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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의 이중주,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
“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 사이에는 단 한 발걸음의 차이만이 있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이 이처럼 절실하게 공감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를 보고 나서 계속 되씹은 이 나폴레옹의 격언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 사이의 대립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동시에 어느새 한쪽에서 한쪽으로 이행하는 계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고미라고 하는 것은 미학체계에 있어 단순한 美와 대립되는 범주이다. 숭고미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적 이성이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한 경험에서 나오는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데 반해 美는 이성의 표상에 걸맞는 조화로운 상태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쾌감에 가깝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과거와는 달리 숭고미가 인간의 미적체험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문화산업 전반에서 관객들이 추구하는 것은 아기자기하고 조화로운 상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인식의 범위를 뛰어넘는 충격적인 사건과 이야기 내지는 웅장한 경험이다. 자신의 인식과 경험의 한계 너머를 체험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관객들의 욕구는 영화산업에서도 ‘타이타닉’이라든지 ‘반지의 제왕’이라든지 ‘매트릭스’라든지 ‘투모로우’와 같은 “숭고한” 영화들의 제작과 흥행으로 이어진다.(반대의 경우 최근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영화는 단순한 美 의 범주에 해당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이하 엑소시즘) 역시도 동일한 숭고미의 연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도 이 영화를 편하게 보기 위해서 영화관을 찾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는 스케일로 사람을 압도하는 숭고한 영화가 아니다. 칸트의 분류를 인용하자면, 숭고미에는 역학적 숭고와 수량적 숭고가 있다. 가령 압도적 스케일의 재난영화는 그 수량적 어마어마함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이성의 표상을 뒤흔들어버리고 인간의 유한한 경험과 이성 너머의 영역을 환기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압도적인 쾌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에밀리 로즈의 경우에는 수량적 스케일은 보잘 것 없지만 역학적인 의미에서 보는 이에게 숭고한 쾌감을 선사해준다. 다른 말로, 엑소시즘은 질적 숭고함의 범주에 든다. 그러한 질적 숭고함은 인간 외부에서 초래되는 거대한 부조리의 경험(재난영화에서 보여지는 수량적 숭고미)가 아닌, 바로 인간 내부에서 초래되고 내면에서 부조리를 일으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다시 말해 엑소시즘은 보다 인간의 내밀한 실존의 부조리를 “엄청난 강도”의 충격과 공포로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적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는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일상현실 속에서와는 다른 차원의 기쁨과 쾌락을 맛본다(숭고미란 충격과 공포와 쾌락과 기쁨이 기묘하게 뒤섞인 혼합감정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인간 내부로부터 초래된 숭고미를 보여준다.
엑소시즘은 과거 ‘엑소시트’라는 영화보다도 더 숭고한 면이 있다. 엑소시트라는 영화는 악령 들린 사람의 목이 180도 돌아간다든지 하는 강렬한 비쥬얼로 시각적 충격에 치중했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에 엑소시즘은 그러한 비쥬얼 자체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엑소시즘은 엑소시트라는 영화보다는 순간 순간의 공포 그 자체에 있어서는 덜하다. 그러나 엑소시즘이라는 영화가 실화에 기반해 있다는 점, 그리고 악령 들린 이의 내면적 공포와 갈등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 종교적 구원의 모티프가 더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엑소시트보다 더 숭고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공포스럽기보다는 어쩐지 슬프다. 엑소시트라는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외부에서 초래된 알 수 없는 부조리한 경험(악령들림)에서 우러나오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에 치중함으로써 일차원적인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데 반해 엑소시즘은 악령들림은 외부에서 온 부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악령 들린 이의 내면의 신앙과 종교 그리고 구원의문제와도 연결이 되며 악령들림에서 초래된 갈등의 영역도 공적인 부분(법정공방)으로까지 번져간다(신앙이냐 과학이냐). 이런 문제는 도무지 인간의 이성과 경험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고로 우리는 일상적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는 한계 너머를 ‘상기’하게 된다.
특히나 에밀리가 죽기 바로 며칠 전 거행된 엑소시즘의 의식에서 마침내 악령들린 상태의 에밀리가 자신에게 붙은 악령들의 6개의 이름을 내뱉는데, 이 장면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에서 공포감이라기보다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는데, 이는 전에는 그닥 경험해보지 못한 숭고체험이었다. 칸트에게 있어서 상상력이란 대상을 이성이념의 목적에 따라 종합적으로 표상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그러나 이성이념은 인간이 인실할 수 있는 현상계 너머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 활동 이면을 규제하는 초감각적인 원리이다. 그러나 현상계 속의 인간이 도무지 어떠한 상상력으로도 표상할 수 없는 “부조리”와 맞딱뜨리게 되면(예컨대 이번 경우는 바로 악령들림이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상상력은 이성의 규제를 넘어서 자율적으로, 부조리한 경험을 어떻게든 표상하고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상승 내지는 고조되는 운동을 하는데, 이때의 상상력은 자신의 한계 너머에서 자신을 규제하는 이성이념(도덕적 이념들)을 환기함으로써 이를 바로 그 자신이 맞딱뜨린 부조리한 대상 내지는 경험에다가 감각적으로 구현시킨다. 이로써 감각적 경험 너머에 있던 이성이념들이 마치 우리의 일상적이고 경험적 삶에 균열을 일으키며 침입해 들어와 실제로 구현되는 듯한 경험을 함으로써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 내지는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다. 나 역시도 바로 에밀리가 자신을 “루시퍼”라고 호명하는 그 순간(그녀에게 붙은 악마의 정체성이 성경적인 맥락에서 폭로되는 순간이다) 비슷한 종교적 경험을 했다. 온갖 기괴한 표정을 짓고 몸을 기묘한 각도로 비틀어대다가 어느새 완전 마비상태에 이르러 보통인간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자세를 보이다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말을 쏟아내며 벌레를 먹고 자해를 하며 라틴어나 아람어로 스스로를 악마로 칭하는 그녀가 전에는 매우 독실하고 성실한 카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보통의 상상력으로는 적합하게 오성의 범주를 끌어들여 표상할 수 없는 부조리한 경험이다. 나 역시도 나의 상상력을 규제하던 이성이념들을 반대로 상상력으로써 현실에다 끌어들여 종교적 구원과 고난과 시련 그리고 시험의 문제, 선악의 갈등, 신과 악마의 투쟁,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긴장관계 등의 종교적 모티프들을 한마디로 한꺼번에 총체적으로 형상화된 듯한 착각 속에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문제는 이 사건 이후의 스토리의 흐름이 정말이지 처음의 압도적인 숭고체험에서 너무나도 신속하게 우스꽝스러움으로 이행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그토록 사람을 흥분시켜놓고서는 김빠지게 만드는 것 또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 영화는 에밀리의 엑소시즘을 실패하고 결국 그녀를 죽게 만드는 신부에 대한 법정소송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사건은 신부의 기억에 의한 회상구조로 엑소시즘 의식을 재현하다가 다시 법정에서의 검사의 변론으로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가설에 의해 걸맞도록 설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최초의 충격과 공포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 것 자체는 영화 중간 중간 엑소시즘을 거행할 때의 숭고미를 방해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어떤 면에서 내가 클라이맥스라고 말한 장면으로 이행하는 계기가 되다시피 했다. 과학적, 의학적 설명에 의한 부조리한 경험의 합리화, 거리두기가 위태위태하게 지탱되다가 바로 그 압도적인 장면에서 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클라이맥스의 숭고체험의 필수적인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영화는 그 클라이맥스에서 멈추지 않게 다른 충격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법정공방에서 패색이 짙은 변호사에게, 에밀리의 엑소시즘을 거행한 신부가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변론할 기회를 달라고 말한다(카톨릭 교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엑소시즘의 정체가 신부의 입으로 폭로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입장이었고 교회에 의해 고용된 변호사는 그 입장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 신부는 자신은 무슨일이 있어도 이 재판에서 에밀리가 죽기 직전에 쓴 편지를 공개해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관객 역시도 그 편지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웬걸, 고인에 대한 모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편지의 내용은 상당히 논리적으로 조잡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호사가 ‘엑소시즘’의 거행이 에밀리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존중해달라는 요청과 에밀리가 죽은 이유는 어쩌면 의학적인 것 너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했을 때 그 변론이 너무나도 설득력이 없고 수사학적으로 엉터리였기 때문에(영화를 직접 보기를 권한다. 그녀의 변론에는 명백한 논리적 오류가 있다) 최초의 숭고 체험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에밀리는 편지에서 자신이 환상 속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고 주장하면서 그녀가 마리아에게 자신의 고통의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성모의 대답은 미안하다는 것이었고, 그녀의 고통은 곧 신의 권능과 영혼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정당성을 부여였다. 그 장면에서 나는 영화관에서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최초의 악령들림이라는 부조리한 경험을 그렇게 간단한 논리로 설명함으로써 부조리한 것이 부조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움이란 숭고체험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대상에 직면함으로써 발생하는 느낌이다. 다만 우스꽝스러움이란 최초의 부조리를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부조리가 최초에 선사했던 낯선 충격을 어느정도 극복하는 인간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낯선 부조리 체험인 숭고체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대상으로서 낯선 것에 대해서 인간은 그것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그것을 비웃는다. 에밀리의 악령들림 현상은 그것이 부조리한 것으로 경험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대립쌍들간의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선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할텐데,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 어째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시련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 이런 것들은 끊임없는 다른 고민들을 낳아도 결국에는 답에는 결코 도달하기 힘든 “차이 그 자체”이다. 그러한 “차이나는” 물음을 간단한 논증에 의해 단정지으면 그것이 애초에 가지는 종교적 가치와 힘들, 그리고 사유의 끊임 없는 샘이 되는 위력, 낯선 것으로서의 아우라를 상실하고 만다. 결국 성모마리아가 그 자신의 종교적 기반과 신비를 파괴해버렸다든가 에밀리 자신이 성모마리아의 말을 너무 표면적으로 해석했든가 하는 문제로 최초의 숭고체험은 그것을 불러일으킨 대상이 간단한 맥락에 의해 규정지어짐으로써, “우스꽝스러움”으로 이행하고 만다. 결국 나폴레옹의 말대로다. 고작 남에게 자신을 그렇게 알리고 싶어 스턴트 쇼를 신앙심 깊은 소녀로 하여금 하도록 만든게 스스로가 고안해 낸 잘난 계획이었단 말인가? 신성 모독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성모 마리아 따윈 난 모른다.
에밀리의 무덤은 결국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이것을 우스꽝스러움으로 해석한다. 다들 그녀의 무덤을 내세의 존재와 신의 권능의 증거물로 생각함으로써 오는 것일 것이다. 그것도 관광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의 무덤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경건한 마음으로 만들고자 무척 애를 쓰겠지만 결국 값싼 가격으로 신의 존재와 같은 신학적 이념의 감각적 구현물들을 현상계에서 “소비”하고자 하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녀의 죽음을 그런 값싼 신앙관에 팔아넘긴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분노(그 신부인가? 언론인가? 교황인가? 성모 마리아인가? 아니면 에밀리 자신인가?)가 들 정도로 나는 그것에서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에밀리가 겪은 시련과 고난 자체가 하나의 단순한 기호가 되어서 종교적 상업화의 희생양이 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종교적 물음은 끊임없이 물어져야 하다. 종교적 물음의 답은 칸트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오성범주와 상상력이 활동하는 감각적 현상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 너머의 물자체, 즉 이성이념이 거주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종교적 물음과 그것과 관련된 이념들은 현상계 속에서 끊임없이 물어져야 하고 고민되어야 한다. 그것이 현상 속의 간단한 논리로 규정되어질 때 신앙은 하나의 기호로 전락하고 값싼 것이 되고 만다.
첫댓글 크아... 멋진 글입니다.
무슨 영화 한 편 보고 칸트까지 나오냐? 이게 어디가 잘 썼다는 거지? 잘난 척만 하려고 쓴 글이네
ㅡㅡ;; 이 무슨 교양없는...
- _-;;
사실 잘난척 맞습니다;;; 제가 칸트를 인용하면서 잘난척을 하는 것은 칸트를 인용하지 않으면 저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지식의 빈약함을 폭로하는 것일테죠.
좋은 글입니다.^^ 어찌보면 신성이 논리적으로 증명된다는 것 자체가 공포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우와~!!! 정말 잘읽었습니다~!!!
사람은 깊은 지혜를 갖고 있으면 있을 수록 자기 생각을 나타내는 말은 더욱 더 단순하게 되는 것이다 - 톨스토이,,, 저의 빈약한 지혜로움때문에 잠시 인용했습니다
좌익님 글이 좀 더 간결하여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음 좋겠다는 생각을 전부터 했더랬습니다,, 글을 읽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다 읽고 나서 뭘 읽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경우가 있더란 말이죠^^;;;주제넘는 참견었다면 맘에 담아두지 마시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