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업중에 교수님이 불러주신 향가 , 고려가요, 시조, 가사 중 1∼2개 나옴
2. 개화기 ★한국어문 시험 문제★
가사와 개화기 소설의 (주제) 차이와 이유 (예: ' 통속 vs 우국')
3. 1920 년대 (현대시 개관)시사 , 동인지와 연결
4. 1930년대 소설의 특징
5. 생명파, 백조 , 시문학파 , 특징과 한계 ㅡ 구체적인 시인 이름 열거하기
태서 신보의 공적(문학사적 의의)
6. 동반자 작가 - 이효석, 유진오, 채만식 에 대해
7. 김유정, 채만식, 김동인 ㅡ 소설의 특징 (중1명 나옴)
8. 일제하 순수문학의 특징 (일제하에선 어떻게 전개되나?)
여기서 동반자 작가란 카프이념엔 동조하나 운동에는 동참하지 않는 작가로 이효섭, 채만식, 김동인 이 그렇다우..
▶향가
1 신라 시대에 불려진 우리 고유의 노래. 표기 방법은 향찰(조사는 음을 사용, 주어와 명사는 훈을 사용)
2 4, 8, 10구체의 형식으로 되어 있음.
- 4구체 : 서동요, 헌화가, 도솔가, 풍요 => 집단성
- 8구체 : 처용가, 모죽지랑가
- 10구체(사뇌가) : 제망매가
3 작자는 화랑과 승려 혹은 지식인과 승려라고 일컬어오나 대체로 후자가 인정됨.
4 주제는 국가의 태평(해성가), 불덕의 찬양(원앙생가), 죽은 사람에 대한 사모(제망매가), 기원 주술(천수대비가, 해성가)
5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균여10수 + 서장 = 11수)
향가집을 삼대목이 있다 하나 전하지 않음.
▶고려가요
1 고려속요 또는 장가라고 부른다. 대체로 악장가사, 악학궤범, 시용향악보 등에 전한다. 이 책들은 노랫말보다는 조선의 제례악 등에 사용할 곡들의 악보를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2 내용적인 면에서 인간의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낸 장르라 할 수 있다.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교화에 어긋난다고 꺼려했음.
예) -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 만뎡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 만뎡
정든 오늘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경경고침상(耿耿孤枕上)에 어느 자미 오리오
서창을 여러하니 도화ㅣ 발하두다
도화은 시름 업시 소춘풍(小春風) 하나다 소춘풍 하나다.
3 한자 문화권 안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사용한 특징이 있 다.
4 작자나 향유계층이 일반 서민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고, 그래서 작자미상의 민요적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구전되어오던 민요적 구비문학이 궁정음악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5 형태적 특징으로 분절체와 여음(후렴구)을 들 수 있다.
6 청산별곡, 가시리, 만전춘별사, 정과정, 동동, 사모곡, 쌍화점, 서경별곡, 도이장가 등.
▶시조
1 평시조를 기준으로 할 때 3.4조의 음수율을 가지고 3장 6구 45자 안팎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4음보이다.
3 4 / 4 4
3 4 / 4 4
3 5 / 4 3
시조마다 1,2자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종장 첫째 구만은 3음절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2 형태상 평시조, 사설시조, 연시조로 나눌수 있다.
3 우리 나라 고유의 정형시이고, 고려 중기에 형성되고 조선 전기에 완성 되었으며, 현대시조로 전승된 전통적 문학이다.
4 양반과 평민 모두가 지었던 국민문학이며, 순수한 고유어를 많이 사용했다. 개성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며 대체로 제목이 달려있다.
* 조선 전기 시조의 특징
- 주로 사대부에 의해 지어짐.
- 사라져간 고려왕조를 애달파한 고려 유신들의 회고의 노래와 신왕조 건설에 적극 참여한 작가들의 찬양의 노래로 분화되어 있다.
* 조선 중기 시조의 특징
- 16c에 들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격화되는데, 이때 벼슬을 물러난 사림파들의 강호가가 유행.
- 황진이등 기생들 시조의 등장으로 담당층 확산의 경향을 보임.
* 조선 후기 시조의 특징
- 시조 담당층이 확산되었던 시기. 사대부들에서부터 시작하여 평민에까지 이름.
- 서민들의 현실적, 구체적 체험의 표현으로 소재와 주제가 다양해졌다.
- 서민의식이 주조를 이루는 산문정신의 부각으로 장형시조, 즉 사설시조가 많이 창작됨.
▶가사
1 시조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가 갈래로써 개화기까지 시기의 주조적 위치를 차지해왔음. 운문으로 된 수필이거나 교술 문학을 말함. 효시는 고려 나옹화상의 서환가, 조선 정극인의 상춘곡 등으로 나뉨.
2 종래의 시조나 경기체가는 형식상으로 제약이 많아서 생활감정이나 자연의 미를 자유로이 표현하기에 부족하여 가사가 많이 창작되었음.
3 3.4조 또는 4.4조를 기조로 한 4음보의 연속체 운문이며, 행의 수에는 제한이 없다.
4 전기 가사는 길이가 비교적 짧고(약100행), 후기에는 수천행(평민가사)에 이르며, 개화기 가사는 전기 가사보다도 더 짧다고 할 수 있다.
5 내용은
- 서정성이 강한 작품(상춘곡, 사미인곡).
- 실제적 사실과 체험을 기술하는데 치중한 것(연행가, 일동장가).
- 이념 교훈을 널리 펴기 위한 노래.
- 허구적인 짜임을 제대로 갖춘 서사적 작품.
▶개화 가사(開化 歌辭)
① 개념 : 개화 가사는 전통 시가의 한 형식인 가사체에 개화기의 새로운 사상을 담은 것이다.
② 형식 : 주로 4 4조 2행의 대구에다 후렴을 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길이가 현저히 짧아진 것이특징이다.
③형성 : 조선 후기의 천주교 가사나, 동학 가사인 최제우의 『용담유사(龍潭遺詞)』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④분류
㈀ 우국경세가류(憂國警世歌類) : 일본의 침략성과 친일 세력의 비리를 폭로, 규탄하는 내용이 많다. 대개 신문들이 논설조로
게재한 것으로 작자는 밝혀져 있지 않다.
㈁ 애국가류(愛國歌類) : 자주 독립과 애국, 신문명 신교육의 도입, 부국 강병, 국위선양 등을 주제로 당시의 독립 신문,
대한 매일 신보 등에 발표되었다.
㈂ 항일 의병 가사(抗日義兵歌詞) : 구한말과 국권 상실 후에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고 자주 돌립을 지키려는 의병들의 향쟁을 찬양,
고무한 내용이다.
⑤ 의의 :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사가 역사적 사명을 담당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고, 동시에 이 시기의
노래가 가사의 형식을 빌렸다는것은 한국 문학사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창가→신체시)
⑥ 작품
교훈가 1880 최제우 인간 평등의 주장이 잘 나타남 (4 4조)
애국하는 노래 1896 이필균 개화하여 애국하자고 노래함 (4 4조)
애국가 1896 이중원 문명 개화를 위해 합심 노력해야 함을 노래함 (4 4조)
동심가 1896 김철영 나라 사랑을 노래함 (4 4조)
▶개화기 소설
일반적으로 서구 열강의 침투와 그에 따라 개항이 시작되는 1870년대부터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되는 1917년 사이에 산출된 소설들을 통칭하는 말로 '신소설'까지도 포함하는 소설 유형이다. 이러한 소설들은 고대 소설과 근대 소설의 과도기적 형태로서, '개화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의 소설 형식이라는 점에서 엄격한 의미의 장르 개념은 아니다.
개화기 소설의 유형에는 첫째, 토론 문답체 소설로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 '거부 오해', '향로방문의생이라' 등의 작품이 있고, 둘째, 몽유록계 소설로 고대 소설의 몽유록 형식을 빌려 온 것으로서 신채호의 '몽견제갈량',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등이 있다. 셋째, 역사 전기 소설로 '을지문덕전', '비스마르크 청화', '의티리국 아마치전' 등의 작품들이 있으며, 넷째, 풍자 우화 소설로 '금수회의록', '만국대회록' 등의 작품이 있고, 다섯째, 신소설로 이인직의 '혈의 누'를 비롯한 '자유종', '은세계', '치악산', '귀의 성' 등 다양한 작품이 있다. 여섯째, 번안 소설로 '장한몽', '설중매', '해왕성' 등의 작품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신단 공안(神斷公案) 소설로 일종의 작자 미상의 재판 소설이 있는데, 주로 '황성 신문'에 연재되었다.
개화기 소설은 대개 미신이나 구습에 대한 배격과 사회 개혁적인 시각, 강한 정치성을 바탕으로 하는 풍자 의식과 비판적 관점을 지니고 있으나, 구성상으로는 고대 소설적인 면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백조≫지의 문학적 성향
《백조》는 1922년 1월, 홍사용,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박영희, 노춘성, 나도향 등을 동인으로 발족하였다. 애초에 격월간으로 계획된 것이었으나 3호에 그치고 만 순수문예동인지이며, 여기에 수록된 작품은 시·소설·수필·희곡·평론 및 해외작품 소개 등 두루 실려있어 종합문예지의 성격을 지닌 동인지라 하겠다.. 특히 당대의 시대현실 속에서 '자유'를 구가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나, 식민지적 현실의 암울함에서 오는 감상적 낭만성에 치우친 경향이 짙다가 점차 반성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발표된 작품은 소설보다는 시에 더 비중이 주어진 특징을 보였다.
《백조》의 시적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시인으로는 먼저 홍사용을 들 수 있다. 《백조》 창간호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백조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하나〉라는 글은 홍사용의 시적 경향을 잘 암시하고 있다. 이 글에 나타나는 '엇지노'라는 탄식과 비애의 관념 및 울음.눈물 등의 시적 소재들은, 이 글의 중심 내용을 이루어 애상적 센티멘탈리즘을 표출하고 있다. 또한 그의 여러 작품들을 살펴보면 환상적인 꿈과 사랑의 좌절, 그리고 그 속에서 빚어진 슬픔이 가져온 감정을 시의 전면에 알몸으로 노출시키고 있고, 실연의 비애는 시의 정서적 원천을 이루고 있다.
이상화의 시 또한 내용면에서 《백조》의 특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 <나의 침실로>에서 '동굴'과 '밤'의 이미지는 닫혀진 내면세계 안에 존재하는 환상적 공간으로의 도피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당대 현실의 어둠과 고뇌 그리고 허무와 절망의 몸부림이 그 두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 안서와 요한의 상징적 수법과 색채는《백조》기에 이르러 그 감상적 체질과 퇴폐적 요소가 '밤'과 '눈물' 그리고 환상과 도피라는 구체적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상화와 비슷한 각도에서 고뇌와 도피를 시도하고 있는 시인으로는 박종화가 있다. 박종화는 《장미촌》에 시 <우유빛 거리> <오뇌의 청춘>을 바료한 후 백조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백조》에 수록된 그의 작품은 <밀실로 돌아가다> <만가>(창간호) <흑방비곡> <춘의 소곡>(2호) <사의 예찬>(3호) 등이 있으며, 이상화의 경우처럼 그 시들은 밤과 어둠,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로 짜여져 있다. 그의 시는 '눈물' '밤' '밀실' 등 《백조》의 기본적 분위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퇴폐적 신비와 결합한 악마주의적 요소를 띠고 있다. 차라리 상징주의 시인 내지는 데카당에 가까운 듯한 월탄의 이런 유미성은 《백조》지의 또 다른 특성이 되고 있는 것이다. 월탄의 이러한 악마주의 역시 월탄 자신의 현실적 절망과 시대적 좌절을 극복하려는 환상적 초월의 자세였다.
이처럼 '밤'과 '동굴' 그리고 악마주의적 요소 및 애상과 눈물이라는 《백조》의 일반적 특징은 회월 박영희에 있어서도 예외적일 수는 없었다. 회월의 시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데카당적 유미주의의 경향이다. 그의 이러한 퇴폐적 악마주의적인 유미주의는 <환영의 황금탑. <월광으로 짠 병실> <꿈의 나라로> 등에서 훨씬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백조》동인 중에서 춘성 노자영은 조금 다른 각도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춘성의 시에서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초기시가 소박한 감상과 서정적 색채를 지니고 잇다는 점이다.《백조》의 다른 시인들이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내면적 세계의 어둠 속에서 병적인 감수성에 사로잡혀 있던 면모를 보였음에 비하여, 춘성은 소녀적인 감각을 통해 아직 현실의 빛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초기의 이러한 소박한 감정은 후기에 와서 당대 시단의 퇴폐적 기류와 《백조》동인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차츰 병적인 요소를 띄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 처럼《백조》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시인들은 현실에 대한 절망과 그로 인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내면 세계에 솟아올랐던 이미지들을 형상화하면서 현실의 구속적 억압으로부터 빠져나와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가 가져다 주는 자유로운 공간을 찾으려 했다. 비록 그들의 시가 서구의 낭만주의를 미숙한 수준에서 모방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실험과 모색이 가져온 시적 감수성의 확장은 우리 근대시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다.
▶1920년대의 시 : 자유시의 출발기
1910년대에까지 위력을 가졌던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시가 청산되고, 시다운 시가 등장한 1920년대의 시는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시의 정형시적 형태로부터 자유시로의 전환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또한 主情的인 시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둘째, 독립운동의 좌절로 인한 우울한 시대 의식과 비애 및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노래하는 영탄적이고 감상적인 경향을 띤 시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시대적 분위기도 물론이지만 서구 문학의 상징주의, 퇴폐주의 및 낭만주의의 영향이 또한 적지 않게 작용되었다. 주요한, 황석우, 오상순, 박종화, 김억, 이상화, 홍사용 등과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시인들이다. 특히, '백조'의 시인들인 이 상화의 '나의 침실로',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박종화의 '흑방비곡' 등은 눈물, 꿈, 죽음과 같은 감상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의 동경과 도취적인 몽환과 죽음의 미화를 주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에서도 이상화는 '나의 침실로'와 같은 감정의 노출과 반현실관을 드러내는 작품을 쓴 반면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와 같은 강한 현실 의식을 노출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세째, 경향파 또는 '카프'의 결성을 전후로 하여 강한 사회의식을 드러내는 시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문학은 시 자체의 독자성과는 관계 없이 지나치게 이념적 주장만을 강조한 나머지, 시로서의 성과도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째, 서정시의 면모가 확실하게 정립되게 되었다. 김소월과 한용운은 어떤 특정한 문학의 사조와도 관계됨이 없이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성과를 드러낸 서정 시인들이다.
김소월은'진달래꽃' , '산유화' , '금잔디', '가는길' 등의 시를 통해서 민요적인 서정의 情恨과 운율적인 가락이 조화된 시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독립 운동가요, 승려이기도 한 한용운은, 그의 시집 '님의 침묵<1926>'을 통해서, 존재와 정신의 지주가 되는 님이 떠나 버린, 침묵한 시대에 있어서 굽힐 줄 모르는 초극 의지와 희망에의 염원을 불교적인 발원과 교합시킴으로써 서정의 의연한 경지를 열어 놓았다.
기타 전통문학에 대한 관심은 김억 등의 민요적 서정과 함께 최남선, 정인보, 이병기, 이은상 등에 의한 시조문학의 계승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920년대의 문학은 근대적인 자아의 추구로부터 민족적 현실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시문학은 서구적인 근대시의 형태를 수용하면서 한국 근대시의 독자적인 형식을 추구하고 있다. 초기 시들은 감상주의에 빠져들어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현실적 상황에 대한 시적 인식을 확대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적인 운율의 발견을 통해, 한국 근대시의 시적 형식을 새롭게 발전시키고 있다.
▶1920년대 동인지
『창조』, 『폐허』, 『백조』등으로 이어지는 1920년대 초의 이른바 동인지 문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전 시기 문학과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젊은 유학생들이 '동인(同人)'이라는 형태로 집단을 형성하여 문학적 글쓰기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구별되는 특징은 없을 것이다. 그 글쓰기가 지니는 각각의 상이한 경향이나 수준들과는 무관하게 '문학·예술‥이라는 영역 내에서 집단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동인지 문학인들이 인적, 물적으로 충분한 자기 재생산구조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한적으로나마 자기 매체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문학에 몰두하고자 했던 행위는 그들이 식민지 조선에 독자적인 문학적 담론의 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 의해 추동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이 시기 동인지 문학에 참여했던 당사자들 사이에는 '시작(beginning)'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들 스스로 '새로움'을 표명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런 직접적인 표명보다도, 일단의 무리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감수성의 울타리 속에서 어떤 지향성을 갖는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자신들 나름의 언어규약을 새롭게 개시하고 있다는 데 대한 최소한의 자기의식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시문학파 특징
① 언어 예술로서의 시어에 대한 자각, 섬세한 언어의 조탁, 순수 국어 사용, 음악성 중시
② 목적 문학을 반대하는 독자적, 순수성을 인정하는 문학
③ 세계적인 문학에로의 지향, 해외 문학파와의 합류1930년대 본격 시단의 전개
▶순수 서정시 운동과 시문학파
시문학파(詩文學派)의 순수 서정(1930년대 초반)
1930년대는 1920년대에 다양하게 모색한 시적 결과를 계승하면서 현대시를 정립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프로 문학이 퇴색하고 순수 문학을 지향하면서 우리 시의 예술적 가치를 드높이는 데 힘을 기울인 시기라 할 수 있다.
1930년대에는 많은 시 동인지가 나와 시문학의 저변이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인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1930년 시 동인지인 '시문학(詩文學)'을 비롯하여 그 후신인 '문예 월간(文藝月刊)'(1931), '문학(文學)'(1934)이 나왔고, 이어서 '시원(詩苑)'(1935) 그리고 '시인 부락(詩人部落)'(1936), '생리(生理)'(1937) 등의시 동인지 내지 시 전문지가 속출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의 근대시는 전대와는 다른 '현대적'인 모습들을 지니기 시작한다. 1929년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하는 이른바 '해외문학파' 멤버들이 문단에 편입되면서부터, 문학 활동에 있어서 내용보다는 기법에 관심을 두는 일군의 시인들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들의 핵심은 단연 1930년에 출발하는 '시문학파'이다.
{시문학}은 1930년 3월 창간되었다. 이의 구성원은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김영랑(金永郞), 신석정(辛夕汀), 이하윤(李河潤) 등으로, 이 중 정지용과 이하윤은 상당한 경력을 가진 기성 시인이며, 박용철과 김영랑은 {시문학}을 통해 비로소 문단에 등장하는 신인이며, 신석정은 미미한 시작 활동이 {시문학}에 의해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은 재등단 신인에 해당한다. 이렇게 다양한 성격의 구성원들이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문학}은 그 내부에 하나의 공통적 특질을 형성하고 있었다. 10년대의 계몽시와 20년대의 목적시에서 보여 주었던 문학의 사회성을 배제하고 시 자체의 순수성과 서정성을 강조하는 순수 서정시 운동을 하면서 청신한 언어 감각과 아름다운 리듬을 통해 심화된 개인적 정서를 형상화하는 데 힘썼다. 그것은 10년대의 계몽시와 20년대의 목적시에서 보여 주었던 문학의 사회성을 배제하고 시 자체의 순수성과 서정성을 강조하는 순수 서정시 운동을 하면서 청신한 언어 감각과 아름다운 리듬을 통해 심화된 개인적 정서를 형상화하는 데 힘썼다. 이 특질은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시문학파'의 계보 속에서 일관되게 추구되어온 관심사였다. 박용철(朴龍喆)은 이론으로 시의 순수성을 강조했고, 김영랑(金永郞)은 맑고 투명한 정서를 청신한 감각과 다듬어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시의서정성과 음악성을 추구하였다. 특히 정지용의 작품들은 전통성과 모더니즘의 경향을 동시에 지양·극복하는 독특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대의 한국 근대시를 한 단계 뛰어넘는 괄목할 성과를 이루어 낸다. 이렇게 1930년대의 한국시는 바야흐로 '현대적'인 특징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그 개화의 모습은 1930년대 중반 무렵의 모더니즘 문학 운동에서 발견된다.
1920년대 문학이 감상과 퇴폐의 늪에서부터 시작되어 카프의 소용돌이를 겪는 중에도 우리의 시는 소월, 만해등 몇몇 시인들의 독자적 노력에 의해 면밀히 그 전통을 조금씩 수립해 나갈 수 있었다. 특히 1920년대 후반에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해외문학파'는 새로운 서구의 서정시를 번역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서정시의 소개는 당대 카프의 지나친 문학의 경향성에 대한 반발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여 박용철, 김영랑을 중심으로 한 <시문학>지(1930)의 순수서정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순수서정시적 기운은 실상 20년대 후반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한 정지용에게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다.
김영랑은 시의 음악적 구조성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것은 압운법과 음성 상징 및 청각적 이미지의 활용 그리고 방언의 섬세한 사용에 의해 시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다양한 수사법의 활용으로 시어의 수사적 가치를 발굴하고, 음악적인 표현구조에 의해 국업미를 순화함으로써 향토적인 리리시즘을 확립하였다는 점에 시사적 가치가 정립될 수 있다. 조밀한 언어의 탄주는 바로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문학파'가 30년대 초에 이룩한 탁월한 성과가 된다.
한편 <문예월간>으로 데뷔한 신석정도 새로운 서정의 한 변방을 개척하였다. 신석정의 시는 1920년대 육성적인 서정과는 달리 다분히 서구적인 목가풍의 서정을 형상화하였으며, 이러한 전원적인 서정은 한 시인의 지적 서정이나 김영랑의 향토적 서정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1930년대 서정의 질을 비옥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박용철은 김영랑과 시문학파의 주축을 이루었지만 창작시에서는 시적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시적 변용에 대하여> 등의 시론과 번역시에 더 장기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볼 때 시문학파는 정신과 방법에 있어 20년대의 시와 30년대의 시의 경계선을 뚜렷이 그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문학파의 공적은 두 가지 면에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참다운 시, 즉 순수한 서정시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들 수 있다. 1920년대의 시는 10년대의 시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들은 외국시에서 수입된 이론과 방법을 적용하는데 급급하였다. 그러나 시문학파의 경우는 심화된 정감을 한국적인 운율로 재구성하는 자각이 뚜렷했으며 청신한 감각적 표현을 위한 방법론이 있었다. 이는 외국시의 영향이나 모방의 자취가 현저했던 1920년대의 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문학파의 독창적인 자각과 의식은 시의 본성을 지키는 데는 물론 새로운 시야를 열게 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이들은 시어에 대한 자각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이들은 시가 마땅히 표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가장 적당한 표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주어진 주제에의 종속에서 해방되어 시인들은 폭넓은 자유 속에서 시적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적 언어를 다시 가다듬어야 했는데, 이것이 시문학파의 과제였으며 또한 큰 공헌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어는 현대시의 요구에 응하면서 본격적인 시어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점이 시문학파가 지닌 예술적 특성이며 현대시적 성격이라 할 것이다. 특히 김영랑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향토적 서정과 개성적 정감의 한국적 운율로의 재구성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태서문예신보
태서문예신보 -- 1918년 9월 26일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주간문예지. 타블로이드판. 8쪽내외. 발행인 겸 편집인 장두철. 창간 당시는 종합지 성격을 띠었으나 곧 문예 전문지로 바뀌었다. <소년> <청춘> 등의 신문학 초기 잡지와 <창조>로 시작되는 본격 문예지의 중간 성격에 위치했던 잡지이다. 주로 소설,시, 수필, 시론 및 번역 작품이 수록되었다. 소설에는 장두철의 <사상의 충돌> <오분의 꿈>, 이일의 <후회>, 작자미상의 <낙화> 등과, 월터 빈센트의 <사랑>, 코넌도일의 <충복>, 모파상의 <고독>, 투르게네프의 <밀회>등 번역 소설이 실렸다. 한편 시에는 김억의 <봄> <믿으라> <봄은 간다>, 장두철의 <아버지의 선물> 등과 백대진, 이일, 최영택, 구성서, 이성태, 황석우 등의 작품, 번역시에는 김억 외에 장두철, 김인식 등이 번역한 베를렌, 예이츠, 아나크레온, 구르몽, 롱펠로, 에머슨 등의 작품이 실렸고, 김억이 번역한 시론 <프랑스의 시단> <시형의 음률과 호흡> 등이 수록되었다. 이 잡지는 신문학사상 최초의 반시지(半詩誌)로서 종래의 잡지들에 비해 수록된 작품의 시적 진보 및 산문시의 등장, 시론의 도입, 번역시의 소개 등으로 초기 한국!
시단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김억과 황석우의 시는 <창조>지에 발표된 주요한의 <불놀이>보다 앞선 최초의 자유시 형태를 보여 주고있어 주목할 만하다. 19년 2월 17일 통권 16호로 종간되었다.
▶1930년대 본격 시단의 전개
시인부락과 생명파
1930년대 후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30년대 초의 시문학파의 순수서정시 운동과 그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모더니즘 시운동은 다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에 의한 도시문명과 기계주의의 감각적 도식화는 필연적으로 인간주의적인 반작용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일어난 30년대 후반의 두 흐름은 생명파적인 것과 전원파적인 것을 추구하는 두 경향으로 대별된다. 인간 생명의 원상을 되찾으려는 몸부림 속에 인간 회귀를 주장하는 시적 경향 즉 생명파는 1936년 발간된 <시인부락> 동인들과 유치진에 의해 주로 전개되었다.
서정주의 시는 인간의 원죄적 업고와 숙명성에 대한 저주와 자학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몸부림을 원색적인 시어로 표현하였다. <화사>를 비롯한 <문둥이> 등 초기작이 대부분 가혹한 운명과 생명에 대한 치열한 도전과 그에 따른 패배와 절망을 노래한 것이다. 이러한 서정주의 시편들은 모더니즘의 기계화와 감각화에 직접적으로 저항하고 반발하여 인간 생명의 체온을 회복하려는 안간힘을 반영한 것이다. 유치환의 시도 험렬한 시대를 알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시는 북만주의 살벌한 풍경을 배경으로 강인한 대결의식과 생명의지를 집중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생명파라는 한 흐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정주와 유치환의 시는 시대적 불행과 운명적 업고를 알몸으로 수용하여 인간적인 문제와 생명적인 연장의 탐구에 주력한 것이다.
▶김유정의 작품 세계
김유정의 작품 세계는 작가 자신의 실제 생활 내지 주변 인물들의 생활상과 밀착되어 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방탕한 형의 억압된 분위기에서 자랐다. 장성하여서는 폐결핵과 가난에 시달리면서, 소박맞아 온 누이에게 얹혀 살기도 했다. 고향에서 들병이들과의 무질서한 생활, 모처럼 손대었던 금광의 실패, 실연(失戀) 등 김유정의 주변에서 일어난 상황들은 그로 하여금 작품 속에다 해학 뒤에 괴어 있는 일말의 애수(哀愁)를 새겨 놓도록 만든 것이리라.
형의 방탕으로 가산이 몰락하고 가난에 쪼들리는 자기의 처지를 그린 "형", "연기", "따라지", 금광에 손댔다가 실패한 경험과 관련된 "금", "금 따는 콩밭", 시골 들병이들과의 어지러운 생활을 그린 "솥", "총각과 맹꽁이", "산골 나그네", "아내" 등에서 김유정의 자화상을 본다.
이 같은 김유정의 소설에서 파악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향토성
김유정 소설의 배경은 대체로 산골 농촌이다. "소나기", "산골", "만무방", "산골 나그네", "동백꽃", "가을", "봄·봄" 등이 그런 작품이다.
김유정의 소설의 향토성은 작가의 체취다. 김유정이 강원도 춘성군 실레 마을 산골 출신이기 때문이다.
(2) 해학성
김유정의 소설에는 한국적인 특유의 해학이 스며 있다. "봄·봄"은 해학성을 띤 대표적인 작품이고, "아내", "총각과 맹꽁이", "땡볕"에도 애수 어린 해학이 깃들여 있다.
(3) 풍자성
김유정 소설 도처에 스며 있는 해학은 단순한 소극(笑劇)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전통적인 해학에 접맥되어 있으며, 그것은 또한 풍자성을 동반한다.
김유정의 소설의 풍자성은 1930년대 우리 소설의 한 경향과 흐름을 같이 한다.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태평천하" 등도 함께 공부할 문제다.
(4) 인물의 우직성(愚直性)
김유정 소설의 인물 가운데는 소박하고 우직한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점순이 키만 크면 성례시켜 준다는 교활한 장인에게 속아 사는 "봄·봄"의 주인공, 다 자란 콩포기를 뽑아 내고 금을 캐내려는 "금 따는 콩밭"의 주인공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타산적인 전달형 사내'나 '야무지고 외향적인 여인'이 등장하는 작품도 있다.
▶이효석 - 작가적 세계와 사상적 세계를 중심으로
1.서론
효석이 30년대의 대표적 작가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서정적 미감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우리에게 받아들여진 나머지 그의 작가적 세계, 혹은 사상적 세계에 대한 면이 상대적으로 외면당해왔다.
작가를 완전히 떠나서는 작품의 이해와 분석, 평가가 완전할 수 없고 반면 작가의 의도, 사상들을 연구하는 것은 작품의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번 연구에서는 효석의 서정성 또는 문체의 심미성을 다루기보다는 효석의 작가적 세계와 사상적 세계에 비중을 두고 그의 작품과 삶을 살펴보도록 하자.
2.본론
가.순응주의
1.동반자 작가로서의 순응주의
효석은 단편 <도시와 유령>(1928)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이어서 <기우>(1929), 행진곡(1929), <깨뜨려지는 홍등>(1930) 등을 발표함으로 그는 동반자 작가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의 첫 작품집인 <노령근해>를 살펴보면 모든 단편들이 카프와 경향을 같이 하는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동반자적>이라는 말을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한다. <동반자적>이라는 말에는 크게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작가 자신은 좌익사상에 동조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 든지 단체에 가입을 하지 않고 작품에 담긴 내용과 사상으로 좌익사상에 찬동을 표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작가의 사상은 좌익이 아니나 작품의 성향이 카프와 유사성을 보이는 것을 구실로 카프가 자체적으로 동반자적 작가라고 규정짓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효석의 경우를 작품에서 드러나는 내용을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자.
<도시와 유령>은 도시 빈민들의 삶을 그려봄으로써 사회를 고발해보려는 의도로 쓰여진 작품으로 <현명한 독자여! 무엇을 주저하는가. 이 중하고도 큰 문제는 독자의 자각과 지혜와 힘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라는 주인공-효석자신일지도 모른다- 이 부르짓는 구호로 끝을 맺는다. <행진곡>역시 <생각보다는 행동하자! 나가자! 일하자!>라는 구호가 들어있다. 이러한 어설픈 외침들이 독자에게 투쟁의 의지를 고양시킬것이라고 생각했 다면 그것은 효석에게 이데올로기의 절실한 체험과 사회 모순 극복의 의지가 결여되어 나타나는 생각일 것이다. <북국점경>(1931)에서는 경향적인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나기 보다는 서구에 대한 선망과 여성의 미에 대한 관심들이 사회비판, 운동 등의 주제와 얽혀서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없는 작품이 되고만다. 즉 미의식과 동반자의식 사이에서 불성실한 곡예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보아 효석의 동반자 작가라는 칭호는 두번째 경우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곧 효석의 사상은 좌익사상과는 거리가 있고 카프의 문학과도 거리가 있는것이다.
또 한가지 그의 경향적 문학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효석의 운명관이다. 카프의 운명관과 소위 부르즈와 문학의 운명관을 단적으로 표현하지면 같은 빈궁을 제재로 취급했으면서도 원인을 운명 또는 불가항력적인 어떤것으로 받아들이면 부르즈와문학이고 운명과는 상관없는 사회의 모순이 원인이라 규정하면 프로문학이 되는 것이다. 효석의 운명관을 살펴보면 다분히 운명은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을 항상 그렇게 꾸며놓은 우주의 의지의 죄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우>
흐르고 흘러서 - 이것이 그나 우리나 피차의 운명인 것이다. <기우>
위에서 보이는 것 처럼 효석의 운명론은 카프의 운명론과는 전혀 다른것 임을 알 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효석의 프로문학에 대한 관심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이지 결코 관념의 구체적이고 행동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그의 프로문학에 대한 모방은 카프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순응한 내적 필연성이 결여된 앵무새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문단 출세의 방편과 당시 시류에 휩쓸려 동반자적 태도를 지녔다가 카프의 퇴조로 새로운 변신을 하였다. 따라서 그의 동반자작가라는 칭호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2. 도피한 탐미주의자로서의 순응주의
1933년을 기점으로 하여 효석의 문학의 경향은 변모한다. <돈>(1933), <가을과 서정>(1933), <분녀>(1936), <들>(1936)등을 잇따라 발표한 후 신념없이 프로문학의 시류에 순응하던 순응주의자는 자연, 성에 대한 탐닉자로 변모했다.
당시의 사회상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던 시대였다. 그리하여 문인들 역시 많은 탄압을 받는다. 그래서 이상이 섹스에 세계로 도피하고 유진오가 먼 과거의 금잔디 동산으로 도피하고 김유정 역시 목가적인 풍경을 찾아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 처럼 이효석 역시 옛날의 목가적인 고향 산천에 돌아가고 거기서 남과 여가 서로 만나 벌거벗고 뜨겁게 만나는 에로티시즘의 달콤한 액체 속에 용해되어 들어갔던 것이다.
효석은 반사회적이고 반문명적인 태도를 지닌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극복의지는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자연과 성을 개인적인 도피의 수단으로 삼았다. 즉 그의 후기작품은 사회에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지적으로 처리하기를 회피하고 직선적 망각으로 달려가는 것이 그가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리고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는 반사회, 반문명을 작품속에서 외치지만 그의 사상은 또다시 당시의 사회에 순응해버렸다. 문명의 요란스로움과 찌꺼기를 개탄하지만 그자신은 누구보다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그의 삶에서 몇가지를 살펴보자.
서울 갔던 길에 날채로 사온 한 폰드의 모카가 아직도 통속에 많이 남은것이
속 든든히 생각된다. 파아코레이터를 사용하니 넣은 가수의 분량만 아끼지
않으면 거배의 진미가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 <단상의 가을>(1933)
서재에 있던 피아노는 '야마하'였고 음악을 좋아하는 제자나 친구들이 오면
즐겨 쇼팡을 치시곤 했다. <효석의 둘째딸 회고록 중>
위의 내용으로 보아 효석의 생활은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이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그의 문학에서 필연성이 없는 헛된 구호만이 발견될 뿐인 것이었다. 또한 효석은 그당시의 도덕관에도 반기를 들었다. 작품속에서 그는 몰도적적인 데카당스 풍조에 심취해있는 듯 하다. 그의 도덕관을 <화분>(1939)을 통해 살펴보자. 이 작품에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관계에 대한 서술이 있고 당시 민중의 삶과는 전혀 유리된 고급스런 향락의 삶이 있고 서양에의 동경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결말을 보면 그들의 방종과 향락에 대한 댓가는 일가의 파멸이다. 즉 효석의 도덕관은 겉으로는 당시 사회에 반기를 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단시 사회의 도덕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즉, 효석은 기존의 사회에 반기를 든것 같다. 하지만 그 겉면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실은 스스로 사회에 안주하여 자신을 사회에 다시한번 맡기는 것이 그의 내면의 모습인 것이다.
3. 효석의 현실에 대한 관점
효석이 현실을 보는 관점은 현실을 탐구하여 옳은 쪽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는 볼 수 없고 자연, 신, 이국에의 동경 등을 통해 현실을 숨기려는 입장이었다.
라. 단편연구
효석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어떠한 경향의 작품만 살핀다면 그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연구에는 그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갈래로 나누어 생각하기로 한다.
- 초기 경향적 작품 (1928-1931) : <마작철학>
- 변모 과도기의 작품 (1932-1933) : <오리온과 능금>
- 자연과 성으로 도피기의 작품 (1933-1942) : <분녀>
▶유진오
유진오(兪鎭午 1906-1987) 소설가. 법학자. 서울 출생. 호는 현민(玄民).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재학 때부터 문우회를 조직하여 활동. 이 무렵 그는 이효석과 함께 카프에 가입하지는 않은 채 프로 문학의 입장을 취하여 '동반자 작가(同伴者 作家)'로 불림. 1927년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고 등단. "오월의 구직자", "김 강사와 T교수" 등은 지식인이 당면하는 정신적 갈등, 또는 가난에 허덕이는 하층민의 삶을 주로 그리고 있으며, "어떤 부처", "치정" 등에는 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급으로 일하는 주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외에 "창랑정기", "화상보" 등이 있다.
- 등단 이후 동반자 작가로서의 활약
1927년 유진오는 좌경적인 종합 잡지『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소설 「복수」「스리」「파악(把握)」과 희곡 「피로연」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프로 문학 작가들과 알게 된다. 이 해 이효석도 문단에 데뷔하여 둘은 갑자기 친해지는데, 그 뒤로 함께 동반자 작가라 불리며 활약한다. 1934년 프로 문학 단체인 카프가 해체되자 유진오는 동반자 작가로서의 경향을 벗어난다. 지식인 문제를 다룬 「김강사와 T교수」(1935), 과거 회고조의 「창랑정기(滄浪亭記)」(1938)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김동리와 순수 세대 논쟁을 벌여 평론가로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채만식(보충)
채만식은 1902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의 고난속에서 살다 간 한국 근대문학사상 최대의 문제적인 작가이다. "동아일보", "개벽", "조선일보" 에서의 짧은 기자생활을 거쳐 생애의 대부분을 창작생활에 바친 그는 120여편에 달하는 장,단편소설과 희곡 및 수많은 평론, 수필작품을 남겼다. 그는 날카로운 현실비판 정신과 특유의 풍자, 반어, 역설의 수법으로 "탁류, 태평천하, 금의 정열 등의 중요한 작품을 잇따라 발표해 식민지하의 민족적, 사회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졌고, 해방 직후에는 질병과 환난 속에서도 "논이야기", "도야지", "민족의 죄인" 등을 통해 당대 현실을 증언하는 예리한 필봉을 휘둘렀다. 1950년 6월폐결핵으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가 남긴 전작품은 우리 문학사상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룬 위대한 업적이며, 민족의 귀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동인
김동인은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 근대소설의 개척자요 선구자였다. 김동인은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造를 창간하고 이를 통하여 5가지 분야를 개척했다고 조연현은 말한다. 첫째는 구어체 문장을 확립하고 둘째는 구체적 문예운동을 전개하고 셋째는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순문학 정신 및 근대 사실주의를 도입하고 넷째는 근대적 단편소설을 개척하고 다섯째는 근대적 문예비평을 개척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김동인은 자신의 소설에서 구어체 문장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주장하며 그 구체적 특징으로 첫째는 '-더라', '-이라'등의 구투에서 탈피. 둘째는 현재법 서사체에서 과거법 서사체로 개혁. 셋째는 대명사 '그'의 사용. 넷째는 사투리의 처음 사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조연현은 김동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이러한 계몽주의에의 거부가 사조상으로는 사실주의를 조성시키는 방향이 되었고 근대소설의 확립과 함께 문학의 기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술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김동인도 계몽기의 문학의 넓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김동인의 문학사적 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근대적 단편소설을 처음으로 개척했다는 점이다. 그의 '배따라기'는 근대 단편소설로서의 기본적 형태를 구비한 한국 소설사상 단편소설의 최초의 한 규범을 보여준 작풍이었다. 김동인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공적은 그가 근대적인 문학비평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전대 혹은 이광수의 목적문학에 반대. 문학의 예술성과 구조를 논하는 형식주의적 비평의 길을 개척하였다
▶채만식의 문학과 풍자에 대하여
풍자(諷刺)란 글자 그대로 풀이해 보면 '바람결[風]에 실려 오는 말[言]을 찌른다[刺].'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인간과 그들이 만든 여러 제도의 약점을 자각하고 웃음을 통하여 그것들을 분쇄 또는 개선하기 위해 비판하는 것'인데, 한 마디로 말해서 잘못된 것을 꼬집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의 공통점은 둘 다 직선적이지 않고 우회적이라는 데에 있지만 풍자와 해학은 엄격하게 다르다. 해학은 인생의 모순과 세상의 비속함을 보고 웃지만 결국에는 인생이란 축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며 냉소적이기보다는 관조적인 태도를 취한다. 반면에 풍자적 태도는 해학과는 달리 개혁의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풍자가 불안정한 사회에서 솟아나는 웃음이라면, 해학은 안정된 사회에서 솟아나는 웃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풍자는 대상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비판 정신의 소산이다. 정면에서의 비판이 아니라 대상의 부정적인 면을 은근히 들추어냄으로써 충격 효과를 노리는 방법인 셈이다. 기지, 조롱, 아이러니, 비꼼, 조소, 냉소 등이 이를 위해 동원된다.
그럼 '풍자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시대의 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모순과 불합리성을 조롱, 멸시, 분노, 증오 등의 여러 정서상태를 통해서 독자를 감동시켜 이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사회적 문학 양식이다. 풍자는 어리석음의 폭로, 사악함에 대한 징벌을 주축으로 하는 기지, 조롱, 반어, 비꼼, 냉소, 조소, 욕설 등의 어조를 포괄하므로, 문학의 어느 갈래에서나 자가가 전개하는 논의나 교훈이 선행하게 된다. 풍자문학은 유개념의 갈래에 포괄되는 하위 개념의 갈래이며, 한국 문학에서는 풍자 소설, 풍자극, 풍자시 따위의 명칭으로서보다는 가전체 설이나 의인화 소설, 실학파의 소설과 탈춤, 판소리, 인형극, 하층민의 민요의 넓은 영역에 걸쳐서 나타났다.
채만식의 풍자 문학은 주로 아이러니를 사용하는데 그 아이러니는 언제나 부정적인 인물을 소설의 전면(前面)에 내세우고 긍정적인 인물을 후면(後面)에 둠으로써 얻어진다. 부정적인 인물들은 긍정적인 인물보다도 더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으며, 긍정적인 인물들은 부정적인 인물들의 조롱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민족 수난기의 문학
1. 시대 개관
1910년대는 주권이 상실된 시기로 계몽적 성격의 문학으로 출발하여 후반기에는 순수 문학이 등장하였다. 20년대 들어 일제의 문화 정책에 편승, 동인지를 중심으로 시 제작이 활발하였으며, 계급 문학과 국민 문학의 대립으로 문학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30년대와 40년대 초는 일제의 사상적 통제가 강화되어 사회 의식 대신 자연이나 현실 풍자적인 문학 경향을 띠었다.
2. 갈래별 개관
(1) 현대시
김억과, '불놀이'의 주요한으로부터 1910년대의 현대시가 출발하여 1920년대는 홍사용, 이상화 등의 감상적 낭만시와 황석우, 오상순의 상징시,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인 '국경의 밤', 한용운의 불교적 연가풍의 '님의 침묵', 전통적 정서를 계승한 김소월의 민요시 등이 발표되었다. 1930년대에는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등이 순수시를 발표하였고, 김기림, 김광균, 장만영의 주지시, 이상의 초현실주의 시가 주목을 받았다. 30년대 후반에는 서정주, 유치환 등의 생명파 시인이 등장하였고, 또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의 청록파 시인이 등장하여 자연 친화적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노래한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도 등장했다.
(2) 현대 시조
1920년대 최남선, 이병기, 정인보, 이은상 등이 활약하였으며, 3,40년를 거치면서 이호우, 김상옥 등이 맥을 이어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3) 현대 소설
이광수의 '무정'을 출발로 20년대 들어 자연주의 기법의 김동인, 식민지 지식의 고뇌를 그린 염상섭, 사실주의를 확립한 현진건 등이 활약하였으며, 그 밖에는 전영택, 나도향 등이 활동하였다. 빈곤을 비롯한 사회 문제를 다룬 최학송의 경향 소설과 카프의 결성과 함께 계급주의 소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30년대에 와서는 판소리 풍자 소설의 채만식, 심리주의 소설의 이상, 자연과 애정으로그린 이효석 등이 활약하였다. 또 김유정의 토속적이고 해학적인 농촌 소설이 발표되었고, 토속적 샤머니즘의 세계를 그린 김동리의 소설도 등장하였다.
(4) 현대 희곡
20년대는 극예술 협회와 토월회를 통해 김우진, 박승희, 이서구, 윤백남 등이, 30년대는 극예술 연구회를 중심으로 유치진, 김진수, 주영섭 등의 작가들이 활약하였다.
(5) 현대 수필
1910년대와 20년대는 최남선, 이광수의 서사적 기행 수필이 주류를 이루었다. 30년대의 '신록예찬'의 이양하, '매화찬'의 김진섭 등에 의해 독자적인 갈래로 영역을 확보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문학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되고 문학에 대한 사상적 탄압이 자행되기 시작하면서 1920년대 이 후 한국 문학의 주조를 형성하고 있던 집단적 이념 추구의 경향이 사라지고 개인적 정서에 기초한 순수 문학의 다양한 경향이 뚜렸하게 등장하고 있다.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시문학(詩文學)' , '시인부락(詩人部落)' , '자오선(子午線)' , '삼사문학(三四文學)' . '단층(斷層)' 등의 시 동인지가 발간되면서 동인 활동을 중심으로 창작에 참여하는 문인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고, '극예술 연구회'를 중심으로 연극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된다. 1930년대 말기에 간행된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은 순수 문학 잡지로서 문학 활동의 중요한 매체가 되어, 많은 신인들을 배출하고 중요 작품들을 널리 수록하고 있다.
'구인회(九人會)'는 소설의 영역에서 순수 문학의 기반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고, 시 동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시의 모더니즘적 경향이 자리잡게 된다. 이 무렵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본격적으로 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이 해외 문학에 대한 소개도 활발하게 함으로써, 문학의 경향이 더욱 다채롭게 전개된다.
1930년대 말기에는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견해차이로 인해 '순수문학논쟁'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상반된 문학관에서 발단한 것이었으며, 표면적으로는 세대론이 핵심을 이루고, 내면적으로는 순수성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