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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의 호심경(에베소서 6장 10-18절)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하심을 베푸사 자녀 삼아 주셨으니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힘 있게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 안에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아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납하고 즉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면서 지혜롭게 살라 합니다.
세월을 아껴 어리석게 살지 말고 술에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 충만하여 찬양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현실적인 신앙생활에 있어 맨 먼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이 바로 서야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기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듯 부부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여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세상 지식에 아닌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학교교육과 성경교육에 대해 드릴 말씀이 너무 많지만 딱 한 마디로 여러분 아무리 좋은 대학 아니 외국 명문대학에 유학을 보내고 그 자녀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아무리 큰 출세를 해도 교회 안에서 성경을 잘 가르치시지 않는다면 자식을 다 망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자녀가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게 하고 끝내는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고스란히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만 말씀드리고 바울의 교훈으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또 세상일이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상전에게 잘 순종하고 항상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하라고 합니다. 또 아랫사람에게도 마음을 다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교훈을 주는데 그것은 주 안에서 힘과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다 강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세상과 싸우고 보이는 육의 눈으로 현실적인 일들과 싸우는 것 같지만 우리의 싸움은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와의 싸움이고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쉽게 말씀드리면 여러분과 저는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에 눈으로 보이는 현실대로 우리가 가진 돈이나 지식, 건강한 몸에서 나오는 힘 등 그런 우리의 능력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대하여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소유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야 힘 있게 사실 것이고 넘어지지 않을 것이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이고, 확신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현실에서나 마음에서나 영적으로 늘 승리하며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왜 필요한지 또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지를 알게 되려면 바로 우리가 날마다 영적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 씨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지고 이기고 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아무리 둘러봐도 귀신은 고사하고 바람도 없는데 무슨 통치자니 권세니 어둠의 주관자들이니 악한 영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공갈치느냐고 하실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중엔 그런 분은 없겠지만요.
그러나 사실 우리는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에서 동시에 살아갑니다.
세상 모든 것들과 우리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예정에 따라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이루어져 갑니다.
제가 오늘 드리는 말씀은 그 창조론이나 신론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를 믿어 하나님이 안에 있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악한 영의 통치와 권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럼 어디에서 역사하나요? 현실적인 환경에서 자녀의 일로, 배우자의 일로, 부모의 일로, 혹은 시댁이나 친정의 일로 어려움이 옵니다. 또 돈으로 인한 어려움과 건강으로 인한 어려움과 직장이나 소속한 단체 혹은 자신들이 오는 사업장의 어려움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어디서 오나 하면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우연히 오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마귀가 쏘는 불화살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귀의 불화살은 우리의 환경, 우리의 생각,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쉬지 않고 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찾아와서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너무 부족해, 너는 죄가 많아, 너는 자격이 없어, 너는 가진 것이 없어. 너는 배운 것이 없어, 너는 실패하는 것이 마땅해, 너는 무시당하는 것이 마땅해, 너는 슬프고 힘들어야 해, 그렇게 우울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어둠의 주관자들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우리는 무기력한 존재로 마귀에게 끌려 다닙니다.
모두들 행복한데 왜 나만, 왜 우리 가정만, 왜 내 남편만, 왜 내 자식만, 왜 우리 친정만, 우리 시댁만, 왜 우리 남편 직장만, 왜 우리 교회만 이렇게 힘들고 불행한가?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사는가? 그렇게 구석만 찾습니다.
남들은 다 직장에 급한 일로 인해 회사를 가는데 나만 주일날 교회가려니 나만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애써 벌어서 감사헌금하고, 십일조 떼고, 선교헌금하고, 주일헌금 내고 나면 한 달에 얼마고, 그 돈 일 년 동안 모아 놓으면 얼마가 될 것이라고 손해만 계산합니다. 주일 날 놀러갔다가 예배 시간되면 아무 교회나 잠깐 가면되지 꼭 본 교회는 왜 가야한다고 하며, 남들도 다 일 주일에 주일 오전 예배 한 번만 드리는데 왜 우리 교회만 주일 낮, 오후,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등 모든 예배는 다 참석해야 하고 무슨 이익이 있다고 전도한다고 일주일에 오후 내내 그것도 두 번씩이나 교회에 또 가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괜히 주변에 암 걸린 사람이 있고,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있고, 진드기에 물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있으면 불안하고 염려됩니다. 또 이웃나라에 쓰나미가 오고 홍수가 나거나 지진이 나면 곧 우리나라에도 그 일들이 생길 것 같습니다.
남들은 기도 시간에 울고불고 따다다다 하고 난리인데 젊잖게 해도 되는데 지랄 맞게 방정을 떠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나에게는 화낼 일만 생기는지- 세상이 악하여 운전하다 보면 진짜 볼상 사나운 운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직장에서도 이웃들도 왜 그렇게 자기만 생각하고 남들은 생각지도 않고 무시하고 말 함부로 하고 경우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 상종 못할 인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왜 그렇게 잘난 사람들이 많은지 장로라며, 권사, 집사라면서 겸손은 코딱지만큼도 없어가지고는 뚝하면 상처주고,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지 정말 꼴도 보기 싫을 때가 많습니다.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비판하고 수군거리는 자리에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일들을 우리가 당하는 것은 사실 눈으로 보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고 내가 부족하고 내가 못나서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마귀가 우리를 바로 흔들려고 공격하기에 생긴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두 육에 보이는 대로 싸울 것이 아니며 여러분이 가진 힘으로 싸울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보고 영으로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싸워야 결판이 난다는 겁니다.
몰론 영의 비밀을 알고 영으로 살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신 분들은 마귀가 ‘너 죄인이고, 형편없다’고 하면 ‘그래 마귀 네 말대로 난 죄인이며 형편없어, 그거 잘 알아.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날 대신해 십자가 져주시고 날 구원하셨다는 거야. 그리고 이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주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고, 강건함을 누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날마다 이길 수 있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어. 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능히 이기고 설 수 있기 때문이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못하면 주님의 힘과 능력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지나요? 영원히 그 어려움과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죽도록 참고 죽을힘을 다하여 견디고 나면 또 그보다 더 큰 일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인생에 외로움과 고난은 끝없이 다가오는데 여러분이 낙심하고, 절망하여 쓰러져 죽기까지 마귀는 불화살을 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아무리 혈기를 부려 죽기 살기로 덤벼도 이길 수 없고,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현실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에는 행복이, 만족이, 강건함이, 풍성함이 없습니다. 승리가 없습니다.
오직 이길 힘은 주님의 힘과 능력입니다. 자유함이 행복함이 은혜와 승리가 강건함과 만족이 풍성함과 감사가 그리고 형통함과 승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영적 씨름에서 이겨야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에 전신갑주로 잘 무장하시길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우리가 전신 갑주를 입지 못한다면 우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리의 약한 모습과 약점이 그대로 들어나게 되어 우리는 아무 것도 붙잡거나 의지하지 못한 채 아무런 소망을 갖지도 이루지도 못한 채 무능력한 자로 끝내는 불화살이 온 몸 구석구석 박히게 되고 심장을 관통하여 결국 파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전에 우리는 힘과 능력에 대하여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두 번째 진리의 허리띠에 대하여 지난주 주일 낮 설교를 들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가 뭐라고 했나요? 허리띠란 앞치마처럼 매는 것으로 무슨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할 마음의 준비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만 바라보는 집중이며,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을 잘 섬기기로 결단하고 살아가는 행동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전신갑주는 간단하게 여섯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한 가지 진리의 허리띠를 말씀드렸으니 오늘은 그 두 번째 흉배, 또는 호심경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흉배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우리교회에서 개역개정 성경을 사용하고 있고 호심경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편의상 호심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왜 호심경을 차야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호심경은 한 마디로 갑옷과 같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갑옷은 갑옷인데 가슴 즉 신체의 중요한 심장과 간 등을 잘 보호하도록 되어 있는 갑옷을 말합니다.
호심경이 주로 막아주는 부위는 가슴과 어깨와 등입니다.
의의 호심경을 찬다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하여 파괴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공격자는 누구이며 어디를 공격합니까?
11절을 보니 그 원수는 마귀입니다. 그리고 그의 공격 부위는 심장입니다. 가슴을 통하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두던 등을 공격하든 궁극적인 공격 목표는 심장입니다. 특히 가슴 부분을 공격할 수 있으면 상대는 곧 바로 땅바닥에 쓰러질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을 공격하여 우리의 심장을 불화살로, 칼로, 창으로 치려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죄와 악으로 썩게 만듭니다. 등 뒤에서 비수를 꽂으려고 합니다. 등 뒤에서란 우리가 알지 못하게 찌른다는 것입니다. 또 어깨에 무거운 짐을 끝없이 올려놓아 결국 염려 가운데 우리 심장이 무너지게 만듭니다. 마귀는 어떤 방법으로든 심장을 파괴함으로 우리의 인생을 박살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의의 호심경을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11절의 마귀라는 원어를 보면 ‘디아볼로스’라고 되어있습니다. 영어로는 데블입니다. 이 명사의 원래 의미는 비방이란 뜻입니다. 이 동사의 의미는 계속 쉬지 않고 비방과 헐뜯음으로 때리고 때려서 상대의 마음을 녹초로 만들어 무너지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귀라는 뜻은 슬랜더(Slander), 즉 참소자입니다. 특히 그는 간계를 사용하여 비방하고 참소합니다.
성경은 사탄은 가장 악한 참소자로서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약점을 잡아 계속 비방과 거짓과 조롱으로 쉬지 않고 공격하는 자라고 합니다. 등 뒤에서 공격하고 또한 쉬지 않고 비방과 거짓을 우리 어깨에 올려놓아 염려로 지쳐 포기하게 만듭니다. 전쟁으로 비유하면 계속 틈도 주지 않고 가슴과 등을 공격하여 심장이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의 호심경이 없는 사람은 사탄에게 계속 참소를 당하고 비방을 당하게 되면서 마침내 그 마음이 파괴되어 더 이상 일어나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참소자 사탄의 공격은 이러합니다. ‘너 같은 녀석이 무슨 신앙생활을 해? 나 같은 게 무슨 직분자야. 이 악한 놈. 너 전에 이러이러한 나쁜 짓을 했지. 너는 여차여차한 죄와 죄악이 있으니 너는 아주 나쁜 놈이요, 형편없는 놈이요, 죽어 싸며, 너는 율법에 의하여 딱 사형을 받아야 마땅해’ 마귀는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군수군하게 하여 그 공격 대상을 왕따 당하게 합니다. 그래서 소망을 잃어버리게 하고 목표를 상실하게 하고 자책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 성령님께서도 우리의 신앙 양심을 가책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 깊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사랑을 의식하게 하면서 우리에게 회개하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지 그 과정에는 비방이나 수군거림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방과 수근거림과 판단으로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받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방과 수군거림은 사탄의 음성이며 공격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신의 내면을 통하여서나 또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을 통하여 이 음성을 몽둥이로 만들어서 계속 그 몽둥이로 우리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탄의 공격에 수차례 얻어맞고 점점 상처가 커져 끝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영적으로 병들어 패잔병이 되어 버리고 믿음생활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여 파멸 당하게 되어 사망으로 멸망으로 지옥으로 향합니다.
19세기 말 드와이트 무디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지은 죄가 많아 아무리 회개해도 죄가 너무 중해 계속해서 생각나 힘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에게 무디가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느냐고 묻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느냐며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을 믿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년이 ‘그럼요. 믿습니다.’라고 하자 무디가 화를 버럭 내면서 “네가 뭔데 예수님이 용서했다는데 죄가 크고 적고 용서가 되고 안 되고 한다는 거냐?”고 하더랍니다. 다 용서하시고 기억도 안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느냐는 것이죠.
여러분 마귀가 양심적으로 우리를 비난할 때 어떤 방법을 쓰는지 아십니까? 꼭 옛날 5년, 10년 전이나 20년 전의 일을 끄집어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그겁니다. 마귀는 우리가 지난 날 잘못한 죄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요즘 컴퓨터 파일에 저장하듯 다 가지고 있다가 틈만 나면 너 옛날에 이랬잖아, 너 그거 못해, 자식에게, 마누라에게 너 어떻게 했니? 넌 원래 그래. 대충 살아, 그렇게 더럽고 추하게 살아왔으면서 새삼스럽게 이제야 거룩이니 정결이니 하는 것은 정말 웃기지 않니? 넌 죽을 수밖에 없어, 넌 죄인이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동조하거나 화를 내면 지는 겁니다. 그럴 땐 ‘그래 맞다. 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어 날 살려주시고 세워주시고 사명주시고 이길 힘과 능력을 주신다.’고 해야 합니다.
내 의가 아닌 십자가의 의 그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게 호심경입니다.
내 자신의 공로로 따지고 내 자신의 의로 따지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서게 된 것이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망과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는지 물으면서 도덕적으로 따집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모범적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왔는지 따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세상적으로 아무리 모범되고 의롭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 왔다고 그것이 구원을 이루어주지 않습니다. 자기 공로로는 구원을 얻을 자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의 호심경을 입지 않고 전쟁에 나가면 그는 사탄의 비방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여 그의 가슴이 파장될 것입니다. 사탄은 쉬지 않고 정죄할 것입니다. 비방할 것입니다. 이 사람 입술을 통해서 저 사람 입술을 통해서 의의 호심경을 입지 않은 자의 마음을 칼로 칠 것입니다. 등 뒤에서 찌를 것이며 그 삶의 어깨에 계속 비방의 짐을 쌓아 올릴 것입니다. 지금 인터넷 시대는 더 무섭습니다. 인터넷 상의 비방과 수군거림은 인터넷을 붙든 마귀의 전쟁터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방의 공격으로 인해 자살을 택한 사람들도 이미 많이 있습니다. 사탄은 특히 그리스도인을 노리고 있다가 어떤 실책을 잡기만 하면 한번이 아니라 완전 쓰려져서 심장이 파괴되어 폐인이 될 때까지 비방과 수군거림으로 그 사람의 심장을 때리는 것입니다.
이 때 사탄의 비방과 정죄의 공격을 받고 병들게 되는 마음은 그 생각이 비정상이 되고 그 감정에 공포와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 차게 됩니다. 따라서 쉽게 정신병 증세가 나타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그 성도는 이미 사탄에게 패배한 패잔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패잔병이 되었을 때는 사탄의 포로로 전락되어 비참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보통은 우울증에 걸립니다. 가장 흔한 일은 공격당한 그 사람 역시 또 다른 비방자가 되어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이제는 자신이 사탄의 도구가 되어 남을 비방하고 파멸시킵니다.
그래서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영적 궤계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탄의 무기인 정죄와 비방과 수군수군 거림에 대하여 영적 무기를 주셨습니다. 즉, 사탄의 비방과 정죄를 이길 수 있는 영적 무기는 의의 호심경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의 호심경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의의 호심경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입게 될 의의 호심경은 완전한 의의 호심경입니다. 이 의의 호심경을 입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먼저 회개함으로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우리의 헛된 알량한 자기 의의 썩은 옷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의의 호심경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의 호심경을 입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의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의를 전제로 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의의 호심경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격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여전히 비방합니다.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수군거립니다. “너는 안 돼. 너는 죄가 많아. 그 죄를 다 어떻게 할 거야. 그러고도 뭐 교회를 다니겠다구? 그러고도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이야? 그것은 위선이잖아.”
그러나 이때 우리가 의의 호심경을 입고 있으면 이렇게 마귀에게 대꾸하며 외칠 수 있습니다. “그래! 나의 의는 없다.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았으며 나는 예수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를 의지하여 산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사탄아 더 이상 나를 정죄하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 그래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내 죄를 해결해 주셨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입었다. 와서 해 볼테면 해 봐라. 이 사탄아.”
분명, 믿음을 가지고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의를 소유할 때 우리에게는 담대함이 넘칩니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이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원히 용서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용기가 흘러넘칩니다. 정신적으로 아주 강해집니다. 더 이상 사탄의 비방과 궤계가 먹혀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어 봅시다. 어떤 아들이 도박빚을 지고 빚쟁이를 피하여 도망다닙니다. 그 다음 날 빚쟁이들이 그 아들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다 빚을 받아냈습니다. 그 사실을 이 아들은 모르고 가족들에게 연락도 안하고 도망자의 삶을 삶니다. 빚쟁이처럼 생긴 사람이 어디에 있으면 무조건 도망하며 불안함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전화 통화를 하게 되고 사실을 알고 보니 자신의 아버지가 도박 빚을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 아들이 어디 길을 갈 때 조금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지불할 모든 빚을 아버지께서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여러분이 주 안에서 의롭다는 사실을 영적 무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녀이기 때문에 나는 의롭다고 믿어야 합니다. 내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이 의가 바로 의의 호심경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차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의 ‘리얼 크리스찬니티’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제4장에 보면 ‘가장합시다.’라는 제목의 문장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얼마나 못생겼는지 거울을 마주하기도 힘이 들 정도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아랑 드롱처럼 지금의 장 동건처럼 잘 생긴 사람의 본을 따서 가면을 썼습니다. 막상 써보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잘 생긴 가면으로 인해 못생긴 외모로 혐오감을 주던 그 때와는 달리 따뜻하게 대해주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면을 오랫동안 계속 쓰다 보니 얼굴이 그 가면처럼 변해 버린 것입니다. 눌려서 그랬든, 소망이 이루어졌든 정말 잘 생긴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루이스가 복음을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주장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도 이처럼 우리가 의롭지 못하고 죄인이고 부끄럽지만 주님이 사해 주시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셨으니 의로운 척하고 의로운 사람처럼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정말 의인으로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의 호심경이란 지금은 아직 우리가 개판일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의인이라고 칭해 주셨으니 의롭다고 믿고 정말 의인인 것처럼 살아가면 그 과정을 통하여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디베케이션 즉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몬을 보십시오. 그가 툭하면 혈기부리고 칼 들고 설쳐대고 변덕을 부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시몬이 아닌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하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 성질 지랄 같은 베드로가 무슨 반석입니까? 그런데 너는 시몬이 아닌 베드로라고, 너는 반석이라고, 돌아올 것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의의 호심경이란 그렇게 믿어 주는 능력이며 기다려 주는 능력입니다. 인정하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 어떤 환경에 놓여도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이 반드시 나를 변화시키시고, 나를 세우시고, 나를 써주시고, 나를 축복해 주시리라고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의 호심경을 가진 분들은 반드시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성화시켜 진짜 의인으로 진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굳건히 믿음에 서서 진짜 의인처럼 무슨 일이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의 호심경은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취하면 우리 가정도 살고 교회도 부흥됩니다. 복음으로 충만한 교회, 복음으로 충만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다 흔들리지 않고 밝은 얼굴로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가정과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의 호심경을 취한 성도들은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십자가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십자가가 나를 살렸다고,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살렸다고,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살게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내 능력이라고, 나는 십자가만 예수님만 붙들고 살겠다고, 내 소망은 오직 십자가요, 예수님이라고 자랑하며 사는 그 분이 의의 호심경을 취한 성도입니다.
첫 번째 진리의 허리띠는 다른 것 다 버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싱글 포커스, 집중, 통합,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의의 호심경은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인정해 주는 능력, 아직 완전한 의인은 아니지만 나는 예수님이 의인라고 했으니 의인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직 의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의인이기에 아직 부족하지만 의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집중해서 바라보면 의인으로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