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 구일 동안이었다.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중이라고 무열에게 말하자 무열은 지도를 펼쳐놓고 생각을 해보
라고 했다. 무열과 나는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휴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전화
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 지도를 펼쳐보았다.
우리들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와 강과 절들의 이름이 어지럽게 표시되어 있는 관광지
도였다.
"너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야."
무열이 말했다.
"예를 들자면, 비행기를 타고 아열대의 섬으로 가서 바다가 보이는 풀에서 수영을 하고 지
중해풍 호텔에서 묵을 수도 있어. 네가 도착하면 호텔 방에는 과일 바구니와 와인이 배달되
어 있고 환영 인사가 마치 백만장자의 딸을 맞는 듯하지. 그리고 유람선에서의 저녁식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어린 고기들로 만들어진 풀코스야. 너의 한달 수입에 해당하는 샴
페인을 터뜨리고 너는 최고급 지갑을 가진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테이블에 앉
아 쇼를 볼 수도 있어."
"얼마 동안이나 즐기는 건데?"
"1박 2일."
무열은 한숨을 쉬고 덧붙였다.
"그리고 너는 두 달 동안 회사 구내식당 이외에서는 밥을 먹지 못한다는 단서가 붙지."
"다른 것도 이야기해봐."
"다른 것은 처음에 비하면 좀 평범해. 너는 여권도 비자도 없이 그냥 마음에 드는 이름을
가진 아홉 개의 절을 지도에서 찾는 거야. 근처에 있는 것이라도 되고 사방에 흩어져 있다
고 해도 상관 없어. 그 아홉 개의 점을 서로 연결하는 shortest cut을 찾는 거지. 컴파스와
삼각자 정도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 다음에 버스편을 알아보고 거기에 맞춰 스케줄을 짜
는 거야. 아홉 개의 절에서 아홉밤을 보내는 거지. 이번에는 절 앞의 기념품 상점에서 목걸
이나 찻잔 세트 정도의 기념품도 살 수 가 있어. 큰 절이라 해도 상관 없고 암자 정도의 작
은 절도 괜찮아. 햇빛을 받으면서 이마가 까맣게 탈 정도로 어정거리며 돌아다녀도 괜찮아.
하지만 좀 지루하겠지. 아마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먼지투성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
을지도 몰라. 가방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질지도 몰라. 그런 상태
에서 네가 나에게 전화한다면 우리는 싸울 수도 있어. 가벼운 말다툼 정도겠지만. 그래서 신
경성 위염을 일으킬지도 모르지. 아마 밤이면 낯선 곳이라서 잠이 들지 못할 거야.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해."
"또 다른 것은?"
"세 번째 것은 간단해. 가장 심플한 것으로 생각해봤어. 그냥 기차를 타고 바다로 가는 거
야."
"그래서?"
"음, 준비해야 할 것은 담요와 보온병과 코펠. 그리고 라디오와 우산."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 건데?"
"먼저 기차를 탄다. 그리고 기차에서 내린다. 다시 버스를 탄다. 눈앞에 바다가 보인다. 햇
빛이 너무나 뜨거운 구월이다. 소라면이라는 곳을 찾아간다. 그곳은 내가 알고 있는 바다 중
에서 가장 한적한 곳이고 관광객도 없고 어부들 몇 명이 살고 있을 뿐이야. 가는 길을 너에
게 가르쳐줄 수도 있어. 그곳에 도착해서 바닷가에 담요를 깐다. 코펠로 커피를 끓인다. 커
피를 보온병에 담는다. 그리고 옷을 벗는다. 누워서 해가 질 때까지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
오에서는 락 발라드가 나온다. 할로윈 정도가 좋을 거야. 가끔 목이 마르면 보온병에 든 뜨
거운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한다. 해가 지면 마을은
파도소리와 개 짖는 소리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지. 불빛 하나도 보이지 않아. 먹물
같은 어둠 속으로 자전거가 지나가는 소리만이 들리는 바닷가야. 그러면 담요를 갠다. 그것
을 손에 들고 하숙집으로 돌아온다."
"그게 전부니?"
"아니, 또 있어. 하숙집에 돌아와 생선을 넣고 끓인 국과 밥을 먹는다. 밥을 먹은 다음 우
물에서 물을 퍼와 빨래를 한다. 맥주를 마시면서 산책을 한다. 밤 하늘은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이 파도친다. 너는 다시 바다로 가서 누워 담요를 깔고 별들의 폭풍우를 바라보고
싶은 유혹에 잠시 흔들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숲이 있지. 너는 모든 종류의 짐승들의 소리가
들리는 숲으로 간다."
"그만해."
나는 무열의 말을 막았다. 하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우산을 잊지 말아야 해."
무열은 나를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옷을 벗은 듯한 나무들이 키 크고 마른 여자들처럼 서 있는 숲이야. 너는 우산을 펴고 앉
아. 언제 비가 올지 모르거든. 숲의 밤 날씨는 변덕스러우니까. 짐승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
이 들리고 있어."
나는 전화를 끊었다. 따뜻한 조청을 빵에 발라 저녁을 먹고 다시 한번 더 지도를 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내 지갑을 다 열어 보이며 나는 기차의
차장에게 말한다.
"이 돈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세요. 국경을 넘어도 됩니다. 돌아오
지 않아도 됩니다."
내 손은 지도를 더듬다가 정말로 먼 곳에 있는 어떤 섬 위에 멈춘다. 그곳은 낙오자의 섬
이다. 나는 언제나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낙오자의 섬은 너무 멀어서 기차를
타고 항구로 나가 다시 배를 타고 하루 정도를 가야 한다. 한때 그곳은 이름 그대로 낙오자
들을 위한 시설이 있는 곳이었다. 가장 먼저 그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상습적 재범자들과
마약 및 알콜중독자, 극단적인 영세민들, 장기적으로 앓고 있는 정신질환자와 처치 곤란한
HIV 보균자들이었다. 그들은 정부에서 만들어준 숙소에서 잠잘 수 있었고 음식을 제공받았
지만 군인들의 감시를 받았다. 섬은 원한다면 이주가 가능했지만 그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했다. 정상적인 모든 삶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낙오자의 섬으로 추방되거나 이주
했다. 처음에 그곳에 대해서 온갖 무성한 소문들이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곳을 두려워했
다.
Ring Ring Ring
무열이었다.
"잠들었니?"
"아니."
"뭘 생각하고 있었니?"
"낙오자의 섬."
"뭐라고?"
"낙오자의 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너, 설마 그곳으로 이주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직은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냐."
"......"
"......"
"심리치료사에게 가봤니?"
세명의 심리치료사가 사회부적응 판단을 내리면 그곳에 있는 시설에 수용될 수 있었다. 그
러면 나는 지금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온갖 종류의 생명보험과 화재보험, 상해보험과 보증보험, 분리수거해야 하는 쓰
레기와 수리해야 하는 낡은 창문과 가스시설, 물이 새는 수도 파이프와 다달이 오르기만 하
는 집세와 세금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내 인생은 그대로 하나의 holiday가 된다. 이처럼
일년에 한번 있는 휴가를 기다리다가 혼자 기차를 타고 떠나고 여행지에서 매년 바뀌는 연
인에게 전화를 하고 노천 온천의 욕조 돌바닥에 가만히 앉아 비나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
본다. 그리고 지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이런 것을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낙오자의
섬은 언제나 폭풍이 치는 험한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가장 가까운 육지도 한 시간 이상
떨어져 있다. 그리고 섬의 해변은 모두 무장한 군인들의 통제를 받고 있다. 섬의 내륙은 포
장되지 않아 비가 내리면 끔찍한 진흙 바다가 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곳은 일면의 반은
비가 내리고 있다.
"심리치료사 모두에게서 원한다면 부적응자 판단을 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어."
"낙오자의 섬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아니, 없어."
"그곳으로 이주한 여자는 군인과 HIV 보균자를 포함해서 백명도 넘는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한다는군."
"설마, 헛소문이 분명하잖아, 그런 건."
"그리고 이런 말도 들었어. 반정부단체나 급진적인 환경론자 같은 불순세력들이 낙오자의
섬으로 위장이주해서 세력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군인들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다는 것, 외
부와의 교통이 지금보다 더욱 두절되리라는 것들."
외부와의 교통두절이라고. 내가 그런 것들을 두려워할 것 같니.
"무열, 난 그냥 내가 낙오자의 섬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렇겠지."
무열은 마음이 가벼워진 듯했다.
"단순한 여행이라면 그곳도 별로 나쁘진 않다고 들었어. 단 여행 허가서를 받을 수 있을
경우의 얘기지만. 하지만 넌 군무원으로 일하고 있으니 부대의 허가를 받는 것이 일도 아니
겠지. 비옷과 고무장화가 필수품이라고 들었어. 여행허가서를 가지고 병원에 가면 예방접종
을 할 수 있고 여행하는 내내 군인들의 지프를 타고 다니게 될거야. 뭐, 나쁘지 않지."
"여행안내서가 어딘가에 있을텐데."
나는 책상 서랍을 뒤졌다. 어딘가의 여행안내서에서 낙오자의 섬에 대해서 언급된 것을 본
것도 같았다.
"이 밤에 모두 결정해버리게?"
"휴가는 내일부터야, 아니 이제 오늘부터라고 해야겠군. 아, 여기 있다. 낙오자의 섬으로 가
려면 먼저 항구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해. 첫 번째 기차는 아침 일곱 시야. 여섯 시간정도 남
았어.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부대로 전화를 걸어서 여행허가서를 신청할 수 있어. 항구에
도착하면 부두 사무소에 팩스로 여행허가서가 도착되어 있을 거야. 이걱 너무 간단하군."
"배가 언제 떠나는지 시간표가 나와 있니?"
"모르고 있었어? 낙오자의 섬으로 가는 배는 해군의 군함뿐이야. 그리고 군함은 매일 낙오
자의 섬으로 떠나고 있어."
무열은 말이 없었다. 볼륨을 죽여놓은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박고 있거나 컴퓨터 모니터에
새로 도착한 메일을 뒤져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그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무열은 묻지 않았다. 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맥주를 가지고 왔어."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무열이 말했다. 가볍고 밝은 목소리였다.
"감자칩도 있어. 같이 마시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기다려봐, 나도 가지고 올게."
맥주는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감자칩의 봉지를 뜯었다. 무열과 나는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맥주를 마셨다. 알콜이 들어가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무열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지
전화기 저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말없는 가운데 맥주를 다 비우는 동안 무열은 콧노
래를 흥얼거렸고 사이 사이 맥주를 마셨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건드리고 발을 까닥거
리고 감자칩을 씹었다. 나는 전화기 이편에서 무열의 그런 모습을 보았다. 무열을 마지막으
로 만난 것은 두 달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 때 무열은 잘 피우지 않는 담배를 꺼내 탁자
위에 팽개치듯이 던지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뭐가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태도였
다. 비록 낙오자는 아닐지라도.
무열이 뮤직비디오에서 나오는 화면에 취해 흥얼거리고 있을 때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
고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낙오자의 섬. 가능하다면 나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
마 무열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곱시 기차를 타려면 여섯 시에 집을 나가야 한다. 간단한 짐을
꾸리려면 잠을 자질 시간은 없다. 나는 이십사시간 이상 잠자지 않고 살아가는 일에 익숙했
지만 그래도 간혹 멍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잠을 안 자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낙오자의
섬으로 이주하는 방법. 나는 그 책을 이미그레이션 사무실의 카운터에서 얻어 왔다. 조명을
싫어하는 사람, 일렉트릭 사운드가 싫은 사람, 계급사회에 도전하기를 싫어하거나 실패한 사
람, 은둔을 원하는 사람, 가족이나 친구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 불임수술을 받은 사람,
커피를 마시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혹은 커피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필터 없
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 인쇄매체를 읽지 않는 사람, 저축이 하나도 없는 사람, 본능적인 파
괴본능이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향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낙오자라고 불리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 책에는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자기를 점검해 볼 수 있는 테스트 문장
이 나와 있었다. 나는 모든 문장에 포지티브였다.
낙오자의 섬은 자살율이 아주 높다.
그곳이 지옥이어서가 결코 아니다. 사람들은 자살의 전단계로 이주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
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데 페이저나 전화기를 가지고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되
지도 않는 곳이기도 하고 어떤 연락이 오지도 않을 것이며 기다리지도 않아야 한다. 아주
오래 전에 나는 무열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은 다 사
라졌다. 무열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지나갔다. 부끄러운 얘기다. 사랑이 사라진 다
음 무열과 나는 관계를 가졌다. 우리는 서로 다른 연인을 생각하면서 슬픔에 치를 떨면서
교접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연인을 향해서 절정의 순간에 외쳤다.
내 눈을 뽑아서 그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나이다.
어리석었다.
우리가 수만 명 노예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들 수만 명 노예의 눈을 모두 뽑는다고 해도 우
리는 서로의 연인을 가질 수 없었다. 우리가 서로의 연인의 눈을 뽑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
들을 가질 수 없었다. 가질 수 없고 관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랑했다. 사랑은 그런 순간
에만 가능했던 모순이었다.
나는 부엌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우유와 맛이 시어진 포도주를 버
렸다. 이제 음악도 들을 일이 없을 것이고 포도주를 마실 일도 없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다
가 책상 서랍에 넣어둔 콘돔과 새 블라우스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좀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보석인 진주반지를 변기에 던져 넣었다. 커피잔을 가지고
탁자에 앉아 한 모금을 마셨다. 집안은 절대적으로 고독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
다. 시계조차 죽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집안의 모든 전구는 스위치를 올려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탁자에 엎드렸다. 시계가 없어도 시간은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낙오자의 섬에서 나는 늙어 죽어 갈 것이다. 흰 칠을 한 벽이 있는 곳이다. 기
운을 잃은 파리가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그날 무열은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자유롭지 못해, 하고 무열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
다. 그리고 담배갑을 탁자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내 방의 전등이 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
사랑하는 여자가 유부녀인 것에 대해, 또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불안감에 대해, 그리
고ㅓ 우리는 침대의 반대 방향에 각자 앉아 서로 다를 각자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
다. 누더기처럼 침대 아래로 흩어진 옷, 무더운 날이었고 창문을 닫아놓았기 때문에 땀이 온
몸에서 흥건히 흘러내렸다. 나는 불친절하고 무례한 무열에게 대항할 기운도 의욕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무열의 손이 떠 있었다. 우리들의 손은 서로의 몸 위에 있었지만 서로의 의식
은 다른 공간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무열의 머리를 만지면서 무열의 가슴에서 떨리는 그의
사랑에 대해서 모두 들어주려고 했다. 그의 여자는 낮 시간 동안 그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
하는 사무실 동료였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를 이해했다. 그
러나 무열은 말하는 대신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무서운 소리가 났다. 무열은 그 상태로 가
만히 있었다. 나는 무열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울고 있었던 것은 나였다. 새
벽이 되려고 했다. 나는 무열의 동정을 받는 것이 싫었다. 내 우울즐에 대해서, 내 가난에
대해서, 내 열등감에 대해서, 지진의 예감에 대해서. 무열은 내 눈물의 근원을 그런 것에서
찾고 언제나처럼 나를 동정할 것이다. 자의식 제로 상태, 자신감 제로 상태, 자기애 제로 상
태.
낙오자의 섬은 춥다. 죽는 날까지 기침과 열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스피린
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무열, 내 친구, 너 오래된 친구 맞니? 나는 어느새 무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무열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앤서링이 돌아가고 있다.
나는 무열이고 나는 없습니다.
앤서링으로 듣는 무열의 목소리는 몰라보게 싸늘하다. 탁자에 사납게 내팽개치던 무열의 담
배갑,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자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