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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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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스크랩 부끄러운 한국 개신교사
sarmy 추천 0 조회 49 08.07.24 1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끄러운 한국 개신교사

 

지난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책으로 자본론을 꼽는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종교, 즉 기독교를 두고 마약이라고 했다.
착취 당하는 인민이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반혁명의 세뇌교육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과거 일제 시대에 교회는 권력유착의 보고였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약간의 타협을 하였다 주장하지만 그 정도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결과로 우상숭배와 민족배신이라는 반 인권적인 일들을 행해왔다.

진보주의 기독교계 언론인 뉴스엔조이에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조선교회가 섬긴 3위-하느님, 돈, 일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 해방이후에는 친미,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새로운 권종 유착을 선택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다시 군사정권에 야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에 권력자들을 등에 업은 기독교는 사상초유의 부흥기(?)를 이루게 된다.
즉, 개신교는 정교분리 담론을 통해 정치권력을 비판하기보다는 체제에 순응하고 그 대가로 국가권력의 보호 아래 교세를 확장하는 전략을 사용하게 되었다.

말해야할 때 말하지 못하고,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지 못하는 한국교회는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면서 그들이 던져주는 떡을 받아먹고 세력을 키워왔다.
이러한 사실들은 널리알려진 것이지만, 현재의 기독교는 스스로 신사참배 거부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큰소리를 친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오리발인가!

물론, 기독교계의 주장대로 소신있는 목사들이 많았다.
문제는 그런 목사님들은 생전에 목회직을 박탈당하고 무수한 핍박을 받고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목사님은 최근에야 목사직이 복권되었다.
군사정권하에서도 도시산업선교회같은 목사들이 있었으나, 이단으로 핍박받고 목회직을 박탈당하고 지금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한다.
반면에 권력의 시녀역활을 한목사들은 대부분 정죄되지 못하고 대형교회의 목사가 되어, 기독교 수뇌부의 감투를 하나씩 얻어쓰고 살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정과 부패는 지나간 과거를 비추어 볼 때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소신있는 목사를 쫓아내고, 무당목사와 세속적 욕심으로 가득찬 목사에게 감투를 준 결과이다.

 

● 친일의 역사 / 적 그리스도

한국의 기독교는 스스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 또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교리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식민지 초기때에는 강렬히 거부되었다.
여러 기독교계 학교가 신사참배거부로 문을 닫기 까지 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시기는 36년이라는 점을 알아두길 바란다. 30년이 넘는 기간의 식민통치에 기독교인 상당수가 변절을 하기 시작했고, 일제강점말기에 기독교는 아예 친일로 돌아섰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수양동우회 사건(1937)과 흥업구락부사건(1938)사건이 터진뒤 대부분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변절했고, 신사참배는 교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시기를 아주 세심하게 살펴보면 대부분이 식민지시기 초기의 사건들임을 눈치챌수가 있다. 식민지 말기에 그들은 어떻게 변절했는가?

아래에서 언급하는 친일 목사들은 ;반민족문제연구소 편찬 [청산하지 못한 역사], [친일파 99인]와 이선교 목사의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등을 참조한 것으로, 그들의 직책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모두 거물급 목사들이다.

*장로회의 1937년 기독교보 에 다음과 같은 사설이 실렸다.“기독교인은 여력을 다해 일본 황실을 받들 것이며 황은(皇恩)을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이며 국운을 융성하게 하며 총후(銃後) 만전을 도모하여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라!”
또, 1938년 4월 25일에는 감리교 유형기 목사를 비롯하여 각 교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신사참배와 총후 보국주간 행사에 모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조선기독교는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해 황도(皇道) 정신을 발휘하고 선양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 의식임을 인정한다"는 결의했다.

*1938년 6월8일 제32회 전북노회 회의에서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 이때 원평교회,신태인교회,화호리교회 등이 다른 노회보다 앞서 신사참배를 결의햇다. 또한 전주 시내 교회들은 다섯 교회가 한꺼번에 전주부 도제직회로 모여 연합적으로 노회 전에 신사참배했다.

한편 ‘신사참배 결행 청원서’를 노회에 제출하여 노회의 부의 안건으로 성립시켰다. 이에 뜻을 맞추어 신태인·화호리 교회도 신사참배 청원서를 제출하여 노회의 회의 안건을 더욱 확실하게 했다. 그 당시 전주부 도제직회 회장은 김세열 목사였고, 화호리교회 당회장은 이우석 목사였다. 전주부 도제직회가 제출한 청원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원서-전주부 소재 5개 교회 도제직회에서는 당국의 누차 간절한 지도에 의하여 만방 무비한 황국신민 된 지위를 자각하고 검토한 결과 결코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신앙과 기도가 없고 따라서 참배는 황실의 조선(祖先)과 국가의 공로자에 대하여 충심, 숭경의 정성을 드림으로써 국민의 적성(赤誠)을 피력하는 것임을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국민의 당연한 의무일 것을 확신하고 이에 전북노회로서 신사참배하기로 결의하기를 청원합니다."
또한 이 노회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각 소속 교회에 결의내용을 통지하는 한편 상회(총회)에도 보고하여 건의하기로 했다.
이후 1938년 춘기노회 때 가을의 총회를 기다릴 것도 없이 각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는데, 4월에는 제주노회가, 계속해서 순천노회, 전남노회가 각기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개최된 장로교 제27차 총회(총회장:홍택기 목사)에서 자발적으로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 본 총회는 각각의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23개노회 중17개 노회가 참석하여 평양노회장 박응월 목사가 제안하고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 안주노회장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다.
총회 서기 곽진근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결의 성명을 발표했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중략).....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 )을 다하기로 함"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가결된후, 장로급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모두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신사에 참배를 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을 하고 조선에 돌아와 역대천황을 위한 사당을 세우는 추태를 부렸다.

*이듬해 열린 장로교 제28차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조직했다.
이 연맹 이사장으로 윤하영 목사,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를 선임하여 종교보국이라는 미명하에 적극적인 부일협력에 나섰다. 다음은 1940년 정인과 목사가 총회에 보고한 이 연맹의 사업 내용이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私的)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중략).....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중략)...이만하면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9회 회록, 1940, 87∼94면]
장로교에서 조직한 이 단체는 총독부와 동조하여 독립운동을 벌인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여 고발하던 가장 큰 세력 중의 하나였다.

*이후 성결교,구세군,성공회 등이 신사참배에 결의했다.

*1938년 10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전쟁협력 강도(講道)에도 정춘수, 차재명, 박연서, 이동욱, 홍병선 목사 등이 연사로 참여했다.

*1939년에 전북노회는 임시노회를 열고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전북노회 연맹을 본회의에 앞서 결성했다.
1939년 전국적인 연맹사업으로 무운장구(武運長久) 기도회를 무려 3,739회나 개최했다.
이 모임은 일본어로 식순을 작성하여 진행했다.

*1941년 2월 8일 전북노회 제34회 제3차 임시노회는 본회의에 앞서 종전의 이름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연맹’으로 바꾸고 연맹의 이름도 노회의 교정을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을 삽입했다.
1941년 국민총력연맹 결성식에서는, 찬송,성경,기도까지 빼고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송(齊誦),천황 폐하 만세 봉창 폐회사를 하고 집회가 끝난후 신사참배를 했다.

*1944년 3월 3일 감리교 교단 상임위원회에서 애국기 헌납 및 교회 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켜, 교회를 통폐합하여 전쟁물자를 낼 것을 결의했다.

*유형기,윤치호,박희도,차재명 목사등이 1937년 각도 순회시국강 연에 나서서, 황국신민으로 부일협력 할 것을 주장했다.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목사는 1936년 1월29일 총독부 에서 신사 참배 순응의 뜻을, 6월에는 신사참배에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YMCA 총무 신흥우 목사는 [동양지광] 1939년 2월호에 "금일의 우리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중략)...천황 폐하의 충성스런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이것이 조선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 이라는 논설을 실었다. 신목사는 해방후에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왔다.

*충북 괴산의 남기종 목사는 박규호 장로와 더불어 기독교 황도선양회(皇道宣揚會)를 조직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서울의 감리교 유형기, 갈홍기 목사 등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 황도학회, 임전보국연맹(臨戰報國聯盟)등을 조직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을 흡수하고, 그 대표들은 신사참배와 총후보국강조주간(銃後報國强調週間) 행사에 모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정신을 발양(發揚)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장로교와 함께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성결교회는 급기야 1943년 12월29일 "중생 신유 성결 재림의 4중 복음교 리가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뜨리며, 이와같은 불온 포교를 해온 책임을 통감한다. 이를 맹서하여 결정하 황국신민의 자격을 실추치 않을 것을 기한다"며 교단의 해체를 선언했다.

*친일 기독교지도자들은 1943년 11월에 징병과 학병의 출정독려차 조선 각도에 유세를 다니고자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을 조직하고,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조직하여 감리교의 갈홍기, 장로교의 채필근, 천주교의 김한수 등을 유세에 앞장세웠다.

*1942년 10월 16에 시작된 평양 서문밖교회당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에서, 17일 오전 9시 회원 일동이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했다.
국민총력예수교장로회 총연맹 이사장 鐵原志化(최지화), 간사장 德川仁果(정인과)의 보고에 따르면, 육·해군에 애국기(전투기)1대를 헌납하고 육전대에 기관총 7정을 헌납할 자금 150,317원 50전,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 23,221원 28전, 놋그릇 계2,165점, 교회 종 1,540개(총액 약 119,832원)을 헌납한다는 보고를 했으며, 국어(일본어) 상용운동전개와 일본어로 초등국어 성서강습교본을 출판하기로 하고,징병령 실시를 촉구했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윤치영목사(중앙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 백락준목사(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 최태용 목사(복음교회 감독),윤일선 목사(세브란스의전 교수), 전필순 목사(조선장로교회 부총무),정춘수 목사(조선감리교 총감독),양주삼 목사(조선성서회 행정총무 감리교 목사) 15명이 참석하여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채필근목사는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주장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르켜 가롯유다같은 사람이라고 매도했다.
최태용 목사는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발언했다.
백락준(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목사는 미국이 반드시 패배할것이라고 1943년 12월 5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백목사는 해방 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총장까지 했다.

*박희도 감리교 목사 -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었다 변절한자다.
친일잡지 [동양지광]의 사장이 되어 창간사에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 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동양지광, 창간호, 1939]
1943년 6월호에서 그는 [진심을 헌납하라]는 글에서는 "그러므로 현시의 반도 총후에서 국민의 헌납운동이 날로 치열화되고 있음은 기쁜 경향이지만 그럼에도 더욱이 중요한 것은 충군애국의 진심이 진정으로 그 헌납품에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다......(중략).....하물며 세계에 으뜸인 황군 병사로서 제1선에 참가할 때 죽음 등을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한 목숨을 헌납할 때 그 죽음은 자기 동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실로 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하도록 촉구하였다.
1944년 3월호에서도 [결전 비상의 때(秋)-궐기하라 반도 청년]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이러한 문필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1937년 9월 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년 11월 6일부터는 강원도 지역에서 학병독려의 강연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의 이름까지 빌려 자신의 잡지를 통해 친일논설을 펴 일제의 신임을 얻기에 열을 올렸다.
박희도는 이외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 되었다가 독재자 이승만에 의하여 구명 도생 했다.

*정춘수 감리교 목사 -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었다 변절한자로 3.1운동으로 체포된뒤, 1938년 9월 4일 매일신보에 사죄의 글을 올리고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에 국방비의 일조로서 자진헌납하고 친일파로 전향했다.(당시 쌀 한가마니의 값이 대략 25~30원)
그는 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 위원등을 거친후, 1940. 10. 감리교 교권을 장악한 후 [감리교 혁신안] 발표했다. 내용중에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것" 까지 규정했다.
"우리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우리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을 솔선결의 실행을 기함" [매일신보 1940년 10월 4일자, "사상선도에 주력 군사원호에 진충, 감리교혁신안 발표"]
그는 `시국대응 신도대회`, `총진회` 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등을 역임했고,
1941. 10. 10.에는 교역자와 신도대표 50여명을 이끌고 부여신궁 조영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왔다.
1941. 10. 21. 국민총력 기독교 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회를 열고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뜯어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하고, 1942. 2. 13. 황군 위문 및 철물 헌납의 건을 감리교 각 교구장에게 공문으로 보내 "교회의 종도 헌납하야 성전 완수에 협력 할것" 을 요구했다.
1944년 감리교단을 이끌면서, 상동교회에 황도문화회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에게 일본정신 주입에 광분, 아마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교인을 인솔하여 남산의 조선신궁까지 뛰어가 단체로 신사참배 강행했다.
1993년 2월, 고향인 청주 3. 1 공원에 세워졌던 민족반역자 정춘수목사의 동상은 시민단체들에 의하여 쓰러졌다.

*정인과 장로교 목사 - 상해 임시정부 외무차장이었다가 귀국후 변절한자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총간사(1939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기독교신문협회 회장(1942년)등을 역임하고, 장로교 중앙상치위원회 총간사로서 부일 협력을 했다.
장로교 총간사로 취임하여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 동아질서의건설에 용왕매진" 하자고 선동하면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선도했다.
교회의 헌법, 교리, 교법, 의식 등을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것과, 전 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이론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 개정을 지시하고,
1941. 9. 4.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앞으로 일보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하략)"
1942. 4. 29. 발표한 글 중의 일부 "내선일체의 완성과 국어(일본어) 생활의 철저"
해방 후 친일행각 죄상으로 반민특위에 체포 되었다가 독재자 이승만에 의한 반민특위 폭력 해산으로 구명도생했다.

*전필순 혁신교단 목사 - 항일단체 대동단 단원이었다가 변절한자로, 중일전쟁시 전국 각지 교회 순회강연시 "정의의 중일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 조선인은 전쟁에 협력하라!" 고 선동했다.
그후, 기독교를 총 망라한 혁신교단을 조직하여 그 괴수가 되어 친일 부역하고, 교회 건물 내에 일본 가미다나를 설치할 것과 황도연구회 설립 선동했다.
해방 후 친일행각 죄상으로 반민특위에 붙잡혔으나 역시 구명도생했다.

*김길창 목사 -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이자 친일부역한 거물 기독교지도자로 기독교인 황민화운동을 이끈 수뇌 인물이다.
1938년 장로교 제 27회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교인의 황민화운동 추진단체의 수뇌 인물로, 황민화운동, 신사참배운동, 민족정신말살운동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일경과 결탁하여 탄압했다.
그는 "3·1 운동을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는 등으로 평가했다.

● 해방후 혼란기속의 교단분열 / 적 그리스도

교회 장로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깡패들을 파견해 불교를 평정했다.
이승만이 그러한 행위를 했던 진짜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해방후 불과 200명 남은 비구승들이 7천명이나 되는 대처승들을 장장 17년간의 정화운동 끝에 1969년 마침내 왜색승인 대처승들을 절에서 쫓아내고 대처종단인 태고종단(현재는 여기도 40%는 비구승이다)을 만들어 나가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간에 불교계는 친애하는(?) 이승만 각하께서 깨끗이 청소해주신 셈이다.
그런데, 해방후 기독교는 과연 어떠했는가?
친일목사는 정죄되지 못했고, 고난의 길을 걸었던 목사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엄청난 교단의 분열을 초래했다.
이른바 장로교에서의 고려파(신사참배거부했던측)분열 사건이 일어나면서, 굴종자들은 "교회를 지켜내지 않았느냐"는 논리로 해명과 회개를 거부했다.
그리고 정죄되지 못한 그들이 지금까지도 교계의 최고 원로로 존경을 받고 있다.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를 거부로 평양 감옥에 감금되었던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평양시내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있으면서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5가지를 1945년 9월 20일에 발표했다. 출옥한 이기선 목사는 5가지 원칙을 지지하는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30여교회를 합쳐 1949년 5월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1945년 11월 14일 평북노회 주최로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평북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있었다. 강사는 이기선 목사와 박형룡 박사였고 참석한 교역자는 200여명이었다. 여기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5원칙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②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간 통회 자복할 것.
③ 목사나 장로가 휴직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④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⑤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 할 것.
이상의 5가지 원칙에 신사참배 결의때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등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홍택기 목사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괴변을 토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여 분열되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윤하영과 한경직목사등은 신의주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했고, 1947년 2월 24일 남한에서는 기독교도 민주동맹이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김창준 목사(감리교 신학교 교수. 북한에서 조선인민회 부의장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의장 역임), 총무는 박성산 목사,고문으로 신흥우 목사, 강령기초위원으로 갈홍기 목사가 맡았다.
이 단체에서 이승만정권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고,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궤변을 성명으로 발표했다.

*1946년 김일성 비서인 강량욱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김익두 목사가 회장이 되자 북한의 교역자가 거의 이 연맹에 가입했다.

*감리교 역시 부흥파와 재건파(친일파)로 분열되었다.
1947년 1월 11일 연합회의에서 감독을 의장으로 고치고 강태희 목사가 의장이 되었다. 친일파가 감리사로 출세하게 된 것이다.
1947년 2월 3일 홍현설, 변홍규 등 40여 명 목사와 문창모, 박현숙 등 평신도 56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내용은 "교권을 잡은 재건파가 교회 장정을 유린하고 불법적 방법으로 연합을 가로막고 친일파를 두호하고 있다. 특히 친일교역자 19명은 감리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성서모독죄: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배척하였고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을 거부하려 하였고 김진철 학생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를 읽었다고 출교시켰다.
② 신사참배찬양죄: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가정에 가미나다를 설치케하고 상동교회를 신사로 만들고 교역자들을 미소기바라에 참여케하였다.
③ 재산매매비리죄: 감리교 37개의 교회건물과 31개의 목사관을 매각처분하였고 공주 영명학교 농지 18,360평과 은퇴교역자를 위한 땅도 매각처분한 돈 40만원 중 절반은 일본군을 위하여 비행기 헌납금으로 하였고 나머지는 총리원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은퇴교역자 농지매각은 1945년 9월에 하였다. 사용처를 밝혀라.
④ 배신교역자: 친미적인 교역자 40여명을 해직 강등 자격취소를 하였고 그리고 일본 정부당국과 야합하여 그들을 투옥, 고문하게 하였다.

*교단을 해체했던 성결교회는 1945년 11월 9일 10일 교단명칭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라고 변경하고 재건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에서는 징병제를 찬양하고 교단의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박현명목사가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거나 친일파를 규탄하는 일이 없어 교단이 분열되지 않았다.

*1945년 9월 18일 출옥성도가 많은 경남노회는 서둘러서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신사참배교역자들에게 "목사 전도사 등은 일제히 자숙한 후 일반 교회를 시작할 것.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실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7월 9일 제47회 정기노회에서는 임원진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가 회장이 되었다.
이에 친일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할 것이며 지금 해방이 되었다 해서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되받아 치면서,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웃지 못할 논쟁이 시작되었다.

*1946년 4월 평양 산정현교회(주기철목사가 담임을 맡았던 교회)에서 담임하고 있던 한상동 목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친일목사들과의 갈등으로 견디지 못하고 월남하여 주남선, 박윤선 박사와 만나 고려신학교를 세울 것을 협의하고, 1946년 9월 2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7년 제48회 경남노회에서는 친일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고, 학생추천 취소 결의를 했다. 이에 경남노회는 한상동 목사 지지파와 친일목사간에 분쟁이 시작되었고 도덕성에 문제가 제기되자 1947년 3월 10일 임시노회를 소집여 노회장 김길창 목사와 임원 전원이 사임했다.
그러나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는 메첸파 선교사와 신앙노선 갈등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자, 그 기회를 틈타 친일 교역자들은 1948년 7월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한상동 목사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 49회 임시노회에서 44대 21로 고려신학교 설립 인정을 취소했다. 1948년 5월 총회에서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했다.

*최문식 목사는 1946년 10월 1일 대구의전 학생들과 시민들을 이끌고 대구경찰서를 습격, 점령하고 시위대들은 총을 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대구폭동이었다. 경찰 부상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요청했을 때 거절하여 병원에서도 소동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것은 경찰에 친일파들이 많은데 대한 감정이었다. 10월 3일 최문식 목사, 윤장혁, 김인식 등도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으나 인민군의 서울 입성시 출옥하여 기독교와 목사들에게 온갖 박해를 저질렀고 철수시에는 납북인사를 끌고 갔다.
이재복 목사는 14연대 반란사건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이재복 목사는 남로당 군사부 조직책이었다.

*축자 영감설을 부인하는 김재준 목사의 강의가 문제시되어 1947년 4월 대구에서 제33회 총회시 51명의 연서로 김재준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새벽예배 시간에 학생끼리도 서로 싸움하여 수라장이 되었고, 1950년 4월 21일 제36회 총회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 총회가 아수라장이 되어 기마경찰대가 동원되어 해산되었다.

*1950년 인민군이 입성하자, 기독교민주동맹이 결성. 위원장에 선출된 김창준 목사는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하기로 하고, 고문에 신홍우 목사, 총무에 박성산 목사를 위촉하고 각 교단대표자로 장로교에 최문식, 유호준, 김종대목사, 감리교에 최택, 박만춘, 심명섭 목사, 구세군에 황종율 사관 등이 준비에 나섰다.
7월10일 YMCA에서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종대 목사가 설교, 임영빈 목사가 환영문을 낭독했다.

*1946년 교회를 버리고 월남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이북에서 양들을 버리고 월남했으니 이제는 참회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는 양을 지키고 또한 수도를 지킬 순교적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서울사수를 결의하였으나, 그 후 제일 먼저 도망친 사람은 한경직 목사였다.

*6.25전쟁중인 1951년 5월 24일, 나라의 국운이 흔들거리는 와중에 장로교 36회 총회가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신앙을 지켜온 고려파를 정죄하고 출옥성도가 제외된 가운데 경남노회가 조직되었다.
결국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파는 1952년 4월 29일 제37회 총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장로교 고신측이 되었다.

*국군의 북진으로 평양을 회복한 1950년 10월 25일 장로교 한경직 목사, 선교사 아담스 목사, 권세열, 윤하영, 전필순 목사 등이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후 2시 서문밖교회에서 3,0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위의 교역자와 함께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한경직 목사가 사회를 보았고 황은균 목사가 설교를 하는 가운데 1950년 11월 말경 평양시내 교회는 연합으로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에 참석한 약 5000여 명의 성도들이 모인가운데, 세쨋날이 지나고 네쨋날이 돌아왔을 때 강사와 교역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성도들은 영문을 모르고 아무리 기다려도 강사와 교역자들은 영영 나타나지를 않았다. 알고보니 미 고위 장성으로부터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듣고 강사 이대영 목사와 다른 목사들이 부흥회를 마치지도 않고, 또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자기들만 살기 위해서 도망친것이었다.

*1952년 7월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이 결성되어 43회 총회 때는 총회 임원이 이들의 일색이었다. 이 단체 외원들은 박형룡 목사의 3,000만환 사건이 터지자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1959년 9월 24일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회된 대한 예수교장로회 44회 총회에서 통합측은 친일목사 전필순을 총회장에 추대하고, 성결교회는 친일목사 이명직을 서울신대 학장으로 추대했다.
회의도중 이환수 목사가 경기노회 총대 선출 내용을 가지고 되풀이 발언을 하자 박희몽, 김자경 장로 등이 "독사의 자식들아 에큐메니칼은 용공단체요 신신학이다"라는 폭언과 함께 회의를 방해하였다. 경기노회는 총대를 다시 선출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노진현 목사는 정회를 선포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전중앙교회 교인들이 회의장에 나타나 교회의자를 뒤엎으면서 회원 목사들(통합측)을 고무신짝으로 두들겨 패고, 대전중앙교회 목사요 부총회장인 양화석 목사가 나타나 "더이상 장소를 제공할 수 없으니 회원들은 나가달라"고 하며 강제 추방시켰다.
대전중앙교회에서 ?겨난 149명 총대들은 1959년 9월 28일 오후 1시 대전 미락식당에 모여 전필순 목사를 회장, 김광현 목사를 서기로 선정하고 총회 속개 준비를 구성하고 29일 오전 10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통합측이 되었다.

*합동측은 1962년 11월 19일 박병훈 목사가 주도하는 호헌파로 분열되었고 다시 김치선 목사가 주도하는 성경장로회로 분열하였고, 다시 1963년 9월 17일, 고신측과 합동하였다가, 분열했다.
다시 대한 예수교장로교 합동측은 개혁파, 개혁2파, 개혁3파, 개혁보수, 개혁정통, 근본1, 근본2, 독노회1, 독노회2, 로고스공의회, 보수, 보수개혁, 보수재건, 보수측, 법통, 보수합동, 사당동측, 보수합동, 홍은동측, 성합, 성합측, 순장, 연합측, 장신, 재건, 정립, 정통, 종합, 중립, 중앙, 합동개혁, 합동보수1, 합동보수, 합동장신, 합동정통, 합동중앙, 합동총신, 합동총연, 합동총회, 합동환원, 혁신, 협동, 호헌1, 호헌2, 호헌3, 합동총회측 등으로 분열이 가속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에 학생들이 항거해도 목사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성명서 한장없이 침묵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때 한국 개신교는 이승만을 돕기 위하여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그를 도왔다. 1960년 2월 18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교계 지도자 초청모임에서 목사들은 이승만 장로를 대대적으로 지지했다.
그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이승만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기독교 목사들에게 연세대학교 학생회에서는 "독재자에게 아부하여 성직을 버렸던 종교인들은 침묵으로 자숙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회개와 각성을 촉구했다.
미국의 힘을 업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국내지지기반이 미약해서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친일파를 끌어들였다. 반민특위를 강제해산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목사들은 이승만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

● 군사정권 유착 / 적 그리스도

일제가 물러난뒤 이승만에게 면죄부를 받고 이승만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군사정권에 충성을 맹세했다.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냈고 해방공간의 논객이었던 오기영도 1947년에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어떤 변절한 목사의 예를 들어 당시의 기독교계를 비판하면서, 조선교회가 섬기는 3위는 일제 강점기에는 "하느님, 돈, 일본"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일본 대신에 미국을 넣어서 "하느님, 돈, 미국"을 3위로 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오기영, "예수와 조선" 〈신천지〉1947.3-4월호, P 106~107쪽]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지 35일만인 6월 21일, 반란정부를 강력히 반대하는 미국정부에게 반란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기독교대표 한경직 목사와 최두선, 김활란, 정일권 등이 미국에 도착해서 애원했다.

*1969년 9 월4일 김윤찬,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목사 등 교역자 242명은 대한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고 3선 개헌을 "대통령의 용단"이라며 지지하고 나섰다.

*1972년 대한기독 교연합회 등에서 유신헌법을 지지 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기독교계는 정부가 내건 "구국의 유신이다. 새 역사 창조하자" 등의 표어를 적극 홍보했다.

*1976년 국보위 종교담당이었던 신촌성결교회 정진경목사와 입법부분의 조향록 목사가 관여하여,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난산교회 강희남 목사를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7년에 처했다.

*1980년 8월6일 롯데호텔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사회에 문만필 목사, 설교에 한경직 목사, 기도에 정진경,조향록,김지길 목사와 김인득 장로가 맡았다.
정진경 목사는 전 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해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 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중략)...전 위원장이 남북통일, 국가의 번영, 그리고 민주화 실현 등 민족의 열망을 이루는데 큰 일꾼이 되어 그 업적이 후세에 남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회 는 KBS와 MBC를 통해 현장중계와 다음날 두번 에 걸쳐 녹화 중계 됐으며, 일간.중앙신문은 머리기사로 다루어 전두환소장을 국민들에게 부각시켰다.
조찬기도회는 같은 달 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 21일 전군지휘관회의 전두환 대통령 후보 추대,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 선거,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으로 이어지는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의 핵이었다.
이밖에 김준곤, 강신명, 신현균, 김신명, 김창인, 지원상, 이봉성, 유흥묵, 장성칠, 박정근, 김용도, 김종식 목사 와 최태섭 장로 등이 참석했다.
여기 참석했던 목사들은 진보적 성향의 교회협에 대항하기 위해 한기총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구실을 담당했고, 대형교회의 목사가 되었음은 물론, 한기총 총무, 침례교 총무, 루터교 증경 총회장, 민족복음화운동본부 총재, 예장 합동 증경총회장, 한국대학생선교회장, 감리교 증경감독......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감투를 하나씩 쓰는 거물급 목사가 되었다.

*김창인 목사는 91년 12월 대통령선거운동이 한창 진행될 때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와 목사 장로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해 “신앙인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린다”는 내용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정권교체기 등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호기를 결코 놓치지 않고 활용해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김 목사를 포함해 조찬기도회 관련자들은 교계 일각에서 줄기차게 제기된 공개사과 요구를 외면한 채 개신교계의 주요 연합행사 때면 단상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교회협은 최근 과거청산 정국과 관련해 시국성명을 발표해 “한국교회의 한편에는 지난 시절 국보위라는 초법적 기구에 일조를 아끼지 않은 지도자들도 있었고, 전직 대통령들의 통치를 정당하게 만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며 이들의 회개를 촉구한 바 있다.

-이선교 목사의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참조

상당수의 양심적인 성직자들이 감옥행, 심지어 죽음을 무릅쓰고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과의 밀월관계를 담보로 유형·무형의 특혜를 받으며 자신의 안일과 교세확장에 탐닉한 종교인들은 누구일까.

그러나 이들을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다. 권력은 종교를 필요로 하고, 종교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있듯이 종교와 권력은;입술과 이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의 거래는 일반적으로 베일에 싸여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계 일부가 정치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선거 때 특정 후보를 위해 각종 종교집회를 주선하는 등의 대가로 불법건축 허용, 세금 감면 등의 반대급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 백년간의, 특히 해방 이후의 개신교 급속팽창은 오로지 size(크기)의 문제이지 kind(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역사의 왜곡 / 적 그리스도

한국 교회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에 눈감고 침묵하고 방조하면서, 암묵적이건 명시적이건 국가 권력에 협조하여 특혜를 누려왔다.
이처럼 국가권력과 유착관계에 있는 종교권력은 국가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대가로 국가권력으로부터 물질적·제도적 성장을 위한 군종제도,교회 건립, 성직자 면세 등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유착관계를 정당화하는 바이블의 근거는 로마서의 바울의 말이었다.
마가복음 12장 17절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구절이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공되었고, 로마서 13장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로마서 13장 1~5절] 바울의 말은 기독교의 권력유착을 더 강화하기 위한 증거물로 세상의 권위에 복종하는 이데올로기를 제시했다.
 
문제는 세상이 뒤바뀌니까 말을 바꾸어 역사를 왜곡하는 기독교의 행태이다.
해방직후 기독교는 떳떳하게 나설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친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후 오히려 민족의 독립에 앞장섰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역사왜곡의 단서가 될만한 기사 하나를 살펴보자.

"제암리 유적 놓고 개신교ㆍ천도교 갈등우려/

3ㆍ1정신의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유적 을 놓고 개신교와 천도교간에 갈등이 우려된다.
천도교청년회 중앙본부(회장 김산)는 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15일 낮 12시 제암리 3ㆍ1운동 순국선열 위령탑 앞에서 81년만에 처음으로 천도교 예법에 따라 합동위령제를 개최한다.
유일한 생존자 전동례(92년 작고)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유해를 발굴, 82년 9월29일 경기도 주관으로 위령제를 지낸 적은 있었지만 순국일인 4 월 15일에 맞춰 천도교가 주관해 행사를 치르는 것은 최초이다.

길놀이에 이어 큰북공연, 천명, 위령제, 살풀이, 진혼제, 대동제, 모듬 북 공연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소속교단 신도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천도교청년회가 개신교 성지로 알려진 이곳에서 위령제를 개최하는 것 은 당시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천도교인이었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일제 헌병은 3ㆍ1 만세운동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던 이곳의 주민 20여 명을 교회안에 몰아넣은 뒤 불을 질러 죽였으며 곧바로 인근의 팔탄면 고주리로 몰려가 김흥렬 천도교 전교사 일가족 7명을 난자해 목숨을 빼 앗았다.

김선진씨가 83년 펴낸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미래문화사간)는 교회당 안에서 참살당한 주민 24명 가운데 천도교 신자가 15명이고 감리교 신자 및 기타가 9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산 회장은 고주리를 포함해 제암리 교회 주변에서 학살당한 주민은 모두 31명이며 이 가운데 천도교인은 22명이라고 주장한 뒤 일제가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학살하기 위해 예배당을 택했을 뿐인데 기독교가 이를 왜곡해 기독교인의 순교성지로 둔갑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료에는 일본 헌병이 마을 기독교 주민 23명을 집단적으로학살(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세 이상 남자 신도들은 교회에 모이라고 하였다(두산대백과사전)등 당시 교회에서 희생된 주민들이 개신교 신자라고 적혀 있다.
또 이곳 역사기념관에 전시된 교회 모형도 인형들이 모두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관광공사도 제암리 교회를 개신교 성지순례 코스로 지정해 개신교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15일 행사를 두고 개신교와 천도교간에 갈등이 빚어 지고 있으며 제암리의 비개신교 주민과 교회 사이에도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실제로 해마다 이날 오후 8시 추모예배를 개최해온 제암리 교회의 강 신범 목사는 천도교청년회 주최의 위령제 참석요청을 거절했다.
강 목사 는 주민들과 함께 천 도교 신도들이 위령제를 지내는 것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종교 간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있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제암리의 안용웅 이장은 3ㆍ1운동 당시에는 천도교가 번성 했으나 지금은 교세가 약해 개신교 위주로 순국 유적이 꾸며지는 것에 대해 주민들이 드러내놓고 반대를 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교회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연합뉴스 2000/04/12 이희용기자 ]

[이와 비슷한 기사로 2000,04,15일의 한국경제신문의 윤승아 기자 의 기사도 있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제암리에서 일제에게 학살당한 주민중 대다수가 천도교인이었고 나머지는 기독교인 몇 명과 기타종교, 무신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일본헌병은 단지 대량 학살장소을 자행하기 위해 기독교의 예배당을 선택한 것일 뿐인데, 기독교는 재빨리 자신들의 성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사료로써, 1998년 11월 4일 일본의 참의원 방한단으로 국내에 온 하시모토의원은 학살 관련 외교문서 복사본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일본 공산당 하시모토 아치(4선)의원은 독립기념관을 찾아와 박유철 관장에게 전해준 문서에는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9년 4월 22일 오후 1시 50분 일본의 총리대신 앞으로 보낸 것으로, 펜으로 쓴 육필이 5장, 사건전모를 요약 정리한 내용 1장 등으로 모두 6장이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수원군 발안장에 파견된 보병중위 12명은 4월 15일 부근 주재순사를 동행, 제암리 기독교회당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25명을 집합시켜 전부를 사살하고 불을 질렀다. 문건의 내용은 이 사건이 군대와 경찰의 위신에 관련되고 외국인들이 비난할 소지가 있으니 철저하게 은폐하겠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문서를 건네준 하시모토 의원은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의해서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선생에게 헌화했다고 한다.

일본측의 외교문서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을 교회로 몰아넣어 학살을 자행했다고 언급되어있다. 그런데 어느순간에 학살당한 사람들이 전부 기독교인으로 둔갑되어 버렸다!
일제에 의해 사망한 천도교인들을 기독교인들이 또 한번 죽인셈이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행각인가!
만약 기독교의 독립운동이 활발했고, 항일운동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증거가 있었다면 이러한 역사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의 항일역사가 너무도 빈약해서 이렇게까지 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뉴스엔조이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한바 있는데 관련기사를 한번보도록 하자.

"한 예를 소개하겠다. 1971년에 명예 박사학위를 두개나 가지고 해방후 KNCC 회장까지 지낸 교계의 어떤 거물급 목사님이 《말씀 따라 한 평생》이라는 430여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자서전을 펴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자서전에 자신의 명예 박사학위 축하예배 순서지까지 전재하여 10여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에 이르는 10년간의 시기는 단 두페이지 반으로 줄여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10여년을 지내는 동안 시대는 더욱 각박해졌고 종교탄압은 날로 극심해만 갔다. 이윽고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점점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의 발악은 더욱 심해졌다. 전쟁마당에 강제로 이 나라의 청장년들을 징병 혹은 징용이란 이름 아래 사지(死地)로 끌려 들어 갔고 심지어는 교회당의 종까지도 무기 제조를 위해 헌납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인들은 이들의 건국신(建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참배와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천조대신의 위패를 모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일이면 보국대에 동원을 지시하고 찬송가도 압수하여 황국신민의 사상고취에 영향을 끼칠만한 가사는 모조리 검은 잉크로 지워서 되돌려주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판국에서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교회발전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노력해왔다.---

이런 기록을 대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여기에 기록한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일제의 탄압 실상에 대한 것뿐이고, 자서전인데도 여기서 자신에 관한 언급은 맨 마지막 단 한 구절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가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목사님은 일제의 가혹한 핍박 중에도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신앙의 용사처럼 보인다.......(중략)......

그의 자서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러한 부일협력에 대한 참회의 문구는 한 마디도 없다. 이것은 해방 후 기독교계가 일제의 잔재청산에 실패하였으며, 해방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의 극복은커녕 반성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뉴스엔조이 2002-05-06 조선교회가 섬긴 3위;하느님, 돈, 일본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뉴스엔조이의 기사는 참으로 많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친일행위에 사죄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은글슬쩍 미화하는 자서전을 쓴 거물급목사.....이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지도자가 어찌 무신론자들보다도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사회로 발전했다.
부끄러운 친일행위를 감추고 오히려 항일운동을 했다는 큰소리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 볼 때, 수십년후 그들은 역사를 조작해서 기독교가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아주높다.
군사정권에 머리를 숙였던 역사는 슬쩍 감춰버리고, 목회직을 박탈당한 도시산업선교회목사들같은 분을 전면에 내세워 "한국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선봉장이었다!"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아주 확실하다.
따라서 안티기독교 형제 여러분께서는 개신교의 행태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두산세계대백과를 검색해 보니 재미있는 자료가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한국의 반기독교운동의 선구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친일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된 기독교의 행각에 이를갈며 반기독교운동을 전개 해나갔다고 한다.
강도 높은 반기독교강연이 활발히 열렸으나 일본경찰과 기독교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일본경찰이 왜 반기독교 운동을 탄압했을까? 답은 뻔하지 않겠는가!)

반기독교 선구자 선배님들의 활동내용을 여기 옮겨본다.

"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개요: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주도하에 진행된 기독교 배척운동.
언제 : 1920년대
누가 : 사회주의 운동세력
무엇을 : 기독교배척운동
어떻게 :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반기독교의 입장을 표명

기독교계는 3 ·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 하에서 타협적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반기독교운동을 자초하였다. 본래 미국인 선교사는 일제로부터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교회의 비정치화를 강화시킴으로써,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와 민족운동을 방해하였다. 더욱이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선교사의 모욕적인 인종차별이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폭발시켰다. 한편 YMCA를 비롯한 기독교사회운동 진영도 3 ·1운동 이후 온건노선인 실력양성운동을 벌임으로써,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일정한 한계를 나타냈다. 이 같은 기독교계 내부의 문제점이 반기독교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1920년대 초반 해외로부터 유입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으로 종교, 특히 기독교의 특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데 있다. 이 당시 사회주의자의 기독교 비판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이익 관철 및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둘째, 현실에 대한 긍정과 복종을 강요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말살시킨다. 셋째, 과학사상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허위를 선전하는 시대착오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논지하에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 1924년 1월 경성신흥청년동맹회 등 사회주의계 청년운동으로부터 반기독교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반기독교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10월 한양청년동맹이 개최한 반기독교대강연회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계가 준비한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방편으로 기획되었다. 박헌영(朴憲永)의 ‘과학과 종교’, 김장현의 ‘지배계급과 기독교’, 허정숙(許貞淑)의 ‘현하(現下)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害毒)’ 등 강도높은 반기독교 강연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이 강연회는 끝내 일본경찰의 탄압과 기독교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를 두고 사회주의자는 일제와 기독교가 유착되어 있는 증거라고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임으로써, 기독교계와 사회주의계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한편,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반기독교운동과 관련하여 자기비판의 움직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YMCA의 진보적 이론가는 사회주의계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기독교계가 현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흥우(申興雨) ·이대위 ·조병옥(趙炳玉) 등은 종래 기독교계가 복음만을 강조해온 것을 비판하고, 경제 ·사회분야의 여러 문제점을 신학과 관련지어 분석하였다. 특히 이대위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연원 및 근본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양자의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기독교 사회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실험하였다. 요컨대, 반기독교운동은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청년단체가 기독교의 본질적 부분에 대한 비판을 감행함으로써, 기독교계와 사회주의 진영의 갈등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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