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팝나무 꽃 필 무렵
목성균
진달래꽃이 노을처럼 져 버리면 섭섭한 마음을 채워 주듯 조팝나무 꽃이 핀다. 조팝나무 꽃은 고갯길 초입머리, 산발치, 산밭 두둑 같은 양지바른 곳 여기저기 한 무더기씩 하얗게 핀다.
조팝나무 꽃은 멀리서 건너다 봐야 아름답다. 가깝게 보면 자디잔 꽃잎들이 소박할 뿐 별 볼품이 없으나 건너다보면 하얀 꽃무더기가 가난한 유생 댁의 과년瓜年에 채 못 미친 외동딸처럼 깨끗하고 얌전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조팝나무 꽃이 필 때의 산골 동네는 고요했다. 그러나 적막하지는 않다. 무슨 예사롭지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고요함이다. 이윽고 명주 필을 찢는 듯한 돼지 멱따는 소리가 그 고요를 찢어놓는다.
그 소리는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다. 어느 소프라노 가수도 이르지 못한 가장 높은 음역音域으로, 동네 사람 모두를 기쁨으로 몰아가는 한마디의 절창이다. 돼지는 죽으면서 온 삼이웃에 인간이 낼 수 없는 미음美音으로 잔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열여덟 살 적 이른 봄, 나는 청포묵이 담긴 부조扶助 함지박을 지고 조팝나무 꽃이 하얗게 핀 산발치 길로 해서 윗말 대고모 댁엘 갔다. 대고모 댁 사돈 색시가 내일이면 시집을 가는 것이다.
대고모 댁 사돈 색시는 나하고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저만큼 막 산모퉁이를 돌아간 까만 무명치마에 하얀 무명적삼을 입은 열네 살 난 색시. 학교를 갈 때나 올 때나, 우리는 늘 똑같은 거리를 두고 걸어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고모 댁 사돈 색시가 돌아간 산모퉁이. 눈부시게 하얀 조팝나무 꽃이 한 무더기 피었다. 급히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봄 햇살에 눈부시게 하얀 적삼이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 가늘고 작은 어깨의 동그스름한 선의 눈부심이여-!
먼 산에서 산비둘기가 “지집(계집) 죽고, 자식 죽고……” 하며 온종일 울었다. 어머니는 청포묵을 쑤었다. 우리 동네서 청포묵을 야들야들하게 쑬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어머니뿐이라고 했다. 대고모가 우리 어머니에게 윗손〔上客〕상에 올리게 청포묵을 쑤어 오라고 일렀다. 그 청포묵 함지박을 지고 산비둘기 울음소리를 밟으면서 윗말 대고모 댁엘 갔다.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울려오는 앞산 발치 뙈기밭에 대고모 댁 사돈 색시 같은 조팝나무 꽃이 피어서 눈부시게 희다. 자꾸만 발걸음이 헛디뎌졌다. 기껏 청포묵 여남은 모가 담긴 함지박이 왜 그리 무거웠을까.
청포묵 함지를 과방에 들여놓고 돼지 잡는 구경을 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과 흥분을 참는 사람들의 긴장이 마당에 가득했다. 돼지는 발버둥치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소리가 째지는 것처럼 날카로운지 앞산 발치 뙈기밭 두둑에 하얗게 쪼그려 앉아 있는 조팝나무 꽃이 흩날려 떨어질까 걱정되었다.
청년들이 돼지의 네 굽을 묵어서 큰 모탕이나 구유를 엎어 놓고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요동을 못 치도록 단도리를 해 놓으면 원규 어르신네가 미리 뒷짐에 감춰 들고 있던 날 선 창칼로 익숙하게 돼지 멱을 땄다. 돼지가 미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산멱을 정통으로 끊어서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다. 원규 어르신네는 언제부터일까, 아마 과방장이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 돼지 멱을 땄을 것이다. 처음에는 돼지의 멱을 빗찔러서 요동을 치고 피를 잔칫집 마당에 흩뿌리며 고통스럽게 죽게 했을 터이지만 그 후 몇십 년 그 일을 반복하면서 그 분은 눈을 감고도 기름진 돼지의 목에 칼을 대면 영락없이 명줄을 한 번에 끊었을 것이고, 돼지는 아플 새도 없이 씀벅하는 감촉만으로 명줄을 놓았으리라.
돼지 목에서 창칼을 빼면, 과방의 말석末席에서 접시 고임 잔심부름이나 하는, 훗날 돼지 멱을 자기가 따리라고 뼈물고 있는 애송이 과방꾼이 얼른 받아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애송이 과방꾼은 들고 기다리던 동이를 얼른 돼지 모가지 밑에다 들이밀었다.
돼지는 멱을 딴 목으로 숨을 쉬는데 그때 선지피가 쿨걱쿨걱 쏟아져서 동이 안에 그득하게 고인다. 그 피, 그것은 상서로운 것이다. 잔칫집에 악귀의 범접을 막는 피다. 동네 사람들은 돼지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목에서 쿨걱쿨걱 힘차게 쏟아지던 피가 멎으면 돼지는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조용히……. 돼지의 얼굴에는 고통이나 통분 같은 표정은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지극히 평온했다. 고삿상에 화폐를 물고 있는 돼지머리를 본 사람은 알지만, 돼지의 얼굴은 지극히 길상吉相이다.
돼지를 잡는 일은 비단 잔치에 쓸 고기를 장만하는 밀도살로만 여길 일은 아니다. 잔치의 제물을 준비하는 일이다. 따라서 새파랗게 날이 선 창칼로 돼지 멱을 딴 그분은 비단 백정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돼지 멱을 따고 자기가 무슨 부족의 제사장이라도 되는 양 근엄한 표정으로 둘러서 있는 동네 사람들을 죽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조팝나무 꽃을 보면 원규 어르신네가 돼지 멱을 따고 서 있던 그 자부심 뚜렷한 모습이 생각난다.
대고모 댁 안방을 기웃거려 보았다. 내일이면 대례청에 설 사돈 색시가 역시 까만 치마에 하얀 적삼을 입고 일가의 안노인들에 둘러싸여서 아랫목에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언뜻 눈이 마주쳤다. 마음에 한 점 동요도 스침 없는 아주 조용한 표정으로 나를 잠깐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돌아서서 울 넘어 산기슭에 조용히 피어 있는 조팝나무 꽃을 보았다.
지금도 조팝나무 꽃을 보면 대고모 댁 사돈 색시를 좋아해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궁금하다. 궁금한 걸 가슴 속 깊이 묻어 두고 있는 것도 다치고 싶지 않은 비밀처럼 은근해서 좋다.
[목성균] 1995년 월간 《수필문학》에 <속리산기>로 추천 완료.
2003년 수필집 《명태에 관한 추억》이 문예진흥원 우수문학 작품집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