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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교회의 회복은 새로운 종류의 수도회주의에서 나올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위기라고들 한다. 교회 성장이 멈추고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던 중에 전 세계에 불어닥친 코로나 팬데믹은 한국 교회의 강점인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에 강한 제동을 걸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교회가 오해를 받고 억울하게 핍박당했다면서 이전의 교회 상태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지만,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고 있다. 탈기독교인, 가나안 교인들에게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떠난 물어보면, 대체로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돈이 주인이 된 교회, 사랑과 포용, 관대함 대신 배제와 혐오에 물든 기독교에 회의감이 들어서 하나님은 믿지만 이제 교회에는 다니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까?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공의회, 역사를 걷다》 등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온 최종원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는 최신작 《수도회, 길을 묻다: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에서 수도회의 생성, 발전, 소멸과 함께 그리스도의 가치를 따르는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1부 탄생’에서는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시작한 초기 수도회의 배경과 수도사의 일상을 살피고, 수도회의 탄생을 개인적 완전성에 대한 추구에서 찾기보다는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 낸다.
‘2부 역사’에서는 주로 라틴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등장한 수도회를 중세 초기부터 근현대까지 연대기적으로 살폈다. 수도회가 세속과 무관하지 않고, 세상의 가장 전위에 서 있었음을 반복해서 보여 준다.
‘3부 유산’은 수도회를 과거의 것으로 내맡기지 않고 오늘 우리 현실 한가운데로 불러오려는 의도를 담아낸다. 수도회 가르침의 현재적 적용, 제국의 심장 한가운데서 수도회 정신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통찰해 낸 20세기의 수도사들, 그리고 여전히 제국의 경계를 넘어 주변으로 향하는 새로운 수도회주의 운동을 살펴본다.
저자는 주변에서 생성되어 마침내 중심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했던 역사 속 수도회의 흐름을 함께 들여다보며 교회 회복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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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수도원의 삶은 고사하고 종교의 가르침마저 역사 속 유물처럼 여기는 오늘날, 수도사의 일상이 어떤 의미가 있
을까? 그 삶의 방식이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현대인들은 세속의 성취와 영광을 갈망하고 경배하지만, 그 욕망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절제되지 않는 욕망 추구가 자신의 자유를 얽어매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수도사의 일상이 재현하는 가치를 단순히 거룩, 경건, 겸손 같은 종교용어로만 표현할 수는 없다. 그 가치는 잃어버린 교회의 시간,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데 있다. 종교의 쓰임새가 욕망의 부추김을 정당화하는 데 있지 않고 멈추어 서서 되돌아보는 데 있음을 보여 줄 때, 수도사의 일상은 회랑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_75-76쪽
이 수도회 운동들은 종교가 혼탁했을 때 자정을 위해 아래로부터 생겨나 불꽃처럼 시대정신을 이끌다가 독한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졌다. 마지막 모습은 유사했다. 개혁 주체가 개혁하려던 대상과 똑같아지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한 개인이나 조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복되는 패턴이다. 여기에서 던져야 할 물음은, ‘그들이 왜 끝자락에 타락했는가?’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담아낼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생성되고 있는가?’이다. 수도회주의는 급진적인 그리스도교다. 급진성에 지속 가능성의 짐까지 지우는 것은 지나치다. _119쪽
언제나 그렇듯 가장 이상적인 입장은 현실에 적용하기는 곤란할 때가 많다. 급진적인 만큼 현실화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 급진적인 주장에서 끄집어내야 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사도적 청빈의 핵심은 재산 소유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 땅의 일, 세속의 일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등 탁발 수도회는 교회가 재산을 포함하여 세속의 권력 등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을 살길로 제시했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바빌론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며 노래를 부른 것처럼, 아비뇽 유수기의 교회는 사도 교회가 잃어버린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했다. 탁발 수도회는, 교회에 주어진 부와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 땅에서 교회가 가진 힘을 포기하는 일, 그것이 사도적 청빈의 핵심이다. 때로 주장 자체가 극단적으로 비화되기도 했지만, 중세 말 내내 사도적 청빈 논쟁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교회가 지향할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는 방증이다. _158-159쪽
수녀원이 가졌던 힘의 원천은 공간이었는지 모른다. 제한이 있고 제약도 있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오롯하게 가질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이 공간성에 대한 고민은 여성이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교회에 여전히 주어져 있는 풀기 어려운 숙제다. 교회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 여성이 들어가거나 설 수 있는 자리, 말할 수 있는 자리는 남성에게 주어진 공간보다 훨씬 적다. 교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페미니즘이며, 이는 곧 교회를 해치는 소리라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라고 느끼는 건 혼자만의 오해는 아닐 듯하다. 한계가 노정되어 있음에도, 제도적으로 허락된 수녀원이라는 공간은 분명하게 그 역할과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_181쪽
수도사는, 또 그리스도인은 현실의 문화와 사회, 정세를 어떻게 읽어 내고 살아 내야 하는지를 찾기 위해 앞서서 헤쳐 나가는 사람, 전위에 선 사람들이다. 제도 교회는 지배적인 시대 분위기 앞에서 저항자의 자리에 서서 사회 변화를 추동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지배 문화와 가치를 전달하고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가 많다. 그 속에서 서로 권력과 영향력을 향유한다. 문명이 지향하는 가치, 제국이 지향하는 가치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노예가 될 뿐이다. 그렇기에 오늘 제국의 가치와 지배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교회와 그 안의 개개인을 일깨우는 수도사들이 더욱 필요하다. 교회는 종교에 적대적이라고 알려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만큼이나 종교 친화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성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_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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