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장례식 목회자 코너 김 영현 목사
매미, 루사의 태풍 때문에 도계에서는 많은 분들이 집을 잃었고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에 많은 교회에서 도움을 주었고
특별히 작은 교회가 연합하여 30채의 집을 지어 어려운 분들에게 주었습니다.
저희 교회도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30가구의 모든 집에 거울을 달아드렸습니다.
도계의 무지개마을입니다.
그래도 그곳에서 교회를 나오시는 분은 없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2008년 가을에 79세의 할머니가 손녀와 함께 저희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지개 마을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한 성도입니다.
바로 강 옥랑 집사님이십니다.
막내아들을 잃고 며느리는 집을 떠났고
그래서 혼자가 된 지적장애를 가진 손녀를 돌보며 함께 사셨습니다.
제천과 동해에 자녀분들이 있지만 가장 어려운 손녀를 돌보려고 힘든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가 멀지는 않지만 걸어오기에는 노인에게는 힘든 언덕길입니다.
그러나 주일 낮에도 저녁에도 걸어서 오시곤 했습니다.
손녀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면서 오지 않으려고 할 때도 할머니는 변함없이 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요즈음은 저녁예배에 출석하는 성도가 점점 줄고 있으며
심야기도회는 더더욱 참여를 않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몸이 아프거나 출타하지 않는 한 금요심야기도회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저녁 9시에 시작하니 천천히 오셔도 되겠건만
8시 경이 되면 벌써 교회에 와 계시곤 하였습니다.
글씨도 모르고 이해도 어려워서 힘들 것도 같은데,
피곤해서 엎드려 있는 때도 많았지만 성전에 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어려운 살림살인데도 쌀이 남으면 떡을 해서 주일 점심에 교우들과 나누었던 분입니다.
산에서 나물을 뜯으면 봉지에 들고 목양관을 찾아서
목사님 드시라고 가끔 들리곤 했던 모습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신앙의 년륜이 짧고 고령인 것을 생각하면
그 분의 열심은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었습니다.
제천의 아드님 댁에 다녀온다고 했기에
3주 정도 출석하지 못해도 아드님과 함께 잘 계신 줄 만 알았습니다.
갑자기 지난 금요일 저녁에 손녀인 향미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할머니 강릉 동인병원에 계신데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114를 통하여 전화로 확인한 결과는 위독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서둘러 집 사람과 함께 동해 남 흡 장로님을 모시고 강릉으로 출발합니다.
중환자 면회시간에 가까스로 맞추어서 찾았지만
이미 의식은 잃은 상태이며 장례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새벽에 그 분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는 복되다는 계시록의 말씀이 집사님을 보면서 생각납니다.
첫째는 82세라는 수를 다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병상에 오래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셋째는 목사의 임종기도를 받은 것입니다.
넷째는 아들, 딸 두 자녀가 임종을 지켜 본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그의 소원대로 자녀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장례를 치룬 것입니다.
여섯째는 많은 교우들이 그를 조문하고 장례예배에 참여한 것입니다.
20여명의 교우들이 찾았습니다.
그 분이나 그 분의 자녀들을 통하여 무언가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입장이지만
외면하지 않고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고 위로한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평소에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라는 그 가르침을,
교우들이 잘 따라 주어서 더욱 감사합니다.
노구를 이끌고 늘 성전을 사모했던 그 모습의 대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강옥랑 집사님은 이제 천국, 하나님의 품 안에 계신 것을 믿습니다.
이제 홀로 남은 손녀 향미를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자녀분들이 함께 예수 믿어서 천국에서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첫댓글 아멘~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집사님의 삶. 그러나 그 인생의 마지막은 시간들은 그를 사랑하는 목사님과 교우들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해 분면 행복하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