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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은 내게 오라 손짓 하네 (상남 - 한계령 - 한계삼거리)
코스소개 (총거리 55k)
상남 - 현리(기린) - 귀둔마을 - 하추삼거리 - 필례약수터 - 한계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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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삼거리
또 비가 내린다. 올 초부터 도보여행을 시작한 이래 눈이나 비가 내린 날이 날씨가 좋았던 날보다 더 많다. 내가 유난히 비나 눈을 몰고 다니는 것 같다. 하기야 봄이나 여름철엔 빗속을 걷는 것이 뙤약볕에 걷는 것 보다 낫다. 햇빛을 가릴 필요가 없고, 비나 눈이 걸으면서 생기는 몸의 열을 자동으로 식혀주기 때문이다. 산자락에 안개가 자욱하게 걸려있어 주변 운치도 좋다. 그리고 빗속을 걸으면 웬지 기분이 좋아진다. 분위기를 탄다고나 할까.
오늘은 출발이 좀 늦어졌다. 동서울에서 12시 20분에 출발한 상남행 버스가 3시 30분에서야 상남에 도착했다. 홍천 가는 직통을 타고 바로 홍천에 와서 상남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내가 탄 버스는 차를 갈아타지 않는 대신 양평, 용문, 광탄, 양덕원을 거쳐 홍천에 도착했다. 홍천터미널에서 한참이나 정차해 있다가 다시 화촌, 내촌을 거쳐서 마침내 상남에 도착했다. 지난 3월 15일에 상남에서 여행을 마쳤으니까 39일 만에 다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학교 일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재빨리 내 손수레인 카멜에 배낭 3개를 싣고 비닐로 감쌌다. 지난 겨울 내내 뻔질나게 반복했던 일이어서 이제는 짜증도 나지 않는다. 한겨울에 첩첩산중에서 눈비도 맞아봤는데 이런 봄비쯤이야 하는 심정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세상살이에 경험만큼 값진 것이 없다고 하나 보다. 처음 당하는 일이면 당황했을텐데.... 실제로 이 여행을 처음 시작했던 지난 1월 30일에도 정선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크게 낙심하여 여행을 포기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버릴까 망설였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악천후 날씨까지도 여행의 동행자로 여기게 된 것이다.
빗줄기가 점점 장난이 아니다. 비옷 상의를 꺼내 입었다. 일기예보에서도 이번 주말 이틀 동안 강원산간에는 비나 눈이 온다고 예보했었다. 아내가 그 사실을 과장된 몸짓으로 전하면서 만류했어도 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정선에서 구절리를 거쳐 모리재를 넘어 진부까지 걸으면서 겪었던 한겨울의 짖궂은 날씨에 비하면 이런 날씨는 하늘이 내게 주시는 축복이나 다름없다.
눈비에(정선에서 구절리를 거쳐 대광사까지), 비포장 진창길에(자개골에서 모리재 아래까지)에, 산속 길에, 민박도 없고, 배낭 3개(70리터, 40리터, 20리터)를 수레(카멜)에 싣고, 어떻게 그런 날씨에 그런 길을 지나왔는지 다시 생각해도 나 자신이 대견하고 뿌듯하다. 무언가 하나를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일 것이다. 레저이론에서는 이런 경험을 레저참여의 심리적 동기라고 한다. 남이 쉽게 하지 못하는 그런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서 특정 레저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날 2박 3일 동안 그 눈비 속에 걸어가거나 자전거라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모두 차를 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타클라마칸사막과 파미르고원, 카라코롬하이웨이, 또는 천산산맥을 걸어서 넘으려면 이보다 훨씬 더 나쁜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는 힘과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이번 도보여행은 처음부터 손님맞이가 고약하다. 빗속에 오미치고개가 떡 버티고 서 있다. 걷다가 고개가 나타나면 올라가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내리는 빗물이 도로경사면을 따라 제법 철철 흐른다. 달리는 차들이 퍼붓는 물세례도 이제는 이골이 나서 피할 생각도 않는다. 비눈 섞인 흙탕물 세례에 비하면 샤워물이나 마찬가지다.
고개를 내려가서 오른쪽 시내를 따라 들어가는 후평동 길이 안개에 젖어 선경에 들어가는 길처럼 신비롭다. 이런 비경은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자연의 선물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는지. 사진 찍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자연경관을 소재로 하는 뛰어난 사진은 악천후나 노출이 어려운 새벽이나 저녁에 많이 나온다는 말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평범한 사진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31번 도로 중에서도 여기서부터 인제까지는 특히 경치가 좋다. 미산계곡처럼 아기자기한 멋이 아니라 내린천이 소양강으로 합쳐지기 전 몸집을 불린 강물과 산이 좀 더 스케일이 크고 시원시원하게 어울리는 그런 멋이다.
31번 도로에는 길 양쪽으로 유독 군부대가 많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길이 그만큼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나는 양구에서 군생활을 했었는데, 현리에 있는 3군단 야전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온 적이 있다. 입대하기 전부터 아팠던 발에 계속 통증이 있었지만, 졸병 때는 눈치가 보여서 오지 못하고 고참이 되어서야 한번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우리 포대장님이 “야, 고태규, 후송갈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마라. 다음 달에 포단포술경연대회에 나가야 하니까.”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그 때가 1980년이었으니까 벌써 30년도 넘은 일이다. 작년엔가 수소문해서 전화를 드렸더니, 대령으로 예편하여 지금은 국방대학원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육사 출신인데도 별 달기가 힘든가 보다. 우리 포대장님 이름이 김낙흥이다. 나에게는 참 잘해주셨다.
언젠가는 내가 대대행정실에서 신문을 찾아서 우리 챠리포대(포병은 기본 단위가 포6문씩 보유한 알파, 브라보, 챠리라는 3개 단위포대가 하나의 포병대대를 이룬다. 보병으로 치면 1개 연대의 화력에 해당한다)로 갈지자로 세월아 네월아 신문을 읽으면서 올라오는데, 마침 대대본부로 걸어 내려오던 그 양반과 딱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쳐박고 신문을 읽느라 포대장님이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야, 임마, 너 뭐하고 있어?”
“네! 포대장님! 당백!”
“고태규! 여기가 무슨 대학캠퍼스인줄 알아? 다른 사람 보기 전에 빨리 치우고 얼른 부대로 올라가!”
“예, 알겠습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때는 일주일 동안 야외진지에 나가서 동계훈련 중이었다. 포병은 동계훈련을 계속 이동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축된 야외진지에 포대를 방열하고(군대 용어로 포격목표를 향해 포를 배열한다는 뜻이다) 거기서 포사격 등 여러 가지 가상작전을 연습하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나는 병장으로 사격지휘소(포병에서는 FDC-Fire Direction Center라고 한다)의 사병 최고참이었다. 그때 텐트를 철거하면서 난로를 급히 끄느라고 물을 붓고 말았다. 그러자 연기가 하늘로 치솟게 되었고, 그 연기를 보신 포대장님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저쪽에서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군대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위치를 적에게 노출시키는 행위는 절대 금물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크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한 마음에 물을 부으면 부을수록 연기는 더 많이 하늘로 치솟았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포대장님은 범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어쩌지를 못하고 벙커 위에 서서 소리만 버럭버럭 질러댔다.
“야, 고태규 너 이 새끼, 너 죽을라고 환장했냐?”
“저 놈이 내 모가지를 날리려고 작정을 했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일이 수습되자 옆에서 계속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던 전포대장(대위인 포대장의 지휘를 받아 포사격을 실제로 지휘하는 장교로 계급이 보통 중위이다)이 웃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고태규가 쎄긴 쎄네. 이런 걸 보고 우리 포대장님이 소리만 지르시는 걸 보면.”
“다른 놈 같았으면 묵사발이 되도록 두둘겨 맞았을걸.”
그 양반도 내게 참 잘해주었다. 항상 나하고 대화하길 좋아했고, 배려해주었다. 다른 부대원들은 무서워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ROTC 출신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장기복무를 하게 되었다. 내가 일병 때 일이다. 그 양반이 당직을 설 때 마침 고참 말년 병장들과 함께 휴가를 나갔다가 귀대시간을 넘겨서 지각 귀대를 하게 되었다. 양구 읍내에서 언니들과 술마시고 놀다가 그렇게 늦은 것이다. 나는 일찍 귀대하고 싶었지만 고참들이 그렇게 버티고 있으니 졸병인 나 혼자만 귀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군대는 항상 함께 행동해야 하니까.
성질이 칼 같은 김중위가 그걸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웬일인지 나는 열외를 시키더니 제대가 얼마 안남은 말년 병장들만 밤에 우리가 임시로 만들어 놓은 스케이트장으로 집합을 시켰다. 거기서 팬티만 입힌 채로 포복을 시켰다. 그러니 팔꿈치와 무릎에 모두 동상이 걸린 것이다. 대대장까지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 그 양반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불명예 제대를 하거나 장기복무를 신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 양반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사병들은 다시 휴가를 보내서 집에서 치료하게 했다. 군병원으로 후송하면 모든 사실이 발각되니까. 김중위님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삼겹살에 소주라도 한잔 사드려야 하는데.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오후 4시가 다되어 출발해서인지 곧 날이 어두워지려고 한다. 비가 내리니까 날씨가 흐려 더 빨리 어두워진다. 날씨만 좋으면 3시간은 충분히 걸을 수 있는데. 상남에서 기린면 소재지인 현리까지가 15킬로이니까 그 시간에 족히 갈 수 있는 거리다. 2시간쯤 걸어 현리를 3킬로 남기고 용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다. 오전 10시경에 아침으로 차 한 잔에 쑥떡(인절미) 몇 개 집어먹고 버스를 타는 바람에 점심을 놓쳤다. 늦더라도 오늘 중으로 현리까지 가려고 했는데, 민물매운탕이라는 음식점 간판을 보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현기증이 나려고 해서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식당주인 내외가 문을 열어주면서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이렇게 비를 맞고서 어디를 그렇게 다니세요?”
“그냥 걷는 게 좋아서 걸어요.”
“그래도 날씨가 좋을 때 걸으셔야지.”
“비오는 날도 좋아요.”
“부인이랑 함께 다니시지.”
“그 친구는 하루 10킬로 이상을 못걸어서 날 따라다니는 걸 싫어해요.”
“심심하실텐데.”
“전혀 심심하지 않아요. 기분은 너무 좋아요.”
“그래요?”
주인아줌마는 내 카멜이 아기유모차인줄 알았단다. 하기야 내가 비닐로 배낭을 감쌌으니까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저녁식사로 민물매운탕 작은 걸 시키려고 하자 여주인이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고 만류한다. 삼겹살 2인분을 시켜서 다 먹었다. 배가 고파서인지 냉동인데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하는 중에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군인가족 4쌍이 각각 고만고만한 아이들 한 명씩을 안고서 들어오고 있었다. 많아야 두세 살쯤 되어 보였다. 정말 누구 말처럼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마도 애기들이 아닐까? 내가 정선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애기들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주인아줌마에게 물었더니 여기 군부대에 근무하는 장교들이란다. 임신을 비슷한 시기에 했는지 아이들 나이가 정말 비슷비슷했다.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에 식당에 갑자기 하나 가득 생기가 돌았다.
숙소인 하늘나라팬션은 현리를 지나 7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식당 옆 건물이 민박이라고 적혀 있어서 여기서 멈춘 것인데, 지금은 비수기라서 불을 넣지 않았단다. 그래서 자기가 운영하는 팬션에서 민박요금만 내고 자라는 것이다. 대신 내일 아침에 여기로 다시 데려다주겠다는 것이다. 내린천은 지금이 비수기라서 손님은 나 혼자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방에 불을 넣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전기담요를 하나 내주었다.
이부자리를 까는데 이불마다 피가 묻어 있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라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탁은 신경을 썼어야지. 그런 생각이 든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낙수물에도 가락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똑 똑 또르르, 똑 똑 또르르”. 잠들 때까지 창 밖에서 이 장단이 반복되었다. 나는 언뜻 어디선가 이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아하! 지난 설날에 백양사에 눈구경 갔다가 공양간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신기해서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들여다본 적이 있다. 바로 그 때 들은 그 소리였다.
아침에 일어나 배란다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흐린데 비는 내리지 않는다. 도보여행을 시작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을 먼저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린천이 방 앞으로 흘러가고 있어 절경이다. 어제 밤에는 어두워서 못 보았던 것이다. 아침 9시에 주인아저씨가 다시 자기 식당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의 도보여행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도착한 지점에서 다음 지점으로 이어서 걸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원칙을 지키고 있다.
출발하려고 준비를 마치자마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번 일기예보는 웬일로 기가 막히게 잘맞네.”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식당 앞 도로로 나오는데, 길 옆에 미산계곡에서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던 곤돌라가 철사도르래줄에 매달려 서있는게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찾았으나 몸에 없었다. 배낭에 넣고 묶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경험을 하고서도 이런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현금과 카드, 지도와 카메라, 그리고 녹음기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비가 계속 내리기 때문에 비닐커버를 벗겨내고 바로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곤돌라는 찍지 못했다. 나와 인연이 아닌가보다.
현리는 군인마을답게 시골치고는 제법 번잡했다. 도로 오른쪽으로 3군단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고, 무슨 공사를 하는 지 중심도로는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3군단야전병원은 홍천 철전리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래도 현리에는 군부대가 몇 개나 더 있었다. 이런 마을은 군부대가 먹여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경제가 군인들의 지출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토요일 주말이라서 그런지 사복차림으로 다니는 군인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나도 주말이면 저렇게 부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었지. 그런데 내가 근무했던 양구 방산은 너무 오지라서 외출을 나가도 딱히 갈 데가 없었다.
시간은 좀 이르지만 11시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돌아다니다보면 제 때에 식사하기가 힘들다. 여행 중 점심메뉴는 역시 자장면이나 라면이 안성맞춤이다. 특히 나 같이 장이 약한 사람에게는 탈날 가능성이 가장 적은 음식으로 가장 확실한 메뉴다. 중국집에 들어가서 간짜장을 시켰다. 역시 시골 간짜장은 맛있다. 이 집은 야구르트까지 준다. 진부에서도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중국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간짜장을 이렇게 맛있게 먹는 모습이 대견하다.
현리를 지나 진다리삼거리에서 인제로 나가는 31번 도로를 버리고 필례약수와 한계령을 향해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다니는 차량이 적은 길을 택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가리산천과 만나는 하추삼거리까지는 큰 계곡이 없는 전형적인 산촌마을로 봄 경치는 별로다. 가을에는 단풍이 설악산에 버금간다고 한다. 현리에서 한계령까지는 대강 26킬로 정도이고, 9킬로 지점에 귀둔마을이 있다. 바로 곰배골을 거쳐 곰배령이나 점봉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서쪽 거점마을이다. 야생화의 천국이라는 곰배령(해발 1,110미터)의 동쪽에는 강선마을과 진동(설피밭)이 자리잡고 있고, 남쪽으로는 진동계곡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점봉산(해발 1,424미터)이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정점에 솟아있다.
그런데 귀둔마을 상담교 부근에서 고개를 내려가는데, 카멜이 갑자기 왼쪽으로 기운다.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바퀴에 바람이 빠져 납작해졌다. 정말 남감했다. 어떻게 하지.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펑크를 수리해서 여행을 계속할까? 우선 히치하이킹을 해서 현리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대여섯 대가 지나고서야 겨우 한 대가 섰다. 들어보니 은퇴 후에 살려고 귀둔마을에 땅을 사두고 집을 지을 궁리차 서울에서 내려온 김사장님이었다.
물어보니 현리에 나가면 펑크를 떼울 수 있다고 한다. 걸어서 올 때는 2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차로는 20여분 밖에 안걸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자전거수리점에 찾아갔으나 주인이 포천으로 출장을 갔단다. 차를 태워주신 김사장님이 다시 귀둔으로 가보잔다. 다시 귀둔으로 되돌아가서 자동차수리점 사장님한테 사정 얘기를 하고 펑크수리를 부탁했다. 김사장님과 공업사 사장님 덕분에 카멜은 다시 굴러갈 수 있었다.
귀둔마을을 출발한 시간이 3시 30분이다. 2시간 정도를 지체한 셈이다. 다시 고개가 시작된다. 지도상에는 이름이 나와있지 않은데 800여미터쯤 되는듯하다. 고개를 넘어서자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계곡바닥이 지저분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강원도에서 이렇게 오염된 계곡을 본 적이 없다. 자세히 주위를 살펴보니 소물앙골 부근에 길 오른쪽 높은 곳에 축사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고, 축사에서 나오는 폐수가 계곡물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냄새도 축사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그 오염된 계곡은 가리산천과 만나는 하추리 입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축사 하나가 이렇게 깨끗한 계곡물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인제군청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또 그 축사주인은 과연 양심이 있는 사람인지도 궁금했다. 폐수처리비용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의 계곡물이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일찍이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지구는 우리 인간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는 있으나,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고. 오죽하면 “우리 인간만 사라지면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와 자연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다 우리 인간이 이처럼 탐욕스런 동물이 되었는지.....
우울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가리산천을 보자 다시 맑아졌다. 우리가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계곡물이 저렇게 맑을 수가 있는데. 강물과 바닥이 하도 맑고 하얘서 꼭 갓난 애기 얼굴을 바라보는 것 같다. 계곡물이 꽤나 넓다. 가리산천을 거슬러 좀 더 올라가자 삼거리가 나온다. 가리1교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가리산리를 거쳐 인제로 빠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인제교육청야영장과 필례약수를 거쳐 한계령 정상에 이른다. 나는 국토종단 도보여행에서 한계령이 하나의 구심점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시행착오였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한계삼거리까지 내려가는 16킬로는 차량이 너무 많이 다니는 도로이면서 갓길이 거의 없어서 보행자가 걸어서 다니기에는 너무 위험천만했다. 그래서 나중에 가리1교부터 덕적을 거쳐 인제까지의 산촌마을 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가리1교부터 필례약수까지는 정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맑은 계곡물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난 수해 때문에 계곡의 자연스런 모습은 크게 망가졌지만 수정처럼 맑은 물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군량밭까지 가는 길은 계속해서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여전히 비가 내려서 그렇게 덥지는 않다. 오히려 봄비가 몸에서 나는 열을 적당히 식혀주고 있다. 적당한 비는 도보여행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 길가에는 이쁜 팬션이 드문드문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비수기라 그런지 대부분 비어 있는 집들이다. 왼쪽에 자리잡은 인제교육청야영장도 텅텅 비어있다. 관리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비만 오지 않으면 들어가서 텐트를 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길 왼쪽으로 ‘푸른농원’ 민박이 보인다. 마을이름은 군량밭이다. 아마도 옛날에는 군량미를 저장했던 장소였었나 보다. 귀둔에서 카멜이 빵꾸났을 때 차를 태워준 김사장님이 추천해준 집이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걸음을 멈춘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선택을 잘했다. 여행 중에 대부분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집을 선택하면 밥을 공짜로 얻어먹기가 쉽다. 산중으로 들어올수록 더욱 그렇다. 비를 털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아들과 함께 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한참이나 나를 쳐다본다.
“지금 걸어서 오시는 건가요?”
“네.”
“이런 날씨에, 참 별난 취미를 가지셨네.”
“적당히 비가 내리면 오히려 걷기에 더 좋아요.”
“어디서 오세요?”
“어제 오후에 상남에서 출발했습니다.”
“추운데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주인아줌마가 난로가에 앉기를 권하면서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주신다. 여기 주인아줌마도 카멜이 유모차인줄 알았단다. 통나무로 지은 식당 안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약술들이 선반에 나란히 서서 색깔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내가 알 수 있는 술은 오미자주와 더덕주 뿐이었다. 주인인 황천오사장은 이 귀둔리 부근에서 4대째 살고 있단다. 젊었을 때는 인천에서 야채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여기 산지에서 싱싱하고 값싼 채소를 직접 가져다 팔아서 부근에 있던 가게들과는 경쟁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내를 설득하여 거의 반강제적으로 아버지가 살던 이 산골로 들어왔단다. 주인아줌마는 여주 출신인데 일이 너무 힘들어서 여기 산골생활이 싫다고 하신다.
저녁으로 삼겹살을 먹었는데, 예사 삼겹살이 아니다. 점봉산에서 기른 곰취와 취, 명아주나물(여기서는 명이나물로 불렀다)로 싸먹는 삼겹살이다. 곰취와 취의 신선한 산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명이나물의 담백한 맛이 삼겹살의 느끼함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오미자술이라니. 오미자의 달콤쌀콤한 향기가 그대로 술잔에 담겨있다. 잘 우러난 오미자주의 발그스레한 색깔이 일품이다. 눈까지 즐겁다.
이 정도면 천상의 밥상이 안부럽다. 내가 여행하면서 원하는 밥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지역에서 나는 채소로 만든 토속음식. 어쨌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나는 최고로 행복해진다. 몸 속의 에너지가 재충전 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상태, 그것도 레크리에이션의 하나이다. 이런 경우는 어떤 행위를 하는 과정이나 결과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할만한 감정상태를 중요시하여 정서적 레크리에이션이라고 한다. 운동처럼 몸을 움직이면서 즐기는 레크리에이션도 있지만, 이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정서적으로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끼는 레크리에이션도 있다.
아침 6시에 잠을 깼다. 내 방 뒤로 흐르는 냇가에서 들려오는 원앙새 소리에 잠이 깬 것이다. 어제 저녁에 인제청소년야영장 부근 도로 위에서 계곡물을 내려다보는데, 원앙새 한 쌍이 흥겹게 놀고 있었다. 역동교 부근의 작은 냇가에서도 원앙새 두 쌍이 내 발소리에 놀라 날아갔었다. 주인장인 황사장님 얘기로는 수해로 물난리가 난 후로는 원앙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난 원앙새만 보면 항상 죄의식을 느낀다. 몇 년 전 구정 때 시골에서 두 동생과 함께 엽총을 갖고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개울가에서 놀고 있던 원앙 한 마리를 동생이 쏘아서 죽인 것이다.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일어난 불상사였다. 나머지 한 마리는 어디론가 멀리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때 난 원앙이 사냥이 금지된 천연기념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렸어야 했다. 그런데 동생이 뭔가를 겨냥할 때 거리가 멀어서 그게 원앙인 줄을 몰랐다. 동생이 원앙이라고 말했을 때서야 쏘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동생은 개의치 않고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정말 황홀할 정도로 색깔이 아름다운 털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원앙을 보자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정말이지 동생놈을 주먹으로 흠씬 패주고 싶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다른 짝을 만나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부부 금술이 좋은 원앙이 바람둥이라는 사실은 아시는지. 행동생물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서양이나 동양에서 금술이 좋은 새로 알려진 백조나 원앙은 더 이상 일부일처제 동물이 아니다. 유전학 덕분에 기러기도 천하의 바람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침을 먹고 8시에 푸른농원을 출발하여 필례약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짐수레에는 식구가 더 늘었다. 오미자주 한 병과 명이나물 1킬로그램을 사서 카멜에 매단 것이다. 귀한 술과 나물이니까 친구들을 불러 함께 음미할 것이다.
필례약수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다. 약수터는 도로에서 왼쪽으로 300미터 지점에 있었다. 주위에는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약수가 나오는 샘은 정말 작았다. 소문에 비해 실망이 크다. 물도 얼마나 조금 나오는지 성수기 때는 한 모금 마시려면 꽤나 기다려야 할 거 같다. 다행히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약수터 주위에 종이컵이 몇 개 널려 있었고 담배꽁초도 있었다. 먹는 물 옆에 어떻게 담배꽁초 버릴 생각을 했을까?
지난 밤 사이 하얀 눈이 쌓여 히말라야 설산처럼 보이는 설악산 봉우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런 뜻밖의 행운은 길을 걷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다람쥐 한 마리가 길가에 서서 내게 무언가 달라고 손을 비비고 있다. 비스켓 두 조각을 던져주었다. 그러자 놀라서 저멀리 달아나서 다시 나를 뒤돌아본다.
필례약수부터 한계령까지는 상당히 힘든 오르막 코스다. 한계령이 920미터이니까 모리재나 운두령보다 100-200미터 정도 낮은 셈이다. 황사장님은 완만한 오르막이라고 했지만 전혀 달랐다. 이번 트레킹 과정에서 가장 난적을 만났다. 그렇지만 눈덮인 모리재와 운두령을 넘어서인지 그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힘은 들었지만 고개를 올라가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다. 해발 1천미터짜리 고개가 이 정도인데, 5천미터가 넘는 파미르고원이나 천산산맥은 어떻게 넘을 것인가? 이 생각에 이르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런 고개에 비하면 이런 고개는 내리막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또 참는 인내심과 절대 포기하지 않는 지구력을 기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몇 발자국 가다 쉬다 가다 쉬다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한계령길에 닿았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양양이고, 왼쪽으로 올라가면 한계령휴게소를 거쳐 인제로 가는 길이다. 왼쪽으로 저만큼 눈 앞에 한계령휴게소가 보인다. 휴게소 전경을 사진에 담았다. 까만 지붕의 한계령휴게소는 언제 보아도 참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누가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우라나라에서 드물게 보는 아름다운 집이다. 집 자체의 절제미와 검은 지붕 색깔 때문에 주위 경관과의 조화가 아주 자연스럽다. 단순하면서도 튀지 않는다. 한계령의 품에 안겨 편하게 쉬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좋은 풍경을 우리 사람들이 다 망치고 있었다. 휴게소 주차장은 봄나들이 나온 관광객들로 돗때기 시장이 따로 없었다. 이틀 동안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하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런 정신사나움이 내가 등산을 안다니고 트레킹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말 우리 인간만 없어지면 자연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다행히 식당 안 창가에는 야생화 분재가 열댓 개 놓여 있었고, 그 중 몇 개는 꽃도 피었다. 거기엔 내가 진다리마을에서 찍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도 있었다. 이런 야생화를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어수선한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점심으로 2천원에 3개 주는 호떡을 맛있게 먹었다.
여기서 인제까지는 29킬로이고, 오늘 종착지인 한계삼거리까지는 16킬로이다. 거기까지 줄곧 기분 좋은 내리막길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계령이 도보코스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갓길이 거의 없는데다가 커브를 돌 때 아래에서 올라오는 차가 시야가 가려서 걸어 내려오는 사람을 못 볼 위험이 많았다. 고개를 내려갈 때는 차를 마주보고 걷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려가는 내내 긴장하면서 아래에서 올라오는 차의 위치를 멀리서부터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차가 커브를 돌아 바로 내 코 앞으로 돌진하는 불상사는 미리 예방해야 하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을 때는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서 차가 지나갈 때까지 그냥 제자리에 서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훨씬 더 위험할 거 같다.
“왜 걸어다니세요? 힘들게. 자전거 타고 다니시지.” 장수대휴게소에서 쉬고 있는데, 장수대국립공원관리사무소 직원 한 분이 내게 물었다. “자전거 타는 거랑 걷는 것은 서로 달라요. 자전거는 많은 것을 놓치지요. 신경도 집중해야 하고. 걷는 것 만큼 여유가 없어요.”
오후 3시 반에 마침내 한계삼거리에 도착했다. 서울 가는 길과 미시령/진부령 가는 길, 한계령/양양 가는 길이 여기서 갈라진다. 교통안내소에 들어가서 버스 타는 곳을 물어보았다. 총각 순경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시내버스를 타고 원통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터미널에는 젊고 이쁜 아가씨들이 많았다. 강원도에서 그저께 어린 아이를 처음 본 것처럼 이렇게 젊은 아가씨들도 처음 보았다. 하도 신기해서 일부러 세어 보았다. 모두 열세 명이었다. 보아하니 군대 간 남친들 면회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 거 같았다. 일부는 남친과 다정하게 함께 서 있고, 일부는 아가씨들끼리 서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어떤 커플은 뭐가 잘못됐는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면회까지 와서 싸울 시간이 있나? 어쨌거나 이런 시골에도 저런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와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울 가는 버스가 터미널에 들어왔다. (2009년 4월 24일-26일).
교통
동서울에서 상남행 버스편이 있긴 하지만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일단 홍천으로 와서 홍천에서 상남행 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 한계삼거리에서는 서울 가는 버스가 없기 때문에 가까운 원통이나 인제로 나가서 버스를 타야 한다.
숙박
상남에서 한계삼거리까지는 관광지이기 때문에 모텔이나 펜션이 많이 있다. 내린천과 가리산천 주변, 필례약수 그리고 한계삼거리 부근에 많이 있다.
식당
상남에서 한계삼거리까지는 도중에 곳곳에 식당이 있다. 상남, 현리, 군량밭 푸른농원, 필례약수터, 한계령휴계소, 장수대휴게소, 옥녀탕휴게소, 한계삼거리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주변 관광지
내린천에서는 레프팅 등 수살레포츠를 즐길 수 있고, 귀둔리는 점봉산산나물축제로 유명하다. 하추삼거리에서 한계령까지는 도처에 멋진 계곡과 휴식처가 많다. 필례약수터도 유명하며, 한계령부터 한계삼거리까지는 전구간이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사계절에 관계없이 절경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