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등장할 만큼 1960년대 한일관 불고기는 서울 시민 최고의 외식 별미였다. 서울 종로에 있던 한일관은 이승만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단골 식당이기도 했다. 한일관 된장찌개를 좋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로 한일관 조리사를 불러들여 음식을 만들게 했고,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부터 한일관을 찾았다. '노무현 육개장'이 탄생한 곳도 한일관이다. 역대 서울 시장들은 매년 1월 1일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치고 난 뒤 한일관에서 떡국을 먹었다.
73년이란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저력의 원천은 여자들이다. 창업주인 신우경(작고)은 1939년 장국밥을 앞세워 종로에 '화선옥'을 열었다. 해방이 되면서 이름을 한일관(韓一館)으로 바꿨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식당'이라니, 그 포부가 드높았다. 2대는 맏딸 길순정(작고)이다. 경기여고, 서울여자의과대학(훗날 우석대 의대, 고려대 의대로 바뀌었다)을 다닌 수재인데 아들 없는 어머니의 식당을 지켜 드리려고 의사의 꿈을 접었다. 3대는 길순정의 두 딸, 김은숙(51)·이숙(48)이다. 둘 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와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인텔리'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어머니 대신 한일관을 계속 이어가야 하나 고민이 깊었다. "워커힐 같은 특급호텔에서 인수 의사를 적극적으로 해왔는데 거절했어요. 우리가 안 하면 할머니한테 원망 들을 것 같아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꿈을 지켜 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9일 서울 한일관 압구정점에서 이들을 만났다. 지난달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열린 한식 행사에 한일관 음식을 선보여 찬사를 받고 돌아온 자매는 "신문에 저희 얼굴은 내지 마세요"라고 부탁했다.
◇한식 세계화? 관심없다
―프랑스 부르고뉴에는 무슨 일로 다녀온 건가.
"로마네 콩티를 생산하는 본(Beaune)이라는 소도시에 '클로 드 부조'라는 성이 있다. 거기서 '한국의 여름밤, 수라상'이란 행사가 열렸다. 부르고뉴 상공회의소 회원들과 와인 양조장 소유주들에게 한일관 갈비와 비빔밥, 대하찜, 빈대떡 등을 맛보여 드렸다."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오방색으로 연출한 대하찜을 아주 좋아하더라. 너비아니 구이도 인기 있었다. 비빔밥을 양념간장으로 드레싱해서 냈더니 '왜 고추장이 없느냐'고 물어와 당황하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 비빔밥이 유명하더라."
―한일관도 한식 세계화에 뛰어든 건가.
"그건 아니다. 떡볶이를 앞세운 한식 세계화에는 별로 동참하고 싶지 않다(웃음)."
―뉴욕이나 파리에 지점을 내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직영만 한다. 외국은 더더욱 우리 손길이 미치기 어려우니 안 한다. 이미 파리에만 한식당이 100개가 넘는다. 세계화보다는 우리 맛을 제대로 지켜가는 일에 주력할 거다."
―올해로 한일관이 73년이다. 저력이 뭘까.
"첫째는 할머니의 용기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여성 선구자의 모습을 할머니에게서 보며 자랐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여자가 자기만의 일을 시작했고 그걸 지속한다는 게 쉬운 일인가. 둘째는 어머니의 인내다. 1979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기울기 시작한 한일관의 명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셨다. 셋째가 한일관 직원들의 힘이다. 할머니 때 일하시던 직원들이 아직도 한일관에 남아 일하신다. 최고령 직원이 77세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재개발 구역으로 묶여 2008년 종로 한일관이 문을 닫고 압구정으로 옮겨갔던 고비마다 그분들이 한일관을 지켜주셨다."
―고비마다 5~6개월씩 공백이 있었는데도 직원들이 떠나지 않았다는 건가.
"할머니 두 가지 철칙이 직원을 가족처럼 여기는 것, 그리고 식재료를 아끼지 말고 쓰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직원들을 하나하나 불러 '너만 특별히 주는 용돈'이라며 얼마씩 주시곤 하셨다는데 그 용돈을 안 받은 직원이 없다더라(웃음). 공백기에도 한일관에서는 직원들에게 월급이 나갔다. 압구정으로 옮길 때만 해도 주위에선 직원들 다 나갈 거라고 염려했는데, 세 분만 빼고 5개월 만에 압구정으로 모두 복귀하셨다."
―77세 직원은 어떤 일을 하시나.
"최용환 선생님인데, 할머니 시절부터 전기기사를 담당하셨다. 당시만 해도 로스터기, 쇠철판 파는 곳이 없으니 함석공, 전기공, 목수를 따로 두고 할머니가 원하는 조리기구를 직접 만들게 하셨다. 여성이면서 총지배인인 김동월 선생님은 66세다. 한일관 서빙팀에서 줄곧 일해오셨는데, 눈썰미가 좋고 머리가 워낙 좋으셔서 테이블 주문내용, 음식값 계산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내는 분이다."
―보통은 사장이 바뀌면 주방장도 젊은 사람으로 바뀌고 지배인도 바뀌는데.
"우리는 건강에 큰 문제가 없는 이상 그만두시라 소리 안 한다. 대신 65세가 넘으면 근로시간을 줄여달라고 부탁한다. 그분들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후계 양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할머니의 손맛이 조리사들을 통해 대물림되고 있다."
◇대통령이 사랑한 식당
1960년대 서울에서 가장 큰 대중식당이었던 한일관은 소설뿐 아니라 한국 음식사를 연구한 논문, 각종 문헌에 단골로 등장한다. 2010년 이화여대 박사학위 논문인 이규진의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에서는 우래옥, 옥돌집과 함께 육류구이 음식문화의 발전기(1945~1975년)를 이끈 식당으로 평가된다. 한식재단이 펴낸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에는 불고기의 대중화를 견인한 주역으로 소개된다. 우래옥이 이북식이라면 한일관은 단맛이 강한 서울식 불고기로, 석쇠에 굽는 풍로 불고기와 육수 불고기가 있었다.
―1939년 화선옥이란 이름으로 창업할 때에도 불고기가 주메뉴였나?
"일제강점기에 일반인은 쇠고기를 구할 수 없어서 내장 종류를 구해 굽기도 하고 전골로도 만드셨던 것 같다. 해방되고 난 뒤 너비아니를 계승한 석쇠 불고기를 내놓으셨다. 육수 불고기는 6·25 전쟁이 끝난 뒤 주메뉴가 된 것 같고. 전골처럼 물이 자작자작하니 손님들이 냉면 사리와 만두를 넣어서 드셨다. 석쇠 불고기가 먼저인데도, 단골 분들은 육수 불고기 맛을 그리워하며 오신다."
―창업주인 신우경 할머니는 여장부였을 것 같다.
"한일관이라는 이름처럼 1등 정신이 투철한 분이었다. 음식 솜씨도 뛰어났지만 이왕 식당을 차릴 거면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집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게 그분 신념이었다. 통도 크셨다. 전쟁이 나 피란했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오니 한일관 간판만 남고 폐허가 되었는데 할머니는 겁도 없이 3층 건물을 지어 올리셨다. 머리도 굉장히 좋아서 손님들, 거래처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지 않고도 다 외우셨다. 인생을 사는 데 지식이 없으면 상식과 지혜로 살아야 한다고 손녀들을 가르치셨다."
―한일관은 처음부터 장사가 잘되었던 건가.
"부산으로 피란해서도 한일관을 열었는데 문 열자마자 미어터졌다. 1966년엔 명동점을 열었는데, 5층 건물에 손님이 어찌나 밀려들던지, 옥상에 의자만 내놓고 야외영업까지 할 정도였다."
―역대 대통령들의 단골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청와대 음식이 좋지 않았다. 호텔 한식도 맛이 없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 음식을 유난히 좋아하셔서 조리사들이 출장요리를 자주 나갔다. 전두환 대통령 내외도 오셨다. 우리 사는 집이 한일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전 대통령 내외가 오면 경호원들이 우리 집 소파를 들고 나갔다. 편히 앉게 해 드린다고(웃음). 김대중 대통령도 단골이었다. 김 대통령이 오시면 수행원들이 주방에 들어가 음식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러고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소탈하셨다. 불고기보다 우리 집 육개장을 좋아하셨는데 신문에서 그걸 '노무현 육개장'이라고 표현해 엄청 인기를 끌었다. 손님들이 갈비탕 드시러 왔다가도 대통령이 육개장을 먹었다니까 바로 메뉴를 바꾸더라(웃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한일관이 기울기 시작했다.
"80년대 삼원가든, 늘봄가든 같은 고깃집들이 등장하면서 어려워졌다. 88올림픽을 전후로 고기문화, 외식문화도 급변했다. 예전에는 갈비, 불고기, 일품요리, 한정식까지 한 집에서 다 했는데, 80년대 들어서면서 구이 따로, 한정식 따로, 냉면 따로 하는 식으로 세분화됐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 직원들과 대책회의를 했다. 우리도 메뉴를 과감히 줄여보자고. 그런데 안 되더라. 한일관에 대한 향수를 가진 분들은 불고기도 찾지만 빈대떡도 찾고 떡만두국도 찾으시니. 그래서 지금도 분식집처럼 메뉴가 많다(웃음)."
―재기에 성공했다.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도 서울에 오면 새로 단장한 한일관에 들렀다더라.
"한일관이 있던 땅의 기운이 좋았던 것 같다(웃음). 한번 쇠퇴한 식당이 다시 일어섰으니 말이다. 코스 형태의 점심 상차림 등 새 메뉴를 개발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가업을 잇기로 결정한 뒤 6개월간 인부들과 함께 식당을 수리하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 음식만큼은 진짜 맛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까지 뛰어든 외식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손님과 직원에게 꼼수를 부려서도 안 된다고 약속했다."
◇박사학위보다 한일관이 소중하다
―서울에만 을지로점, 압구정점, 영등포점 3곳을 직영하고 있다. 맛은 어떻게 관리하나.
"단골 분들은 '옛날 그 맛'이라며 좋아하시지만 음식 맛은 시대에 맞게 변해줘야 한다. 60년대 불고기를 지금 내놓으면 짜서 못 드신다. 갈비도 그때는 엄청 질겼다. 우리가 고집하는 것은 있다. 불고기는 국내산 등심만 사용하고, 만두에는 쇠고기만 쓴다는 것. 누군가 만두는 돼지고기 속을 넣어야 제맛이라고 주장해서 딱 한 번 바꾼 적이 있는데 단골 분들이 바로 불평하셔서 다음 날 원상복귀했다. '한일관의 맛'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냉면은 평양냉면, 함흥냉면을 따라가기 어렵지 않을까.
"평양냉면은 메밀이 많이 들어가고, 함흥냉면은 거의 전분이지만 우리는 50대 50으로 한다. 비빔냉면이 인기가 많다. 맵지 않고 담백하대서."
―박사이고 석사인 분들이 음식장사를 해서 되겠나. 배운 게 아깝지 않은가.
"전혀 아깝지 않다(웃음). 이 일도 충분히 지적(知的)이다. 음식을 다루는 일도 끊임없이 머리를 움직여야 한다. 조리사들만 믿고 있다간 망한다. 전공한 지식 20년, 30년씩 우려먹고 사는 것보다 훨씬 변화무쌍하게 살 수 있다."
―음식을 공부하지 않았는데 가업을 잘 전수할 수 있을까.
"한일관에서 태어났으니 어릴 때부터 음식 먹고 만드는 걸 좋아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딸들에게 불문학을 강요하는 바람에 둘 다 같은 전공을 했을 뿐이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 한일관 진두지휘는 동생(이숙)이 해왔다. 가업을 잘 이어가려고 경희대에서 다시 경영학 석사도 밟았다."
―아무리 자매지간이지만 따로따로 가정을 꾸린 마당에 식당 수익을 두고 갈등이 불거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두 딸 싸우는 꼴을 못 보셔서 우애 있게 자랐다. 요즘도 하루 24시간 중 18시간을 함께 다니면서 식당 세 곳을 관리한다. 둘이 머리를 맞대니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 뭣보다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다, 한일관이니까 석ㆍ박사학위 버리고 하는 거다, 하는 식으로 둘이 바라보는 방향이 같다. 죽이 잘 맞는다."
첫댓글 박근혜는 너무 간것같음....근데 패혈증 걸린건 진짜 이상하긴 해
너무 간거 아닌가 싶다...
박유천 얘기는 왜 하는 거지...전혀 도움 안 될 얘길 하네 그냥 유명인이니까 하는거겠지만..
일단 출처가....참
이게뭐지 내가 뭘읽은거지 하다가 안철수를 사랑하는 모임 보고 납득,,
뭔데 이건
글 되게 못쓴다.. 쓸데없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하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건가 싶었다ㅋㅋ
출처가ㅋㅋㅋㅋ
출처ㅋ
??a뭐야
ㅋㅋㅋㅋ안철수를 사랑하는 모임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