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의 길, 그 지난(至難)한 여정
♣ 돌아올 수 없는 다리, 1946년
1946년은 남북한 모두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 시점이었다. 신탁 통치를 주장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북한 공산당은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신탁 통치 찬성 지지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김일성은 "모스크바 협정을 북조선에서만이라도 먼저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탁치 운동은 반탁에 대한 공격을 동반했다.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이들은 "친일파 · 민족반역자"로 규탄 당했다. 북한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에서 신탁통치 반대인사들을 숙청했다. 북한의 민족주의자 조만식(曺晩植)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정치 행위가 되고 말았다. 소련과 김일성은 1946년 1월 조만식을 감금했고, 그 이후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손을 잡았던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해 버린 후, 1946년 2월 소련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김일성, 부위원장은 김두봉이었다. "임시 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것은 사실상 정부였다. 북한의 공식 역사서인 「현대 조선 력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북조선 림시 인민위원회의 수립으로서 우리 인민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두고 념원하던 진정한 인민정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혁명의 강력한 무기를 틀어쥐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인민 대중은 사회의 떳떳한 주인으로서의 자주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연과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창조적인 투쟁을 결정적으로 벌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또 한 번 말과 실체가 다른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임시 위원회라고 이름을 붙여서 앞으로는 마치 정부가 아닌 것처럼 가장을 해놓고 뒤로는 '혁명의 강력한 무기를 틀어쥐고' 있다.
김일성 자신도 임시 위원회가 정부임을 인정했다. 그는 1946년 8월 15일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전체 인민의 의사와 이익을 대표하는 북조선의 중앙 주권 기관"이라고 찬양했다.
임시 위원회는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북한의 토지 개혁은 획일적이었다. 농가(農家)마다 가족 숫자가 다르고 토지의 비옥도가 다르며, 위치에도 차이가 있다. 식구가 적은 집이 있고 많은 집이 있으며, 비옥한 땅이 있고 척박한 땅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모든 차이점들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소련의 경우와 유사하다. 소련의 토지 개혁 사례 가운데 토지를 무조건 폭 1미터 안팎으로 잘라준 기록이 있다. 그러다보니 한 사람이 가진 토지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있게 되었다. 농민들은 폭 1미터의 한 부분에서 농사를 짓고, 다른 구역으로 가서 또 짓고, 또 다른 지역으로 가야했다. 정말 무지한, 공산당식 방법이다.
토지 수확량을 거두어가는 방법 또한 무지막지했다. 수확고의 25%를 거두어갔는데, 실제 수확량이 아니라 예정 수확량의 25%였다. 세금은 돈을 번 다음에 내는 것이 상식이다. 앞으로 돈을 얼마만큼 벌 것이라고 국가에서 예상액을 정해주고 미리 세금을 매긴다는 것은 세금이 아니라 착취이다.
북한의 토지 개혁은 일종의 기만이었다. 무리하게 획일적으로 강행되었고 집단 농장으로가는 단계적 조치에 불과했다. 결국 1958년 집단 농장화가 이루어졌다.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가 되고 국민들은 국가의 농노(農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사유 재산제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구호를 내걸었지만, 무상 분배는 없었고 무상 몰수만 있었을 뿐이다.
남로당 총책을 지낸 국내파 공산주의자 박갑동의 증언이다.
"이북에서의 토지 개혁은 무살 몰수, 무상 분배로 지주와 자영농, 영세 소농까지 전부 없애버렸어요. 이런 일은 동구라파의 폴란드나 체코에서도 없었던 일이에요. 그런데 북한 김일성 집단은 이런 것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몰수했어요. 그것은 그 사람이 국내에서는 한반도 항일(抗日)을 위해서 싸운 적이 없고, 국내 동포들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예요 ...
해방 직후에는 전국 재산의 8할 이상이 일본인 소유의 재산이기 때문에 국유화돼 있었고, 대지주라고 해야 극소수에 불과한데, 공산주의자들은 중농 이하의 영세 소농에 이르기까지 무상 몰수에 의한 무상 분배를 들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 무조건 무상 몰수, 무상 분배해서 집단 농장화 하니까, 물질적, 정신적 인센티브가 없어져서 생산력이 격감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식량 부족 사태가 생기고, 토지 개혁이 다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박갑동은 공산주의가 몰락하게 되는 과정을 지적한다. 무자비한 토지 개혁이 집단 농장으로 이어져 생산력 격감을 낳은 것이 공산권 몰락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것이 실체이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은 대대적으로 토지 개혁의 성공을 선전했다. 폭력적인 토지 개혁으로 수탈당한 북한의 지주들은 대거 월남(越南)했다.
토지 개혁이나 국유화는 웬만한 정권이면 함부로 실시하게 어려운 조치이다. 국민의 재산에 손을 대야하기에 강력한 반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북한처럼 전 국토에 대한 무상 몰수, 산업 시설의 90%에 대한 국유화 같이 엄청난 조치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단행한 정권이 "임시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정말 앞뒤가 안 맞는다. 북한 군대도 임시 인민위원회 산하로 창설되었다.
분단 정권 수립을 위한 스탈린의 지령, 38선의 분단선화, 반공 민족주의자들의 제거, 정권 수립, 토지 개혁과 국유화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정책은 일관성 있게 속도전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한에서의 미군정은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남한 정국에서는 갈등만 증폭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합의는 물론 심의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미국이 한반도를 국제 정세, 특히 중국 대륙의 상황에 따라 정책이 바뀔 수 있는 지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의 세계정세도 그렇거니와 특히 중국의 정세는 너무나 유동적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과 달리 한국은 광대한 대륙의 일부였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중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내전이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었고 그 앞길이 투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1945년 8월부터 1947년 초반까지의 미국의 남한 정책은 신탁통치를 실시하기 위한 소련과의 교섭을 계속하면서 중국에서의 사태를 관망하는 Wait-and-see 정책, 즉 "안개가 개는 것을 기다리는" 정책이었다.
신탁 통치를 실행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은 미소 공동회의를 열었다. 그것은 출발부터 실패가 예정된 회의였다. 이미 소련은 분단을 확정지었고 북한에 강력한 정권을 수립한 뒤였다. 그네들이 회담에 참여한 것은 한반도에서 국제 합의를 준수한다는 모양을 내고 친소 정권을 공고화하기 위한 명분 쌓기와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
소련 측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 다시 말해 신탁 통치에 찬성하는 정당만을 받아들여서 한반도에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탁 통치에 찬성하는 정당은 공산당뿐이었다. 미국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다른 정당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소련의 회담은 잇따라 결렬되었고, 북한은 공산화에 성공했고,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 전체를 붉게 물들이기 위한 투쟁에 여념이 없었다. 미국은 1949년에야 끝난 중국 내전의 상황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앉아있다가는 한반도 전체를 공산당에게 내어줄 판이었다. 누군가 움직여서 나라를 구해야할 때, 이승만이 나섰다.
♣ 구국을 위한 결단, 남한 순행과 정읍 발언
신탁 통치를 주장하는 공산당에 대한 싸움은 반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이 자치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동물조차도 스스로 돌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맥아더에 의하면 신탁통치안은 한국인들을 동물만도 못하게 취급한 것이다. 당연히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 세력이 신탁 통치 안에 거세게 반발했다. 남한의 언론들은 탁치 안을 국제적인 노예제라고 비난했다.
반탁의 선두는 이승만과 김구였다. 1946년 1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이승만의 주장이 실렸다. "탁치가 강요된다면 열국의 종속 민족으로 우리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타인에게 맡겨놓는 격이 될 것이다.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탁치론은 영원히 우리 반도와 국민들 팔아먹으려는 가증스러운 행동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한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려는 저의를 품고 있다."
공산당에 대한 이승만의 비난이 거세어지고,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나자, 곤란해진 쪽은 미군정이었다. 국제적으로는 소련과 합의하며 국내적으로는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 원고를 사전 검열하여 소련에 대한 비난을 삭제했다. 이승만과 하지의 대결이 점차 치열해졌다.
이승만은 반탁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며 1946년 4월 15일부터 지방 유세에 들어갔다. 그의 연설 주제는 반탁과 반공이었다.
"이론상으로 공산주의는 그럴듯하다. 만일 이 주의를 전달하는 사람들이 이 주의를 전하는대로 실천한다면 나도 그들을 존경할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자들은 아름다운 이상으로써 양의 가죽을 만들어 쓰고 세계 정복을 꿈꾸는 소련의 앞잡이로서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것이다 ...
그들은 세계 사람들에게 각각 그들의 정부를 파괴시키고 나라를 소련의 독재 하에 넣도록 훈련시키고 있다. 당신의 동생일지라도 공산주의의 훈련을 과학적으로 받았다면, 이제는 당신의 동생이 아니다. 그 동생은 소련을 자신의 조국이라고 부르며 당신의 국가 공업을 파괴하는 한편 정부를 뒤엎고 동포들을 소련에 넘겨주려 할 것이다. 그러면 드디어는 당신의 나라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엔, 당신의 동생은 집 없는 거지가 되고 가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잘못을 깨달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승만의 유세는 남한 전역을 열광시켰다. 그에게 비판적인 미군정의 여론 조사원조차 "이승만이란 이름은 신비로운 후광에 쌓여있다. 유세는 돌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때로 만 명이 넘는 거대한 군중이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 앉아서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영남 유세를 마치고 호남 지역을 방문했을 무렵, 이승만에게 미국과 소련의 회담이 또다시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북한에는 공산 정권이 수립되어 한반도 공산화를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는데, 남한은 기약도 없이 미국과 소련의 가망성 없는 합의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조국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이승만이 또 한 번의 결정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른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었다. 1946년 6월 3일, 전라도 정읍 유세에서 이승만은 유명한 발언을 한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미국, 소련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이 발언은 사실상 국내외 모든 정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스크바 협정의 준수를 고수하던 하지에게도 폭탄이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보도 되자 정국은 소란해졌다. 남한 지역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주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미군정도 그를 비판했다. 이승만이 분단을 획책한다는 비난, 민족을 두 동강 내버린다는 감상적 민족주의에 기초한 비판의 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