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에 대한 세 가지 비유
(Three Parables about Seeds)
어거스트 반 린(August Van Ryn)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서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이 무조건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왕국의 현재 형태는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들(false professors)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인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 물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를 풀어주셨는데, 이로써 나머지 모두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주신 것입니다.
처음으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인자(히 2:3)이신데, 이는 복음이 처음에 주님에 의해 전파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며, 그 다음에 주님의 제자들에게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씨는 말씀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땅이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네 가지 종류의 땅과 사람 마음의 네 가지 상태를 설명해주셨는데, 그중에 오직 하나만 실제적인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매번 말씀이 머리에 지식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마 13:19) 뿌리워집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 곧 구원의 복음을 거절할 때는 지식적으로만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온 전체가(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의지적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생명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길가에 씨가 뿌리웠다는 것은 단단한 땅에 씨가 떨어진 것이며, 따라서 죄로 인해 강퍅하게 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전혀 무관심함을 보여줍니다. 이 경우는 사단이 즉시로 와서 씨를 낚아채 가는데, 이는 누가복음 8:12에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는 피상적인 부류의 죄인들로서, 쉽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열광적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거기에 죄에 대한 참된 회개가 없고, 모든 것이 겉모양뿐입니다(all is on the surface). 모든 것이 육신의 발로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은 고난 속에서 검증 받아야 합니다. 결국 그러한 믿음은 풀무 속에서 정금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연기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희생(고난)이 없이도 종교적인 고백이 가능하게 합니다(행 14:22).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믿음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졌는데, 이것은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우리 주님이 해석해 주셨습니다. 종종 부자들은 세상 염려로 인해 자기 영혼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소홀히 합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해 재물이 영혼 구원에 대한 걸림돌이 됩니다.
다음을 주목해봅시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에게 마귀가 악한 역사를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육신이 방해요소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세상이 나쁜 영향을 행사했습니다.
말씀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의 사람만 실제로 열매를 맺었는데, 누가복음 8:15에서는 이것을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여기서는 "착하다"고 말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결코 자신에 대해 착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이 범죄한 자들이며, 또 구주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도 착하다고 할 수 없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열매를 맺은 좋은 땅에서도 그 열매맺는 정도가 달랐습니다. 이는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동일한 정도로 반응하지는 않음을 뜻합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이 두 번째 비유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처럼 사단이 참된 씨를 빼앗아 가는 대신에 자신의 "거짓된 씨"를 덧뿌렸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귀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세상을 범람하게 하여, 그 결과로 "마귀의 자녀"들을 생산합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 사단이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25절). 마귀는 잠을 자지 않는 듯 합니다. 사단과 그의 사자들의 의도는 참된 믿는 이들의 열심과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사단도 가라지라 불리는 거무튀튀하고 흉악하게 생긴 들보리를 심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이 어떤 점에서는 진리와 비슷해 보이듯이 들보리도 자랄 때에는 외형적으로 참된 곡식처럼 보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때에도 우리가 성경에서 경고를 받은 대로 많은 거짓된 가르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종들이 이러한 가라지들을 뽑기를 구하였을 때, 주님은 가만 두도록 하셨습니다. 추수 때에 추숫군들이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해석해주셨습니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의 결실은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입니다. 이 세대의 끝에 천사들이 마귀의 자녀들인 가라지를 뽑아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님이 여기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교회 안에 함께 있게될 것을 가르쳤다고 주장하지만, 주님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있어서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세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38절), 곡식과 가라지가 바로 세상에서(교회가 아닌) 함께 세상 끝까지 있을 것으로 언급하셨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수백만을 학살하면서 세상에서 이단들을 뿌리뽑고자 했는데,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 여기서 경고하신 것처럼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무차별 학대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단보다는 오히려 참된 믿는 이들을 더 많이 박해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 일은 우리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이 거두어 내어져서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세상(세대) 끝에 있게 될 것인데, 바로 대환란이 끝나는 시점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의 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대환란 전에 영광 가운데 끌어 올려질 것인데, 분명하게 43절에서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휴거는 30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이 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기 전에 하늘로 끌어 올려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에 임하실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어, 변화된 몸으로 함께 임하게 될 것입니다(골 3:4). 여기서 휴거는 직접 언급되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되었는데, 그 이유는 마태가 왕국의 진리를 펼치면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천국의 절정(climax)은 휴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에 있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을 통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 멸시받아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사람처럼 - 후에 거대한 나무로 변하게 된 현상을 통해 천국을 설명하려 하였습니다. 겨자씨를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거룩하신 구주께서 취하신 겸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작은 씨가 자라 가지가 많은 거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작은 씨가 심겨진 결과로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즉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박해를 통해 멸절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사단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서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거듭난 적이 없는)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입증된 하나의 진리입니다! 전에는 박해자였던 사단이 이제는 모방자가 된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기독교가 이제는 기독교계가 되어, 종교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천국에서 자기의 거처를 마련한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이 거대한 나무의 가지에 깃들이게 되었는데, 이 새들은 우리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사단과 그의 사자들입니다(4, 19절). 처음에는 참된 믿는 이들만이 함께 하였습니다. 이제는 명목상의 교회(professing Church)가 영적인 혼돈과 도덕적인 타락을 조장하여,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을 근심케하고 애통하게 하는데, 이는 모든 가증한 일들이 그 가운데서 자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겨자씨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참뜻입니다.
처음 두 가지 비유는 천국에서 개인들에 대해 말했고, 다음 두 개의 비유는 "단체적인" 면에 대해 말합니다. 많은 씨들이 여기서 하나의 씨가 되었습니다. 많은 가라지를 누룩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계 안에 원수의 속임과 혼돈이 난무할 지라도 그 가운데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끝까지 충성하며, 하나님의 복되신 아드님을 예배하고, 존중하고, 또 따르는 작은 무리들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