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과 이완 장군 집
- 낙산 밑 왕족 이웃에서 ‘법도에 어긋난다’ 이사 -
임진왜란은 패했지만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백전백승의 무장이 이순신만은 아니다. 해전의 충무공이 이순신이라면 육전의 충무공은 바로 이수일1)이었다.
그는 장군이었으면서 먹고 자는 것은 반드시 병졸들과 같이 하여 병사들의 정신적 숭앙을 한 몸에 받았던 분이다.
바로 이 이수일 장군의 아들이 효종 때 명장인 이완(李浣) 장군이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칼날같이 강직하고, 또 유비무환을 발휘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장이었다.
그의 강직함을 알아보자.
그가 수어사로 있을 때 휘하에 있는 무관 하나가 죄를 지어 죽게 된 일이 있었다. 한데 마침 그 죄인의 누이가 인선왕후2)의 시녀였기에 왕후를 통해 구명을 사청(私請)해 왔다.
이완 장군의 누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 누이의 며느리가 바로 숙경공주3)인 것을 기화로 대비가 숙경공주를 낙동에 있는 이완 장군의 집에 보내어 구명을 청하였다. 이완 장군은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비께서 직접 살려 주라고 하명을 해도 법을 굽힐 수 없는데 하물며 샛길로 들어온 말로 어떻게 법을 굽힌다는 말이오.”
그러면서 그는 공주더러 다시는 그런 심부름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의 집이 낙산 밑 인평대군4)의 집과 바로 이웃하고 있었는데 훈련대장으로 임명받자 바로 집을 옮겨 버렸다. 왜냐하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왕족의 이웃에 산다는 것은 법도가 아니라는 그의 강직한 성품에서였다.
그의 강직함을 전부터 눈여겨보아 오던 영의정 정태화가 그를 훈련대장으로 천거하자 병영에서는 거부 반응이 물 끓듯 일어났다.
왜냐하면 그동안 군기가 문란할 때로 문란해져 있어 그의 강직함을 두려워한 부패 군관들이 작당하여 이완 장군 축출공작을 벌인 것이다.
이에 임금이 정태화에게 이완에 대해 물었다.
‘“신은 이완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신의 전 가족을 담보로 하여 이완을 책임지겠습니다.”
정태화는 이렇게 고하고 그를 모함에서 지켜주어 끝내 군기를 바로잡게 했다.
이완은 부하들이 자신에게 품의할 일이 있거나 또 놀러오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혼자서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당시 풍토가 남을 헐뜯는 일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한 현명한 통솔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완 장군이 왕궁을 수호하는 북영에 있던 어느 날 밤 효종의 부르심을 받았다.
“가령 사변이 나서 병자년 같이 급해 진다면 경이 마땅히 나를 강도(강화)로 호위하고 갈 것인데 적병이 뒤에서 추격해 오면 어떻게 할 참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그의 대꾸는 다음과 같았다.
“신이 이미 20말씩 들 만한 크기의 큰 포대를 수천개 만들어서 병사마다 하나씩 차고 다니게 하였는데 유사시에는 흙을 그 속에 가득 담아 포갠 것으로 첩을 만들어 지형에 따라 배치하면 높이는 거의 한 길에 이르고 그 둘레도 족히 자기 몸을 호위할 만하옵니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넓은 들판이라도 진지가 구축되어 가히 적을 막을만하옵니다.”
이완 대장이 대군의 이웃을 피해 낙산에서 옮겨 산 집이 대사동, 지금 파고다 공원 뒤쪽에 있었다. 뜰에 손수 심은 배나무가 있었는데 후세에 한 세도가가 빼앗아 산후부터 열매가 열리지 않더니 갑술년(숙종 20년)에 공의 서손이 억울함을 소송하여 그 집을 되찾은 뒤부터는 열매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한다.
이수일 :
자는 계순, 호는 은암, 본관은 경주이다. 1554년(명종 9)에 태어나 1632(인조 10)에 졸하다. 충주 서촌의 시곡에서 태어났으니 지금의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잿말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 1623년 인조반정에도 가담하여 공을 세웠고, 이듬해 이괄의 난 때에는 평안도병마절 도사겸 부원수가 되어 이괄의 무리를 크게 깨트려 공을 세웠다. 좌의정에 증직되고 뒤에 충무라 시호했다. 묘소는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에 있으며 지방기념물 21호로 지정되어 있고 묘소로부터 서남쪽 전방에 사당인 충훈사가 있으며 그 앞으로 이경흥이 찬하고 김좌명이 글을 쓴 신도비가 있는데 1667년에 세워진 것이다. 충주시 가금면 민속자료전시관에 있는 이수일진무공신록권 및 영정은 지방유형문화재 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2)인선왕후 : 효종의 정비. 성은 장씨(張氏). 본관은 덕수(德水). 아버지는 우의정 장유(張維)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갈 때 따라가 8년간이나 머물면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능은 여주의 영릉(寧陵)이다
3)숙경공주 : 효종과 인선왕후의 소생 1남(현종) 5녀(숙안(淑安)·숙명(淑明)·숙휘(淑徽)·숙정(淑靜)·숙경(淑敬)) 중 5번째 공주이다.
4)인평대군 :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집인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은 바로 인평대군이 살던 집이다. 따라서 이완 장군의 집은 '이화장' 옆 어디가 아니겠나 한다.
또 하나 이야기
이완 대장은 조선시대의 뛰어난 담력과 배짱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하루는 외갓집에 간 이완이 밤중에 뒷간에 갔는데, 개가 뒷간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런데 호랑이가 뛰어들어와 개를 물어가버렸다.
하인은 호랑이가 이완을 물어갔다고 이완의 아버지께 일러바쳤고, 곧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하인들이 허둥지둥 이완을 찾아보니, 태연히 앉아서 뭣를 누고 있었다.
이처럼 이완은 어떤 급한 상황에서도 항상 태연했다.
얼마 후, 더운 여름날 정자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던 이완은, 잠결에 섬뜩해서 눈을 살짝 떠 보았다.
그런데 뱀이 몸 위를 지나가는 게 아닌가.
보통 사람 같으면 크게 놀라서 난리가 날 텐데...
조금 더 성장한 이완은 사냥을 즐기게 되어 깊은 산중으로 돌아다녔는데, 하루는 짐승을 쫓다 그만 밤이 되어 길을 잃었다.
동서남북을 모르는 상황에서,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집은 도둑 소굴이었다. 그래도 이완은 제 집처럼 들어와 생활하였다(?).
조금 있다가, 도둑들이 들어와서 술한잔 마시고 저승 보낸다고 하였는데, 이완은 의외로 도망을 가지 않았다.
그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술을 마시던 도둑들은, 이완이 손님을 두고 그냥 마시냐고 해서, 도둑들은 술을 주었다. 이완은 안주도 주라고 해서, 고기를 한 점 주었더니 잘도 먹었다. 그런데 두목은 갑자기 밧줄을 풀어 주고 몇 해 전 점을 친 내용을 얘기하였다.
점쟁이 말이 어느 때고 포도대장을 만날 테니 증거가 될 표를 얻어놓으로 했다. 두목은 이완을 포도대장감으로 본 것이다.
20년 후, 이완은 과연 포도대장이 되었는데, 한 도둑이 잡혀왔다. 그런데 그 도둑은 20년 전에 만났던 그 두목인 것이 아닌가!!
이완은 20년 전 써 준 글을 읽고 용서해 주었다.
그 두목은 용맹한 사람이라서 이완의 부하가 되었다.
이처럼 이완은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태연하였으니, 용맹을 인정할 만하다.
(자료제공 : 맹꽁이 서당 5 - 조선 시대 현종~경종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