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주필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은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에서 "저 개·돼지만도 못한 우리 대신이란 자들은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됐다"며 "아! 분한지고, 2000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고 통곡했다.
그로부터 100여년 후 장지연은 자신이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했던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매국노들과 나란히 '친일 반민족행위자'에 이름이 오르는 운명에 처했다. 2005년 활동을 시작한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장지연이 1914~1918년 쓴 몇개의 글을 '친일 성향'이라 보고 지난 1월 그를 친일 행위 조사대상으로 선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경남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장지연 무덤을 경상남도 문화재에서 해제하라고 요구했고 마산시는 시내에 있던 '장지연로(路)'의 거리 이름도 없애버렸다. 2004년 국가보훈처는 장지연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었다. 세월에 따라 장지연을 민족 언론의 상징처럼 떠받들기도 하고 '반민족행위자'의 구렁텅이에 처박기도 하는 모순과 혼란이 이어졌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지난 6월 22일자로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에 "여러 정황상 (장지연에 대해)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엄격히 적용하기에는 다소 미흡해 선정을 취소했다"는 통지문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은 지하에서 백골(白骨)이 되고 진토(塵土)가 되었을 장지연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 되찾으려 했던 조국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벌이는 이 소동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군화와 총검으로, 이어서는 고문과 징역으로 짓밟으며 2000만 국민의 목을 조이던 시절에 생(生)을 영위(營爲)한 조선 사람의 일생을 100년이 흐른 후 오늘의 기준으로 재단한다는 것은 이만큼 위태롭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운 일이다.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의 부분적 행적에 매달릴 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그가 한 일을 종합해 균형 있게 본 후 내려져야 한다.
장지연의 경우 1910년대 일제하에서 친일 성향의 글을 썼다고 하지만 1920년대에는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해석하기에 따라 친일 소지가 있을 수도 있는 몇편 글을 빌미로 '시일야방성대곡' 집필이나 독립운동 참여 등 그의 다른 공적에는 애써 눈을 감아버린 채 그를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는 것은 역사를 보는 균형 있는 자세가 아니다.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장지연과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등 4430명을 수록한 '친일 인명사전'의 올해 안 출판을 강행할 것이라고 한다. 정권이나 권력이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 개입하고 대한민국 역사를 굴절(屈折)된 시각으로 보는 특정 이념 성향의 학자와 시민단체가 편을 지어 자기들의 색깔로 역사를 개찬(改撰)하는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해도 되는 것인가를 생각할 때다.
조선일보 2009.8.31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