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남이고 올해로 아흔이 되신 어머니가 계신다. 가끔 서울에 일 보러 나가면 하룻밤이라도 어머니 곁에 자려고 늦은 밤이라도 찾아간다. 머지않아 돌아가실 터이다. 그러면 나는 이 시간에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동창 신부의 사제관으로 갈까? 아니면 야간열차를 타고서라도 우리 마을로 가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어머니의 존재감이 한없이 클 것만 같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자는 아들에게 밥을 차려 주시는 것을 무척 기뻐하신다. 생선도 발라 주시면 나는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저수지 갈대 끝의 잠자리 허물처럼 껍데기만 남은 몸인데도 아들에게 마지막 밥을 지어 먹이시려는 듯하다. 집을 나서면 잠시 뒤 어김없이 베란다 창을 여시고 아들의 뒷모습을 내다보시며 ‘잘 가라.’ 손짓하시면, 나는 ‘어서 들어가시라.’며 손을 흔들며 답한다. 이런 순간도 이제 몇 번이나 있을지 생각하며 나는 정류장을 향한다.
나는 사제가 된 뒤로 어머니와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혈연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신자들의 혼인 미사 주례는 멀리라도 가서 해 주면서 친척 결혼식에는 참석도 하지 못했다. 바빠서가 아니다. 어머니는 ‘성당 일에만 열심인 것이 신부의 도리’라면서 친척들의 장례조차 알려 주시지 않았다. 아들을 온전히 봉헌하고 싶었던 마음임을 이해한다.
혈육이란 무엇일까? 부모 형제 친척은 출가 뒤라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는 소문에 그분을 찾아 나섰다는 것도 공감하고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출가와 혈연 사이의 최소한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이해해 주는 것도 나이 든 나의 태도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