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의 민주항쟁과 뜨거운 함성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군부 권위주의에 맞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하려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었고, 그 출발점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었으며, 이후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와 종교계가 결합한 민주화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이러한 시위의 흐름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결집이 되었으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고,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웅변은 독재에 저항하고 시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도구였다. 당시, 공식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집회와 연설, 그리고 유인물이나 성명 발표 등은 사실상 언론을 대체하는 의사 표현 수단이었다.
대학가의 시국 토론이나 거리집회의 연설, 그리고 노동현장의 결의문 낭독 등은 군중의 결집과 연대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김대중은 뛰어난 연설 솜씨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역설하며 국민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김영삼 역시 직설적이고 신념에 넘치는 연설로 군부 독재정권에 맞섰다. 이들의 연설은 국민에게 용기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상징성이 있었다. 그리고 학생운동 지도자들과 재야인사들 역시 거리와 강단에서의 웅변을 통해 억압된 현실을 고발하며 행동을 촉구하였다.
결국,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웅변은 행동을 이끌어내는 힘이었다. 억압된 시대일수록 군중 속에서 연설하는 것은 위험을 동반하지만, 그만큼 웅변은 더욱 강력한 울림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웅변의 위력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 이한열의 희생과 어머니 배은심의 삶
피로 쓴 웅변으로 민주주의를 깨우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권위주의적 통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던 시기였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도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는 계속되었고, 정치적 자유와 집회, 그리고 언론의 자유는 크게 제한되었다. 그러나 대학생과 재야인사, 종교계와 시민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987년은 그 저항의 목소리가 마침내 거대한 국민의 함성으로 폭발하였다. 14일,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숨졌지만, 정권은 사건의 진실을 축소, 은폐하려 했다. 이어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시민과 학생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6월 9일, 또 하나의 비극이 일어났다.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은 다음날 예정된 6,10 국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교내 결의대회에 참석했다. 집회를 마치고 교문 쪽으로 행진하던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고, 그 과정에서 이한열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그는 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민주주의 함성만을 남겨둔 채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이한열이 쓰러지는 순간의 사진 한 장은 역사를 움직였다. 피를 흘리며 친구의 품에 기대어 쓰러진 스무 살 청년의 모습은 신문과 외신을 통해 전국과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한열의 죽음은 학생들만의 분노가 아니었다.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6월 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6월 10일부터 26일까지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시민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거리행진에 참여했다. 마침내 6월 29일 여당대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 복권, 그리고 언론자유 보장 등을 포함한 8개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이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얻은 가장 큰 역사적 결실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6월 항쟁의 승리는 한 사람의 희생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박종철의 죽음, 그리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 또 전국적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이한열의 피격과 죽음은 이미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인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 한 가운데 한 어머니가 있었다.
배은심.
평범하게 살아가던 어머니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아들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는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27일 동안 찢어지는 가슴을 쥐어짜며 아들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아들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7월 5일, 이한열은 말없이 어머니의 곁을 떠났다.
그런데 아들의 장례를 치른 뒤 어머니 배은심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에는 왜 내 아들이 죽어야 했는지, 왜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만나면서 자신의 슬픔이 혼자만의 슬픔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해 8월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전국의 민주화운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싸웠다.
최루탄을 마셨고, 연행되었으며, 구류를 살기도 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아들 이한열이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고 있었다. 배은심은 훗날, ‘나는 어디를 가거나 나 혼자 간다고 안 해요. 나는 반드시 우리 한열이하고 둘이 간다.’고 말했다.
이 말은 한 어머니의 회한을 넘어선다.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의 삶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죽음은 어머니를 다시 거리로 불러냈다. 배은심은 민주화운동 유가족들과 함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활동했고, 지역 유가족 조직을 만드는데에도 힘을 쏟았다. 202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이한열기념관은 그의 삶을 돌아보며 ‘민주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추모전을 열었다.
이한열 열사와 어머니 배은심을 보면서 웅변 정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은 웅변이 결코 연단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사람이 시대의 부당함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웅변의 시작이요,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야 말로 보다 더 값진 웅변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결국, 학생들이 거리에서 외친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는 시대를 향한 웅변이었다. 이한열의 희생은 말할 수 없는 시대에 피로 쓴 웅변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배은심의 활동은 아들의 뜻을 행동으로 이어간 삶의 웅변이었다. 이한열의 피와 배은심의 눈물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