기분과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기분과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향하여 항변하니, 예수님에게 사탄아라고 하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는 예수님의 야단을 맞고 있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통의 비밀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통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물건을 담는 그런 그릇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라고 하는 것에 따라서 그 통을 이야기합니다. 나무로 만들어졌으면 나무 통,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으면 플라스틱 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만들어지고 난 이후에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라고 하는 그 재질에 따라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고 있는가라고 하는 그 담고 있는 내용에 따라 불려짐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예요. 쓰레기통이에요. 쓰레기를 담지 않고 귀한 보석을 담으면 그 통이요. 보석통이라고 불릴 수 있어요. 아무리 귀한 보석함이지만 그 속에 잡쓰레기를 담아 놓으면 보석함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통이라고 불려진다는 사실이에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서 시장에 가봐 남대문시장에 가보면 참 눈길을 끄는 재미난 장사 한 분이 계세요. 골라 골라 3천 대 골라 그러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끕니다. 그분이요. 이 한가운데 통을 하나 달아놨어요. 쓰레기통을 달아놨습니다.
그런데 플라스틱으로 만든 쓰레기통이지만 그 안에는 돈이 담겨져 있어요. 참 지혜롭죠. 그 통을 당겨다가 돈을 거슬러 주고받아서 그 속에 넣고 하는 그 쓰레기통 뭐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좌편에서 어느 구석에 다 다 손이 닿을 만큼 위에 고무줄을 달아서 쓰레기통을 온통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 통을 뭐라고 부를까요? 만들어진 목적이 쓰레기를 담는 쓰레기통으로 만드니까 쓰레기통이라라고 불릴까요?
아니요. 어느 누구도 교통을 쓰레기통이라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쓰레기를 담고자 만들었지만 그 안에 돈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은 돈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장사가 끝나면 제일 먼저 귀하게 챙겨가는 것이 그 돈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삶을 통이라고 한다면 내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 한번 먼저 질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 안에는 내 안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겨져 있으면 성령의 능력으로 담겨져 있으면 성령의 지혜로 담겨져 있으면 그 담겨진 내용으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을 받습니다. 내 고백을 들을 때마다 내 헌신을 보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이 있다고 칭찬하며 인정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은 채워져 있지 않고 내 생각으로만 채워져 있어요. 내 고집으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내 편견으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내 것으로만 챙겨져 있는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한번 질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니요. 내 것을 배우지 아니하고 내 것을 비우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체험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체험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내 생각으로 예수님에게 항변하였지만 들은 말은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하시면 그 순간만큼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야단치고 계십니다. 그 순간만큼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경계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기 이전에 먼저 내 속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베드로가 16장 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처럼 그 말씀으로 채워져 있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져 있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채워져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긍휼함의 은혜로 내 속이 채워져 있는가 먼저 내 속이 채워져 있어야 그 능력과 그 힘과 그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시편 1편의 내용 잘 아시죠?
거기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이야기하시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걸음을 어디로 인도하시는가라고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가요?
내가 어느 곳에 가서 누구를 만나 무슨 삶의 순간을 살든지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공이 되시면 내 걸음걸음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물가로 인도해 주세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위험한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세요 근데 4절에 보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라고 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거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이제까지는 주께서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주께서 내 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감동이 내 걸음 걸음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때는 푸른 초장을 만나고 쉴 만한 물가를 만났어요.
그런데 4절에는 누가 그 걸음을 인도하는가라고 하는 주어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인도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달리는 거예요. 내 생각을 가지고 사니 사망의 골짜기를 향합니다. 내 주장을 가지고 사니 사망의 음침한 곳으로 발걸음을 향할 뿐이에요. 나 똑똑한 사람이어서 내 생각 가지면 잘될 줄 알았는데, 내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 능력을 가지면 이 문제점 넉넉히 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들이 힘을 합하면 그 합심된 힘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성경의 교훈은 그거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앞서 가셔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앞서 가시고 우리가 뒤따라 그분의 뜻과 그분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따라갈 때 하나님의 형통하심이 우리의 삶 속에 임재되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할 때는 만나는 곳이 쉴 만한 물가예요. 푸른 주장입니다. 그런데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내 주장과 내 기분과 내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항변하는 순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사탄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경계하여 말씀을 남기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 감당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믿음의 결단을 이 수련을 통해서도 생각하였고 또한 마지막으로 결단도 하였습니다.
그 일돈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리에게 무장시켜 주시는 거예요. 성령의 충만함으로 무장해서 그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 순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으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문을 나가는 순간에 그 말씀의 내용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을 나가고 예배의 자리를 떠나는 순간, 수련을 끝나는 순간 내 삶으로 돌아가서도 내가 믿음으로 결단했던 그 결단의 내용들이 우리의 삶 속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눈물을 흘려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였던 그 기도의 간절한 제목들이요.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유지되어야 됩니다. 또 빠져나갈 거예요. 학교 생활하고 직장 생활하고 평소에 삶을 하다가 보면 우리가 결단하고 기도했던 내용들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충만함으로 채워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가 우리에게 보여주잖아요. 충만할 때에는 믿음의 고백을 남기고 있지만, 자기의 생각으로 채워지는 순간 너는 사탄이라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는 예수님의 경계 어린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본문 베드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받고 수리를 통해서 믿음의 결단을 가졌습니다. 이 결단과 이 각오와 이 충만함을 잘 간직하는 우리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령 충만함의 은혜가 차고 넘쳐서 우리의 24시간 365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아서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감당하든지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 주의 종, 주의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순간도 다른 생각 품지 아니하고, 한 순간도 다른 마음 품지 아니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입니다. 우리의 24시간 우리의 365일이 그 신실한 일꾼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