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솔이
내가 살던 고향은 진달래꽃이 탐스럽게 피는 산골 마을
경북 봉화군 법전이다.
봄이면 산나물 고사리가 지천이고 약초와 송이가 많이 나는 곳이다.
앞산에서 들려오던 뻐꾸기 소리, 밤의 정적을 깨우던 개구리 울음소리,
처마끝에 제비집, 초가지붕위에 하얀 박꽃. 더운 여름날을 식혀주던 매미 소리,
고사리손으로 작은 꽃밭을 만들어서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면 물을 주고
꽃이 피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초롱초롱 한 내 눈망울과 은하수가 반짝이던 고향하늘,
총각들의 애간장을 태우던 사춘기 시절에 아름다운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샘물 속에 뭉글뭉글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던 개구리 알집
메뚜기떼와 잠자리의 사랑놀음을 구경한 지도 오래되었다.
뜸북새 울어대던 밤을 보내고 새벽이 되면
아버지 쇠죽 쑤던 냄새가 먼저 문지방을 넘던 초가집
때묻지 않은 세상과 가족과 친구와 풀벌레 울음소리....
나이 가 들수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추억들이 그리워 지는 건 향수병인가보다.
봉숭아 꽃잎 따서 손톱에 물들여 주던 친구의 미소 같은 세상이 다시 돌아 왔으면 좋겠다.
부싯돌이 반짝하고 지나간 것 같은데 고향을 떠난 지 벌써 33년이 되었다.
명절이 되어 몇 시간 씩 기차에 시달리며 멀미 때문에 심한 구토를 하던 귀성길도
이제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객지생활의 고단함도 잠시 잊고 큰 댓병 백화 수복 한 병에 새마을 담배 한보로,빨간내복,
동생들 옷이며 양말 등.. 내 덩치 보다 더 큰 보따리를 들고 끙끙대며 흙 먼지 나는 길을 한시간씩 걸어도
가족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잘 있었니껴?"
"아이고 이게 누구로? 고생 많았제?"
방문만 열어놓아도 동네 어귀까지 훤히 보이는 고향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도시생활에 뽀얘진 내 얼굴을 보고 부러워 하는 친구도 있었고
돈 버는 딸을 둔 부모님을 부러워 하는 동네 사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슬픈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먹고사는 일이 무엇보다 절박 했으니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높은 빌딩에 기대고 있으면 고향의 든든한 소나무가 생각난다.
문명의 소리에 숨이 막혀 이제는 넉넉한 시골이 편해 보이고 흙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동네 작은 골목에 젖 달라고 칭얼대던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어 본지가 언제던가.
도랑가에서 버들피리 삐~~리리 슬프게 울어 댈 때는 슬픈 세상이 있는 줄 몰랐다
허무한 세월을 돌고 돌아서 어느 날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고향을 잊지 못 하듯이 고향도 나를 잊지 않고 있을까?
지금은 고향도 많이 변했고 그때 같이 살던 사람들도 많이 떠났다
저 세상으로 객지로......
누가 누가 병이 들어서 곧 돌아가실것 같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눈물이 난다.
요즘은 예전과는 달리 과일나무를 많이 심어서 과수원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고속도로가 생겨 고향길은 점점 가까워 지는데
최선을 다해 살지못한 부끄러움 때문에 선뜻 달려가지도 못한다.
버스 차비가 없어서 10리 길을 걸어야 했던 그 길
육성회비를 못 내서 눈물로 오르내렸던 길
배가 고파서 찔레를 꺾어 먹고 도랑 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길
진달래꽃을 따서 나눠 먹던 순이와 점화, 친구들의 추억이 남아 있는 길
신작로 길에 흙먼지 쓴 코스모스길을 다시 걷고 싶어진다.
학교 근처 작은 전방에서 가난한 주머니를 유혹하던 하얀 돌 사탕의 달콤함은 아닐지라도
아픈 추억이든 아름다운 추억이든 그 추억 속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찾고 싶어졌다
일년에 한 번씩 동창회를 핑계 삼아 고향에 가지만
내가살던 고누골에 한 번도 마음 편히 가본 적이 없다.
어릴 적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동네 어른들도 계시고
90 이 넘으신 친구 어머님도 살아 계시지만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보다 더 커져 있는 현실 앞에서 번번이 무너지고
살길 바빠 종종걸음치는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보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처럼 살았다.
2008,7,26
첫댓글 솔이씨 의 글을 보니 어릴적 고향 생각이 저절로 생생하게 납니다. 영화 필림을 보는것 같이.... 좋은글 쓰시고 . 또한 실어 주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