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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오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출간 이후로, 기존 서구의 사회적, 철학적, 신학적 토대가 되어왔던 기독교의 창조론과 극심하게 갈등을 발생하게 됨으로써, 최초의 진화론과 창조론간의 갈등이 비화가 되었다. 당대에는 대부분의 공공교육기관을 종교재단에서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논쟁은 주로 지식인간의 학술적 토론에 가까웠다.
19세기부터 진화는 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론들 중 하나가 되면서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무신론주의, 회의주의, 정교분리주의에 받아 들여 졌다. 그로 인하여 각 세속국가의 정부들은 공공교육의 하나로써 생물학에서 진화론을 가르치게 되었다. 종교계는 진화론의 공공교육기관에서의 확장을 막고, 창조론을 가르치게 하도록 투쟁하였다. 또한 진화는 이해의 복잡성과 관찰에 필요한 시간이 인간의 일생에 비교하여 길다는 점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못된 지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 미국의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창조론을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정교분리원칙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에 종교계는 필립 존슨교수의 <심판대의 다윈>을 시작으로 창조론에서 변형된 이론인 지적설계이론을 개진해갔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다양한 개신교 단체가 진화론을 공공교육기관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교육계 및 과학계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진화에 대한 오해는 주로 매스컴이나 창조과학회 및 지적설계론자들로 인하여 대중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과학계는 이를 반박하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가톨릭신자 83%, 개신교신자 39.6%가 진화론을 믿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윈 이전에 많은 사람들은 생명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식물과 동물들이 서로 잘 구분되는 종류라는 유형학적인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라는 종안에서 서로 다른 인종들이 매우 분리가 잘되고 확실히 구분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전학 연구는 인간이 놀랄 정도로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오직 생물학적으로 하나의 인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위니즘은 인종차별주의의 기초가 되는 이러한 유형학적인 사고를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인종차별주의는 역사적으로 창조론과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죠지 맥크레디 프라이스는 <유기적 진화의 유령>이라는 책에서 “불쌍한 작은 친구가 남쪽으로 가서 길을 잃었다. 강렬한 태양 빛으로 그의 피부는 검게 되었다. 그리고 적도의 강한 열로 그의 머리카락을 그을렸으며, 그의 정신은 텅 비게 되었다.” 라며 흑인과 몽골리안을 퇴보된 인간으로 비하하였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특히 1067년에서 1993년까지 국가의 정책이었던 The Christian National Education system에서 백인 어린아이는 흑인들과 분리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정책은 진화론의 개념을 배제하였으며, 비 백인들을 부정적으로 보이도록 가르쳤으며,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을 포함하여 성경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종교적인 모임을 강요했다.
미국 남부의 성서지대(Bible Belt)에서는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극렬하게 투쟁했다. 창조과학 연구소의 헨리 모리스는 “햄의 자손들 특히 흑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예가 되었다. 세속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적이고 철학적인 야벳의 후손들과 종교적인 열정을 가진 셈의 후손들에 의해서 결국은 교체되었다.” 라며 인종차별적 견지에서 성서를 해석했다.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1300만명의 과학자와 공학자 중에서 5% 미만인 60만명만이 창조론자들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생명의 기원과 관련이 없는 컴퓨터공학이나 기계공학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것이다. 생명과학 분야에 근무하는 48만명의 과학자 중에서 오직 700명만이 창조과학을 믿거나 창조과학이 틀리지 않은 이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이 분야 과학자의 0.15%만이 창조론을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자들이나 교수들이 어떠한 것을 믿는가가 아니라, 그들의 확신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이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종교적 확신 때문이지 증거 때문이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진화론에 관한 가설과 같은 진화론의 특정한 부분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이 매우 의심스럽다는 회의주의적인 표현을 쓴다. 그런데 그들은 진화가 그러한 의문으로부터 오랜 기간을 잘 버텨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은 단지 이론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과학적 의미에서 이론이라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 그룹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원리로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된 집합체라는 의미이다. 진화론의 경우, 다음 몇가지 현상이 관련되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들이다.
“생명체는 20억년 이전에 지구에 나타났다. 생명체의 모습은 생명체의 역사 동안에 변화하고 다양해졌다. 이들 종은 하나 혹은 매우 적은 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연결된 공통적인 계보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 자연선택은 종의 변화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자이다.”
이론으로서의 진화론 말고, 사실로서의 진화가 있다. 이것은 생명체가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크게 변한다는 관찰이다. 사실로서 진화는 다윈의 이론 이전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진화론은 이 사실을 설명한 것이다. 만약 "단지 이론뿐이다"라는 말이 실질적인 반론이 된다면, 창조론자들은 중력이론, 원자이론, 질병에 대한 세균론, 극한 이론(미적분이 근거를 두고 있는)등을 모두 비판해야 할 것이다.
진화의 경우,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얻어진 엄청난 양의 자료가 있다. 모든 생명체는 복제, 유전, 촉매작용, 및 대사의 기작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통 계보는 계급의 패턴, 혹은 집단 안의 집단을 보여준 것을 예상한다. 우리는 단일하고, 일관성 있으며, 잘 정의된 계층체계의 배열, 즉 생명체의 계통수를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계통의 증거들이 같은 생명체의 계통수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형태학적, 생화학적 혹은 유전적 특징 중 어떠한 것을 조사해도, 본질적으로 같은 결과를 얻어낸다.
화석 생물도 이 생명체의 계통수에 잘 들어맞는다. 우리는 화석 기록에서 전이 형태의 몇몇 사례들을 발견한다. 연대순으로 나타나는 화석들은 수백만년 동안의 공통 계보와 변화가 일관성이 있으며, 갑작스런 창조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많은 유기체가 볼 수 없는 눈이나 날 수 없는 날개와 같이 rudimentary, vestigial characters를 보이고 있다.
격세유전이 종종 나타난다. 격세유전은 가까운 조상에게서는 사라진, 먼 조상의 특징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유기체의 진화론적인 역사와 일관성이 있는 격세유전만을 볼 수 있다. 개체발생(발생학과 발생생물학)은 유기체의 진화 역사의 과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고래와 많은 뱀들은 태아의 시기에 뒷발이 발달되며, 이것들은 태어나기 전에 재흡수 된다.
종들의 분포는 진화사와 일치한다. 예를 들어, 유대류는 호주에만 있으며, 이러한 예외는 대륙이동으로 설명된다. 멀리 떨어진 섬들은 종종 그 서식처나, 일반적인 생김새는 매우 다양하지만, 유전적으로는 상당히 가까운 종들의 집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관성은 화석 종들의 분포가 포함되어도 유지된다.
진화론자들은 새로운 구조는, 이미 다른 구조에서 적응된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므로 구조가 비슷한 것은 기능 보다는 진화론적인 역사를 반영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은 자주 본다. 인간의 손, 박쥐의 날개, 말의 다리, 고래의 앞발, 그리고 두더지의 앞발은 서로 기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비슷한 뼈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분자수준에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인간은 유전자의 상당 부분, 아마도 70% 이상을 초파리나 선충과 공유한다. 두 유기체가 같은 기능을 독립적으로 진화시켰을 때, 서로 다른 구조가 종종 사용된다. 예를 들어, 새, 박쥐, 익룡, 곤충은 모든 서로 다른 구조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활강도 여러 가지 추가적인 방식으로 수행된다. 또한, 이것은 분자 수준에서도 적용된다.
진화 역사의 제한 때문에 종종 최적화되지 않은 구조와 기능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람의 목구멍과 호흡계는 호흡과 음식을 삼키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목이 막혀 숨질 수 있다. 미최적화된 것들은 분자 수준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DNA의 상당 부분이 기능이 없다. 일부 기능이 없는 DNA, 즉, 어떤 트랜스포전, 슈도 진, 그리고 내재 바이러스 등은 공통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것을 나타내는 패턴을 보여준다.
언어는 때에 따라서 애매하기도 하다. 에를 들어, “set”은 옥스퍼드영어 사전에 22페이지나 넘게 다루고 있다. "진화"라는 단어는 불행히도 이러한 애매함의 한 사례이다. 진화는 시간에 걸친 생물학적인 변화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하며, 진화론을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더 폭 넒은 관찰과 아이디어를 포함하기도하며,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일반적인 변화를 말할 때도 쓰인다. 이러한 애매함은 최소한 생물학적 진화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해서, 일반적으로 그 단어가 사용되는 앞뒤 문맥에 의해서 해결된다. 앞뒤 문맥을 조합시키는 것은 참으로 부적절한 것이며, 대립형질의 빈도의 변화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진화론을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의 건전함은 애매함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과학적인 논문은 다른 과학자들이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도록 쓰인다. 즉, 그들은 가능한 애매한 것이 없어야만 한다. 그 증거들은 압도적이다. 진화론은 단순히 이론이 아니다. 진화의 주요 측면은 예를 들어 공통 계보 같은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창조론자들은 종종 그들에 입맛에 맞게 우주론적인 변화를 진화론에 포함시기기 위해서 애매한 표현을 잘못 사용한다. 이것은 크나큰 무지이거나, 의도적인 부정직함이거나, 혹은 둘 다 이다.
창조론에는 서로 배타적인 많은 모델이 있다. 성서적인 창조론만 해도 천동설, 젊은 지구론, 날 시대 창조론, 진보적 창조론, 지적설계 창조론 등이 있다. 창조론은 생명체들이 한 번에 전체가 모두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하며, 이것은 모든 종들이 분명히 분리되며, 종류 혹은 종들에 대해서 분명하고 보편적인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암시한다.
지적설계론의 "설계"는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설계와 전혀 관련이 없다. 설계는 목적을 가지고 배치된 어떠한 원인을 이용해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지적설계의 의미로 설계를 구분하는 과정의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윌리엄 뎀스키는 어떠한 것은 아닌가(일상성과 확률)라는 것을 가지고 설계를 정의하며, 지적 설계를 불신으로부터의 주장으로 만든다. 그는 설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문제의 매개변수를 말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부적절한 얼버무림에 지나지 않는다. 설계에 관한 어떠한 이론도 설계자와 목적을 밝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실제로 설계가 아니다. 지적설계 이론가들 중 어느 누구도 설계자의 목적을 포함시킨 적이 없으며, 어떤 이는 명시적으로 그런 것들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만약 지적설계이론이 설계를 증명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의미하는 것이 없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로 말하는 설계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지적설계는 주관적이다. 뎀스키의 수학적으로 복잡한 공식에서 조차도 특수화된 복잡성의 설계서는 사실이 발생한 이후에 결정될 수 있으며, 설계서를 주관적인 개념으로 만들고 있다. 뎀스키는 현재 ‘명백히 특수화된 복잡성’과 ‘실제적인 특수화된 복잡성’을 비교하며, 오직 후자의 것만이 설계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적설계는 일반 상식과 반대되는 결과를 암시한다. 거미집은 분명히 특수화된 복잡성(specified complexity)의 기준에 잘 맞으며, 이것은 거미가 지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주장이 말이 된다면, 어떤 이는 거미의 설계자가 지적이지 못하며 단지 지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말하거나, 혹은 거미의 설계자가 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적설계이론의 모든 설계는 우주의 오직 초기에 포함되었다고 하는 약간 합리적 유신론으로 환원되거나, "특수화된 복잡성"과 같은 용어는 유용한 정의를 갖지 못한다.
지적설계는 지지자들로부터 일종의 창조론이라고 정의되고 그렇게 취급된다. 유명한 지적설계 서적은 이러한 창조론적인 생각을 지적설계의 정의에 포함시켰다. 지적설계는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가 지적인 존재로 인하여,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닐이 있고, 새들은 깃털, 부리 및 날개를 가진 것 등의 사례처럼 그들 각각을 구분하는 특징들이 완전한 상태로, 갑자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적설계 운동은 기원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설명을 거부하며,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한 한 번 혹은 여러 번의 창조로 자연주의적인 설명을 대체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론이다. 과학적인 방법론은 설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과학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즉, 고고학이나 법학 분야에서 설계를 찾을 수 있고, 검출해낸다. 설계론자 자신들이 이러한 설계를 사례를 검출할 수 있는 증거로 제시한다. 인간의 설계가 아닌 지적설계는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지적설계를 암시하는지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말하지 않는 사실 때문에 제외되는 것이다.
과학은 자연적인 원인만을 간주하는 것으로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다. 자연적인 원인이 아닌 기도의 힘이라던가, 점술, 사후세계 및 기타 다른 것들을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논문이 있다. 과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원인이 자연적인 것인가라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 객관적이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신뢰할 수 있도록 검증되었는가라는 점이다.
디자인이 의인화된 설계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디자인은 구름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며 불균일한 가열이나, 증발 등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진화가 설계자이다. 변이와 선택을 이용하여, 생식을 돕고, 환경에 잘 맞도록 만든다. 만약 설계자를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설계자가 필요하지 않다면, 왜 다른 것들은 설계자가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