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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되는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
삼하 21:10-14
10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1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삼하 21:10-14 / [두 아들을 잃은 리스바] 리스바는 본래 이방 호리 족속의 여자로 사울의 첩이 되었다가 한때는 아브넬에게 더럽힘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은 이제 다윗까지 감동시키게 되었다. 리스바는 두 아들이 처형된 곳으로 가서 시체들 곁에 굵은 검정색 베옷을 펴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추수가 시작될 무렵부터 그 시체들 위로 소나기가 퍼부을 때까지 리스바는 그곳에 앉아 낮에는 독수리들이 시체들 위에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였다. 11) 다윗은 이방 호리 족속의 여인 리스바가 처형된 두 아들을 위하여 그토록 놀라운 일을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12)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유해를 길르앗의 야베스에서 가져오게 하였다. 블레셋 군인들이 사울의 군대와 길보아산에서 싸울 때 그들은 이 싸움에서 진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쳐죽이고 그들의 시체를 벳산의 광장에 매달아 두었었다. 거기서 그들의 시체를 몰래 거두어다가 안장시켜 준 이들이 바로 길르앗야베스 주민들이었다. 사울이 전에 그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은 것이다. 13) 다윗은 이제 십자가에 처형된 일곱 사람의 유해도 모아다가 14) 사울과 요나단의 유해와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이 모든 일이 다윗의 명령대로 다 이루어지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더 이상 흉년이 들지 않게 하셨다.
처형된 사울의 일가 7명을 위한 아야의 딸 리스바의 정성에 감당한 다윗이 그들을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는 장면입니다.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10-11) 이스라엘 사람은 시체가 장사되지 못하고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을 큰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시체가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건기인 4월부터 비가 올 때까지 아마도 10월경에 시작되는 우기로 예상되는 무려 6-7개월 동안이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 리스바는 두 아들이 처형된 곳에 굵은 베를 바위 위에 펴고 계속 밤을 지새우며 시체를 지킨 것입니다. 리스바는 죽은 아들들을 향하여 어미로써의 마지막 사랑을 베풉니다. 리스바의 이런 정성스러운 행동이 다윗에게 알려집니다.
죽은 자의 뼈를 거두어다가(12-14) 다윗은 리스바의 정성에 대하여 듣고 감동을 합니다. 12절을 보시면 다윗이 직접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찾아가서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가져옵니다. 신하를 시켜서 명령할 수 있는 일인데 직접 찾아옵니다. 여기에는 사울과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애정도 있었겠지만, 사울 가문의 장사를 다윗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악의로 죽인 것이 아니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취하자 사람들이 사울의 가문에 죽은 7명의 뼈를 취하여 베냐민 땅 셀라에서 가족묘로 합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삼 년 기근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기도가 14절에서 응답 된 것입니다.
적 용 : 1절에서 드린 다윗의 기도가 14절에 응답이 됩니다. 또한 본문에는 리스바가 기도했다고 나오지 않지만 자녀의 마지막을 위해 보여준 리스바의 정성 또한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도가 응답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까? 응답이란 무엇일까요?
馬耳東風(마이동풍) 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귓등으로 흘리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예의입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예로써 대하는 자세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좋은 인상을 주고, 대인관계가 원만해집니다. 리스바의 행동이 다윗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으며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낀 다윗은 그들을 잘 장사지내도록 하여 모든 기근의 원인에 대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사울의 자손 일곱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복수하게 하고 그들을 위로한 다윗은 이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인생을 살며 죄를 짓게 되면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반드시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온전한 회개를 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그 후에야 기도를 들으시니라!
오늘 주신 말씀, 사무엘하서 21장 14절 말씀을 보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고 전합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것도 이제 막 왕관을 받아 쓴 집권 초기의 다윗 왕인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기도하는데, 그런데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시다니, 일견 믿겨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꼭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방금 전 읽은 말씀에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시긴 하는데 언제 들어주시는가? 바로 그 후에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그 이전까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에 응답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전을 넘어 그 이후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그 이전 상황 속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 이후의 상황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오늘 주신 말씀 속에서 우린 두 가지의 중요한 단어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는 은혜요 다른 하나는 자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과 그 후의 경계선엔 은혜와 자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은혜를 갚은 후에야, 그리고 자비를 베푼 후에야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배은망덕 한 자, 무자비한 자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가면서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주신 말씀 잘 기억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어, 부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은혜를 갚은 그 후에야 응답하십니다(10-12).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자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은혜를 갚은 그 후에야 나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당연히 갚아야 할 은혜를 갚지 않고, 여전히 빚으로 남겨 둔 자의 기도는, 그 은혜를 갚기 전까지는 들어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기 위해서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은혜를 갚는 일입니다. 은혜 갚는 일 곧 보은을 생활화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응답 속에 행복을 이어갈 수 있는 첫 번째 길입니다.
의아한 것은 이 사건과 기도의 응답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 때로부터 조금 더 과거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사사시대, 하루는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저들이 쳐들어 온 지역이 바로 12절에 등장한 길르앗 야베스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야베스 지역에 사는 거민들이 보니 저들이 너무 막강하여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해서 싸워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백기를 들고 화친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암몬 사람들이 너무 심한 요구를 해옵니다.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전부 오른쪽 눈을 빼고, 앞으로 성실하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너희들의 항복을 받아 주내겠다!” 해도 너무 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해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항복하는 대신, 왕이 된 지 얼마 안 된 사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다행히 사울 왕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저들 암몬 사람들을 물리쳐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 왕에게 잊지 못할 큰 은혜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어느 날, 바로 그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갔다가 그만 길보아 산에서 아들 요나단이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 왕 부자의 시신을 자기네 나라 수도인 벳산 거리에 높이 매달아 놓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워 이겼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울 왕 부자는 죽어서까지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알고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저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명색이 한 나라의 초대 왕이요 그 아들인데, 그 시신을 거리에 그냥 매달아 두다니, 정말 치욕 중의 치욕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나섭니다. 저들은 젊은이들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블레셋의 벳산 성벽에 올라가, 마침내 사울 왕 부자의 시신을 가져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저들에게 가서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받아다가 그 아비의 묘에 장사지냈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문제는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점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행동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저들이 40년 전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사울 왕에게 입은 은혜를 40년이나 간직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때, 그 은혜를 갚았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는 점은 저들이 사울 왕이 죽은 뒤에 은혜를 갚았다는 점입니다. 우린 일단 사람이 죽고 나면, 은혜도 다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어도 은혜는 남는 법, 그 은혜를 갚지 않고서는, 기도에 응답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니, 저들이 그 뼈를 가져다가 사울에게 사랑을 받았던 여인에게 전해 주었군요. 그러자 그 여인이 반석 위에 베를 깔고 그 시체를 모신 후에 그 시신을 지키는 데, 낮엔 공중의 새가, 밤엔 들짐승이 와서 그 시신을 범하지 못하도록 지켰다고 하는군요. 망자에 대한 예를 갖추는 저들 모습이 정말 갸륵한데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일을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게 비가 올 때까지 했다고 하는군요. 비가 쏟아지기까지 시신을 지켰다는 말, 짧게는 건기에 해당하는 6개월 동안 지켰다는 말이요, 길게는 당시 삼년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비가 올 때까지 3년 동안이나 지켰다는 말이 됩니다. 참으로 지극 정성을 다해 저들이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은혜를 갚은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셨다는 겁니다.
기도에 응답 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를 갚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은혜를 입고도 아직 갚지 않은 은혜가 있거든, 어서 갚으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은 내가 갚지 않은 은혜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배응망덕한 자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기는 은혜 갚는 일을 아예 습관화 하는 것입니다. 보은의 생활화, 그렇습니다. 은혜 갚는 일이 나의 습관이 되고 보은이 나의 생활이 될 때, 하나님은 항상 나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은혜 갚을 줄 아는 성도의 새벽 기도는 더 큰 응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갚을 줄 알아, 늘 기도에 응답받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자비를 베푼 그 후에야 응답하십니다.
13절에 보니,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자, 사람들이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 부자와 함께, 베냐민 땅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후에야 하나님은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울 부자와 함께 장사지내준 저들은 누구일까? 저들은 누구인데 왜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일까? 어찌하여 지금까지 저들의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던 것일까? 저들을 장사지내는 일과 기도의 응답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사연인 즉 이렇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굉장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21장 1절을 보니, 그것도 연거푸 삼년동안이나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해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오질 없습니다. 왜 응답하시지 않나? 답답해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문제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값으로 지금 너희들이 고생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왜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일까? 살인죄를 지은 것은 사울이니 사울만 벌하시면 될 것을, 왜 온 백성에게 벌을 내리시는 걸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시 과거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선지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승장구한다는 소문을 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맞서 싸울 생각을 거두고, 다 헤진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서 여호수아를 찾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청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꼼꼼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저들에게 속아 화친을 맺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저들에게 속은 것이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저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그 약조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사울이 왕이 된 다음 기브온 사람들을 보니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왜 저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가? 저들은 우리와 같은 피가 아닌데, 그것도 선지자 여호수아를 속이고 화친을 맺은 가증한 것들 아닌가? 내가 왕이 된 이 참에 아예 저들을 정리하리라! 결국 사울 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맙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인종 청소라고나 할까요? 문제는 이 일로 사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마땅하거늘, 그 맹세를 저버리고, 이유도 없이 저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울은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자비를 모르는 사울 왕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가 죽은 후까지 계속됩니다. 한 마디로 사울왕의 잘못으로 인해 다윗 왕과 온 백성이 지금 고초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다시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자 하나님이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하십니다. 해서 물었더니 저들이 사울왕의 아들 일곱 명만 달라고 합니다. 저들을 매달라 죽임으로 모든 죄와 원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겠다는 겁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왕의 첩이 남긴 아들 가운데 일곱을 골라 저들에게 넘겨주었고, 저들은 그 일곱 아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의 일곱 아들에게 카메라를 비추어 봅니다. 저들 아들들의 입장에선 정말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아들들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부모님들께 고합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식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언정, 화근이 되어서는 아니 될 줄로 믿습니다. 나 부모 때문에 내 자식들이 복을 받을지언정, 나 부모 때문에 화를 입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나 부모 때문에 자녀들이 행복할지언정, 나 부모 때문에 이 놈의 세상 살고 싶지 않다고 탄식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벌을 받거나, 우리 부모의 죄로 인해 자녀들이 기근의 고통을 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자녀들에게 하늘의 복을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다윗 왕, 결국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마침내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줍니다. 인간적으로는 다윗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 성벽 위에 내다 걸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그 아비의 묘에 장사하되,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도 국장에 참여할 것을 명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왕의 명대로 좇아 행했더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자비라는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는 성도들은 무자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비를 모르는 사람, 주님께 합당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꼭 갚아야 한다는 율법적인 주장을 넘어 십자가의 사랑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향해서도, 죄 없는 손으로 저를 치라 하시며, 오히려 그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자비한 율법주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구나 믿기만 하면 살려 주신다는 복음의 자비로 우린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 왕의 자비를 배우고 싶습니다. 다윗 왕의 측은지심을 닮고 싶습니다. 사울 왕과 자기 친구 요나단 왕자를 향한 배려와 자비는 물론, 무고하게 죽어간 일곱 왕자들에 대한 넉넉한 자비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랬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넉넉한 마음이 없었다면, 만약 그도 사울처럼 무자비하게 굴었다면, 아마 다윗과 백성들은 영영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다윗은 자비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조차 그는 자비를 베풀어 그를 죽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에 늘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아니, 자비를 베푼 그 후에야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다윗처럼 넉넉한 자비를 베풀어 기도마다 응답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마당을 닫으려고 합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어찌 그리 각박한지 모릅니다. 왜 사랑하는 당신에게 그리도 야박하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론 사람이 사람을 향해 이토록 모질게 할 수 있나, 이렇게 잔인하고 무자비한 존재인가, 정말 인간성 자체에 대해 회의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어딜 가도 은혜나 자비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찌나 무자비하고, 어찌나 팍팍한지, 사람 만나는 것이 가장 두려울 정도입니다.
특히 세상 사람들은 대개 원수 갚는 일을 잘 합니다. 때론 원수 잘 갚는 사람을 미화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 하에 무자비한 행동을 일삼는다는 데 있습니다. 사울처럼 말입니다. 아니오,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은혜를 갚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그저 내가 받은 은혜만 생각하시고, 그 은혜 갚는 일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내가 받은 하늘의 자비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나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지 고민하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잘 갚으시고, 자비는 넉넉하게 베푸시어, 늘 기도마다 응답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