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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하이레스
알싸 사진방을 탐색하던 도중, 조선의 백성들은 엄청난 양의 식사를 했으며, 식량이 부족했던 기간도 임진왜란 직후 수십년에 불과하다고 하더군요.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도 백성들이 기근과 징세에 시달려 식량 부족으로 굶어죽는 일도 꽤 많았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제가 역사에 관심이 깊어서 그런지 쓸데없는 글을 쓰는 것일수도 있지만,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읽어봐주셨으면 합니다. 아 저보다 역사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 혹은 제 글에서 오류를 발견하신 분들은 가차없이 지적해 주세요.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정하겠습니다.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 ~ 1671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에 걸쳐 일어난 대기근이라 하여 '경신대기근'이라 일컬어진다. 조선, 아니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기근 중 하나였으며, 당시 임진왜란을 경험했던 늙은이들 조차 '임진왜란이 이것보다는 나았다' 라고 탄식할 정도의 대재앙이었다.
대기근이 일어난 17세기는 기후학적으로 소빙기에 접어드는 시기였으며, 이 때문인지 전 세계는 이상기후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 세계의 평균 기온이 떨어져 혹한에 시달리는 한편 우박, 벼락, 지진, 태풍, 폭설, 가뭄 등 자연재해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자연재해는 동시다발적으로 우리나라에도 찾아왔으니, 이 자연재해의 종합선물세트가 바로 경신대기근이다.
대기근의 징조는 1670년 새해 벽두부터 나타나는데, 1월 한달 동안 하늘에서 햇무리와 달무리(해와 달 둘레에 먼지나 수증기 등이 모여 둥글게 형성된 테두리)가 여러 번 관측되었다. 당시에는 해와 달 이외의 것이 하늘에 나타나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들 모두 매우 놀랐다.
또한 1월과 2월에 걸쳐 유성이 자주 발견되고 운석이 평안도 중화군에 떨어졌다고 보고가 올라왔다. 유성의 잦은 출현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이 역시 큰 화제가 되었다.
지진 역시 자주 일어났는데, 1월에는 전라도에서, 2월에는 경기도와 경상도에서,5월에는 황해도에서, 6월에는 경상도에서, 7월에는 충청도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그리고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8월 이후에는 지진이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과거에 비해 지각이 많이 불안정해졌다고 평가받는 현재에도 지진의 발생 빈도가 매우 낮다는 것을 볼 때, 저 시기의 지진은 기상이변 수준으로 매우 자주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2월에 충청도에서 역병이 발생하여 80여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고, 평안도에도 역병이 돌았다. 3월에는 경상도에서, 4월에는 충청도와 제주도에서 역병이 돌았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그다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본격적으로 농사가 시작되는 3월 이후에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는 데 있었다.
2월 말에 서울과 경상도에서 우박이 쏟아진 것을 신호로, 5월달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에서 서리와 우박이 쏟아져 농작물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자연히 농사가 잘 될리가 없었다. 게다가 우박은 계속 쏟아지는 데 정작 비는 오지 않아 가뭄이 지속되었다. 심지어 비가 너무도 안와 파종을 못할 지경이었다. 오라는 비는 안오고 우박이 쏟아지는 데다 밤이되면 서리까지 내리니, 농부들은 죽을 맛이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크리티컬이 터지고 말았으니, 현대 이전까지의 농업에서 가장 큰 재앙으로 일컬어지는 메뚜기 떼가 발견 된 것이다. 5월에 경기도에서 처음 발견된 메뚜기 떼는 경기도의 논을 초토화 시키더니 6월에는 함경도로 이동해 가뜩이나 논이 부족해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함경도 백성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피해는 조정에까지 보고되어 당시 영의정이던 정태화는 '현재 겪고 있는 재난은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는 수준'이라고 까지 말할 정도였으며, 현종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고 자연재해를 물리고자 했으나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6월이 되자 본격적으로 자연재해가 몰아치기 시작했으니, 그 시작은 엄청난 태풍과 장마였다. 지금도 장마와 태풍에 의한 피해가 막심하건만,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강력한 태풍과 장마가 한꺼번에 한반도를 강타했으니, 그 피해는 이루말할 수 없었다. 6월 내내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졌으며, 이로 인해 전국 곳곳에서 홍수가 일어났고, 지난 달까지만 해도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우제를 지냈던 임금과 신하들은, 이번엔 반대로 제발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하늘에 비는 기청제를 지내야 했다.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는 제주도가 가장 극심하여, 제주도는 곡식은 고사하고 풀뿌리, 나무뿌리마저 성한게 없어서 전부 굶어 죽을 위기에 놓여있었으며, 제주목사가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판이니 어서 곡식을 보내주십시오.'라는 보고를 조정에 올릴 정도였다.
더이상 닥칠 피해도 없을 것 같지만, 어김없이(?) 재해가 또다시 조선에 찾아왔으니, 이번엔 농사 짓는 소를 죽이는 역병이었다. 이 역병은 수개월 간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심하게 일어나, 무려 수만 마리의 소가 쓰러져 죽었다. 이는 전국 모든 농가의 4%가 일할 소를 잃었다는 소리다. 강풍과 폭우가 동반된 폭풍우도 계속되어, 무려 11월까지 전국 곳곳에서 폭풍우로 인한 피해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1670년 한 해 동안, 조선을 거쳐간 자연재해는 냉해(우박과 서리), 가뭄, 수해, 병충해, 역병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재해의 종합판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조선 전체의 농사는 그야말로 망했다. 조선 8도의 모든 농사가 흉작이 되어버렸으니 엄청난 대기근은 예고된 재앙이었다.
이미 보릿고개에 해당하는 4~5월부터 굶주리는 사람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보릿고개를 지탱할 수 있는 곡식인 밀과 보리가 잇다른 냉해 때문에 흉작이었기 때문이다.
7월에 처음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발견된 이후, 아사자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조선에서 가장 큰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었던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아사자가 급증했으며, 심지어 전국의 모든 곡식이 모이는 한양 도성 내에서도 굶어죽은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보다못한 조정은 소의 도살을 허가하기에 이른다.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농사를 중시했던 조선에서 소는 농사를 짓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도살할 수 없었다. 이는 임진왜란 때조차도 지켜온 조치였으나 이번에는 기근이 너무 심해 조정에서도 소의 도살을 막을 수 없었다. 소의 도살은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 할 수는 있지만 다음 해의 농사에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 제 살 깎아먹기 식의 조치였고, 이를 고려해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은 다음 해 농사를 고려할 처지가 아닐 정도로 절박했다.
결국 조정은 소의 도축을 허가했다. 이미 도축 허가 이전에도 도축에 대한 처벌로 죽음을 각오하고 소를 잡아먹는 사람들이 많았던 판국에, 조정의 도축 허가는 대대적인 소의 도살을 불러왔다. 당장 내년 농사에 쓰일 소는 씨가 말랐고, 살아있는 소를 잡아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역병으로 땅에 파묻은 소를 꺼내어 먹는 일도 파다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역병에 걸려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듬해인 1671년에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곳곳에 굶어죽은 시체들이 널렸고, 이로 인한 전염병 또한 크게 확산되었다. 대기근을 보다못한 정부가 1월에 도성에서 진휼소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었는데, 이것이 또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 정부가 나누어주는 진휼미를 얻어먹기 위해 전국에서 유랑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역병이 도성 안으로 퍼진 것이다.
도성안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사대부와 왕실 종친들, 그리고 궁궐 안 궁녀들까지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명망있는 조정의 중신과 재상들도 역병으로 죽었으며 심지어 임금의 누이인 공주마저도 역병에 걸려 죽자, 임금마저도 역병을 피해 창덕궁을 떠나 외궁으로 피신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조정의 신하들은 사직서를 내고 역병이 퍼진 도성을 떠나 낙향하는 일이 잦았고, 이로 인한 행정력의 공백 또한 재난을 수습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1671년 4월에 대기근은 절정에 달했다.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그해 봄에 보리와 밀의 수확량은 바닥을 기었고, 이로 인한 보릿고개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5월엔 가뭄이 또다시 닥쳐왔고, 6월엔 대홍수가 발생했다. 전국 곳곳에서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있었고, 그로 인한 전염병의 피해도 막심했다. 조정에서 시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사체가 너무 많아 인력이 너무나도 부족해 승려들을 동원해 시체를 수습할 지경이었다. 조선이 숭유억불의 나라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러다보니 곳곳에서 그야말로 경악할 사건들이 일어났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버리고 가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아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가버려 아이가 굶어죽는 일은 양반이었고 자식을 강물에 던져 죽인 부모도 많았다. 하도 버려진 아이들이 많아서 조정에서 나서 이들을 거두어 살피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
전국에서 도둑이 들끓었으며 심지어 나라에 바치는 곡식과 물품을 훔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사형은 기본 옵션일 정도로 중대한 죄었지만 굶어죽으나 사형당하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훔치는 것이었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버리는 일도 발생했는데,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불효는 삼강을 위배하는 강상의 죄였고, 대역죄와 동급으로 취급할 정도로 엄청난 죄였다. 그야말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식을 먹는 식인 행위까지 발생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임금의 비서실은 승정원 마저 '얼마나 굶주렸으면 저랬겠습니까. 조정의 구휼이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라고 두둔한 것을 보면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재앙에 맞서 조정도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대책은 나 내놓았다. 역병이 도성 내로 퍼지는 것을 무릅쓰고 진휼소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었고 그나마도 구휼미마저 바닥을 드러내자 청나라로부터 곡식을 들여오자는 논의를 펼칠 정도였다.
역사에 흥미있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당시 사대부, 특히 집권당인 서인들에게 청나라는 그야말로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 같은 존재였다. 청나라라면 이를 빠득빠득 가는 것은 물론 심지어 청나라의 황실인 만주족을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여길 정도였다. 물론 청나라에게 구원을 청하자는 논의는 결국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치욕을 감내하고서라도 청나라에게 구원을 청하자는 목소리가 집권층 내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곳곳에서 구원을 청하는 장계가 빗발쳤고 조정은 사면령을 내리고 형벌을 감해 민심을 달랬으며 좀도둑질 같은 가벼운 죄는 상황을 고려해 죄를 묻지 않았으며 가능한한 모든 인력을 동원해 시신을 수습하여 전염병을 진정시키고 비축한 모든 곡식을 내어 나누어 주는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조정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인지, 1671년 신해년 여름을 정점으로, 대기근은 한풀 꺾이고 서서히 진정되어갔다. 그러나 그 여파는 그해 겨울까지 이어져 여진히 많은 피해를 양산했다. 또한 24년 뒤인 갑신년(1695)에도 2년에 걸친 대기근이 다시 찾아왔는데, 그 피해도 엄청났다고 한다.
경신대기근의 피해는 그야말로 막대했다. 대기근이 진정되어가던 1671년 6월과 12월에 집권 서인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 세 편에 언급된 사망자 수는 백만여 명이다. 1669년에 조사된 조선의 공식적인 인구는 516만명이며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인구까지 감안하면 1천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조선 인구 중 최소 10%에서 최대 20%에 이르는 인구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사망자가 저 정도이니, 굶주림과 역병을 겪은 사람은 조선 인구의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굶주림과 역병은 제주도에서부터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모든 지역, 그리고 일반 백성들부터 사대부와 왕실 종친에 이르기 까지 조선의 모든 계층을 휩쓸었다.
2년에 걸친 대기근은 조선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굶주림을 피해 많은 유랑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방으로 이주했고 이 과정에서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이 발생하여 그 유명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훗날 간도 문제를 유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대동법의 시행 또한 촉진되었다. 당시 대동법은 경기도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단계였고 이 과정에서 대동법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거웠던 시기였는데, 대기근의 과정에서 대동법이 백성들의 구제에 큰 역할을 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서 전국적인 대동법 확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조선 후기에 널리 퍼진 미륵 신앙, 도참설 등의 사상이 이때 본격적으로 촉발되었다. 백성들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신앙에 기대는 일이 많았고 이 과정에서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예언과 새로운 사상들이 많이 생겨났다.
조선 후기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수도권 집중 현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잇다른 재난으로 지방의 행정력은 마비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구휼 정책이 작동하던 서울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서울 집중 현상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경신대기근 이후 지방 세력의 벼슬길이 점차 막히고 서울 근교의 인재들만 정계에 진출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볼 때 꽤 신빙성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급격한 상업 발전도 경신대기근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조선 건국 이래 농업은 천하의 근본으로 매우 중시되어 왔으며 상업은 농업의 발전을 막는다는 이유로 억압당해왔다. 그러나 경신대기근은 조선의 집권층에게 농업에 대한 회의감과 상업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었고, 조정에서 앞장서 상평통보를 발행하고 유통시키는 등 조선의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조선 최악의 대재앙 중 하나이며 이후 조선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은 경신대기근은 정작 국사 교과서에는 실려있지 않고 따라서 많이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토록 중요한 사건이 교과서에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지식과 글 솜씨 때문에 쓰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네요. 실록을 포함해 이것저것 참고했는데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필력이 형편없어서 너무나도 긴 글이 되어버렸는데 이 문장까지 보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조 : 조선왕조실록, 위키백과, 그리고 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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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첫댓글 좋은글이다
재밌다 이거 쓴 사람 대단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