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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울
겨울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꽃잎처럼 눈송이가 휘날리는 겨울이 오면 늘 생각나는 영화가 하나 있다. 「겨울 나그네」. 나이가 들수록 애틋한 추억은 시간의 저 아래 쪽에서 올라온다. 순정했던 심신에 새겨진 기억은 세월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는 모양이다. 80년대 중반이니까, 내 나이 그리 젊을 때는 아니었지만 촌놈이 영화 한 편 보러 가는 게 그리 간단한 시절은 아니었다. 인터넷이란 게 없던 그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것은 몸단장하고 외출을 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혼자 가는 일은 잘 없었고 누군가와의 데이트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겨울 나그네」를 보러 영화관엘 간 것은 80년대 중반 어느 겨울, 어느 해인지는 모르나 눈이 많이도 내린 겨울이었다. 「겨울 나그네」의 놀라운 흥행도 그 눈과 관련이 있지 않았나 싶다. 눈은 그 궁핍하던 시대에도 은총인 듯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해 주었다.
며칠 전, 오갈 데 없는 고 3들을 데리고 한 열흘 영화를 보여주며 노는 프로그램을 맡은 적이 있다. 그때 저 영화를 다시 돌려보았다. 지금 시점에서 보니 분위기가 좀 촌스러웠지만 치기어린 아날로그 시대의 진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7-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자들의 인생 풍경을 좀 들여다 볼 수 있는 영화였다. 눈도 많이 내리는 요즘 겨울 로맨스가 그리운 사람도 있을 터, 옛 영화 한편을 '읽으며' 지나가버린 청춘을 추회하길!
겨울 나그네: 80년대 겨울을 추억하는 한 방식
서울에서 멀지 않은 한 소도시의 역에 기차가 멈추고, 30대 중반 쯤 돼 보이는 부부가 코트의 깃을 여미며 내린다. 세상은 온통 백설로 덮여있고 까만 두 줄의 선로가 도화지 위에 줄을 그어놓은 것처럼 선명하다. 여자의 손에 들려있는 빠알간 장미다발이 백설의 배경 앞에서 애절한 겨울 서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들이 서울에서 이 도시에 온 것은 6년 전에 죽은 한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눈 덮인 묘지의 주인은 바로 「겨울 나그네」의 주인공 한민우(강석우).
상념에 잠긴 남자(안성기)가 독백한다.
"우리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러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그 청춘 시절의 이야기를!"
불현듯 영화의 화면은 십 수 년 전의 어느 대학 캠퍼스로 넘어간다. 부잣집 아들로 귀공자 같은 용모의 민우는 의대를 다니는 학생으로 티 없이 맑으나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다. 그는 어느 날 낙엽 휘날리는 가을교정을 자전거로 달리다가 첼로를 들고 가는 한 여학생과 충돌한다. 허둥지둥 바람에 날리는 악보를 줍고 얼굴을 들어 사과를 하는데, 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운명의 이상형, 해맑은 눈빛에 도라지 색 치마 그리고 빨간 구두. 민우는 서둘러 떠나는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돌아서는데, 큐피터의 장난인지 낙엽 사이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수첩을 발견한다. 이름은 다혜(이미숙), 음대 기악과 재학생.
이 수첩을 소중히 챙겨 넣은 민우는 연애의 고수로 통하는 선배(현태-안성기)를 찾아가 그녀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묻는다. 현태의 노련한 조언이 유효하여 민우는 다혜와 곧 가까워진다. 다혜 역시 민우를 금방 좋아하지만 손 한 번 잡는 데도 몇 달이 걸리던 시절의 일이니 연애라고 해도 선정적인 장면 하나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플라토닉 러브를 믿는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다. 이 연애 과정에서 세 사람은 종종 함께 만나곤 하는데, 현태가 노련한 고참 역할을 한다.
민우와 다혜의 사랑이 깊어가는 사이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조용히 비극의 싹이 자란다. 많은 한국 멜로물의 구도가 그렇듯이 어느날 민우는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재발견한다. 즉, 그는 자신의 친모가 단순히 어릴 때 죽은 것이 아니라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된다. 추적해 본 결과 그의 친모는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상대로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여자였다. 유부남을 사랑하여 아이까지 낳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아파하다 바다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사실 6.25 이후 미군 기지촌은 한국의 급격한 근대화 과정 속에 독특한 다문화를 만든 기지였다. 한국인들의 국제결혼도 대체로 기지촌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렇게 민우가 불순한 자신의 정체성을 뒤늦게 발견하고 방황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를 맞아 풍지박산이 된다. 민우는 병원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빚쟁이로부터 보호하려다가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간다. 정상이 참작되어 오래지 않아 사면되지만 출옥한 민우의 눈빛은 많이 달라져 있다. 밝고 천진하던 웃음 대신 우수와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두부를 사들고 간 다혜와 현태의 위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실 7-80년대에 성취한 놀라운 한국의 경제성장은 기업들의 비리와 불법이라는 이면을 안고 있었다.
출옥한 민우는 다혜의 사랑과 현태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잠적해 버린다. 몰래 술집에서 일을 하며(성병 걸린 여자들의 보건관리) 밀수품 거래에 손을 댄다. 목숨이 위태로운 범죄의 세계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자신을 위험으로 몰아넣으며 삶을 자학적인 비극으로 몰아간다. 순정한 다혜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자격지심으로 그녀를 잊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잊으려하면 할수록 여자는 더욱 강한 그리움의 족쇄가 된다. 자신을 짝사랑하던 술집 댄서 은영(이혜영)의 저돌적인 순정에 몸을 맡겨보기도 하지만 역시 마음은 따로 논다.
민우의 잠적으로 애간장을 태우던 다혜는 민우를 찾는 과정에서 현태와 자주 만나게 된다. 현태도 적극적으로 나서 돕지만 가랑비에도 옷이 젖듯이 남녀의 잦은 만남이란 감정을 적시게 마련이다. 후배(민우)의 사랑을 위해 헌신하던 현태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다혜의 애인이 되고픈 유혹에 빠진다. 다혜도 민우만 생각하던 마음이 조금씩 양 갈래로 나눠진다. 사랑의 계기도 시간이 마련하지만 사랑의 파국도 시간이 초래한다. 그럼에도 둘은 민우에 대한 우의와 사랑을 훼손할 수 없어 마음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민우가 드물기는 해도 가끔 나타나 존재를 알리기도 하지만 의리와 사랑의 양가성이 작동하던 시대였다.
한편 민우는 귀금속 밀매를 하다가 자신을 속인 상대를 칼로 찔러 또 감옥에 간다. 그때 은영은 민우의 아이를 밴 사실을 알고 술집을 그만두고 다른 도시로 가 가게를 차린다. 그리고 민우의 출옥을 기다린다. 그러니까 은영은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밤, 눈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잘 수는 없다며 민우에게 달려들어 아이를 가진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눈이 없으면 성립이 안 되는 영화다.
민우가 출옥했을 때, 은영은 이미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다. 민우는 어쩔 수 없이 은영이와 함께 살지만, 은영은 민우의 마음속에 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민우는 시간만 나면 저수지에 가 낚시를 하며 자신의 비운을 달랜다. 낚시는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즐기던 취미다. 그런데 민우는 어쩐 일인지 아이의 이름을 짓지 못한다. 아마도, 사랑 아닌 실수로 만들어진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으므로 다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민우의 현실을 현태가 드디어 알아내고 그것을 다혜에게 알린다.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민우가 있는 곳으로 간다. 눈 쌓인 시골에 내려간 다혜는 가게에서 아이를 안은 은영을 대면하고 아이의 얼굴에서 민우를 발견한다. 그리고 눈 덮인 호수가 언덕에서 민우와 재회를 한다. 차가운 겨울 서정이 이들의 열정과 회한을 냉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자는 "행복하세요?"라고 묻는데, 남자는 먼 하늘을 보며 "내 년에는 벌을 칠 생각에요"라고 대꾸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서울로 돌아온 현태와 다혜는 애써 민우의 시대를 뒤로 밀어내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현태는 "사실은 다혜씨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얼마 뒤에 두 사람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객들 속에는 민우도 섞여있다. 그러나 끝내 아는 채 하지 못하고 홀로 발길을 돌린다. 그 후 민우는 대놓고 귀금속 밀매를 하다가 경찰에 들키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담담히 자동차와 함께 자폭해 버린다. 그의 손에는 다혜의 사진이 들려있다. 낙엽 속에 떨어진 다혜의 수첩에서 몰래 빼내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그 후 6년의 세월이 흐른다. 혼자 남아 아이를 키우던 은영은 현태를 찾는다. 얼마 전에 괜찮은 미군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아이는 바로 미국으로 데려 갈 수 없고 초대장을 가지고 와 데려가야 한다는 것. 그 때까지 시골에 있는 아이를 좀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러 현태를 찾은 것이다.
집에 돌아온 현태는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돌린다. 24 곡으로 된 연가곡 『겨울 나그네』 중 가장 유명한 노래다. 사랑하던 여자에게 바람을 맞은 남자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장면을 묘사한 노래다. 80년대에 꽤나 유행한 노래다. 보리수에 새긴 사랑의 맹세도 외면하고 길을 떠나는 남자의 겨울 심정을 읊은 노래다. 이 가곡은 민우가 좋아하던 노래이자 영화의 주제곡이다.
현태가 안락의자에 앉아 「보리수」를 들으면 상념에 빠져 있는데, 아내 다혜가 오랜만에 듣는 음악이라며 반가워한다. 현태는 은영이가 찾아온 이야기를 하고 민우의 죽음을 알린다. 그 순간 다혜는 커피 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잔은 박살이 난다. 그녀의 사랑은 그제야 일단락 된 셈이다. 현태가 다혜를 안고 위로한다.
다음날 두 사람은 민우의 아이를 찾아 기차를 타고 눈 쌓인 시골로 간다.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첫 장면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회상의 기법을 쓴 것이다. 과연 민우를 닮은 아이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아이를 따라 민우의 무덤으로 간다. 두 사람은 눈 덮인 묘지 앞에 장미를 놓고 고개를 숙인다. 마침 무 덤 뒤쪽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태현의 독백이 들려온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어디로 갔는가.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우리들의 젊은 날은 저녁놀 속에 사라지는 굴뚝 위의 흰 연기와도 같았나니...
이것이 지난했던 80년대 청춘들의 한 초상이고 일정 부분 공유했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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