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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금나라는 고려를 매우 경계하여서, 외교관계를 맺을때 매우 조심하였고 고려와 금나라와의 관계가 요나라와 같이 단순히 명분상의 상 - 하 관계였다고 이야기들을 하죠.
근데 사실 이는 비교대상인 여 - 원관계가 너무나도 인상이 큰 나머지 그것과 비교를 하면서 금나라와의 관계는 요나라와 똑같이 형식적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뭐 그리고 몽골 덕분(?)에 실제로 의미있게 관계를 유지하는 기간도 약 100여년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기도 했고요.
실제로 금나라 건국직후인 인종2년(1124)에는 금나라가 스스로 국경군대에게 조심하라고 하는 한편,
대체로 通問이 있을 적에는 통상적인 규칙을 어기지 말고, 혹시라도 침략해 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그렇지 않고] 함부로 먼저 高麗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금사 고려전
정식으로 조공책봉관계를 맺으려고 할때 인종 4년(1126) 9월에는 외교격식을 요나라때와 똑같이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고, 고려도 금나라 사신을 전송하고 회답하는 표문에도 요나라때의 그것과 똑같이 했습니다(지들이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근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까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요나라와 조공 - 책봉 관계를 맺은 이후에 압록강 지역 문제를 두고서 몇 번 투닥거린 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외교형식에 전혀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종5년(1127) 3월 부터 금나라에서는 "너희들 우리가 원한 표문은 안주더라?" 라며 문제를 제기 하고 나왔죠.
"올린 표문을 살펴보고, 짐이 선유사(宣諭使)를 보낸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한 것과 예물을 바친 사실을 잘 알았다......경은 얼마 전 공물을 보내면서 다만 사의를 표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을 뿐이다."
고려사
금나라는 여 - 요 관계와 똑같이 하겠다고 했기에 고려는 그래서 외교형식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금나라는 달랐던 것이죠. 무엇보다 다음해인 인종6년(1128)에 금나라가 요구한 내용은 고려에게 있어서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바로 충성의 맹세를 하는 서약표문(誓表)를 써서 보내라는 것이었죠.
아 놔. 이자겸에 금나라에 진짜 난이도 한번 헬이네 ㅆㅂ
그냥 한장 써주면 끝나는 거 아니냐라고도 하겠지만, 고려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저 서약표문을 요구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요나라에게 조차도 말이죠.
하지만 금나라는 요나라와의 그런 어정쩡한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더 확실하게 자기 밑에 위치하는 것을 문서상 그리고 외교형식에서 제대로 표현하길 원한 것입니다.
초기에는 고려를 경계하기도 하고, 요나라와의 관계대로 하겠다고 해놓고서는 왜 갑자기 바뀌었을까?
그건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124년 그리고 1126년까지 아무일 없다가 1127년과 1128년에 금나라가 고압적으로 바뀐건 바로 '정강의 변' 이 계기였습니다.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을 생포해서 끌고간 이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금나라스스로도 동아시아의 맹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치는 이전의 요나라와도 확실히 다른 것 이었죠.
정강의 변 직후에도 금나라 심정은 아마 대충 이 정도?
요나라도 군사적 우위를 송나라에게 인식시키기고 전연의 맹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금나라의 정강의 변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송나라 흠종도 정강의 변이 벌어지기 직전에 내놓은 방안이 보다 많은 세폐와 더불어, 금나라 황제를 백부로 섬기겠다는 즉 전연의 맹(전연의 맹은 형제관계를 맺는다는 거 였는데 체결이후 요나라의 캐치 프레이즈는 송황제가 우리 태후를 숙모로 모시기로 했다!) 당시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이습니다만 결국 화북지역이 금나라에 떨어지고 황제 2명이 끌려가는 사건이 벌어짐으로 해서, 다원적이었던 동아시아의 균형추는 확실히 금나라로 기울게 됩니다.
실제로 - 요즘은 다른 해석이 있지만 - 두고두고 욕먹는 진회가 주도한 송나라가 금나라에 신칭한다는 조약(소흥화의)는 바로 효력을 발휘했고, 금나라의 사신과 조서가 도착하면 그것을 송나라의 신하가 받아서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송나라 황제가 직접 금나라의 조서를 받으러 내려가야하는 형식을 취해야 했습니다. 뭐 신하들이 참례하지 않는 자리에서 행해졌다고는 합니다만(참고로 고려도 인종20년(1142) 부터 금나라의 요구로 책명받는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가 도성의 남교(남쪽교외)에서 궁궐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금나라가 고려에게 '요나라 때와는 다른' 태도를 요구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죠.
고려 내부적으로 그러한 금나라의 태도에 반발해 서경반란 사건까지 일어나지만 인종과 김부식으로 인해 잘 무마가 되었고, 결국에는 금나라의 외교적 우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짓게 됩니다.
또한 이런 문제는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의종2년(1148)에도
"금나라 사람이,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의 서두에 왕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사신을 배신(陪臣)이라고 표기하지 않았으니 법을 맡은 관청으로 하여금 치죄하게 해야 한다.’고 황제께 일러바쳤습니다."
고려사 세가
놀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거도 신경써야 함?????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금나라는 조금이라도 틀린 형식이 있으면 철저하게 지적할 만큼 외교 형식에 있어서 요나라와는 다르게 철저하게 우위에 서려고 했습니다.
또한 이는 왕의 책봉문제에서도 나타납니다. 요나라는 왕의 책봉 문제에 관여한 일은 없었습니다. 거의 다 적장자로 정상적인 승계였기때문에 관여할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수양대군의 고려 ver이라 할 수 있는 고려 숙종의 즉위 경우에도 요나라는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죠.
하지만. 금나라는 달랐습니다. 적장자가 아닌 비정상적 승계에 대해서 확실하게 관여를 하려 시도합니다. 그 모습이 일어나는 때가 바로 '무신난'
무신난으로 인해 옹립된 명종은 태자가 아니었고, 엄연히 의종제위기간때 금나라로 부터 인정받은 태자가 있었기 때문에 천자국이었던 금나라는 명분상 당연히 이에 관여 할 수 있었고, 이를 실제로 하게 됩니다.
어 이것들이????
王晧가 讓國에 관한 사실을 아뢰는 [사신을 보내려] 하자, 婆速路에게 詔勅하여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는 한편 有司의 移文으로 자세히 물어보도록 하였다. 高麗에서 통고하기를 “前王이 오래도록 병을 앓아 정신이 혼미하여 정치를 할 수 없기에, 친아우인 晧더러 國事를 임시 대리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니, 上은, “讓位는 큰일인데 어째서 먼저 아뢰어 요청하지 아니하였단 말인가?” 하고서, 有司에게 詔勅하여 재차 자세히 물어보도록 하였다.
금사 고려전
고려사 열전 유응구 편에서는 유응규가 저때 가서 명종의 책봉조서를 얻어내는 것처럼 묘사하지요.
“한 나라의 임금을 책봉하면서 백성에게 물어보는 것은 맹안(猛安)과 모극(謨克)을 임명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신 편에 직접 왕현에게 조서를 보내 자세히 물어 보라.” 고 하며 전 왕의 양위를 승인하지 못하겠다는 회답을 유응규에게 주었다. 유응규가,“제가 두 가지 표를 올렸는데 새 국왕의 표에 대한 회답은 왜 주지 않으십니까? 어느 곳에 사신 가더라도 임금의 분부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무입니다. 신이 이제 임금의 분부를 욕되게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한 것이니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상국에서 목숨을 마침으로써 천하가 알게 할 것입니다.”
라 하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의관을 갖춘 채 뜰에 서서 대궐을 바라보며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사흘 밤낮이 지나도록 꼼짝도 하지 않자 관반(館伴)이 황제에게 알렸고, 황제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식사를 권하였으나 그래도 먹지 않았다. 따라온 사람이 밤중에 몰래 물과 미음을 올렸으나 유응규는 “너도 사람인데 어떻게 이다지 간사한 짓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닷새가 되자 몰골이 바싹 말라 숨이 거의 끊어질듯 하였고 서 있을 힘도 없어 자꾸만 쓰러졌다......... 황제가 그의 충성을 가련히 여겨 대신(大臣)을 보내 위로하고,이레째가 되자 황제가 더욱 가련히 여겨 회답의 조서를 주고 아울러 음식과 폐백을 주면서 잘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고려사 열전 유응규
회답조서를 받았으니 이제 해결 된 거겠지???
하지만 열전과 달리 유응규가 단식투쟁(?) 까지 하며 얻어낸 것은 명종의 책봉을 승인해주는 조서가 아니라 그 사유를 물어보는 조서를 보낸 것일 뿐 이었습니다.
右丞 孟浩는, “마땅히 高麗 士民들에게 물어보아 진실로 모두가 [晧를] 추대하고 복종하면 바로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上은, “한 나라의 임금을 책봉하면서 백성들에게 물어본다면, 이는 猛安謀克을 除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하며 곧 高麗의 사신을 물리치고, 王晛에게 자세히 물어보는 詔書를 내리며 吏部侍郞 靖을 王晛에 대한 宣問使로 삼았다.
금사 고려전
유응규(庾應圭)가 금나라로부터 돌아오면서, 전 왕의 양위를 허락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금나라 황제가 보낸 회답조서를 가지고 왔다.
고려사 세가 명종원년 5월
하 ㅆㅂ 그 무신놈들때문에 단식투쟁까지 했건만......
그리고 고려조정 특히 살아남은 문신들은 금나라의 반응과 진상을 확인하러 온 금나라 사신들에게 왕이 병이나서 그랬다 하면서 이를 해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똥 싸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 인 건 예나 지금이나....)
완안정이 이번 사태에 대해 질문하자 왕은,
“전 왕은 이미 왕위에서 물러나 다른 곳으로 나가 거처하고 있으며 병이 점점 심해져 조서를 받으러 나올 수가 없소. 길 또한 험하고 멀어 자신이 갈 수도 없소이다.”
고 둘러댔다. 완안정이 이 때문에 전 왕을 만나지 못했으며, 왕은 그 대신 전 왕의 표문을 마련해 그 편에 부쳤다.
고려사 세가 명종원년 8월
고려 실무진들 : 아 그냥 전 왕이 병이 낫다고 하고 좀 넘어갑시다 우리
하지만 금나라는 사실을 대략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晧가 사실은 나라를 찬탈하여 晛을 섬에다 가두어 두었다. 靖이 高麗에 도착하자 皓가, “王晛은 이미 임금 자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나가 있으면서 병이 들어 차도가 없으므로 자리에 나와 命을 받을 수 없으며, 오가는 길이 험하고 멀어 사신이 갈 곳이 못되오.” 라고 하였다. 靖은 결국 晛을 만나 보지 못한 채 詔書를 晧에게 주고, 晛의 表를 전달받아 가지고 와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지난번 表와 대략 같았다.
금사 고려전
다만 금나라 측에서도 천자국으로서의 고려에 대한 '확고한 외교적 지위를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이지, 딱히 의종을 복위 시키겠다 이런 목적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하고 쿨(?)하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도 조위총의 귀부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상국으로서 내란에 개입하겠다는 명분으로 연주성(평안도 영변)까지 금나라 군대가 진입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지요.
이듬해 금나라가 고라(高羅)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연주 부근에 진을 치게 하자, 성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고라가, “우리 황제께서, 너희 나라 국경에 있는 고을들이 국왕의 명령을 거역했는데 연주성만 그들을 따르지 않아 오랫동안 적도들의 위협을 받으며 형세가 심히 위급하다는 보고를 들으셨다. 이에 나에게 분부해 군대를 인솔하고 가서 도와주라는 명령을 하셨으니 달리 의심하지 말라.”
고려사 열전 현덕수
그나마 다행히 당시 연주를 책임지던 현담윤이 기지를 발휘하여 금나라가 군대가 내란에 개입하는 초유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현담윤은 평소 금나라 사람에게 은정과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기에 그의 군영으로 가 사정을 알렸다. 고라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황제께서 보고받은 것이 과연 맞았다. 위급한 일이 있으면 내가 응당 도울 것이니 그대들은 충성과 의리를 다해 한마음으로 왕실을 보호하라.” 고 격려한 후 돌아갔다.
고려사 열전 현덕수
금나라로서도 딱히 내란에 개입해서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철 수를 한 것일테고요.
일본학자 이와이 시게끼는 중화제국은 여러가지 방법과 제도로 패권주의의 이념을 현실화 하려 하였다고 보았고 명대 중국에서는 그 하나의 방법으로 '예제 패권주의'가 존재했다고 역설했습니다. 김성규 교수는 이러한 '예제 패권주의'가 당나라도 아닌 '금나라 시대'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초기 인종대 뿐만이 아니라 의종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졌고, 그것이 왕위계승 문제 및 내란에 개입이라는 형태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최충헌때 부터는 금나라도 내부사정과 몽골의 침입등으로 고려내 왕의 폐립 문제가 발생을 했어도 명종대와 같은 적극적 개입을 못하게 되는데, 이게 이어지다 보니 최우대에가서는 완전히 국제적 감각(겁대가리)를 상실하게 됩니다. 뭐 그래도 유승단 처럼 제정신 잡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현실적 의견이 반영되는 것은 수십년간 몽골이 고려 백성들을 살육하고 난 뒤의 일이 되지요.
하..... 저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놈들이 나라를 기어코 말아먹는 구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야 이걸가지고 인종대부터 고려가 굴욕적으로 변했다 이런식으로 평가하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겠죠. 애초에 인종대에 외교적으로 금나라의 우위를 이전보다 더 직접적으로 인정함으로서 전쟁을 피하면서 실리적인 영토 이득(현종이래 최대 숙원이었던 보주성(의주)을 확실하게 고려의 영토로 편입)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외교적으로 상대방의 우위를 확실히 인정함으로서 영토적 실리를 보장' 받는 것은, 고려말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회복이후 원나라와의 외교에서, 위화도 회군이후 고려 조정과 명나라의 외교에서, 태종~세종대 조선과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그대로 재현되었고, 그 과정을 거쳐 획득한 영토는 현재 21C 한반도 거주민족이 향유하고 있으니 그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와 상대의 격차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실리를 보장받는 것도 조공짬밥(?) 없는 나라들은 잘 못하죠. ㅎㅎ 그렇다고 한반도 국가들이 싸워야할때 안 싸우는 것도 아니니깐요. 그래서 이 난세에도 우리나라의 생존 DNA를 믿어봅니다.
맹수 우리에서 맹수와 같이 있는데도 질기게 살아남았던 그 DNA가 이 난세에도 잘 발현되기를 바래 봅니다 ^^
고려:보주만 아니었으면 ㅂㄷㅂㄷ!
보주 문제만 아니었어도 접대의 관습을 깨는 일도 없어서요.
금나라가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 서열정리를 확실하게 한 계기는 '정강의 변' 이고(고려가 보주를 확보한 건 훨씬 이전이고 금나라는 그때는 아무 말도 없었음), 보주문제가 없었더라도 금나라는 외교적인 것을 바꾸라고 고려에 요구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럼 보주문제가 없었다면 인종과 김부식등이 금나라의 요구를 거절 했을까?에 대해선 확실치 않지만 거절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김부식이 이자겸의 금 사대 요구를 반대하다가 금 사대로 돌아선 건 자기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금나라 군대가 개봉 포위하는 등의 위력을 몸소 체험하고 난 뒤여서.... 그 김부식의 요구를 인종이 들어 주었을지는 별개지만서도 ^^;;
@배달의 민족 보주만 일찍 확보했어도 거란(요)한테 외교적으로 휘둘릴 일이 없어서요.
그럼 여진부족과의 전쟁때 접대의 관습을 깨고 여진족 부족장들을 죽이지 않아도 됬죠.
고려 내부에서도 여유가 있어서요.
@노스아스터 그건 아쉽기는 한데 요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결국 고려가 '못' 되찾은 거라서(되찾을 능력이 있었으면 귀주대첩이후 강감찬 주도하에 진행 했겠죠) 그게 당시 고려의 '한계' 였던거 아닌가 싶어요 ㅜㅜ 결국 보주성을 되찾는 건 동북9성이 실패하고 나서 요-금 교체과정에서 요나라가 도망가면서 가능하게 되지요;;
외교적으로 상대방의 우위를 확실히 인정함으로서 영토적 실리를 보장받는 것이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군요
요나라에 비해 금나라가 너무 쎄기는 했지요. 송나라까지 패버린 놈들인지라...
그쳐 근데 상대적으로 관심도 적고 원나라 인상이 너무 강해서 여-요 관계에 묻어가는 경향이 있길래 한번 적어 봤습니다. ㅎㅎ
노예로 부리던 민족이 역으로 주인 행세하려고 했으니 당시 고려가 인식한 선조국가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때부터 거의 하층민수준의 미개 민족이고 금나라 건국이전에도 상당수 여진족이 고려의 번호나 속방이었는데 성장해서 전쟁도 하고 역으로 강해져서 속국취급하니.. 당연히 고려 지배층 뿐만 아니라 일반민중사이에서도 상당히 반감이 있었을 듯합니다 괜히 거란이나 중국이 무례한 외교행태나 요구에도 참고 있던 여진이 저러니 고려가 윤관이 직접 전쟁에 나가고 금나라랑 또 전쟁하자고 묘청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면 어떤 기류인지 상상이 갑니다...다만 이런 것은 조선 때도 반복되니...
그 김부식조차 이자겸 집권기에는 금나라 사대 반대 파였다가 이자겸 퇴출이후 송나라를 갔다오고 나서야 현실 직시를 한 것을 보면, 당시 기류가 어땠을지 대충 이해가 가지요 ^^;;
사실 국제 현실을 직시하고 그를 해결하려고 했던 국정책임자와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간의 인식차가 심한건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