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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예로부터 ‘글과 그림은 같다’는 ‘서화동법’의 문인화 전통과 함께 인품(人品)을 중요시했다. 작품에 인품이 우러나야 품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 전통을 가장 잘 지킨 인물로는 단원 김홍도와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특히 단원은 신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정감어린 서정과 함께 높은 인품을 드러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재능과 함께 인품이 동양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소리를 그린 화가를 아는가. 깊어가는 가을밤, 앙상한 나뭇가지에 잎들은 다 떨어지고 소슬한 가을밤 소리가 한없는 적막감을 자아낸다. 갈필(渴筆)로 휙휙 낙엽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단원(檀園)은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른 속도로 그리고 있다. 둥근 달이 희미한 빛을 발하는 창백한 화면은 여기저기 스치는 검은 소리와 어울려 마치 구스타프 말러의 흐느끼는 듯한 암울한 현(絃)의 선율을 듣는 것 같다. 집 안에 단정히 앉아 앞마당 달빛과 가을의 소리에 응시하고 있다가 손님이 왔다는 머슴의 소리에 고개를 돌린 노인은 바로 단원의 마지막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죽음의 손님인가. 2m가 넘는 이 작품을 그린 바로 그해에 김홍도는 세상을 떠난다. 나는 김홍도 말고는 바람을 그린 화가를 아직 보지 못했다. 게다가 바람소리에 쓸쓸하고 적막한 마음을 실은 화가도 보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의 심정을 자전적(自傳的)으로 표현한 화가도 그리 흔하지 않다. 화원으로서 정조(正祖)의 측근에서 파격적인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는, 정치와 문화의 과감한 개혁을 끝내 완수하지 못한 채 정조가 180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은 이후, 온갖 수모와 가난 속에서 5년 만에 병사(病死)한다. 경주에서 보낸 4년이란 세월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순(耳順)이 되기 전 하늘이 나에게 내린 은총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난해는 내 생애에서 가장 격동(激動)의 해였으며 동시에 풍성한 해였다. 그리고 하늘의 눈부신 은총은 계속 나를 비쳐주었다. 귀중한 4년 동안의 체험을 대학 강단에서 학문으로 되살리고 글로 남기게 되었으니까. 경주에 있으면서, 내 학문은 물론 내 생(生)의 완성을 위해 경주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썼는데, 이제 새해를 맞아 서울에서 더 높은 차원에서 그 말을 되풀이할 수 있게 되었다. 신(神)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이 회색의 서울에서 그 투명하고 밝았던 서라벌 들녘의 공기를 매일 마시고 있다. 서라벌의 그 빛과 산하와 예술을 모두 내 마음에 담아왔기 때문이다. 서라벌에서 사는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이해하게 되었고 중국을, 그리고 중앙아시아, 인도, 그리스, 로마 등 온 세계를,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 인생은 온통 우연 아닌 것이 없지만 그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노력은 내 스스로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 지구의 역사에 한 발자국이라도 내 자취를 남겨야 할 것이 아닌가. 아무리 인생이 허망하다고 하더라도. 경주의 산하(山河)는 정말 청아(淸雅)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 산하에 수많은 고귀한 예술품들이 어울려 있어서 그러함에 틀림없다. 아침 저녁 출퇴근길에 보고 또 보고, 주말이면 카메라를 등에 지고 산을 넘고 내를 건너는 동안, 나를 매혹시킨 것은 철따라 시간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산하의 빛이었다. 나는 불상이나 탑들이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또 다른 빛을 띠고 있음을 알고 나서 같은 유적이라도 자주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한 유적 슬라이드만 수백 컷이 됐다. 한 풍경(風景) 속에서 유적은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산수(山水)란, 계절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그날 그날 다르고 아침·낮·저녁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순간마다 다른 빛과 모습을 찍느라고 나는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그러는 사이 불상과 탑은 나무나 돌 같은 사물로 변해 버렸다…. 나무, 산, 그리고 오솔길의 빛을 찍기 시작하면서 더욱 바빠졌고 지쳐버리기도 했다. 때때로 카메라가 없었으면, 카메라로부터 자유스러워졌으면…. 그러나 카메라는 ‘순간’의 모든 것을 찍는 것, 사물의 천기(天機)는 한 찰나에만 나타낼 뿐. 차츰 카메라는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이 모든 앵글과 모든 빛의 심상(心象)의 깊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흑백(黑白)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유가 생기고 한가(閑暇)해지며 사물을 관조(觀照)하게 되자 내 마음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 흑백(黑白)이란 바로 먹(墨)으로 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을 통한 심상의 깊이 표현 최근 나는 친구의 권유로 장파(張法)가 쓴 《중서학(中西學)과 문화정신(文化精神)》(우리나라에서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이라 제목을 고쳐서 번역출간)을 읽고 많은 것을 배웠다. 참으로 좋은 책이다. 중국에서 이런 책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경하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서양미학과 동양미학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른가를 극명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의 미술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 미술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미술을 공부해야 한다. 서화(書畵)에 비하면 불교조각은 그리스·로마와 인도의 영향을 받은 외래적인 성격이 강한데, 거기에서 얼마나 중국적인 것이 실현되었는지 살피고 있는 중이다. 다만 모두가 과도기양식으로 보는 북제(北齊)와 수(隋)의 추상화(抽象化)의 완성을 나는 중국적인 성격의 완성이라고 보고 싶다. 그토록 시시각각 다르게 보이는 자연을 내가 여러 앵글에서 살핀 것을 한번에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동양화에서만 가능하다. “중국화가는 실컷 돌아다니고 실컷 보며 한걸음 한걸음 옮기면서 그 면면(面面)을 살피고, 그렇게 유람(遊覽)하며 충실히 수양을 쌓아 아름다운 산과 강이 가슴속에 역력해지면 그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그려 낸 것이다”라고 장파는 정리하고 있다. 서양화에서는 야외에 이젤을 세워놓고 자연을 직접 상대하여 초점투시(焦點透視)로 자연을 사생(寫生)하지만, 중국화에서는 그런 일이 결코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이른바 진경산수(眞景山水)도 우리의 산천과 사람이 그림에 나타났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표현방법은 여전히 산점투시(散點透視)의 방법이다. 곽희(郭熙)의 삼원법(三遠法)은 산점투시의 카테고리에 든다. 겸재의 광대한 〈금강전도(金剛全圖)〉는 산점투시법으로만 가능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민화(民畵)야말로 때때로 산점투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서양식 초점투시에 의한 엄밀한 사생(寫生)은 동양화에는 없다. 첫머리에 나는 김홍도의 아마도 절필(絶筆)일 가능성이 많은 〈추성부도(秋聲賦圖)〉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글씨나 그림솜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품(人品)이며 그림에 인품이 우러나야 품격(品格)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화가들 가운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 보인 표현주의적(表現主義的)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정선(鄭敾)이나 이인상(李麟祥), 김정희(金正喜) 등이 고결한 선비정신을 나타냈으나 김홍도처럼 정감어린 서정적(敍情的)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림을 보고 어떤 경우든 ‘아, 이 작가는 생(生)의 마지막 경지에 도달했구나’하고 느껴지는 작가는 고흐, 호틀러, 고갱, 마티스 등 서양에는 많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생역정에 따른 마음의 변화가 그대로 그림에 반영된 작가를 한 사람 뽑으라면 단연 김홍도가 아닐까. 그림에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예술의 원리지만, 우리나라같이 화가를 천시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김홍도는 그 선비다운 인품 때문에 비록 미천한 화원이었지만 임금의 은혜를 입었고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필적을 모은 유고집 《단원유묵화첩(檀園遺墨畵帖)》을 불교경전처럼 귀중하게 여기라는 홍현주(洪顯周, 정조의 사위이며 뛰어난 문장가)의 말은 결코 과찬이 아니다. 서화가이며 시인인 조희룡(趙熙龍)은 그를 가리켜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신선과 같다”고 했다. 시인 홍신유(洪愼猷)도 “생김 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의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이와 같은 고로 그림 역시 그와 같다”고 했다. 단원의 스승이며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은 물론 평론가로서 당시 예원(藝苑)의 총수(總帥)라 일컬어졌던 강세황(姜世晃)이 단원을 평하기를 “얼굴이 준수하고 마음가짐은 깨끗하여 보는 이는 모두 그가 고상하여 속세를 넘어섰으며, 시중거리에 흔한 자잘한 무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 그는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 젓대며 시(詩)와 문장에도 그 묘(妙)를 다했으며 풍류가 호탕했다. … 그의 거처는 책상이 바르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으며 계단과 뜨락이 그윽하여 집 안에 있으면서도 곧 세속을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든다”고 썼다. “사람들은 글씨와 그림이 본래 두 갈래가 아님을 참으로 알지 못한다. … 그러므로 글씨에 능하면서 그림을 하지 못하면 곧 그 폐단이 고루한 것이며, 그림에 능하면서 글씨를 하지 못하면 즉 그 폐단은 속되다고 한다. 이 두 가지를 겸한 이는 바로 단원뿐인가. … 이 서첩은 단원의 그림이라고 일러도 역시 가할 것이다”라고 홍우건(洪祐健)은 유묵첩에 썼다. 이렇게 입을 모은 찬탄의 말에서 단원은 고매한 문인의 한 전형으로 떠오른다. 이처럼 많은 문인 사대부들은 단원의 인품과 글씨와 그림이 일치함을 보고 그를 사랑하고 찬탄했던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서양의 천재(天才)란 개념이 과연 동양에도 있는가 생각해 왔다. 서양의 천재란 동양의 군자(君子)와 다르고 고사(高士)하고도 다르다. 그런데 서양의 천재는 도덕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하다. 동양에는 신동(神童)이라는 것이 있으나 어린 나이에만 한정하고 있다. 군자나 고사는 오랫동안 배워서 닦은 노인의 모습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인품(人品)을 중요시하여 왔다. 그런데 문인(文人)이 그렸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 문인화(文人畵)라고 할 수 없다. 문인이라고 해서 모두 인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인이라는 이유로 서툰 솜씨를 관대하게 대해 주어도 안 될 것이다. 청대(淸代)의 진형락(陳衡恪)은 “문인화의 요소 가운데 첫째는 인품이요, 둘째는 학문이며, 셋째는 재능이고, 넷째는 사상인데, 이 네 가지를 갖추면 가장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학문과 사상은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나는 인품·학문·재능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원은 비록 학문을 이루지 못했지만 인품이 고매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니 그의 그림이 문인화의 성격을 때때로 강하게 띨 수 있었다고 하겠다. 물론 모든 화가가 서법(書法)을 익혔을 것이나 특히 단원처럼 여러 글씨체(體)에 능할 뿐 아니라 글씨(書)의 원리를 그대로 그림에서 고집스럽게 지킨 경우는 드물다. 그의 그림들의 바위·나무·사람(의 옷 표현)은 완전한 글씨의 획들로 결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품을 중요시한 전통
그는 〈수석소림도(秀石疏林圖)〉에 화제(畵題)를 쓰면서, “바위는 비백(飛白)과 같고 나무는 주(대전(大篆)을 말함. 주(周)나라의 주가 정리한 문자로 소전(小篆) 이전의 문자와 서체를 말한다. 대전의 대표적인 예가 석고문(石鼓文)이다)와 같으며 대나무를 그릴 때는 팔법(八法)(영자팔법(永字八法), ‘永’자(字)에 여덟 가지 기본적인 획들이 간결하게 집약되어 있음)을 통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이가 이와 같은 것을 능히 알고 있다면 글씨(書)와 그림(畵)이 본래 같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의 여러 서체(書體)는 사물의 형상을 추상화한 것이므로 본래부터 글씨와 그림이 하나였음을 안다면 그의 주장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법(書法)이 발달하고 확립되면서 획의 질(質)을 그림에 그대로 살려야 한다는 것은 시대에 따른 새로운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즉 글씨의 필법을 그림에 옮겨 오묘함을 다했고, 화법을 서(書)에 옮겨 정신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씨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글씨가 있다는, 단원의 글씨를 보고 말한 것은 조맹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단원의 현존하는 최초의 그림 〈신언인도(愼言人圖)〉와 최후의 그림이라 여겨지는 〈추성부도(秋聲賦圖)〉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인물화·산수화·풍속화·화훼영모·사군자 등 모든 화과(畵科)에 걸쳐 그는 서법의 원리를 일관하고 있다. 그 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봉(中鋒)이다. 그것은 붓의 뾰족한 끝이 바로 심(心)이요, 그것이 획의 한가운데를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봉으로 획을 그을 때 그 획은 중량감을 갖게 되고 입체감을 띠게 되어 생명력(氣)을 발하게 된다. 그리고 한 획은 속도를 조절하며 지면(紙面)에 각인(刻印)하듯 반드시 세 번 멈추며 그어야지(三轉折) 단번에 그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획에 호흡(氣)과 힘(生命力)을 유지케 하기 위한 것이다. 깊은 호흡과 힘은 같은 것이다. 그래야 획은 견고함을 유지하며 무한히 계속 나아갈 수 있다. 동양 그림에서 이야기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기(氣)는 바로 ‘호흡’을 뜻한다. 그리고 삼전절(三轉折)은 말 그대로 평면적으로 미세한 꺾임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종이 속으로 깊이 세 번 뿌리내리며, 한 획을 긋되 새로이 시작하는 세 획이 내면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단원 그림을 자세히 보면 획 하나하나가 이러한 중봉(中鋒)과 삼전절(三轉折)의 원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화일치(書畵一致)를 결연하게 실천한 대표적 문인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다. 그는 〈부작난도(不作蘭圖)〉에 쓰기를, 난초를 20년 동안 안 그리다가 우연히 그렸는데 비로소 그 난의 본성을 나타내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 그 이전에 그렸던 난초보다 더 못해야 할 것인데 그 난초 그림은 우리나라뿐만아니라 동양에서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어찌해서 그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20년 동안 결코 난초를 그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난초를 그리기 위해 글씨를 써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찍이 그는 난초 그리는 법은 예서(隸書) 쓰는 법과 가깝다고 했고, 아예 화법(畵法)이 아니라고 했다. 난초를 안 그린 지 20년, 그러다가 우연히 그린 것이 바로 〈부작란도〉다! 그리하여 이것을 유마(維摩)가 내보인 불이선(不二禪)의 경지에 빗댔으며, 끝에 쓰기를,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의 기이한 문자를 쓰는 법(초예기자(草隸奇字)의 법(法))으로 난을 그렸는데 세상사람들이 어찌 알 것이며 어찌 좋아할 것인가 했다. 그러니 오히려 ‘우연히’가 아니라 오히려 득의(得意)를 얻어서 ‘난초를 썼으며’ 그림이 이루어지기까지 내밀(內密)의 과정을 그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의 오만함이 ‘우연히’란 말로 내 가슴을 친다. 그는 이 난초를 그리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끊이지 않았으며 서법(書法)을 닦음으로써 ‘필연적으로’ 난(蘭) 그림이 탄생된 것이다. 그러면서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낸, 그의 희열에 찬 작품이라고 스스로 쓰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그림은 오직 한 번 있는 것이지 다시 그릴 수 없다고 역시 쓰고 있지 않은가. 글씨와 난 그림은 말 그대로 무애(無碍)의 경지다. 난을 계속 그린다고 난을 잘 그리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초예기자(草隸奇字)의 법(法)’은 동기창(董其昌)의 말이다. 그 당시 문인들은 그 말을 모두 알고 있는 터였으니 오히려 더 자신만만하게 그 원리를 터득하고 실천했음을 피력한 셈이다. 탈속한 분위기의 시정(詩情) 이러한 김정희의 산정(山頂) 분위기에 비하면, 미천한 화원이면서 그 높은 인품과 그것이 그대로 드러난 글씨와 그림을 그려 당대에 주변의 사랑을 받았던 단원의 그림에서는 뜻은 높되 신분의 제약을 받은 탓인지, 소쇄(瀟灑)한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적막감이 돌고 쓸쓸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데 말년에 가까워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관음도(觀音圖)〉와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의 그림이 보여주는 자유자재한 필획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형(形)을 떠난 절대의 획들로 단원 독자의 경지라고 보인다.
바다 물결을 보라. 물결만 보면 전혀 물결이 아니다. 약간 푸른 담묵(淡墨)으로 무질서하게 그린 듯하나 출렁이는 파도를 자유자재로 그리고 있다. 형태 없는 몇 가닥, 말 그대로 무애(無碍)의 획들로 구성되어 있다. 관음의 옷자락도 구불구불 전혀 옷주름으로 보이지 않는 절대적 획들로 구성되어 있다. 짙고 엷은, 굵고 가는 획들이 서로 어우러져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은 신운(神韻)이 돌고 있다고나 할까. 이 획들은 전혀 어떤 사물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이처럼 형태를 해체하여 다시 재구성한 단원의 솜씨는 가위 입신(入神)의 경지다. 전율하는 듯한 획들이 모두 중봉으로 그어져서 엷지만 힘이 있다. 화면 오른쪽에 쓴 단원(檀園)이란 글씨는 중후하고 막힌 데가 없어 서법이 무르익고 있다. 〈염불서승도〉의 그림도 같은 솜씨다. 서방극락정토에 태어나길 바라는 단원의 소망이 깃들여 있다. 뭉게뭉게 흐르는 구불구불한 구름은 구름이 아니다. 물결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흐르는 구름을 더없이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구름 위에 연꽃을 탄 노승(老僧), 연꽃을 나타낸 자유자재한 솜씨를 보라. 여러 연꽃송이와 잎들은 이미 형태를 떠나 구름과 노승의 옷자락과 어울린다. 몇 개의 굵은 농담으로 처리한 가사자락도 이미 형태를 떠나 있다. 자유로운 필획들은 참으로 눈부실 정도다. 단로(檀老)라고 화면 오른편 끝에쓴 글씨도 〈관음도〉에서처럼 중후하고 견고하여 명필이다. 단원은 그림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과감히 형태를 해체하여 글씨에서 습득한 단원 나름의 기운생동의 필획을 구성할 뿐이다. 그의 그림은 모두 글씨의 선묘(線描)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사물에서 자유로워져서 무애 상태에서 노니는 단원의 노경(老境)의 그림들을 나는 특히 사랑한다. 그가 일생을 통해 일관한 것은 김명국(金明國)이나 이인상(李麟祥)의 그림처럼 그의 그림에서 서법을 철처히 지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 자신이 직접 시(詩)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탈속(脫俗)한 분위기의 시정(詩情)이 가득하다. 《을묘년 화첩(乙卯年畵帖)》이나 《단원절세보(檀園折世寶)》(《병진년 화첩(丙辰年畵帖)》이라고도 함) 같은 것은 각각 그 한 첩이 곧 한 권의 시집(詩集)이다. 그림에 시와 글씨가 완벽하게 어우러져야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자신의 인품과 심정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민족의 모습과 마음을 담아내 그 익살스러운 천성을 마음껏 나타냈으며, 음악과 함께 살아서인지 화면에 조선음악의 한없는 유장(悠長)함이 넘쳐 흐른다.
문일평(文一平)의 말대로 참으로 그는 조선의 화선(畵仙)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