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요한복음 6 : 66 - 69
기독교는 영생을 얻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모두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를 믿어도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 중에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는 말씀에 제자와 “열두 제자에게”(67)란 제자라는 말씀은 똑 같은 제자이지만 실상은 영생을 얻지 못한 제자와 영생을 얻은 제자로 나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나고 열두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67)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너희 중에도 한 사람은 마귀니라”(70)는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도 가룟 유다도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을 얻을 수 없는 믿음은 표적을 보고 믿는 제자들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였습니다(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큰 무리는 남자 어른들만 오천명 정도라고 하니까 남녀노소 모두 일만오천명은 더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큰 무리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먹고도 부스러기가 열두 바구니가 남는 이적을 행하신 것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한 것은 오실 메시야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오실 그 선지자라’고 고백한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의 부스러기가 남도록 행하신 이적을 보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표적(기적과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신유집회를 한답시고 능력있다는 분으로부터 안수를 받고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물며 짧았던 다리가 길어졌다고들 합니다. 병원에 의사가 고치지 못한 암덩어리가 기도해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적을 보고 예수 믿는 것은 영생을 얻지 못하는 불완전한 믿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기독교는 표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믿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는 말씀에서 분명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었던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는 예수님과 다니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던져졌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구원 받을 수 없는 믿음은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라고 했습니다(26). 이 말씀은 예수 믿는 목적이 물질적 축복을 받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면서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면 장사도 잘 되고, 농사도 잘 되고, 취직도 좋은 데 할 수 있고, 월급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복 주시면 이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습니다. 소득도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바라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라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라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그 부모도 아는데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느냐고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7,4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51)고 하시니까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고 하며 영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것도 단순하게 무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에 대한 오묘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큰 무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행하신 표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 내린 만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영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지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고 하며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 제자가 되었지만 배부른 까닭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은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축복을 받고 체험했지만 결국 자기 죄값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표적을 보고, 배부른 까닭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 중에 큰 무리가, 많은 제자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분석해 보면 오늘 우리에게 무서운 경종을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큰 무리를 이룹니다. 그러나 큰 무리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을 분석해 볼 때 과연 영생을 얻게 될 성도가 얼마나 될까? 한번 생각해 보면 끔찍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말씀으로 설교하는가를 분석해 보면 표적과 물질의 복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유와 기복적인 신앙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바라는 것 역시 표적과 기복적인 것을 더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바라는 바를 충족해 주기 위해 영생을 얻는 진리를 가르치기보다는 표적과 기적을 가르치고 물질적인 축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누구가 기도해서 무슨 병을 고쳤답니다. 확인이 잘 되지도 않는 그런 것을 사실인양 외칩니다. 누구는 십일조를 십이조, 십삼조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답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외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은 위험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큰 무리가 다 떠나고 열두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게 실패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열두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돌아간 큰 무리들 가운데는 세상적으로 베드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 사람도 있을 것이며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고백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이야 말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참된 성도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표적을 보았고 또 그 떡을 함께 먹었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을 듣고 이해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것을 믿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바른 신앙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의 지혜나 지식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신바가 있습니다(마16:17).
이러한 고백을 했다고 해서 완전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고백했음에도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두려워 도망했고, 베드로는 부인도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고기 잡으러 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끝까지 버리지 않고 친히 찾아와 주셨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오늘의 성도들 역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였다고 해서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다가 실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생의 말씀을 믿고 고백한 성도는 예수님이 버리지 않습니다. 실족하였을지라도 그곳까지 찾아오셔서 일으켜 주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영생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생의 말씀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이 오묘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말씀을 들었을 때 영생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떠난 무리들처럼 영생을 얻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표적과 떡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라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믿는 종교입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로마 사람이지만 말씀을 믿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로부터 파송을 받아 가버나움의 치안을 책임을 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그 종을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으로 가고자 했지만 백부장은 예수님께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7:7)라고 말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이 이렇게 말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백부장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의 집에는 우상 제단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병든 하인이 낫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말씀의 능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7:9),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영생의 말씀이 있는 종교입니다. 선포되는 이 설교 말씀은 영생을 얻게 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불행한 것은 오늘의 교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하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외치고 기복적인 말씀만을 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제자들에게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귀가 열려야 합니다. 말씀에 감동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씀을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말씀이 아니라 영생을 주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제자들처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영생의 말씀이 주는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