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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5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이 아침에 눈을 뜨게 하시고 주의 말씀으로 속히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모습으로는 도무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사오나 나의 비천함을 하감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으니 넘어지나 아들을 힘입어 담대하게 일어나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오염된 나의 심령을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으사 맑고 깨끗한 영의 소유자가 되어 늘 주님과 동행하게 하시고 오늘도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내 맘과 내 뜻대로 자행자지 하지 않으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
나의 부정성과 자기주장의지 그리고 땅에 속한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하게 사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할 수 없사오나 오직 주께서는 가능하시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147:12-20
제목 : 세상 소망이 다 사라져 갈지라도 주님을 기뻐하는 자 되기를...
12.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13.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14.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15.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6.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17.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18.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9.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20.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 나의 묵상
어제 본문에 이어서 시편 147편의 세 번째 단락이다.
시인은 어제에 이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세 번째 이유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예루살렘아, 시온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한다(12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너의 문빗장을 견고하게 하셔서 어느 누구도 감히 쳐들어오거나 넘보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너희 자녀들이 안전하고 복을 받아 누리기 때문이다(13절).
또한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되 나라와 족속 그리고 가정을 포함하여 그 심령까지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양식으로 배를 불려주시는 하나님이시다(14절).
주의 말씀이 땅에 임하므로 그의 말씀 곧 명령이 빠르게 실행이 된다(15절).
하나님은 양털을 흩뿌림 같이 눈을 내리시며 재를 뿌림 같이 서리를 내리시고 떡 부스러기를 뿌림 같이 우박을 내리시므로 땅의 누구도 그 추위를 감당할 자가 없다(16-17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 그 추위와 얼음을 녹이시고 바람으로 그것들을 녹이셔서 물이 흐르게 하신다(18절).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또한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다(19절).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 민족 곧 이스라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다.
이는 다른 민족은 주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할렐루야(20절).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 사람(아담)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로 작정하셨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과 함께 언약을 맺으셨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직접 언약을 맺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곧 ‘언약적 이름’이다.
따라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아담을 일컬어 ‘언약적 교제의 존재’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삼위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삼위 하나님의 형상(우리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관계적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그런 교제 안에서 아들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아들 되신 성자께서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께 늘 그의 계명을 지키는 복종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것처럼 아담 역시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어 복종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복이 곧 ‘말씀’이다(창 1:26-28절).
이와 같이 언약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계명 곧 말씀을 주셨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계명을 지킬 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르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어기므로 하나님을 떠나 분리되고 말았다.
여기서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당장 육신의 죽음이 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분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결국 언약이 깨어지고 말았다.
사람은 불의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릴지라도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가 없기에 그 언약을 계속 이어나가신다.
그래서 범죄하여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도망한 아담과 하와를 친히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는 준엄한 징계를 하시지만 아담과 하와를 향한 생명의 복음을 주시므로 그들을 살리신다.
그 복음이 바로 창세기 3:15절과 21절의 내용이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에게 주시는 두 가지 약속은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다(창 15:5-7절).
이 약속은 곧 당시에는 그의 아들 이삭과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으로 이루신다.
그러나 이 약속은 단순히 육신의 아들 이삭과 눈에 보이는 가나안을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삭을 넘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요, 마귀에게 속한 자인 우리를 구원하여 의의 자녀로 새롭게 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갈 3:16절).
또한 가나안의 약속은 단순한 지구상에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땅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갈 3:29절).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에 대하여 노래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에 대한 역사를 찬양하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시온은 같은 의미이며 이는 오고 오는 주의 백성 곧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이들이 받을 복은 문빗장을 견고히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녀들을 돌보셔서 그들의 자녀들이 잘 되는 복을 주신다.
이는 그저 단순히 그들이 육신적으로 고통이나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대적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육신의 한계는 항상 노출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아직 구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따라서 이런 육신의 한계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과 억눌림이 있지만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주의 자녀들은 그런 무덤의 상황 속에서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자녀들이 잘 되는 복이란, 단지 우리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잘 되는 그런 복이 아니다.
이는 주님이 주신 우리의 자녀들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누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녀들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을 복으로 여기며 그렇지 못할 경우 자녀들을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부끄러워하며 꺼려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녀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진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자녀가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잘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자녀들 역시 우리의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다음 세대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음 안에서 아들의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 책임이 우리 부모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부터 우리 자녀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지 못했고 땅의 것에 천착하며 살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눈에 보기에 보란 듯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며칠 전에 아내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가 정말 잘못한 것,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은수 민수를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보낸 것이다.
그 때는 우리 부부가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 역시 목사였지만 땅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자의 복이라고 생각하였던 자들이었다.
물론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그 기저에 깔린 내면의 생각은 어찌됐든 사람들이 보기에 보란 듯한 자식들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 또한 간절하였었다.
그 때는 서울로 대학을 가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고 꿈이었기에 단순히 ‘in Seoul’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자 두 아들 모두 재수도 하고 반수도 하면서 서울대 입시를 쳤으나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어찌됐든 지금 와서 우리 부부가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것은 이 두 아들을 서울로 보내지 않고 비록 가까운 지방대에 보낼지라도 부모와 함께 지내면서 복음으로 세우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모른다.
복음 곧 주의 말씀이면 되는데, 그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곁눈질 했던 것이 마냥 가슴이 아플 뿐이다.
좀 가난하게 살면 어떤가?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떤가?
좀 부족하면 또 어떤가?
세상 소망 다 사라져 가도 끝이 없는 주님의 사랑이 있으니 그것을 은혜로 삼는 자의 복이 얼마나 큰지는 상상초월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녀들은 이 땅을 살지라도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영생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육신적 축복들은 모두 그림자들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의 예표들이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이기에 그것을 아무리 많이 가진다 한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한 순간에 훅 갈 수 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소유라면 사실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영원히 바라고 추구해야 할 것은 없어지는 땅의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여야 한다.
우리와 우리의 영적 자녀들의 소망이 하나님 나라일 때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보내셔서 언 땅을 녹이시고 당신의 말씀을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보내셔서 그 말씀을 잘 쉐마하도록 하셨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의 뜻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주님이 나를 죽이신다고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다.
내가 입이 열 개라 한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재와 티끌 가운데서 회개할 뿐이다.
오늘도 나는 연약하여 넘어져 수렁에 빠질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담대함 곧 파레시아이다.
그리고 노래할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죽었던 나를 살리셔서 오늘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거룩한 불구자로 세워주시고 담대하게 ‘나는 그런 죄의 자리에 갈 수 없어’라고 단호하게 멈춰서는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
이런 주님의 은혜와 참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찬양) 주 나의 모습 보네 상한 나의 맘 보시네
주 나의 눈물 아네 홀로 울던 맘 아시네
주 사랑 내게 있네 그 사랑이 날 채우네
주 은혜 내게 있네 그 은혜로 날 세우네
세상 소망 다 사라져 가도 주의 사랑은 끝이 없으니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이 주 은혜임을 나는 믿네. 아멘.
주님...
주님의 복음을 알지 못하여 그저 땅의 것에 천착하여 살던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 놓습니다.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자로 서 있기 원하오니 무화과 잎으로 가린 나를 주께서 말씀의 검으로 발가벗기시고 가죽옷 곧 주님의 옷인 보혈의 옷으로 입혀 주소서.
이제는 구약의 그림자와 같은 그런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실체를 보여주신 영원한 복음인 하나님 나라를 날마다 누리며 영원에 잇대어 살게 하소서.
나의 거짓된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져주시어 정결케 하소서.
나의 부정한 마음을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온전히 연합하게 하소서.
우리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 취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의 복음 외에는 자랑이 없게 하소서.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셔서 오늘도 거룩한 불구자로 세워주소서.
죄의 자리에는 얼씬도 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복된 자리 곧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