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저명한 축구 저술가 아르만두 노게이라(Armando Nogueira)는 히우 남부 블루 레이크(blue lake)가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저서 네 권을 내게 선물했다. 그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던지 그가 방을 빠져나가 액자를 하나 들고 왔다. 편지와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였다.
1970년 월드컵 대회 중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벌어진 브라질과 잉글랜드의 준준결승전의 한 장면을 찍은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사진 속에는 펠레(Pele )와 바비 무어(Bobby Moore)가 있었다. 펠레는 손가락으로 무어의 셔츠를 잡아당기고 있으며, 무어는 펠레의 다리 사이로 정확히 공을 향해 발을 쑥 집어넣고 있다. 두 선수 모두 경기에 집중한 나머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대 선수를 자극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몸싸움은 아니었다. 상호간의 이런 예의는 지금 보면 정말 놀랍다. 무어는 내가 아르헨티나에 체류중일 때 암으로 죽었다. 남아메리카 언론은 그에게 장문의 추모기사를 할애했다.
사진 옆의 편지는 삭아 없어질 때까지는 노게이라 가문의 보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펠레가 쓴 것이었다.
아테나이움호텔, 피카딜리, 런던.
사랑하는 아르만두에게,
당신이 당신의 책 수정구 Bola de Cristal 에서 '밥 무어(Bob Moore)'와의 이 볼 다툼을 묘사하게 된다면, 월드컵 경기치고는 우리가 서로에게 너무나 예의바르게 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스포츠입니다.
당신의 친구,
펠레.
이 편지 내용이 브라질 축구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펠레는 브라질이 잉글랜드를 격파하고 결국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승과는 별 관계도 없는 사건의 미담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더불어 같은 경기에서 고든 뱅크스(Gordon Banks)의 터무니없는 득점 방해 행위에 대해 그가 보인 반응을 생각해보라. "그 순간 고든 뱅크스 선수가 정말 증오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진정하고 나서야 그에게 진심으로 갈채를 보냈습니다."
브라질 하면 우리는 펠레가 활약하던 팀을 연상한다. 펠레의 브라질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처음 등장했다. 그때 펠레는 17살이었다. 브라질은 결승전에서 주최국 스웨덴을 5대2로 물리쳤다. 브라질 축구팬들은 '삼바, 삼바(Samba, samba)'를 외쳤다. 승리가 확정된 후 브라질팀은 먼저 브라질 국기를, 다음으로 스웨덴 국기를 들고 경기장을 두 번 돌며 승리를 축하했다. 그 브라질이 1962년 다시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펠레가 부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한 1966년에는 우승을 놓쳤지만 1970년에 또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그 브라질 스타일이 1982년에 다시 등장했다. 요즘은 브라질 스타일을 네덜란드나 프랑스의 플레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이제 브라질 스타일은 더이상 브라질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는 히우에 머물면서 브라질 사람들이 과거에는 왜 그렇게 경기를 했고, 이제 더이상 그런 플레이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히우데자네이루는 사실상 두 개의 도시다. 하나는 요하네스버그 같고 다른 하나는 소웨토 같다. 부유한 백인들은 해안선을 따라 거주하고 있으며, 가난한 유색인들은 산지의 파벨라스[favelas, ]에 살고 있다. 파스텔톤 페인트로 단장된 파벨라스는 아래서 보면 멋진 여름 별장처럼 보인다. 부자들은 언제나 이 시각으로 이곳 주민들을 바라본다. 부자들은 산지 지역으로 올라가는 일이 결코 없다. 파벨라스의 사망률은 아주 높다. 이곳 주민들은 1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부자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냉방시설이 된 지하철도 이곳까지는 오지 않는다. 수도도, 전기도, 아름다운 해변도, 다른 무엇도 이곳에는 없다. 브라질 축구의 전성기 동안 파벨라스는 말란드루(Malandro)의 산실이었다.
브라질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브라질 스타일이 브라질의 국민성에 고유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브라질 사람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말란드루 얘기를 꺼낼 것이다.
말란드루는 브라질의 민간전승에서 유래한 인물이다. 그의 조상은 노예였고--브라질은 1888년에야 겨우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자유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는 규율이 보통 사람에게는 필요하지만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기꾼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혼자 움직이며 어떤 규칙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가난하지만 그는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며,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중요한 사실은 브라질인들이 스스로를 말란드루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말란드루가 브라질의 국민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다.
무니스 소드레(Muniz Sodre) 교수가 창문 밖 위쪽을 가리켰다. "내가 자세히 설명해 드리죠." 그가 말했다. "파벨라에 가면," 제 정신이 아니었던지 나는 정말 파벨라에 갔다. "가장이 없는 여성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돌봐야할 애들이 대여섯 명씩이나 되는 가정들이죠. 이 아이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가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경찰한테서 도망도 치고, 싸움도 잘 하는 아이죠. 그는 삶의 고통을 뒤로 하고 공을 드리블합니다. 그는 어머니를 대신해 먹을 것을 마련합니다. 축구장에서 수비수를 따돌리는 것과 실제 생활에서 영리한 소년이 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소년이 바로 말란드루죠."
고전에 등장하는 말란드루는 흑인이다. 그는 브라질 흑인들의 전래 스포츠인 카포에이라(capoeira)에 뛰어나다. 카포에이라는 춤과 무예가 혼합된 것이다. 댄서는 발뒤꿈치에 칼을 부착하고, 자신을 베려는 상대 선수와 춤을 추며 겨룬다. 말란드루는 실크 스카프를 하고 다니는데 단지 멋으로만 그러는 건 아니다. 실제로 카포에이라를 할 때 실크 스카프가 그의 목을 지켜준다. "당신이 원한다면 카포에이라는 쉽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드레 교수가 씩 웃었다. "나도 카포에이라 선수입니다. 나는 실제 칼을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master)죠."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소드레는 50세로 히우데자네이루연방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얘기를 나누었던 냉방시설이 갖추어진 그 강의실은 유럽 변방의 식민지로, 발에 칼을 부착한 흑인 사기꾼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던 것이다. 소드레의 설명에 의하면, 자기는 물라토[mulatto, 백인과 흑인의 혼혈]이며 바이아[Bahia, 브라질 남동부의 주]에서 흑인 스승으로부터 카포에이라를 배웠다고 했다. 스승은 말란드루에 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어느날 한 외국 흑인이 스승의 카포에이라 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소드레가 그와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나중에 스승이 소드레에게 그 방문객이 어디 사람이더냐고 물었다.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왔다던데요." 소드레가 스승에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스승의 추리는 이러했다. "저런 사람들을 난 잘 알아. 그 자는 히우 출신의 흑인일 거야. 부두에서 일하면서 프랑스어는 귀동냥으로 배웠 겠지. 그러고 보니 그런 자가 바로 말란드루로군!"
소드레는 그가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며 이에 반대했다.
"자네는 아직 젊어서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가 말란드루라고 해도 나 와 같은 말란드루를 속일 수는 없지." 스승이 그에게 말했다. 스승은 말란드루라 면 배우지 않고도 프랑스어쯤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 각했다.
소드레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축구를 이해하려면 먼저 카포에이라를 이해해야 합니다. 카포에이라는 상대방을 속이는 방법이라 할 수 있죠. 강한 선수가 이기는 복싱과는 달라요. 카포에이라는 몸의 철학입니다."
카포에이라는 춤일 뿐만 아니라 스포츠이다. 그리고 카포에이라는 위대한 브라질 축구로 승화되었다. 영국이 브라질에 축구를 도입하고도 처음 몇 년 동안은 흑인들의 클럽 가입이 금지되었다. 경기를 하고 싶은 물라토는 하얗게 보이려고 얼굴에 분칠을 하기도 했다. 남아프리카 생각이 나는 대목이다. 흑인들의 참가가 허용되면서 브라질 축구의 황금시대가 도래했다. 최초의 위대한 흑인 축구 선수는 1938년 월드컵 대회 득점왕 레오니다스(Leonidas)였다. 이후 브라질은 펠레 디디(Didi) 가린샤(Garrincha) 자이르징유(Jairzinho) 등 흑인 선수들을 주축으로 세 차례나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의 브라질팀은 너무나 '흑인적'이어서 백인 여성과 결혼한 디디는 하마터면 스웨덴 월드컵 대표팀에서 쫓겨날 뻔했다.
물론 이들 자신이 카포에이라 선수는 아니었지만 우아함과 묘기를 숭상하는 문화에서 배태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축구를 하는 말란드루였다. 소드레의 말을 들어보자. "위대한 축구 스타는 최고의 드리블러였습니다. 가린샤 펠레와 같은 선수들은 드라이 리프[Dry Leaf, 브라질 미드필더 디디가 고안한 유명한 장거리 슛. 마지막 순간에 급격히 가라앉아 이런 별명이 붙었다] 바이시클[Bicycle, 공중에 떠 있는 공을 두 발을 공중에 띄워 뒤로 쓰러지면서 머리 너머 뒤쪽으로 차는 오버헤드킥] 등 새로운 동작을 창안해냈죠. 최고의 카포에이라 선수들처럼 말입니다." 전형적인 말란드루 축구 선수는 가린샤였다. 파벨라스 출신으로 왜소한 체구의 물라토인 그는 측면 공격수로 활약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브라질팀 감독이 선수들에게 상대팀의 전술을 설명하고 있었다. 감독의 브리핑이 끝나고 가린샤가 그에게 묻는다. "상대팀에게도 이 사실을 모두 말했나요?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뭘 할지를 어떻게 아는 거죠?" 그라운드의 풍운아인 이 말란드루에게 전술 계획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닥치는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이 말란드루 스타일이었다. 가린샤는 비록 그의 한 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길었지만 애초의 전술 계획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플레이를 했다. 그 '작은 새(Little Bird)'는 브라질 대표로 세 차례 월드컵에 출전해 두 번이나 우승 메달을 조국의 품에 안겼다. 은퇴 후 그는 자신이 과거에 탈출했던 빈민가에 다시 유폐되어 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8명의 자녀가 딸려 있었다. 그는 술에 의지했고 곧 죽었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히우 거리에 시민 1백만 명이 모였다. <가린샤:국민의 기쁨 Garrincha:The Joy of the People>은 유명한 브라질 영화다. "브라질에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닙니다. 축구는 일종의 무대 연극, 과장된 몸동작입니다." 소드레의 말이다.
그 주 일요일에 마라카냐 스타디움(Maraca a stadium)에서 그들의 과장된 몸동작이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었다. 1년 전에 스탠드 한 쪽이 무너져 세 명이 죽고, 경기장은 여러 달 동안 폐쇄되었었다. 재앙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히우 주재 로이터 통신 기자인 브라이언 홈우드(Brian Homewood)가 내게 말해주었다. "브라질 정치인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는 유지보수 작업에 돈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새 경기장을 건설하려고 하죠. 이런 상황에서 결국 일이 터진 겁니다."
그날 세계 최대의 경기장은 안전해 보였다. 축구 경기 역시 소드레가 평가한 바에 따르면 차분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보타포고(Botafogo)를 2대0으로 눌렀는데, 그 시합은 한 해 동안 내가 관전한 게임 중 단연 최고의 경기였다. 수백 명의 브라질 특급 선수들이 이미 해외로 빠져나가고 없었지만, 두 팀 모두 브라질에서 일류 팀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국가 대표로 선발돼 A매치에 정기적으로 출전하는 선수가 그라운드에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경기 내용은 경이 그 자체였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첫 골이 터졌다. 바스코의 프리킥이 보타포고의 벽 위쪽에 맞고 튀어나오자 바스코의 포워드가 25야드 거리에서 논스톱 발리킥으로 골 그물을 갈랐다. 여러 수준의 시합에서 이와 같은 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요행수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선수는 몸을 회전시켜 골키퍼가 없는 오른쪽 깊숙한 구석으로 킥을 해 유유히 득점에 성공했다. 침착하고 계획적인 이 플레이를 보면서 이 선수가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 장악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종일관 화려한 공격 위주의 축구가 펼쳐졌다.
"이게 바로 우리의 근본이죠." 며칠 후 히우 중심부에 있는 주앙 아벨랑제(Joa o Havelange) 빌딩에서 만난 브라질 대표팀 감독 카를로스 알베르투 파레이라(Carlos Alberto Parreira)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1970년에 브라질팀 주장으로 활약했던 카를로스 알베르투(Carlos Alberto) 선수가 있다. 1980년대에 잠시 브라질 대표팀을 지도했던 감독의 이름도 카를로스 알베르투 실바(Carlos Alberto Silva)다. 스포츠 재킷을 맞춰 입은 말쑥한 차림의 카를로스 알베르투 파레이라 감독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폴란드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할 대표 선수를 공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어느 나라에서 시합을 치를지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파레이라와 브라질 기자들이 U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고, 대표 선수 명단이 건네졌다. 감독이 소집의 개요를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기자들이 한 명씩 그에게 다가와 단독 기자회견을 요구했다. 한 시간 동안 20명쯤하고 '단독 기자회견!'을 했을까, 마침내 내 차례가 돌아왔다. 파레이라는 전혀 혼란스러운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현재 지도하는 브라질팀이 1990년의 그 처량했던 팀보다 더 나은지 물었다. 그가 완벽한 영어로 대답했다. "영국에서 시합을 가졌을 때도 기자들이 전부 그 질문을 하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게 우리가 지향하는 바죠. 우리는 우리의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네 명의 1자 수비와 공간 차단, 그리고 공격 추구로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선수들이 어려서부터 해온 경기방식이죠." 그가 한 말의 요점은, 그가 변화를 시도했어도 브라질 특유의 경기 스타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알기로 한 국가의 경기 스타일을 바꾸어 성공한 유일한 감독은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빌라르도(Carlos Bilardo)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메노티(Menotti)가 이끌던 세련되고 우아한 축구를 깡패 집단과 다름없이 거칠고 투기적인데다 속임수까지 동원하는 축구로 전환시켜 조국 아르헨티나에 월드컵을 안겨주었다. "브라질 선수들을 어-, 어- 집어넣을 수는 없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던지 그가 구속복 입은 사람 흉내를 냈다.
그러나 브라질인들은 변화하고 있다. 지난 6차례 월드컵 대회에서 브라질팀이 보여준 성적의 부침을 살펴보자.
1970년도 대표팀을 준비시켰던 감독은 스포츠 평론가로도 유명한 주앙 살다냐(Joa o Saldanha)다. 그는 말란드루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피력했다. "브라질 축구는 음악처럼 리듬을 갖습니다." 펠레 제르손(Gerson) 히벨리누(Rivelino) 토스타우(Tostao)가 모두 미드필더로 함께 플레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들이 나오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이 모두 동일한 유형의 선수이고 또 히벨리누와 제르손이 둘 다 왼발잡이라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최고고 천재들입니다. 그들을 믿어보자구요. 그들은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 겁니다." 그러나 살다냐는 월드컵 본선 대회에 결코 참가하지 못했다.
예선전 내내 브라질팀을 이끌었던 그가 해고당한 사실을 놓고 여러 가지 설들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성질이 고약했으며 주먹이 오가는 싸움에도 여러 차례 가담했다고 증언한다. 펠레가 그를 몹시 싫어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살다냐는 펠레를 팀에서 쫓아낼 궁리를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브라질에서는 감독들이 일상으로 해임된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사건이라는 얘기다. 가장 흥미를 끄는 가설은 브라질의 군사 독재자 에밀리우 가라스타주 메디시(Emilio Garrastazu M dici) 대통령이 살다냐의 해임을 원했다는 것이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브라질 대통령을 지냈던 메디시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했다. 동시에 그는 축구팬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 살다냐는 한 때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브라질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메디시가 그와 선수들을 오찬에 초청했다. 살다냐는 훈련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며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한 아르헨티나 기자가 다리우(Dario)가 대표팀에서 빠진 이유를 물었다. 살다냐는 호베르투(Roberto)와 토스타우가 기량이 더 뛰어나다고 해명했다. 기자가 다리우는 메디시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 아니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대통령의 각료를 뽑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내가 이끄는 팀의 공격진을 선발할 수도 없는 일이죠."
그는 월드컵을 꼭 세 달 앞두고 해임되었다. 후임으로 감독직을 요청받은 두 사람이 사의를 표했다. 실패하면 팬들이 자신들의 인형을 태우는 걸로 만족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우려했다. 결국 '작은 개미(Little Ant)' 마리우 자갈루(Mario Zagalo)가 감독직을 맡았다. 그는 다리우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브라질을 메히코의 영광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월드컵을 차지한 마지막 대회였다[이제는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브라질은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회 우승을 차지해 통산 4회 우승으로 여전히 최다 우승국으로 남아 있다].
브라질이 월드컵 대회에서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면 국내에서는 전체 국민이 참여하는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진다. (브라질의 한 감독은 골다 메이어[Golda Meir, 이스라엘 정치가 건국 공로자]의 말을 원용해 이렇게 탄식조의 말을 내뱉었다. "나는 축구 감독들의 나라에 살고 있다!") 논쟁은 전통주의자들과 현대화론자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살다냐와 같은 전통주의자들은 위대한 선수는 자신의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반면 현대화론자들은 브라질도 이제는 변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1970년 팀은 잘 조직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966년 대회에서 뚜렷이 드러난 유럽세에 의한 펠레의 부진을 지적한다. 그리고 브라질의 방법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지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자갈루는 1970년에는 자신의 작전과 전술을 적용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그 '작은 개미'는 조용한 성품으로 교회에 다녔으며 브라질인이라기보다는 스웨덴 사람 같았다. 마침내 1974년 월드컵 대회를 맞아 그는 자신이 현대화론자라고 선언했다. 그의 작전 지시는 이런 것이었다. "절대 골을 내주지 말 것. 상대팀이 자유롭게 플레이하도록 틈을 주지 말 것. 그리고 확실할 때만 공격할 것." 브라질은 패배했고 그의 집은 돌팔매질을 당했다.
클라우디우 코우팅유(Claudio Coutinho)는 1970년 팀의 트레이너였다. 월드컵을 한 차례 더 치르고 나서 1978년에 그는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표팀을 지휘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의 개입을 배제하지 않았다. 브라질의 체육 행정을 책임지고 있던 엘레노 누네스(Heleno Nunes) 제독은 집권 정당 ARENA의 히우 지역 주요 대표였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회에서 브라질이 우승하면 ARENA의 선거 승리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히우 지역의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책략으로 누네스는 코우팅유에게 그 도시 최고의 팀인 바스코 다 가마의 호베르투를 선발하라고 지시했다. 코우팅유는 군말 없이 따랐다. 그 자신 군인이었던 것이다. 전직 배구 선수이자 육군 대위였던 그는 브라질 군대의 체력 훈련 과정을 개편하기 위해 미국 우주비행사들의 체력 훈련 프로그램을 연수하기도 했었다. 완벽한 영어로 교양을 쌓게 되자 그 역시 본능적으로 현대화론자가 되었다. 그는 드리블을 "시간 낭비이며 브라질의 약체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하면서 배척했다. 그가 더 나아가 유럽의 오버래핑 전술을 칭찬하자 한 전직 감독이 아니꼬왔던지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오버래핑! 가린샤가 혼자서 하는 기술 아냐." 살다냐가 깜짝 놀라서 코우팅유를 보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 아니. 지쿠(Zico), 히벨리누, 그리고 다른 선수들이 코우팅유 앞에서는 '예' 하고 말했겠지. 이 선수들이 훈련할 때는 수비수처럼 뒤로 달리겠지만, 그라운드에 올라 실제 경기에 임하면, 글쎄, 내 생각에는 감독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은데. 나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네."
물론 선수들은 감독의 지시에 따랐다.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보여준 경기는 너무나 아둔한 것이어서 본선 2회전에 진출한 날 브라질 축구팬들은 마르델플라타[Mar del Plata, 아르헨티나 중동부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남동부에 있는 해안 도시]에 있는 브라질팀의 캠프에서 코우팅유 인형을 불태워버렸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매수했고, 브라질은 탈락했다. 히우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자살자들이 속출했다.
월드컵 때마다 우리는 브라질의 자살 사건과 아프리카 주술사 얘기를 듣는다. 언론 매체는 브라질팀이 탈락하면 헌신적인 팬들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다고 믿는 것 같다. 진실은 이와는 많이 다르다.
대회 초반 브라질팀이 승리를 구가하는 동안 브라질 국내 생활은 파티와 같은 흥겨운 분위기이다. 거리에서는 자동차 경적이 울리고, 모두가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러다가 브라질이 지고 탈락하면 분위기가 반전되고 조울증 환자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받게 된다. 승리의 환희가 지나가고 그들은 그 끝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발작적 '고양감'은 '침울함'으로 바뀌고 결국 자살을 한다.
코우팅유는 1982년 월드컵이 열리기 전 스킨다이빙(skin-diving) 사고로 죽었다. 텔레 산타나(Tele Santana)가 1982년 브라질팀을 감독했고 그는 과거의 아름다운 축구를 다시 선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팀은 파올로 로시(Paolo Rossi)가 이끄는 이탈리아에 3대2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브라질로서는 잊을 수 없는 시합이었다. 이 대회가 끝나고 2년 후 브라질의 스타 소크라테스(Socrates)가 산타나의 주장을 재차 확인했다. 그가 시합 전 3일 동안은 이성 파트너와의 성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에 이의를 제기하며, 로마(Roma) 유벤투스(Juventus)와 잇따라 1백만 파운드 계약을 거부해버린 것이다. 두 팀 말고 그는 피오렌티나(Fiorentina)에 입단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브라질 축구가 왜 아름다움과 열정을 추구하는 한 판의 유희인지 알게 되었다. 반면 이탈리아의 수비 축구를 보면 지겨워서 눈물이 날 정도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Daily Express 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렇게 적고 있다.
다음 월드컵에서 산타나의 팀은 다시 명예롭게 탈락했다. 현대화론자들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1990년 브라질팀을 이끌었던 세바스티아우 라자로니(Sebastiao Lazaroni)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다.
평범한 골키퍼였던 라자로니는 선수 생활을 일찍 그만두고 축구 관련 서적을 무수히 탐독했다. "대표팀은 개인기에 덜 의존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생긴 것도 브라질 사람 같고, 브라질 유니폼도 입었지만 동유럽의 완고한 고집쟁이 스타일 선수들을 기용했다. 수비수를 7명씩이나 배치한 브라질은 스웨덴과 코스타리카를 각각 1대0으로, 스코틀랜드를 2대1로 물리쳤다. 대회 기간 중에 이탈리아 경찰이 출동해 라자로니를 찢어죽이겠다는 브라질 언론을 제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라자로니의 방법은 정말 위험합니다.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해야만 겨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초반에 탈락하면 결국 형편없는 팀으로 기억될 겁니다." 펠레의 경고였다. 브라질 선수들은 "펠레는 재수 없는 늙은이일 뿐"이라고 응수했다.
결국 브라질은 초반에 탈락하고 말았다. 아르헨티나와 맞서 그들은 마법과 같은 플레이로 상대를 압도했다. 마치 목각 인형을 세워놓고 경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83분경에 아르헨티나가 득점에 성공해 1대0으로 승리했다. 유황 연기가 한 번 일었다 사라지자 아르헨티나의 목각 인형들이 빌라르도주의(Bilardismo)의 화신으로 모습을 일신했던 것이다. 경기 중에 브라질 선수 브랑쿠(Branco)는 옆줄 밖 벤치에 대고 물을 달라고 했다. 이 때 아르헨티나 벤치에서 물통이 하나 날아왔다. 그 순간부터 브랑쿠는 계속해서 맥을 못 췄다. 나중에 그는 아르헨티나 놈들이 물에 하제(下劑)를 탄 게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하룻밤 사이에 라자로니는 브라질의 공적 제1호로 전락했다. 그가 피오렌티나에 체류하다가 일자리를 얻게 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이 과거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우리가 1990년에 했던 방식, 그게 브라질적이지 않다는 걸 압니다." 파레이라의 말이다. 당연히 그는 과거로 회귀했다. 파레이라는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라자로니 사태 이후 그는 '현대' 축구를 설교할 여건이 못 된다. 파레이라의 브라질은 라자로니의 팀보다는 더 전통적이고 펠레 시절보다는 더 현대적일 것이다.
축구는 결코 그냥 축구가 아니다. 브라질 국민 역시 축구 얘기를 하면서 브라질이 국가로서 어떠해야 할지를 토론한다. "아마 그건 영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인류학자 루이스 에두아르두 소아레스(Luis Eduardo Soares)가 내게 말했다. "우리나라 대표팀이 시합을 하면 우리는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그라운드에서 발현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세계인들에게 비치고 있는 겁니다." 브라질인들은 이 점을 우리보다 더 강렬하게 느낀다. 그들에게 코우팅유 자갈루 라자로니, 그리고 기타 지루하고 재미없는 축구의 옹호자들은 단순한 패배자들이 아니라 반역자들인 것이다. 정치 분야에서는 이 문제가 브라질이 유럽을 모방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야 하느냐의 구도로 쟁점을 형성한다. 브라질은 오늘날 후진적이다(히우에서 시간 약속을 한 번 잡아보라). 그러나 브라질은 창조적이기도 하다. 브라질에는 위대한 축구가 있고, 삼바가 있으며, 수준 높은 영화가 제작된다. 동시에 브라질은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다. 현대화론자들은 축구뿐만 아니라 정치 분야에서도 브라질을 제2의 독일로 바꿔놓기를 희망하고 있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페르난두 콜로르 데 멜루(Fernando Collor de Mello)가 1990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브라질을 '선진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의 임무는 실패로 끝났다. 콜로르는 부정한 관행에 도전했지만 자기 자신만은 예외였다.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던 그가 브라질사상 가장 부패한 대통령으로 밝혀진 것이었다. 1992년 그는 사임함으로써 탄핵을 모면했다.
콜로르는 말란드루였다. 이제 남아 있는 말란드루는 몇 되지도 않으며 그나마도 모두 정치꾼이라고 <오페라 말란드루 The Opera of the Malandro>에서 시쿠 부아르케(Chico Buarque)가 노래한 바 있다. 브라질은 변화하고 있다. 말란드루는 이제 파벨라스를 떠나고 없다. 그들은 살인자들에게 굴복했으며, 재미없고 지루한 축구에서도 손을 뗐다. 흑인 드리블러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도시에서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더 좁아지고 있고 클럽들은 학교와 스포츠클럽에서 더 많은 선수들을 선발하고 있다. 이것은 축구를 하는 선수들이 더 부유해졌음을 뜻한다.
1980년대의 스타들인 지쿠 팔카우(Falcao) 소크라테스 등은 모두 백인 중간계급 출신이다. 카포에이라마저 백인의 스포츠로 바뀌고 있다. 그것을 이제 히우의 유명 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 그 학교라는 것도 최고 스승인 마스터(master)만이 흑인인 경우가 태반이다. 브라질은 엄청나게 변화했다. 1990년 월드컵 대회에서 펠레는 브라질 선수처럼 플레이하는 선수로 독일인 로타 마태우스(Lothar Matth us)를 꼽았다. 브라질인들은 사태를 잘못 이끌고 있다. 현대적인 축구와 후진적인 정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