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쿠테타는 처벌 받지 않는다.
쿠테타는무력에 의해 정권을 빼앗는 일이다.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이다.
혁명이 피지배계급에 의한 반란인 데 비해 쿠데타는 일부 지배권력이 자기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수행되며, 권력 이동은 지배계급 내부의 수평이동에 불과하다.
쿠데타는 군대, 경찰, 그밖의 무장 집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정권 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반대파 숙청, 의회의 정지, 헌법 개폐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쿠데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을 국가적인 규모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 기성 정치권의 무능,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 마비 등이며, 또 이에 대해 국내에 유일한 무력조직으로서의 군대나 경찰 및 이를 지휘하는 야심적인 정치가나 장군 등의 존재이다.
쿠데타의 전형으로는 1799년 11월 9일 통령정치를 타도하고 스스로 제1집정이 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1851년 12월 2일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제정에의 길을 연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누란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라는 공약을 내걸고 청년장교들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7월에는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군정(軍政)을 실시했으며,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도 함께 맡았다.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된 후, 그해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을 15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전두환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재가도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반란 사건이다. 유혈충돌이 수반된 하극상 사건이었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80년의 5·17사건을 일으켜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였다.
5·17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로 간주될 수 있지만 12·12사건 당시에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목표가 아직 명백하게 표출되지 않았으므로 12·12군사반란은 예비 쿠데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중국에서는 ‘한국의 트럼프’라 불리기도 하는데, 윤 대통령의 정치적 명성은 그가 바로 검사로서 힘을 휘둘러 두 사람의 전 대통령(박근혜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면서 쌓아올린 것이다.
기이한 것은, 8번이나 사법고시에 낙방했다는 한국의 첫 검사 출신 대통령이, 실은 좌파 정권인 문재인 전 대통령 집권 시기에 발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서울중앙지검장에서 시작하여 검찰총장을 거쳐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심복’으로서, 윤석열은 과거에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도와서 이전 보수 정권의 거두인 박근혜를 물리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윤석열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검찰의 권력을 줄이고자 추진한 사법개혁 과정에서 결국 문 전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문 전 대통령이 임명했으나 재임 기간이 짧았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윤석열은 당시 어쩔 수 없이 검찰총장직을 내려놓았으며 이에 따라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했다.
이후 윤석열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 보수진영으로 넘어가 대선 출마를 위한 민심 기반을 다지게 된다.
윤 대통령은 집권 이후엔 과거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시절 자신의 수족 노릇을 했던 한동훈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그래서 윤석열 정부를 '검찰 왕국'이라는 말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한동훈이 대통령이 된다면 역사상 가장 긴 쿠테타가 완성된다.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검찰 쿠테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