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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형의 넉넉함을 가진 사람 - 부산아이파크 김승현 | |
한국프로축구연맹 | 08.04.14 |
‘김승현’ 흔하디흔한 이름. 김승현이란 이름을 가진 유명인들을 손꼽자면 벌써 3~4명은 넘는다. 그렇다면 ‘축구선수 김승현’은 과연 얼마큼 알고 있을까? 프로 데뷔 7년차이지만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은 그의 얼굴과 이름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올 시즌, 부산에서 두드러진 활약으로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아직 K-리그가 시작 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점차 그에 대한 팬들의 반응도 들끓어 오르고 ‘올해의 재발견’이라는 칭찬도 쏟아지고 있다. 올 시즌 K-리그의 그야말로 핫피플인 ‘축구선수 김승현’을 부산아이파크 클럽하우스에서 만나보았다.
그 어떤 것도 나를 채울 수 없다면 내가 그것에 맞추는 것이 도리이다. 하지만 나를 채우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면, 설사 무언가를 잃는다 해도 그곳으로 흔들리는 게 도리이다. 그리고 그는 철없는 아주 어린아이 때, 이미 그 도리대로 행했다.
“처음에는 전라도에서 하는 육상대회에서 100M 달리기를 했었어요. 육상을 전문적으로 한 게 아니라, 그냥 한번 씩 대회 참가하는 것처럼 했었죠. 그러다가 장흥초등학교 축구부 감독님 눈에 들었죠. 선생님께서 ‘축구 한번 해보라고 해보지 않을래?’ 하시 길래, 저는 축구가 좋아서 선뜻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하기 시작했죠.”
“처음에 축구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반대하셨어요. 절대 축구하지 말라고 정말로 반대가 심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워낙 축구를 하고 싶어했으니깐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잖아요. 끝까지 부모님을 설득했더니 결국은 승낙해 주셨어요.”
“장흥초등학교 처음으로 전국대회 우승도 했었어요. 제1회 선수권대회에서. 그리고 그 축구부 멤버 그대로 장흥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어요. 워낙 초등학교 때부터 합숙하면서 손발을 맞추던 친구들이다 보니깐 중학교가서도 성적이 좋았죠. 중학교가서도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했었죠. 초, 중학교 때는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축구를 즐겼다.’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최초 우승이란 타이틀은 그 어린 아이의 팀이 전라도 지역의 초, 중학교 축구부 역사를 새로 썼다고 볼 수 있을 정도. 이런 승리의 기쁨은 그 어린아이를 더욱더 축구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축구를 좋아하던 아이에게 최대의 고민이 생겼다. 바로 본인의 키. 축구에 작은 키가 결점이 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축구를 그만둘 만큼 심각한 고민거리였다고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까지 키가 160cm였어요. 무척 작았죠. 그래서 고등학교 진학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운동을 그만 두려고 했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다 순천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는데, 키가 너무 안 크다 보니깐 저는 혼자서 이리저리 생각을 많이 했죠. 집에서도 저 운동 시킬 마음도 없으셨구요. 그래서 축구를 그만 두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당시 금호고 감독님이셨던 기영옥 감독님께서 1년 동안 한번 쉬어보라고 권하셨어요. 1년 동안 쉬면서 그래도 키가 안 크면 운동을 그만두더라도 그때 가서 그만두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고등학교 1년을 쉬었어요. 그런데 그 쉬는 동안 키가 18cm가 자라서 거의 180cm까지 되었어요. 그렇게 2학년 때부터 다시 경기를 뛰게 되었죠.”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 대전에 계시는 (고)종수 형이 3학년 선배셨어요. (고)종수 형이 있을 때는, 저희 축구부가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했었어요. 후배로 있으면서 (고)종수 형에게서 여러모로 많이 배웠죠. 그런데 제가 3학년 때는 우승을 한 번도 못 했었어요. 그렇게 초 중학교 때, 최초로 우승도 많이 하더니 고등학교 때는 전국대회 준우승 한번 했어요.(웃음)”
축구할 맛이 절로 나네
그는 ‘잘한다. 잘한다.’는 칭찬에 신이나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호남대로 진학한 그는 주위의 응원과 격려를 자신의 발판 삼아 더욱 좋은 기량을 선보였다. 그렇게 그는 대학시절, 화려한 경력들을 쌓으며 한국축구의 미래로 관심을 받기도 했다.
“제 친구들은 대부분 성균관대로 진학하기로 확정이 되었어요. 저 역시도 성균관대 가기로 확정되었었는데, 당시 중앙대 감독님이셨던 서현옥 감독님께서 호남대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호남대로 가게 되었어요.”
“호남대에서 추억들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에요. 그야말로 축구할 맛이 절로 난다고 해야 할까요? 골을 넣을 수 있는 찬스도 많이 왔고 또 그 찬스들을 잘 살렸어요. 제 포지션이 공격형 미드필더였는데 득점왕을 받은 적도 있었으니깐요. 험멜코리아배 2001 전국춘계 남여대학연맹전은 아직도 기억이 남아요. 준결승전에서 제 골든골로 아슬아슬하게 결승전에 진출했었거든요. 그런데 결승전에서도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아서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서 우승했었어요. 당시에 주장이었는데, 아마 우승팀 주장이어서 최우수선수상을 주지 않았나싶어요.(웃음)”
“대학 졸업하고 코 수술로 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했었어요. 그게 다친 게 아니라 코가 좀 막혀서... (웃음) 그때, 연락이 왔어요. 대표팀에 합류하라고. 그런데 기영옥 감독님부터 주변에서 말리셨죠. 한 달 동안 병원에 있었는데 무슨 대표팀이냐고 합류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은사님이 그래도 경험이라고 한번 들어가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특별히 기대한 것 보다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갔어요.”
“당시에 히딩크 감독님이 파워트레이닝을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한달 동안 운동을 쉬다보니깐, 몸이 제 몸이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했는데, 온갖 기초 체력에서 제가 다 꼴찌 한 거에요. 골키퍼들보다 더 못했었어요. 그런데 그게 다 신문에 난 거에요. 부끄럽게 다 꼴지 했다고. 그 때가 제가 호남대에서 연고로 전남에 입단할 때였거든요. 이제 막 신인으로 입단할 땐데, 저 나름대로 속상하기도 했어요.”
2002년 전남에 입단한 그는 K-리그 루키로서 모든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데뷔전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였기에, 그는 그 관심에 보답하듯 데뷔전부터 데뷔 골을 넣었다. 그리고 16경기에 3골이라는 그의 기록.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성적으로 프로 첫해를 마칠 수 있었다.
“초반에는 좋았어요. 개막전 때부터 데뷔전을 치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그 경기에서 골을 넣었어요. 경기 끝나고 너무 어리둥절하고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감도 안 오더라구요. 프로 첫해는 대부분 그렇듯이 정신없이 보낸 거 같아요.”
멈춤은 나에게 일어섬의 변주
대학에서부터 프로입단까지 줄곧 승승장구하던 그의 질주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프로에 입단 후, 기분 좋은 출발과 달리 그에게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어느덧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다. 팀 내에서 주전 선수로서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더니 결국 경기에 나서는 횟수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잦은 부상이 많았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일단 감독님 눈에 들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깐 경기에 출전하는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그렇게 슬럼프 한 번 빠지니깐 헤어 나오지를 못 하겠더라구요. 빨리 슬럼프를 극복했어야 했는데, 그 뒤로 스스로 관리도 잘 못하고 흥청망청 놀다보니깐 몸도 많이 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광주에 간다고 했어요. 경기를 못 뛰니깐 이럴 바에는 빨리 군대를 다녀오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지금 경남FC에 있는 박종우 선수와 함께 광주로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답답하게 상무에 있을 때는 많이 다쳤어요. 그래서 경기도 생각보다 많이 뛰지를 못했죠. 새롭게 출발하려고 간 거였는데, 아쉽죠.”
길어지는 슬럼프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스스로 최선의 결단으로 광주 상무행을 선택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내린 선택이었지만 광주에서도 그의 플레이를 보기는 힘들었다. 군대라는 색다른 곳에서 부상으로 경기까지 뛰지 못하는 상황.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오히려 광주에서의 군대 생활이 즐거웠단다.
“저는 광주에서 보냈던 생활이 어떤 생활 보다 재밌었어요. 처음에 군대 갔을 때는 완전히 다른 생활이다 보니깐 잠을 제대로 못자서 정말 힘들긴 했어요. 그런데 그 고비, 1년만 딱 넘기고 나니깐 재밌었어요. 밖에 있으면 선수들이 돈도 있고 조금 편하지만 군대 있으면 서로 선수들이 돈도 없고 힘들다 보니깐 서로 의지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힘든 상황이 되면 서로 서로가 힘이 되요. 그래서인지 저는 지금보다 더 정말 재밌게 광주에서 보냈어요. 그리고 선수들이 기억에도 많이 남아요. 제대하고 나와서 프로에서 광주상무에서 함께 했던 선수들 보면 반가워요. ‘아 저 선수, 같이 고생했던 선수였는데...’ 하면서.”
남녀사이 뿐만 아니라 감독과 선수 사이에도 소위 궁합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와 감독이라고 하더라도 서로의 궁합이 맞지 않으면 제 기량을 다 보여줄 수 없는 법. 2006년, 그가 다시 전남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없었다. 2006년과 2007년을 통틀어 13경기를 뛴 것이 그의 기록 전부였다. 부상도 아니었고 슬럼프도 아니었다. 단지 감독과의 궁합이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제대하고 전남으로 돌아왔을 때, 허정무 감독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저와 감독님의 스타일이 잘 맞지 않았어요. 제가 감독님 스타일에 맞추기에 조금 힘들었어요. 전남 팀 분위기나 스타일이 여러모로 저랑 맞지 않았죠. 그래서 또 감독님 눈에 들지 못해서 경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아시아챔피언스리그나 FA컵같이 중요한 경기 때는 꼭 출전을 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 . 그래서 더 속상했던 적이 많았어요.”
“축구를 하겠다고 다짐한 이후로 그 선택에 미련이 없었어요. 하지만 전남에 있을 때는 후회를 많이 했어요. ‘내가 과연 이렇게 까지 축구를 해야 하나.’ 할 정도로요. 축구선수가 축구를 못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속이 많이 상하는 일이니깐요.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처럼요.”
“그런데 전남에서 2군 감독님 및 코치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여기서만 축구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힘내라고. 형들이랑 후배들 그리고 구단 관계자분들이 '넌 어디 가서도 잘할 수 있어.' '너는 가능성이 많은데 너무 안타깝다.' 이렇게 말씀해주시면서 잘 챙겨주시니깐 너무 감사했죠. 그런데 아쉽게도 기량에 비해 제가 전남에서 보여주지 못한 게 너무 많으니깐 죄송하고 아쉽고 그래요.”
몸과 마음은 그라운드를 벌써 휘젓고 다니는데 두 발은 그라운드 밖에 묶인 채 동동 구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속 앓이만 하고 있으니 알게 모르게 자격지심도 생겼을 터. 하지만 그는 억누르고 참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렇게 안타까움과 답답함에 지쳐 쓰러져 가고 있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매번 넘어지더라도 그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낭떠러지는 아니니깐.’
“저는 힘들어도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냥 무덤덤하게 있어요. '이번에도 너 경기 못뛴다.' 이래도 저는 평소대로 "아 ~" 이러면서 받아들여요. 오히려 주변 분들이 안타까워하시더라구요. 저 뿐만 아니라 그런 선수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힘들다고 해서 다른 것에 의지하고 조금만 나쁜 길에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올 수 없이 더 도퇴된다고 생각해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기대만큼 보답하리라
전남에서 태어나 광주 상무시절을 제외한다면 줄곧 고향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그. 하지만 부산과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06년 시즌이 끝난 뒤, 부산에서 그에게 영입 제의가 왔었다
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전남과의 계약이 남아 있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부산행을 불발이 되었다고. 당시 경기를 출전하지 못하던 터라 속이 더 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올해 그는 결국 부산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그것도 황선홍 감독의 요청으로.
황선홍 감독이 부산 아이파크의 새로운 사령탑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영입한 선수가 바로 김승현이다. 이 정도면 황선홍 감독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황선홍 감독은 김승현을 ‘평가가 절하된 선수’라며 그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었다. 그리고 전남 드래곤즈 코치 시절, 묵묵히 열심히 노력하는 김승현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2003년도에 제가 경기를 제대로 뛰지 못하고 있을 때, 황선홍 감독님이 당시 전남드래곤즈 코치님으로 계셨어요. 황선홍 감독님께서 당시에 저를 잘 챙겨주시고 신경을 많이 써 주셨어요. 제가 안되보였나봐요.(웃음)”
“부산으로 오기 전에, 약간 부담스러웠어요. 황선홍 감독님께서 어떤 기대를 하고 계시는지 알기 때문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렇지만 저는 무조건 왔어야 했어요. 감독님께서 저를 원하신다고 오라고 하시는데 조건 없이 오는 게 맞죠.”
그는 요즘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주는 은사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올 시즌 K-리그에서 그의 활약은 종횡무진이다. 지난 3월 9일 열렸던 전북 현대와의 홈 개막전에서는 승리를 확정짓는 역전골을 기록하며 부산의 시즌 첫 승을 선사했었다. 그리고 3월 16일에 펼쳐졌던 대구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비록 패하긴 했지만, 2-1로 앞서나가는 골을 성공시켰다.
“전북현대와의 홈 개막전 때 골이 들어갔을 때는 진짜 좋았어요. 그 말 이상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좋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좋았어요. 감독님의 첫 승이었고 홈에서 개막 승이었고. 솔직히 선수들뿐만 아니라 황선홍 감독님도 걱정이 많으셨어요. 저희 팀이 개막전 때 정비도 덜 된 상태였거든요. 그리고 아직까지 강팀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선수들이 다 한 마음으로 뭉쳐가지고 승리를 만들어 냈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죠.”
김승현은 벼락같은 스타덤이 아닌, 나날이 진보하는 '일신우일신'의 미덕을 가진 선수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라운드 중심에서 관중을 열광시키고 있는 선수이다. 4월 벚꽃의 진한 향기처럼 참으로 오랫동안 팬들의 마음속에 진하게 남아 있을 그의 플레이가 계속해서 기대해 본다.
“처음이라고 생각하고, 초심의 마음을 가지고 팀에 도움이 되어야죠. 부산에 있는 한, 팀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경기장에 직접 오셔서 달라진 부산을 한번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저를 믿고 응원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제 제가 가지고 있는 기량을 팬들에게 더 많이 보여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K-리그 명예기자 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