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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습관상 왔던 길을 다시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새로운 길을 찾아 걸으려하지 되돌아 가는 발걸음에 익숙하지 않는다. 그러나 되돌아 나가다 보면 들어 올 때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광을 보게되는 기회가 참 많다. 이 섬은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그린벨트처럼 개발제한 구역이다. 구시가지로서 골목만 들어가면 옛향기 물씬 풍기는 골목길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섬이다. 선원들이 몰려 살던 모습, 그리고 선술집 등 무역항으로서 옛모습이 그려지는 뒷골목, 차를 기다리면서 골목안으로 들어가 걸어 보았다. 대나무 장대에 아무렇게나 걸린 빨래, 창가에 놓인 화분, 그리고 현관 옆에 놓여진 생활용품들 그리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보며서 항구도시의 면모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동네 한바귀 돌면서 뒤골목 정취를 담아갈 수 있었는데, 참 아쉬웠다.
영보님은 셀카에 지금 심취하고 계시고 있는 중이시다. 자화상을 만들고 계시는 모습이 너무 진지하셔서 살짝 샷다를 눌렀다.
파스칼 형제님 잠시 거리 벤치에 앉아서 망중한을 이끌어 내고 계시는 중, 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현주민들의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다가 온다. 여행중 도심에서는 앉아 쉴 곳이 마땅하지 않지만 변두리로 나가보면 나무밑이나 공원에 벤치가 있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많은 편이다. 잠시 쉬는 사이 에그타르트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달콤함이 압안 가득 퍼졌다. 커피가 그리웠다. 짙은 향이 모락거리는 커피 한 모금과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투갈 에그 타르트는 바삭한 페이스트리 위에 달걀 크림을 올려서 오븐에 구운 것으로, 식감이 부드럽고 달콤하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하여 전부 차에 올라탔다. 잠시지만 가로수 그늘에서 휴식이 꽤나 달콤했다. 그 만큼 잠이 모자랐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식 식당을 찾았다. 이국에서 맛 보는 고국 음식, 이제는 어디를 가나 한식당이 있어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 식당 이름은 홍대다. 홍대앞에 있는 음식점과 실내 인테리어가 엇비슷한 것 같다. 식사를 마친 후 걸어서 마카오 성당 참례를 하기로 하였다.
해엽 건너 마카오 타워가 보였다. 높이는 338m로서 번지 점프가 유명한 곳이다. 성당 참례 후 올라갈 계획이 있었다.
마카오의 중국 반환 2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338m 높이의 타워로, 마카오의 밤을 아름답게 수놓는 곳이다. MOP688을 내면 마카오 타워 61층 전망대의 외곽 상판을 직접 걷는 스카이 워크를 체험하고 인증서, 기념 CD, 티셔츠를 받을 수 있다. 스카이 점프는 전망대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으로 인증서, 멤버십카드, 티셔츠를 포함하여 MOP1,888의 비용이 든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번지점프대가 있는 이곳에서 TV 프로그램 ‘런닝맨’의 출연자인 배우 송지효가 미소를 머금으며 점프를 하여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지만, 역동적이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마카오 중심지 답게 도심은 잘 정비 되어 있었다. 총무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 걱정이었는데 보조 가이드와 어느 상가로 향했다.
구 시가지 골목 언덕을 걸어 올라 가자 좁고 허룸한 구 길이 나왔다.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에 속하는 성 로렌스 성당이 언덕위에서 해안을 바라 보며 있었다. 그리고 입구 계단에 올라서자 마카오에 최초로 진출한 예수회 본부가 보였다. 회색 건물로서 예수회를 상징하는 문장이 예수회 건물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성 로렌스 성당(Macau St. Lawrence’s Church) 은
선원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던 곳으로 세나도 광장에서 펜하 성당으로 올라 가는 골목 입구에 있다.
마카오 남쪽 해안을 바라다보는 언덕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이곳은 마카오에 온 초기 포르투갈 선원들이 무사하게 항해를 마치도록 선원 가족들이 기도하던 곳이다. 1560년에는 목조 건물로 지어졌었으나 1846년 현재의 모습인 석조 건물로 재건되었다. 성당 외부는 바로크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중국풍의 타일을 이용한 지붕과 터키옥이 박힌 천장, 이중 계단과 안뜰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당 주변에는 부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성당의 영광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로렌스 성당에서 나와 뒤로 돌아나가 내려가자 신학교로 지어진 아우쿠스팅 성당이 나왔다.
스페인 아우구스틴 수도회에 의해 1586년 신학교로 지어졌다. 3년 후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서 성당으로 재건립되었다. 노란색 외관의 벽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대리석으로 뒤덮인 높은 제단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있는 모습의 상을 볼 수 있다. 이 상은 예전에 한 번 가톨릭 성당으로 옮겨진 적이 있는데 다시 아우구스틴 성당으로 돌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매년 사순절 첫 번째 일요일에는 ‘파소스’라고 하는 행사가 열리는데 밤부터 다음날까지 예수상을 나르는 거리 행렬이 이어진다.
성요셉 신학교 성당.
성 요셉 신학교는 1728년 예수회가 설립했다 성 바오로 대학(St. Paul's College)과 같이 중국에서 선교할 수 백 명의 선교사를 배출하였고 마카오, 중국내륙, 일본, 베트남, 등 카돌릭 전파에 큰 족적을 남겼다. 옆에 있는 성 요셉성당은 1758년 완공되어 봉헌되었으나 현재 건물은 1953년 재건축된 건물이다.
염려하고 걱정하였는데 총무님이 결국 탈이 난 모양이다. 걱정이다.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되는데.... 체칠리아 자매께서 측근에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것 같다.
극동지방 천주교 역사의 중심 마카오’는 마카오 시 중심부에 20개가 넘는 유서 깊은 천주교 건축물과 몇 곳의 광장으로 구성된 역사지구를 한데 묶어 놓았다.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된 이곳은 동서양 문명의 통합과 공존의 살아 있는 증거로서 인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역사의 중심 마카오’를 여유롭게 탐방하는 동안, 지금 우리는 곳곳에서 아름다운 역사적 문화적 유산과 마주치고 있는 중이다. 성요셉 신학교는 1758년에 성바울 대학과 함께 건축되어 중국과 일본 등 각지에 다수의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이 신학교는 대학과 동일과 커리큘럼으로 학생들을 양성 했으며, 1800년대 포루투갈의 여왕인 도나 마리아 1세로 부터 ‘사명감으로 뭉친 집’ 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신학교 옆에 있는 성 요셉 성당은 1758년에 건축되었으며, 중국에서의 바로크 양식이 적용된 대표적인 예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2001년 유네스코에서 발간되는 알틀라스 먼디알에 소개 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는 천주실의 저자로 유명한 예수회 소속 마테오 릿지가 머물던 곳이다. 이곳을 출발하여 북경까지 약 18년간 중국을 속속들이 알아가며 도착하여 아담샬에게 자리를 물려 줄 때까지 중국에 천주교 터전을 딱는다. 지금 이 신학교 마당에 마데오 릿지의 동상에 세워져 있다.
천주실의에 대하여 자세하게 부언하면 다음과 같다.
마테오 리치( Ricci,M., 利瑪竇)가 저술한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 상, 하 2권. 모두 8편으로 나누어 174항목에 걸쳐 서양학자인 서사(西士)와 중국학자인 중사(中士)가
만나 대화를 통하여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가톨릭 교리서이며 호교서(護敎書)이다. 중사는 중국 사람을 대변하는 박학다식의 학자이고, 서사는 가톨릭사상과 스콜라철학을 겸비한 서양학자로 저자 자신이다. 이 책은 전자의 입을 빌려 전통유학의 사상과 불교· 도교를 논하게 하고, 후자가 스콜라철학과 선진 공맹(先秦孔孟)의 고전을 들어 천주교의 교리를 펴고, 그 사상을 이론적으로 옹위(擁衛)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화형식을 빌려
진술된 문장은 사서육경과 그 밖의 경전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유교서 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서도 자주 활용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하지
않고 차근차근 타이르듯이 이끌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승복하지 않을 수 없게 꾸며져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마테오 리치가 중국 학예(學藝)에 얼마나 통달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고어(古語)를 구사하고 성어(成語)·성구(成句)는 가급적 오랜 원형을 찾아 사용하였고, 고사(故事)의 내력을 광범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을 편술한 시기는 1593(선조26)∼1596년으로 보이나, 정식
간행된 것은 저자가 북경(北京)에 거주하게 된 뒤인 1603년의 일이다. 그 뒤 제2판이
발리니아니(Valignani, 范禮安) 신부에 의하여 광둥성(廣東省) 사오저우(韶州)에서 간행되고, 1607년 쟝수성(江蘇省) 저장(浙江)에서 이지조(李之藻)에 의하여 제3판이
나왔다. ‘천주실의’ 라는 책이름은 ‘De Deo Verax Disputatio’를 번역한 것으로, 직역하면 ‘하느님에 대한 참된 토론’
이라는 뜻이다. 내용은 천주교 신앙의 모든 문제를 다루지 않고 몇 가지 중요한 교리, 특히 본질적 문제만을 다루어 마침내 신앙과 계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론을 폈고, 이를 인간의 이성과 자연적인 식견으로 입증하며 전개해 놓은 멋진 호교서다.
성 요셉 신학교 성당 – 예수회에서 1746년 착공하여 1758년 완공하였다. 성당 정면 건축배열은 대칭형으로 라틴형 십자가 모양이다. 건축구조는 로마에 있는 예수회 예수 대성당과 비슷하고 북경남당과 거의 같다. 제대 중앙에 예수성심상을 모시고 왼편에는 예수회 창설자 성 이냐시오로욜라와 오른쪽에는 동방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모셔 놓았다. 또한 성인의 팔뼈 부분을 화적 주교(Bispo D. Digo Correio Valente)가 1619년 인도 고아(Goa)에서 일본으로 모셨다가 다시 1633년 - 1634년경 마카오로 모셔와 성바오로 성당에 모셔 놓고 200여년 동안 공경하였으나 1835년 성 바오로 성당 화재로 성 안토니오 성당과 주교좌 성당을 거쳐 현재는 신학교 성당에 모셔져 있다.
신학교 안 마당 고목에 꽃이 피었다.
마카오 성 미카엘 묘원은 1853년 건립되었고 그 안에 성당은 1875년 봉헌되었다. 170여년 전 이 땅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선종한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소년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무연고 시신을 1969년과 1979년 두 차례 합장시켜 묘를 만들었는데 그 당시 함께 최방제 소년이 묻혔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소년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추모식을 갖기 위하여 서울에서부터 꽃을 준비하고 추모사를 지니고 출발했었다.
한국 교회 설립 이후 한국인으로서 국외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1836년 마카오에서 수업을 받았던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1821~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고, 이 중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은 신품성사를 받고 귀국하여 사제로 활동하였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중국 장춘 소팔가자에서 부제 품을 함께 받고, 중국 상해에서 1845년 8월 17일과 1849년 4월 15일에 각각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도 채 못되어 순교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 말 귀국, 1861년 6월 15일 선종할 때까지 10년 6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마카오에서 선종한 소년 최방제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별 삼형제라는 동요가 있는데 그 가사 내용처럼 소년에 대한 애듯한 마음이 와닺는다. 지금도 이글을 쓰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중이다.
별 삼형제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질 않고
남은별만 둘이서 눈물 흘리네
서울에서부터 준비해 갖고 간 꽃을 매만져 화병에 꼿고 있는 데레사 자매님이시다. 컨디션이 강하되어 있는 와중에도 꽃을 정리하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성 미카엘 묘원에 도착하여 우선 성당으로 입당하여 약식 추모제를 갖었다.
최초 한국의 신부가 되기 위하여 떠났던 세 소년의 선발은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1835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베드로) 신부는 이듬해 초부터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인재를 탐문, 신학생으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선발,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모방신부에 의하여 발탁된 세소년은 걸어서 의주로 의주부터 걸어서 장장 6개월만에 마카오에 도착한다.
최 방제(1821∼1861). 세례명 프란치스코 하비에로. 성인(聖人) 최경환(崔京煥)의 조카이며, 최 양 업(崔良業) 신부의 사촌. 1836년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김대건(金大建), 최 양업과 함께 1836년 출국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있는 외방전교회 (外邦傳敎會 )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최방제 소년은 11월 27일 마카오에서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선종한다.
최초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신부님께 선택된 신학생으로 최 양업 토마스 신부님에 이어 최 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로 였다. 충남 홍주에서 최인호 야고보와 황 안나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 남양으로 이주한 후 모방신부님에게 신학생으로 선택을 받는다. 1836년 3월14일 중구 주교동에 있던 모방 신부님 자택을 방문한 이후 12월2일 서약 후 3일 마카오로 출발한다.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칼르리 교장신부님 밑에서 기초 교육 중 11월27일 위열증세로 사망한다. 해마다 많은 신자들이 찾는 남양성지는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년이 살았던 곳으로 동시에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소다.
나레이터를 헬레나 자매님이 맡아주셔서 위에 내용을 데레사 자매님 연주 음악에 맞춰 읽어 주셨다.
이어서, 추모사는 마틸다 자매님과 세베리노 형제가 읽어 나갔다. 성당내에서는 엄숙한 침묵이 흘렀다.
잊혀진 소년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추모하며
교회와 신자들 기억 속에서 사라진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년을 기억하며 이 자리에 서서 순례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조국산천과 부모형제들을 뒤로하고 8개월의 걸음 대장정 끝에 찾은 마카오,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 머물 수 없어 마카오를 떠나 페낭 신학교를 찾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민란의 진정으로 다시 마카오로 돌아 오지만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위열 병이었습니다. 좀처럼 물러 갈지 모르는 위열병은 소년의 꿈을 송두리채 앗아 가고 이후 교회와 신자들의 기억속에서 조차 사라져 버립니다.
소년의 죽음만 생각해도 서럽고 가슴이 먹먹한데 소년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사무치면 먹구름이 되어 순례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멀고 먼 이국 땅에 홀로 남겨진 소년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모두가 함께 동행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며 부를 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년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쓸쓸함이 가득했던 소년의 죽음, 그 쓸쓸함은 지금도 이어져 우리 모두에게 오랜 묵상 끝에 기도 드리게 합니다.
조용히 소년의 이름을 불러보고 되 뇌이면서 소년이 그토록 원했던 천주의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세상을 만들어 천주의 사랑안에 머물고 있는 소년을 잊지 않겠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년이여 사랑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년이여 사랑합니다. 진정 사랑합니다. 아멘~ |
성당 안에서 추모식을 갖은 후 합장 묘를 찾았다. 기본적인 예의를 갖춘 후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순례자와 현지 가이들도 손을 맞잡고 아리랑을 합창하였다. 하모니카 선율과 아리랑 가락이 마음을 먹먹하게 하였다. 분명 세 소년들은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 제대로 하느님을 섬기려고 이곳에 왔었을 것이다. 부모 형제를 뒤로 한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걸어 마카오에 도착한 세 소년은 고국산천과 부모 형제가 그리웠을 때 아리랑을 불렀을 것이다. 두 소년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안에서 영광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한 소년은 중도에 낮설은 이국 땅에서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후 묘소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다.
화초는 사람이 만들어 사람의 손에서 키워지지만 들꽃은 하느님이 키워주신다고 우리들은 믿고 있다. 최방제 소년은 하느님께서 영혼을 돌봐 주시고 있으시리라 믿지만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돌봄도 이뤄져야 마음이 편해 지는 것이 사람들 마음이다. 신앙심이 약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느님께서 돌봐주시는 일과 사람들이 사람의 인정을 담아 관심을 갖고 돌보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 마음도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부분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을 나누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우리 순례단은 항상 소외된 부분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최대의 관심과 실천으로 정하고 있다. 103위 성인들도 중요하지만 들꽃처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무영순교자들을 하느님과 함께 사랑하고 있는 단체다. 신분을 몰라 가족과 친척은 아무도 찾지 못하는 무명순교자 가족의 마음으로 간소한 제물을 준비하고 찾는 이유다. 잊혀져 가는 소년 최방제! 이렇게나마 찾아 보고 위로하고 싶었다. 샬롬.
추모행사를 모두 정리한 후 돌아서서 성 미카엘 묘원을 걸어 나오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나무 사이로 우리들이 놓고 오는 리본 달린 꽃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순간 성호를 긋고 화살기도를 드렸다. 들꽃이 되어 버린, 별 삼형제에서 사라진 별 하나가 된 최방제 소년을 위해 기도하오니 사랑으로 안아 주옵소서 소년이 채 하지 못한 신앙적 전교와 사목의 삶에 대하여 우리와 한국교회에서 이루어 갈라진 민족에게 일치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이로서 성지순례의 공식적인 일정은 매듭되었다.잠이 부족하고 더위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함께 순례를 해주신 영보님과 형제, 자매님들 그리고 현지에서 충실한 가이드로 안내를 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함께한 시간들 행복했습니다.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맙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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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독도 겨우 풀렸을까 하는 시기에 순례기간의 순간 순간의 기록과 사진들을 보니 존경과 감사의 마음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순례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정리된 내용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함께 한 순례의 시간들 좀처럼 잋지못할 것 같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