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에서 줄포만을 건너면 보이는 산이 선운산이다. 선운산의 본래 이름은 도솔산이었다.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있어 선운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 우왕 때의 문신 윤진이 그의 시에서 “옛 길이 숲 사이에 뚫렸는데 돌이 험하고, 겹친 산이 절을 싸안았는데 물이 맴도네. 양쪽 벼랑에 나무 빽빽한데 평상에 바람 일고, 시냇가 누각에 잠깐 올라가 한바탕 웃네”라고 노래한 선운산은 흔히 선운사의 뒷산인 수리봉(342미터)을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1979년 전라북도에서 지정한 도립공원 범위인 선운계곡을 둘러싼 E자 모양의 산 전체를 선운산으로 보는 게 옳다. 가장 높은 경수산(444미터)과 청룡산(313미터), 구황봉(285미터), 개이빨산(355미터)이 독립된 산처럼 솟아 있고, 이 산에서 모인 물이 인천강(인냇강)을 이루어 곰소만으로 유입된다.
구름 속에 누워 선도를 닦는다는 뜻을 지닌 선운산에는 바위들이 많다. 구황봉 마루에는 탕건을 닮았다는 탕건바위가 있고 구암리에는 별바위와 형제바위, 오암마을 뒤에는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자라바위, 용암마을 뒷산에는 용처럼 생긴 용바위, 아산초등학교 뒤편에 전담바위와 사자바위, 학전 앞에는 개구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었던 바위가 낙뢰로 깨졌다고 해서 깨진바위가 높이 30여 미터로 솟아 있다.
고려 명종 때의 문신 김극기는 선운산을 “산의 숲이 앞뒤 사면을 둘렀는데, 한 족(簇) 천당(天堂)에 정거(淨居), 자수(紫綏, 정3품 이상이 차던 호패의 자줏빛 술) 늘어진 것을 자랑하랴. 현전(玄筌, 현묘한 기틀)에는 다만 부처의 진리를 엿보고자 하네. 폭포 소리 옥 부수듯 단풍진 골짜기에 울고, 산 경치는 소라를 모아놓은 듯 푸른 하늘에 솟았네. 마주 앉아 조용히 옥진(玉塵)을 날리니 웃으며 이야기하는 끝에 맑은 바람 문득 이네”라고 노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중애사ㆍ참당사 등의 절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선운사에 딸린 몇 개의 절만 있을 따름이고 낙조대 아래에는 용문굴이 있다. 선운사를 창건할 당시 검단선사가 연못을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급하게 서해로 도망가기 위해 뚫어놓은 것이라는 용문굴은 규모 면에서 대단히 큰 굴이면서 신비하기 짝이 없고 시원스럽다.
암벽타기를 즐기는 산악인들이 연습장으로 활용하는 바위벽을 돌아가면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옆 절벽에 고려 초기 지방 호족들이 세웠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 17미터, 너비 3미터인 이 불상은 낮은 부조로 된 거대한 크기의 마애불로 결가부좌한 자세로 양끝이 올라와 있고 입도 역시 꾹 다문 모습이기 때문에 부처다운 부드러움이나 원만함 없이 위압감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애불의 머리 위에 누각식의 지붕이 달려 있었는데 인조 20년(1648)에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 속에는 신비스러운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끈질기게 전해져왔다. 동학 접주를 지낸 오지영이 1940년에 펴낸 동학 및 천도교 운동사에 관한 책인 『동학사(東學史)』에 기록된 비결 탈취 과정은 다음과 같다.
지금 고창군(당시 무장현) 아산면 선운사 동남쪽 3킬로미터 지점에 도솔암이란 암자가 있고, 그 암자 뒤에 50여 척 높이의 층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절벽에 미륵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미륵상은 3000년 전에 살았던 검단선사 진상이란 것으로, 그 미륵의 배꼽에 숨겨져 있는 신비한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다. 이 비결을 1892년(임진) 8월 무장 접주 손화중과 동학 지도자들이 밤중에 꺼내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학 지도자들이 여러 형태로 피해를 받았지만 그 비결을 꺼낸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어 무장 접주 손화중의 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결국 동학농민운동의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도솔암 내원궁
바라볼수록 마애불과 잘 어울리는 한 그루 소나무 뒤편에 도솔암이 있다. 깎아지른 절벽과 푸른 나뭇잎이 손짓하는 듯한 정경 속에 자리한 내원궁(內院宮)이라고 불리는 도솔암에는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선운사 지장보살좌상이 있다. 남해금산의 보리암만큼이나 영험하기로 소문이 난 지장보살좌상은 관음전에 있는 금동보살상과 크기나 형식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선운사는 이른 봄에 동백꽃과 벚꽃, 가을에 석산(꽃무릇)이 아름답다. 덕분에 꽃이 아름다운 사찰로 소문이 자자하다. 다만 선운산 자락에 숨은 야생화는 그 명성에 묻혀 있었다. 6월은 봄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선운산의 생태를 누리기에 적합한 시기다. 특히 짙푸른 숲길이 매혹한다. 탐방 구간은 선운산생태숲에서 도솔암까지 이어지는 숲길이 안성맞춤이다. 왕복 2시간 남짓으로 소요시간이 적당하고 경사도 완만해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광대수염, 수정란풀, 사상자, 나도양지꽃, 참꽃마리, 미나리아재비 등 길가에 핀 야생화도 어렵잖게 만난다. 도솔암 가는 길은 특정 종이 압도적으로 분포하지는 않는다. 그윽한 숲길을 산책하듯 거닐다가 꽃을 발견하는 기쁨이 각별하다. 선운사, 도솔암 등 오랜 암자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5~6월에 꽃을 피우는 산골무꽃 무리
선운사는 꽃으로 이름난 사찰이다. 꽃으로 유명한 사찰이 꽤 있지만, 선운사가 한 수 위다. 이른 봄에는 대웅보전 뒤편의 산자락이 온통 붉다. 1967년 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다. 4월은 선운사 입구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꽃잎이 흩날릴 때는 극락이 따로 없다. 봄꽃에 그치지 않는다. 9월 선운사는 온통 석산(꽃무릇)이다. 붉고 화려한 꽃은 땅 위에 핀 9월의 단풍인 양하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늘 여행객이 북적이니 선운사를 포함한 선운산 일대를 천천히 음미하기 어렵다. 부러 한적한 시기에 찾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선운산 일대를 느긋하게 돌아보기 좋은 때는 6월 초순으로, 사람은 적고 숲이 생기롭다. 그냥 걸음을 내기 무료하다면 야생화나 생태 여행으로 주제를 잡아도 좋다. 동백꽃이나 석산(꽃무릇)에 가린 선운산 풀꽃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봄날에 비해 야생화 수는 적어도 숲이 주는 청량감은 절정이다. 여름 야생화의 독특한 매력도 누려볼 수 있다.
경로는 선운산도립공원 입구에서 도솔암 구간이 무난하다. 왕복 2시간 코스로, 경사가 완만해 걷기 편하고 걸음을 낼수록 숲의 정취가 더한다. 길가의 야생화도 소박한 정감으로 매료한다.
첫걸음은 2008년에 조성한 선운산생태숲이다. 이곳은 자생 숲이라기보다 종전 습지에 조성한 생태 공원에 가깝다. 생태 연못과 습지 사이로 난 데크를 오가며 익숙한 습지 생물을 관찰한다. 이맘때 가장 시선을 끄는 건 보라색 붓꽃과 노랑꽃창포다. 노랑어리연꽃도 슬슬 꽃을 피울 기세다. 선운산생태숲은 꽃만 치자면 6월보다 7월이 다채롭다. 부처꽃, 마타리, 좀비비추 등이 피어나고 습지에는 어리연꽃과 수련 등이 얼굴을 내민다.
도솔천 쪽으로는 천연기념물 367호 고창 삼인리 송악도 진귀한 볼거리다. 송악은 두릅나뭇과에 속하는 덩굴식물로, 뿌리가 바위에 붙어 자란다.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으나 족히 수백 년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암벽을 기어오르는 푸른 덩어리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고창의 송악은 북방 한계선에 해당해 가치가 특별하다.
첫댓글 요기도 비가 안온다했는데수고하셧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