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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아정과 척화비 유감
산청 다운타운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여 두 밤을
편하게 해준 고마운 산청온천랜드를 떠난 시각은 아침 6시 반경.
산청초등학교 학생들이 몰려들기 전에 학교를 둘러보려고 그랬다.
이 학교는 지금은 없는 비운의 환아정(換鵝亭) 터란다.
또한 1908년에 민족교육의 장으로 태어난 계명학교가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에 의해 공립으로 전환되어 이 정자에서 시작했단다.
환아정은 이조 태조 초(1395년경)에 산음현 현감 심린이 창건하였다
하나 신빙성이 약하다.
고려말~이조 초기에는 감무(監務)가 파견된 작은 현이었으니까.
진(晉)국 왕희지(王羲之)의 백아환자(白鵝換字)에서 땄다는 이름의
환아정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이후 복원과 중수를 거듭하며 산청의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는데 건립시기가 대수겠는가.
다만, 1950년에 전소된 정자를 복원하려는 군민들의 강렬한 염원에
반해 현실적 애로들 때문에 진척이 여의롭지 못하단다.
그 터에 들어선 학교 교사 때문이며(철거할 수 없고) 복원터를 따로
물색하는 것 또한 이론이 분분하다니까.
옛 환아정과 복원 조감도(1. 2 전재), 산청초교(3)와 척화비(4)
학교 교정에는 도유형문화재 제294호인 '척화비'(斥和碑)도 있다.
고종3년(1866)과 8년(1871)의 병인(丙寅),신미(辛未) 두 양요(洋擾)
를 치른 흥선대원군이 서구세력의 단호한 배척을 온 나라에 널리 알
릴 목적으로 전국의 중요 지역에 세우게 한 비석이다.
화친(和親)을 매국(賣國)으로 몰고, 쇄국정책을 확고하게 밀고 나가
겠다는 대국민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환아정 뜰에 세웠는데 일제가(?) 두 조각내어
땅에 묻은 것을 학교 교사 신축때 발견, 현 위치에 복원했단다.
주목되는 점은 병인년에 만들어 놓고도 5년 후인 신미년에 세웠다는
점이다.(丙寅作 辛未立:비문)
병인년, 고전 끝에 프랑스군을 물리친 대원군은 쇄국정책 의지를 더
강화해 갔다.(약탈당한 외규장각 문서 등은 현재에도 현안이지만)
아마, 그래서 그 때 척화비를 만들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한데, 5년을 뜸들이다가 세운 까닭은 무엇인가.
신미년, 미국의 침략(?)이 없었다면 척화비는 유야무야 됐을까.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그가 쇄국정책을 접고 과감하게 친서구정책을
폈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20C 극동의 정정은 전혀 다르지 않았을까.
한반도가 겪어야 했던 질곡의 역사도 물론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21C의 현실 또한 달리 전개되고 있지 않을까.
오호 통재라!
괴상한 사대주의
이른 아침, 척화비 앞에서 부질없는 상념에 잠겨있던 늙은 나그네는
참새떼처럼 조잘대는 아이들에 놀라 자리를 떴다.
학교와 담장 사이인 경호강가 동산의 수계정(脩稧亭)으로 올라갔다.
환아정 복원 중수때 수계정, 세연정(洗硯), 소록정(瀟漉), 도사관(道
士館), 사경각(寫經閣), 구향관(口香館) 등도 건립했다 하나 내가 서
있는 수계정 외에는 건립시기와 상존(尙存) 여부를 모르겠다.
수계정은 애초 건립 목적이 어떠하던 산청읍내는 물론 경호강 따라
펼쳐지는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 좋은 위치에 있다.
수계정(1)과 생초 경호강변의 경호정(2)
곧 산청땅을 떠나게 되는 시점에서 산청의 이틀을 돌이켜 보았다.
산청은 중국의 이미테이션(imitation)인가.
뫼(山), 땅(地), 골(谷), 내(江), 정(亭), 당(堂), 루(樓), 대(臺), 각(閣),
재(齋), 관(館), 헌(軒) 불문하고 이름 대부분이 중국에서 왔다.
중국의 산과 강, 계곡, 지형을 닮았다 해서 그 이름들을 통째로 수입
하고 그 안의 이름까지도 그대로 베껴 붙이다니.
아무리 중화사상에 순치(馴致)되어 있다 해도 산수까지 숭화(崇華)
하다니 너무 하지 않은가.
산음인들이 이처럼 중국의 산수에 매료돼 있는데 우리의 풍수대가
이중환은 왜 산음땅을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평가절하했을까.
안음(현 함양군 안의,·서하,·서상과 거창군 마리,·위천,·북상 등의 면),
거창, 함양, 산음 등 지리산 북쪽 4고을의 땅이 모두 기름지다면서도
산음만은 "음침하여 살 만한 곳이 못된다"고 했으니.(택리지)
알프스의 설원과 초원은 장쾌하고 아름답다.
대관령~선자령 역시 그러하다.
한데, '한국의 알프스'라고 표현해야 느낌이 제대로 생성되는가.
간월산~신불산~영축산으로 이어지는 대평원은 낙동정맥의 백미다.
굳이, '영남의 알프스'라고 말해야 실감이 가는가.
그러니까, 산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다만, 산청이 지나치다는 것일 뿐.
우리는 대대로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우리의 강산은 참으로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자연이란 원천적으로 비교의 대상이 아닌 천혜의 자원이기는 하나,
우리의 자연은 어느 나라와도 비교될 수 없도록 독특하고 수려하며
앙증스럽다.
내 비록 과문(寡聞)이기는 해도, 내가 본 해외의 어느 산수도 규모가
클 뿐 우리의 것을 따를 수 없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외국나들이가 용이치 않은 시절에 해외출장 또는 유학의
특권(?)을 누린 층들에 의해서 우리의 강산은 자꾸 비하되었다.
내 나라의 빼어난 산수에는 무지한채 외국 것만 침이 마르도록 치켜
세우는 찬외비내(讚外卑內)라 할까.
사상적 사대주의도 개탄할 일이거늘 지리, 지형, 산수의 사대주의에
다름 아닌 이 현상은 더욱 수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그들의 산수가 우리 금수강산을 닮았다는 자긍심을 가지면
안되는가.
내가 몸담았던 대학의 해외유학파 교수들도 그랬다.
나는 대학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때 이들을 관광사대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며 기회가 날 때마다 교직원들을 팔도의 산야로 내몰았다.
경제성장에 뒤따른 해외관광 붐을 막을 수 없다면 우리 강산에 대한
자부심부터 길러야 한다고 말로, 글로 주장하며 사대주의 교수들의
적대적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행했다.
자연과의 꾸준한 집단적 교감은 모래알같은 대학구성원들에게 응집
력을 배양해 놀라운 시너지효과가 생산되는 의외의 성과도 있었다.
상당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를 비난하는데 앞장섰던 교수가 문화
관광부 장관이 되었다.
한데, 그는 내가 하던 대로 해외관광에 우선한 국내관광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골백번 들어도 싫지 않은 지당하고 고마운 말씀이다.
나의 적대자를 내 추종자로 만든 것은 세월인가 그 자리인까.
구형왕릉
부질없는 상념 털고 수계정을 떠났다.
경호강 따라 한가로이 걷는 아침길이 맘에 들어 끊기고 적잖이 우회
해도 3번국도를 들락대며 오부면(梧釜) 지역을 통과했다.
곧, 도착한 생초(生草)의 요란한 식당가도 경호강 발원지 답게 민물
고기 일색 메뉴이기 때문에 독상(獨床)인 내게는 화중지병이었다.
지근의 조각공원과 강정유원지를 찾는 관광객들이 주 고객이겠는데
외로운 늙은 길손이 반갑겠는가.
생초국제조각공원
생초는 함양과 경계를 이루는 산청땅이다.
상당히 멀다는 이유로 '구형왕릉(仇衡王陵)'을 모르쇠 하고 함양으로
넘어가면 발병이 날 것만 같아 발길을 돌렸다.
태봉산 자락의 도 기념물 제7호 산청생초고분군(山淸生草古墳群)을
살펴보는 것과 본통치 넘는 것을 포기하는 조건이 붙은 선택이다.
5C경 가야시대(伽倻時代) 지배층(支配層)의 것으로 여겨진다는데.
고분군 주변의 옛 성(어외산성 또는 척동산성) 확인 역시 포기하고.
금서면(今西) 화계리(花溪).
우뚝한 필봉산, 왕산자락의 구형왕릉은 가락국(駕洛,金官伽倻)10대
구형왕의 능이란다.
다만, 전해 올 뿐 확증이 없다 하여 '전(傳)구형왕릉'이라 한다는 것.
가락국은 기록이 제각각인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임인년(서기 42)에
건국하여 490년 만인 임자년(532)에 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23대 법흥왕이 이끈 군사에 패하여 신라에 합병되었다는 것.
"가락국 멸망의 한(恨)을 고스란히 품고 왕산 자락에 잠든 구형왕은
편안히 흙속에 묻히는 것조차 거부하고 돌로 무덤을 만들게 해 후세
인들이 산 이름까지 왕산으로 불렀지 않나 싶습니다"
금서면장의 말이 왜 나그네의 코끝을 찡하게 했을까.
구형왕릉(1~3)과 김유신사대비(4),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5. 6)과 망경루(7)
조금 아래에는 '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金庾信射臺碑' (신라태
대각간순충장열흥무왕김유신사대비)가 서있다.
사후(死後)에 신라의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봉(封)함을 받았지만
김유신은 가락인이었다.
구형왕의 증손자라니까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사대비가 서있는 곳은 김유신이 어린 시절에 자신의 증조부인 구형
왕 무덤 앞에서 수년간 시묘살이할 때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란다.
왕릉으로 오르는 마을(화계리) 끝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이 곳에서 매년 춘.추(음 3월16일, 9월16일) 향례와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삭망 향례를 올리고 있단다.
그런데 김유신사대비와 문화재자료(제50호)로 지정한 덕양전으로는
구형왕릉의 접두어 '전'(傳)자 떼어내기가 역부족인가.
그렇다면, 구전 정도에 휘들려 문화재(사적)로 지정했단 말인가.
아니면, 자잘한 돌로 된 이 무덤이 우리나라 유일(?)의 피라미드형
7단 적석총(績石塚)이라는 이유로 사적(제214호)으로 지정했나?
덕양전 다음에 망경루(望京樓)도 있다.
고려의 유신(遺臣) 육은(六隱)중 하나라는 농은 민안부(農隱閔安富)
와 관계된 정자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망한 고려의 유신들이 은거한 곳이 개경 만수산
(萬壽) 자락의 두문동이다.
농은은 두문동72현 중 살아남은 한 분이다.
그는 이곳 산음 대포리까지 남하, 은둔 중에도 매월 1일,15일에 왕산
중턱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고려 왕을 그렸단다.
후세인들이 부르는 왕산 중턱의 망경대(望京臺)가 바로 그 자리라고.
한데, 단성의 문익점과 정천익 양 후손들의 시비와 흡사한 일이 여기
에서도 벌어지고 있는가.
6은은 목은 이색(牧隱李穡),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야은 길재(冶
隱吉再), 도은 이숭인(陶隱李崇仁), 수은 김충한(樹隱金沖漢)과 함께
여흥민씨 농은 민안부 인가 옥천조씨 농은 조원길(農隱趙元吉) 인가.
민안부의 호는 원래 소암(素菴)이었는데 산청에 은거하는 동안에 스
스로 농암이라 개작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민안부의 농은유집(農隱遺集)에 있다는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의
진위 여부는 왜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가.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인 양 가문의 열을 식힐 결정적 키(key)인데.
또 발작하려는 왕산오름 욕구를 누르고 '유의태우물'까지만 올랐다.
'의성(醫聖) 허준의 스승 신의(神醫)류의태'라는 사제관계를 전제로
한 실명의 우물이라면 이 우물은 분명 가짜다.
역사성도 사실성도 없는 픽션(fiction虛構)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신의,의성 여부는 차치하고 이조14대선조때 사람(허준)과 19대숙종
때 사람(유이태)이 어떻게 역(逆)사제관계가 될 수 있겠는가.
산청군 관계자들이 모를 리 없으면서도 소설과 TV드라마의 위력에
편승해 관광상품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약초의 고장'이라는 금서면에는 동의보감의 고장을 상징하는 전통
한방관광단지도 왕산 중턱에 조성중이니까.
유의태우물(1~3)과 채준수님 부부(3)
아리송하고 헷갈리는 통영별로
구형왕릉에서 우물까지 반정도는 임도가 나있다.
마침 한 승용차의 호의(KEPCO산청지점장 채준수님 부부)로 시간을
적잖이 세이브했다.
화계리에서 경호강(임천교)을 건너면 함양군 유림면이다.
경호강의 상류 임천이 흐르며 옛 임천원이 있던 지역일 것이다.
화계마을은 한우마을인가.
고기집(음식점)들에서 굽는 쇠고기 냄새가 시장기를 더욱 돋구었다.
끌리어 들어가는 족족 퇴박맞고 부아가 치밀려 했다.
영리 추구의 장사라지만 고약한 인심인 것 만은 분명하잖은가.
낙동정맥 서창(양산) 소달구지집의 후한 인심이 더욱 그리웠다.
임천교(1)와 본통삼거리(2)
1034번지방도로 따라 함양군 수동면(水東) 본통마을로 갔다.
생초면 어서리에서 구형왕릉으로 인해 많이 돌아서 간 것.
수동은 서부경남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함양의 관문이다.
본통고개와 5리인 통영별로 사근역(沙斤驛)은 현 수동면소재지다.
대동지지는 <사근역 - 5리 - 본통치 - 30리 - 정곡역 - 30리 - 양천 -
30리 - 진주>의 95리길도 통영별로의 하나라고 소개한다.
3번국도(신안에서 양천을 건넌후 도내고개를 넘어 명석면에서 대평
길과 합류하여 진주로 가는)와 대개 일치하는 길이다.
본통치에서 산청을 거치지 않고 정곡으로 가며, 정곡에서 오조점을
경유하지 않고 양천으로 가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걷고 있는 단성~오조점~산청~사근역 길은 정곡과
본통치를 경유하지 않는 길이어야 하는데 가능한 일인가.
또한 사근역~단성~진주가 115리로 20리나 더 돌아가는데 고산자는
어찌하여 이 길을 통영별로 주도로로 소개했을까.
참으로 아리송하고 헷갈리게 한다.
고산자가 과연 걸어본 길인가.
본통마을은 수동면사무소가 있는 화산리의 자연마을 중 하나다.
여수순천 반란사건때 양민들이 반란군 통비자(通匪)로 몰려 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는 본통고개(本通峙) 아랫마을이다.
살육의 비극이 멎은지 반세기가 지났다.
은폐 사실들을 일일이 들춰내는 역사 앞에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우리 국군의 용맹사인가 잔혹사인가.
도로공사로 어수선한 본통삼거리를 벗어나서 수동면사무소를 향해
가는데 도로변에 신축한 정자 '서수정'(嶼水亭)이 안성맞춤이었다.
시장한데다 잠시도 쉬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섬동마을 어귀 길가에 어울리지 않은 이름이라 두루 살펴보았으나
내력이 없다.
섬동마을 리장에게 물었으나 모른단다.
취락 전부터 작은 계곡물이 마을을 돌아 흘렀다는 데에서 마을 이름
'섬동'의 유래를 찾아본다.
그러면, '서수'(嶼水)가 절로 나온다.
수동면사무소의 한 분이 마을 이름(섬동)과 면이름(수동면)의 합성
일 것이라고 동의했다.
서수정
그런데, 늙은 길손이 새 정자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가.
지금의 정자는 운좋게 태어나서 조상덕에 할 일 없이 빈둥대며 세월
죽이는 한량(閒良)들, 이른 바 시인묵개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달프게 일하다가 땀 식히고 피로를 푸는 민초들의 휴식처요 마을
공론이 도출되는 민주광장이다.
길손의 오아시스다.
고색짙고 유서깊은 내력이 별거냐.
달빛에 물든 것이 신화요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잖은가.
이 정자도 지금은 아무도 몰라주지만 한 세월이 흐르면 고색창연한
신화와 역사로 채색될 텐데.
그러니까, 다다익선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