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요나라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왕조를 세우고, 후진의 고조에게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16주’를 빼앗는 등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실로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3백여 년 만에 찾아온 중국의 분열기요 혼란기였다.
조광윤은 927년, 후당의 수도 낙양에서 근위장교 조홍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3백여 년 전 위진남북조의 분열을 해결했던 수문제 양견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유력한 가문이었으나, 가난한 군인의 아들인 조광윤은 집안 덕을 거의 보지 못하고 21세 때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곽위라는 절도사의 부하가 되었는데, 곽위는 950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후주의 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조광윤의 출세길이 열리기 시작해서, 2년 뒤 근위대장의 신분으로 수도 개봉에서 근무하다가 태자 시영(柴榮. 곽위의 아들들이 일찍 죽음에 따라 양자로 들어가 태자가 되었다)의 눈에 들어 그의 친구이자 오른팔이 된다. 그리고 시영이 954년에 즉위하면서(후주 세종) 가장 유력한 장군으로 떠오른다.
조광윤은 북한과 후주가 고평에서 충돌했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한 세종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명성을 날렸으며, 그 뒤에도 다섯 번 전쟁에 나가 모두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 지긋지긋한 난세를 내 손으로 끝장내겠다”며 천하통일의 뜻을 품고 영토를 넓혔으며, 내정에도 충실하여 민생과 재정을 안정시켰던 ‘오대십국 최고의 명군’ 세종이 그만 959년의 거란 원정길에 병사하고 만다. 황제의 자리는 졸지에 일곱 살에 불과했던 시종훈(공제)에게 돌아갔다. 어린 황제와 강력한 절도사. 오대십국 시대의 정변 조건은 완벽하게 갖춰졌다.
마침내 960년,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했던 조광윤은 ‘진교의 변’을 만난다.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서 머물다가 술에 취해 잠든 그에게 부하 장수들이 억지로 황제의 옷을 입히고는 황제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조광윤이 계획적으로 쿠데타를 해 놓고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수가 많다. 하지만 거란군의 침공은 분명히 있었으며, 당시 그가 출정하면서 인질이 될 수 있는 가족들에게 아무런 대비도 없이 출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실제로 “얼떨결에 황제”가 된 것이리라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조광윤의 군대는 진교에서 회군하여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공제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송이라고 했다. 스무 살 때만 해도 당장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지 기약이 없던 그가 3백 년 송왕조의 태조가 된 것이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의 근심을 없애다
뜻밖에 전 황제가 죽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행운’을 맞이한 것도, 그 기회를 활용해 역성혁명을 벌인 것도 수문제나 송태조나 똑같았다. 하지만 송태조는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를 비롯한 전 왕조의 황족을 살육했던 수문제와 달리, 시종훈과 그 친인척들을 정중히 대접했다. 또한 한고조나 명태조 같은 창업황제들과 달리, 자신을 황제로 이끌어 준 공신들을 ‘토사구팽’시키지 않았다-굳이 따지자면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 피비린내는 전혀 없었다.
황제가 된 몇 달 후, 송태조는 진교에서 자신을 황제로 받든 석수신, 왕심기, 고희덕, 장령탁, 조언휘 5대 공신을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이렇게 말을 꺼냈다. “경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 짐이 이 자리에 있었겠소? 진심으로 감사하오.(…) 하지만 한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소. 물론 짐은 경들을 전적으로 믿지만, 경들 중 누군가의 부하들이 언젠가 딴 마음을 먹고 술 취한 주군에게 황제의 옷을 입힐지 알 수 없지 않소?”
그런 말을 듣고 “그것도 그렇군요”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섯 공신은 혼비백산하며 그 자리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송태조는 그들에게 계속 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이오? 절벽 틈을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모두들 하나같이 부귀를 원하지만, 얼마 안 되는 삶을 편안히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뿐인데, 그나마 지키기 힘드니 말이오.(…) 그러니 경들은 각자의 병권과 지위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그러면 여생은 아무 염려 없이 평안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송태조는 공신들의 자녀와 자신의 자녀를 혼인시켜 서로 딴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하자고 권했다. 결국 석수신 등은 황제의 뜻에 따라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 일을 두고 “술잔을 들면서 공신들의 병권을 없앴다”고 하여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 하는데, 오대십국 내내 정권을 불안케 했던 절도사들의 병권을 술자리 한 번으로 해결해 버렸다는 말이라, 곧이듣기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다섯 명의 공신 중에는 한신이나 조광윤처럼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오대십국의 혼란에 지긋지긋해 하던 민심 등을 고려하면 아주 어이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