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북한에 대해 강경 발언을 고수하던 그와 그의 측근이 2003년 도쿄와 베이징에서 북한 측 대리인과 부적절한 협상을 벌인 사실이 공개됐다.
■ 대북 강경파 아베 신조는 왜 북측 협상 대리인 최수진 씨를 만났나?
■ 협상 과정에서 “(대북)경제제재 동의하지 않는다”고 유화 제스처를 쓴 이유는?
■ 협상에서 아베 측은 최수진 씨에게 5,000만 달러 대출을 약속했나?
아베 신조(安倍晋三·50) 자민당 간사장대리가 한 남자와 팔짱을 끼고 웃고 있다. 그는 중국교포 최수진 씨. 그는 6·15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막후에서 움직인 북한 측 대리인으로 한국에서는 꽤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간략한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현재 나이 55세.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 하지만 그는 북한 출신 양친에게서 태어난 조선족이다. 폐품 수집업으로 사업을 시작해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개방을 타고 사업을 크게 일으켜 하얼빈에 대규모 민족호텔을 지었고, 제철업체를 경영했던 인물. 중국교포 가운데 헤이룽장성을 대표할 만한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혔지만 대북한 거래대금을 못 받아 자금난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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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간사장대리와 최수진 씨가 함께 찍은 사진은 지난 5월31일에서 6월7일까지 일본 <주간현대> 취재팀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던 필자가 평양에서 직접 입수한 것이다. 당시 북한 정부 당국자가 이 사진을 제공한 데는 분명 아베 신조라는 대북 강경 노선을 펼치는 일본 정치가를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고, 북한 당국자도 굳이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아베의 편협한 내셔널리즘은 북·일 국교정상화에 방해가 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로서도, 일본인으로서도 위험한 인물이 아닌가?”
최수진이 정리한 아베 측 교섭 기록들
북한 당국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A4 용지 크기에 기록된 자료들을 제공했다. 나머지 사진에는 아베와 최수진 말고도 다른 몇 사람이 더 등장한다.
필자는 아베 신조가 지난해 1월 내각 관방 사무관을 지낸 이노우에 요시유키(井上義行, 아베 신조 관방장관 시절 비서 역임)를 평양에 밀사로 파견해 북·일 교섭의 창구를 자신으로 일원화하기 위한 ‘이원외교’를 펼쳤다는 사실을 <오마이뉴스>와 일본의 <주간현대>에 폭로한 바 있다. 지난 2월이다.
아베 간사장대리 측은 이 보도에 대해 “북한 쪽과 접촉한 적이 없다”고 전제하고 “(필자가) 북한 김정일의 공작에 놀아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하는 자료들은 아베 간사장이 직접 북한 측과 접촉한 것을 밝히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다.
사진 한 장. 얼굴의 주인공은 아베 신조와 최수진. 찍힌 날짜는 2003년 8월17일. 평양의 당국자는 필자에게 이 사진을 건네주면서 “아베가 최수진이라는 북한의 파이프 역과 접촉해 일본정부와는 별도로 대북 외교 창구를 독점하려고 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노우에를 북한에 보내기 약 5개월 전에 아베는 별도 루트를 통해 북한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2년 9월 북·일정상회담을 실현하고 납치자 가족 5명을 귀국시켰다. 하스이케 가오루, 유키코 부부 등 5명의 납치 피해자 가족이 도쿄(東京)의 하네다 공항에 들어왔을 때 일본 전체는 북한이 일으킨 납치사건에 대한 분노 일색으로 뒤덮였다.
북한 당국자는 또 다른 자료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베는 납치 피해자 5명의 가족을 일본으로 데려간다고 하는 대북 외교의 공적을 독점하려고 최수진과 회담을 했다. 그 증거물로 우리는 최수진이 작성한 당시 회담 내용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당신들은 아마도 아베 측이 북한에 약속한 내용에 놀랄 것이다.”
당시 최수진 씨가 정리해 북한정부가 보관해 온 아베 측의 북조선에 대한 교섭 내용 기록을 보자.
2003년 8월16일 오후 2시. 중국국제항공(CA) 925편이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는 최수진 씨다. 공항에서 3명의 남자가 그를 맞이했다. 일행은 도쿄 우치사이와이초(內幸町)에 있는 제국호텔로 향했다.
최씨 이외의 3명은 어떤 사람들일까? 파일에는 실명이 기재돼 있고, 특히 한국의 새천년민주당 이정일 의원이 포함돼 있다. 이밖에 ‘인터·로비 - 일한정경연구회 대표회장’ 박광 씨, 그리고 아베 신조의 공설 제1비서 이쓰카가 등장한다.
이들의 면모를 알아보기 전에 회담 당시의 정황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최수진 씨와 이정일 의원은 이날 제국호텔에 투숙했다. 북한이 제공한 기록에는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9층의 이정일 의원 방에서 회담을 한 것으로 돼있다.
다음날인 8월17일, 이들 4인은 아베가 준비한 자동차로 이동했다. 자료에는 ‘일본의 명승지인 후지(산)에 도착’이라고 쓰여 있고, 북한 정부 당국자는 “최는 아베의 별장으로 초대되었다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납치 피해자 송환하지 않아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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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우선 납치 문제를 국민이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북조선과의 사이에 무역 등 협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양국 간의 수교가 실현되면 배상 문제, 경제 협력은 당연히 크게 진전될 것입니다.
최: 그렇다고 한다면 북조선으로서 생각해야 할 순번은 우선 납치 문제의 해결이고, 다음에 양국 간의 수교가 실현되고,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경제협력을 받아라 이 말이지요?”
아베: 그렇습니다.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측도 약속을 지켜 일본에 귀국한 납치 피해자 5명을 북조선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전용 비행기를 평양의 순안공항에 보내 납치 피해자의 가족과 만나게 해 납치 피해자가 어느 나라에 살면 좋은가 선택하게 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피해자 본인들이 일본에 영주하겠다는 의사가 있어 말이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최: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경제 협력은 가능합니까?
아베: 핵 문제는 6개국 협의에서 말해야 하는 것으로, 일·조(북·일) 간에 수교가 되면 핵 문제와 관계없이 경제 협력을 진행합니다.
최: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다시 한번 당신의 의견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베: 경제 협력은 가능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미국의 얼굴색을 살필 마음도 없습니다.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의 관계는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대단히 밀접한 관계로, 그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깊습니다. 고이즈미 총리의 의견을 부시 대통령이 대부분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6개국 협의 석상에서 일본은 핵 문제에 대해 미국과 함께 강한 태도로 북조선에 압력을 가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 제재에 우리 일본은 분명하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북 강경 발언은 ‘진심이 아닌 발언’”
이것을 외교상의 전략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지난해 11월 아베는 한 강연회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제3회 북·일 실무자협의를) 열어 봐야 할 것은 없었다. 그들(북조선)에게는 기본적으로 압력 말고 효과가 없다. 경제 제재를 발효할 시기가 오고 있다.”
그 아베가 극비회담에서는 북조선에 대한 경제 제재라는 카드를 꺼내지 않겠다고 단언한 것이다. 아베의 말은 다시 이어진다.
아베: 납치 문제는 일본의 정치가로서 빠른 시기에 해결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일본도 납치 피해자 5명을 북조선에 돌려보내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 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정치가로서 국민의 의견을 최대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납치 문제만 해결되면 핵 문제와 관계 없이 북·일 간의 수교, 그리고 경제 협력을 진행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식사를 겸해 이뤄진 회담은 2시간 남짓 이어졌다. 이때의 모습은 다른 사진에서도 나타난다.
다음날인 8월18일, 아베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쓰카를 포함해 4명이 제국호텔의 이정일 의원 방에서 회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 행해졌다. 북한 고위당국자에게 전하는 아베의 친서가 작성된 것이다. 이것은 박광 회장이 대필했다고 한다. 37페이지 전문을 게재한다. 번역하면 이렇게 쓰여 있다.
“○○○ 선생에게. (전략) 인사를 생략합니다. □□□씨(편집자주 : 실제는 최수진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가 내일(來日)해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다각적으로 건설적인 말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부터 서로 의견 교환에 대해 ○○○씨에게 전하기 때문에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총총. 일본정부 내각관방 부장관 아베 신조 배상. 2003년 8월18일.”
이 친서는 필적감정을 의뢰한 결과 서명을 포함해 아베가 아닌 다른 사람이 썼다는 결과가 나왔다. 북한 정부 당국자가 말한 대로 박 회장이 쓴 것인지 모를 일이다. 최씨는 친서를 휴대하고 이날 오후 2시55분 CA 926편으로 베이징(北京)으로 귀국했다. 이 회합에 참석한 이들의 신상은 다음과 같다.
▷이정일 = 한국 야당 의원. 전라남도 출신으로 한양대를 중퇴했다. 1992∼2000년까지 신문사 <전남일보>의 사장,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2000년의 선거에서 해남·진도선거구에서 당선해 현재 민주당 중앙위원을 맡고 있다.
▷박광 = 이 인물에 대해서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주간현대>가 공식적으로 검증한 증서를 통해 확인한 결과 본명은 박재두로, 대표취재역 회장을 맡고 있는 <인터·로비 - 일한정경연구회>는 주식회사로 되어 있지만, 명함에 쓰인 주소로 법인 등기된 흔적은 없었다. 또한 박씨가 외부에 나눠 준 아베의 ‘외교고문’이라는 직함이 들어간 명함을 입수했는데, 아베 측은 “(아베의) 외교고문은 과거는 물론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회답했다.
▷이쓰카 = 죽기 직전의 아베 신타로를 도왔으며, 신조 대(代)가 되어서도 비서를 맡고 있다. 아베가의 일을 도운 지 약 20년 된 베테랑이다. 북한 파일 속에서는 이쓰카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아베의 대리를 맡을 정도로 아베의 신임을 받고 있다. 아베보다 먼저 이쓰카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고, 조국에 유리하게 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아베와 북조선 고관이 만나는 것이 좋다”
세 사람의 회담은 계속됐다. 최씨가 중국으로 돌아간 뒤로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회담에서는 아베 측과 북한 쌍방의 목적이 확실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무대는 베이징으로 바뀌었다. 파일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일시: 8월25일 오전 8시 반 ∼ 11시 반
▷참가자: 최수진·박광·이쓰카
▷회의의 목적 : 조·일 비공식 회담을 실현하기 위한 쌍방의 입장을 확인하고 회담의 기초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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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와 최씨가 상정한 비공식 회담의 형식은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총서기의 친서를 교환한 토대에서 갖는 것으로 하고, 의제는 ▷납치 문제 ▷쌀 지원 문제 ▷국교 수립 문제 ▷경제 협력 문제 등 4가지로 되어 있다.
다음은 다시 대화록.
이쓰카: 아베로부터의 전언이지만, 아베는 일본의 정치가로서 이전에 진심이 아닌 발언과 행동을 하고 말았지만, 이것에 대해 사죄하려고 합니다. 납치 피해자의 가족 8명을 일본에 부르는 것이 목적이고 최우선의 과제이며 국민 감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하스이케, 지무라, 소가 히토미의 가족이 귀국한 것은 지난해 5월, 7월의 일이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이쓰카가 그동안 아베의 북조선 관련 강경 발언에 대해 북한 측에 사죄의 입장을 밝혔다는 점이다. 뿐만이 아니다. 대화록에는 아베 측의 ‘외교 행태’가 북한 쪽에 아부하는 일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쓰카: 납치 문제에 관해 최초로 납치 피해자 5명을 되돌려보낸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해 김정일 장군의 체면을 상처받게 했다. 일본 측에서 어떻게 하면 체면을 되살릴 수 있는 보상을 할 수 있는지, 북조선 측에서 제안해 주었으면 좋겠다.
최: 대단히 좋은 제안이다. 북조선 측에 전달하겠다.
이쓰카: 아베가 북조선에 대해 나쁜 내용의 발언만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만에 하나 악의가 있는 발언이 진짜였다면 왜 아베가 일본에서 당신과 만나고 또 내가 베이징까지 만나러 왔겠는가? 일정한 환경에서 국민 대신 발언하는 것은 정치가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 좀 전에 체면을 보상해 준다고 하는 제안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쓰카 : (비공식 회담이) 실현되면 대부분의 일이 해결된다. 고이즈미 총리로부터의 친서에 대해서는 내용이 어느 정도까지 들어가야 하나 알 수 없지만, 만일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와 일치단결해 있기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에게 직접 말하면 해결된다.
박광: 중요한 것은 납치·수교·쌀지원 등으로, 직접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파이프를 정하고 언제라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안 되는가?
이쓰카: 일본 관료들과 만나 보면 결정권이 없는 주제에 정치 목적의 자기주장을 한다. 반면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의 미팅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아베가 북조선의 고관과 만나는 것이 좋다. 중요한 것은 납치 문제로, 예를 들면 8명이 일본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국민은 계속 북조선을 추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북조선 측이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답변만 해준다면 국민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지금부터 새로운 납치 피해자가 나온다고 해도 일본에 귀국시키면 되는 일이다. 이 이상 납치 문제를 의제로 거론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쓰카는 이 회담에서 납치 피해자 가족 8명을 일본으로 되돌려보내면 금방이라도 쌀 지원을 시작하는 여론을 만들 움직임이 나올 것이라며 상대의 호의를 이끌어 내려고 하고 있다.
다음날도 회담이 이어졌다.
▷일시: 8월26일 오전 9시 반 ∼ 오후 0시
▷참가자: 최수진·박광·이쓰카
이 회담은 전날 정해진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눈에 띄는 점은 경제 원조를 조르는 최씨(북한 측)에게 이쓰카가 그 지침을 제시한 것이다.
사실 확인에 아베 측 침묵으로 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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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측과 최씨의 회담은 결실을 맺었을까? 북한 정부 당국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베가 이노우에를 밀사로 북조선에 보낼 즈음을 마지막으로, 북조선은 아베를 교섭 상대로 중요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아베의 대북 발언은 더욱 강경해졌던 것이 느껴진다. 이노우에의 방북이 결실 없이 끝난 후인 지난해 4월, 아베는 북륙(北陸)지방에서의 가두연설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본래는 정부에서 일원화하고 (북한과) 교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닥이 보이는 것 같은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회담 내용을 전한 북한 정부 당국자는 그 외에도 다른 자료를 제시했다. 특히 ‘지불계약서’는 박광 회장이 최수진 씨에게 5,000만 달러를 대출해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목적은 북한과 한국·일본의 친선을 추진하는 것이 명분으로 되어 있고 “(일본의) 중앙은행 총재 상당의 간부와 DPRK(북한)의 정부 책임자가 연대보증인으로 서명날인한다” 등으로 작성되어 있다.
필자는 지불계약서가 혹시 위조일지 모른다는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서류에는 사인이 되어 있지 않은 점과 박 회장이 5,000만 달러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못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극비회담의 참석자 중 한 사람인 이정일 의원으로부터 회담 내용의 사실 여부를 직접 취재했다. 그는 한·일의원연맹에 소속된 의원으로 일본을 자주 방문한다. 특히 그는 한국 측 의원 가운데 일본어 실력이 특히 출중해 아베 간사장대리와는 절친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는 우선 아베에 대해 “합리적인 정치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일본에서 극비회담이 있었던 것과 회담 내용이 틀리지 않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그는 지불계약서에 대해서도 “그 금액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최수진 씨가 북조선에 쌀·옥수수·비료 등을 수출하고 못 받은 미수금이 5,000만 달러가 된다. 아베 씨와 북조선 측이 쌍방이 합의해 결정한 형태로 취해진 조치”라고 설명했다.
사진·자료 그리고 이정일 의원의 증언을 감안해 볼 때 극비회담이 행해진 것까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북한으로부터 유출된 정보에는 분명 아베를 쓰러뜨리려는 의도가 들어있고, 자료 속의 기록에도 최씨의 사상적 편향이 반영돼 있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아베가 이 회담을 무엇 때문에 했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최수진·이정일·박광 씨 이름을 거론하고 극비회담을 했는가 아닌가를 아베에게 묻고 싶었다. 우리가 소유한 사진과 자료도 제시하면서 취재하고 싶다는 신청을 했지만, 아베 및 이쓰카는 문서로 이렇게 회답했다.
“일상적으로 여러 국회의원분들로부터 면회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면회 요청자가 복수의 동행자를 데려오는 일도 있어, 면회할 때 모든 인물에 대해 점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부의 방침과 다른 경우에는 면회를 포함해 거절하고 있습니다.”
회담을 했다는 것인지, 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회답이다. 정치가로서의 신념을 갖고 회담을 준비했다면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이 좋다. 회답을 받은 다음날 중의원 제1의원회관에서 이쓰카에게 직접 말을 걸어 취재해 보려고 했지만, 그 또한 입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