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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영지주의
최근의 조사 결과 전통적인 견해, 전통적인 결론, 전통적인 '사실들'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아직은 소수겠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는 다수가, 열렬히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유난히 어리석고 방탕한 이단이 어떻게 교회 안에서 부상할 수 있었는가의 질문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그토록 대단했던 영지주의 운동을 뿌리치고 부상할 수 있었는가?
영지주의의 역동적인 생각이 어떻게 독단으로 치부되고 말았는가?- 램플러그(목사)
그리스도교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는 훗날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운 문자주의자들의
견해와 정반대되는 점이 너무나 많다. 문자주의자들은 엄격한 권위주의자였다. 반면, 영지주의
자들은 신비를 중시한 개인주의자였다. 문자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교인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신조를 강화하고자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다양한 믿음과 실천에 관용적이었다.
문자주의자들은 수많은 복음서 가운데 넷만을 <성서>로 채택했고, 나머지는 악마적인 이단
으로 간주해서 불길 속에 던져버렸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수백 가지의 복음서를 썼다. 참된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주교가
설교한 대로만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문자주의자들은 가르쳤다. 참된 그리스도교인 이라면
그노시스, 곧 신비한 '앎'을 스스로 체험해서 스스로 1명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영지주의자들은 가르쳤다!
영지주의자는 혹독하게 억압을 당했다. 그래서 최근까지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전부가 그들을 비방하며 그들의 기록을 말살한 사람들의 저술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가 그리스도교 사상을 곡해한 것---이교도 교리를 동원해서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혼란시킨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2천여 년 동안 그런 생각을 고수해 왔다. 성공적으로 반대파를 제거하고
모든 증거를 말살함으로써, 그런 생각은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45년에 이집트
나그 함마디 인근의 한 동굴에서 영지주의 장서가 발견됨으로써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제 영지주의자들은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장서는 영지주의와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리의 기존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영지주의자는 오늘날 이단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스스로를 진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 계시록>이라고 불리는 영지주의 복음서에는, 부활한 예수가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거짓 교회imitation church(모방 교회)'라고 질타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지주의자가 보기에 참그리스도교를 곡해한 것은 문자주의자들이었다.
원래의 그리스도교는 모든 입문자가 신비한 앎, 곧 그노시스를 개인적으로 체험케 하는 영적
종교인데, 문자주의자들은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는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문자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 ---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에게나 맞는 '세속적 그리스도교' --- 만을 가르쳤다. 반대로 영지주의는 참된 '영적
그리스도교'였고,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 그리스도교의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가르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의 말은 이단 영지주의자가 한 말이 아니다. 초기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스도교인 두 사람---알렉산드리아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 학교를 운영한 클레멘스와
그의 후계자 오리게네스---의 저술에 나오는 말이다.
두 사람은 평생 대단히 존경을 받았고, 오늘날에도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두 사람은 현대의 주류 그리스도교보다는 영지주의를 훨씬
더 닮은 그리스도교를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가톨릭 교회의 성자로 존경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영지주의에 대한 책을 썼고, 영지주의자를 참그리스도교인
이라고 불렀다(클레멘스의 저서 <스트르마타stromata> 7장 1절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영지
주의자만이 진정으로 경건하다.…. 참 그리스도교인은 영지주의자이다' : 저자 주).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처럼 영향력 있고 존경을 받는 지성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것과 달리, 영지주의자가 그리스도교의 변방에서 어슬렁거린
이상하고 하찮은 이단자였던 게 아니라는 증거이기에 충분하다. 반대로 영지주의에는 폭넓고
역동적이고 세련된 영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영성은 AD 첫 몇 세기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지성인들을 매료 시켰다. 이단자로 낙인 찍혀서 거의 잊혀진 발렌티누스나
바실리데스와같은 위대한 성자들뿐만 아니라, 명성에 전혀 금이 가지 않은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사람들까지도 영지주의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교도 철학
문자주의자가 영지주의자를 겨냥해서 가장 자주 되풀이한 비난의 핵심은, 영지주의자가
본질적으로 이교도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초기 문자주의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단자 사냥꾼이었는데,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케케묵은 고대 그리스의 낡은 헝겊으로
새 옷을 깁는다고 비난했다. 그는 영지주의 현자인 시몬 마구스의 추종자들을 '미스테리아의
사제들'이라고 일컬으며 그들이 '제우스를 닮은 시몬의 이미지'를 숭배한다고 비난했다.
광적인 반영지주의 저술을 남긴 테르툴리아누스는 영지주의 입문식을 엘레우시스에서의
이교도 입문식에 비유했다. 이레나이우스의 제자인 히폴리토스는 영지주의자 집단을 이집트의
세트 신 숭배자라고 부르며 이렇게 주장했다.
그들은 미스테리아 종교와 의식을 전파한 고대 신학자인 무사이우스, 리누스 오르페우스
등에게서 모든 교리를 차용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세속 철학자들의
이미지'와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동일시하며 똑같이 숭배한다는 것에 격분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 축제에 참석했고, 자신들의 모임에 이교도들을 받아들였다.
그 점에 대해 테르툴리아누스는 비난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단자들이 수많은 마법사, 보따리 약장수, 점성술사, 철학자 등과 교류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 문자주의자는 영지주의자들을 기괴한 무리로 몰아붙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옳은 말을
했다. 즉, 영지주의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너무나 닮았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
자들과 달리 이교 신앙을 적대시하지 않았고, 이교 신앙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했으며, 고대 철학 연구를 장려했다. 실제로, 나그 함마디의 동굴에서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영지주의 문서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문서도 함께 발견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교도 철학에 심취했다. 그는 이교도 철학이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신성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풀이했다.
그리스 철학은 영혼을 순결케 하며, 믿음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한다.
진리는 이 믿음을 초석으로 삼아 그노시스의 건물을 세운다.
오리게네스도 마찬가지로 완벽한 신앙심을 가지려면 이교도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교도 철학을, 그는 세련된 미각을 만족시키는 훌륭한 요리에 비유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인을 '미사를 위한 요리사'에 비유했다. 그는 이교도 현자(고대 그리스 철학자)
암모니오스 사카스에게 철학을 배운 사람이었다. 이교도 철학자 포르피리오스는 암모니오스나
오리게네스와 '오랫동안 교제'했다. 그는 두 사람이 '플라톤주의자'이며 '통찰력에 있어서
당대인을 훨씬 능가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암모니오스는 위대한 그리스도교인 철학자 오리게네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이교도 철학자 가운데 1명인 플로티느소의 스승이기도 했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철학
교실에서 영지주의 그리스도교를 언급하면서, 영지주의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열등한 버전
이며 지나치게 복잡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모든 전문 용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빚진 것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영지주의자 친구 몇을 존경하는데,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되기 전에 그런 용어를
만들어 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몰라도 계속 그런 용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교도 신화
영지주의 저술들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과 이교도 점성술, 마법, 철학 개념이 빈번
하게 등장한다. 예컨대 <구원자의 책>에는 이에오우Ieou(최고신)가 다른 위대한 다섯 신, 즉
이교도의 신 크로느스·아레스· 헤르메스·아프로디테·제우스를 거느리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또 영지주의 문서에는 이교도 신화와 유대인 신화가 서로 뒤섞여있다. <바룩Baruch>이라고
불리는 영지주의 문서에는 이교도 점성술과 유대인의 천사 개념이 합성되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12천사를 창조했고, 이 천사들은 이교도의 12황도와 동일한 우주를 에워싸고 지배
한다. 이 문서는 하나님을 유대인처럼 엘로힘Elohim이라고 칭하지만, 엘로힘을 제우스와
동일시한다. 또 엘로힘이 이교도 영웅인 헤라클레스를 예언자로 선택했다며,
하나님을 디오니소스의 다른 이름인 프리아포스Priapus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곧 프리아포스이다. 그는 어떤 것도 존재하기 전에 만물을 창조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었기에 프리아포스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피조물의 존경을 받으며,
모든 신전에 그의 상이 세워져 있다.
히폴리토스는 나세네스Naassenes라고 불린 영지주의 집단에 대한 얘기를 전해 준다.
나세네스는 이교도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의 모든 신화에 내재된 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나세네스는 위대한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 죽은 신화적 인물인 아티스를 예수와
동일시했다.
'여러 모습을 지닌 아티스'는 그들의 찬송가에서 아도니스, 오시리스, 판, 바쿠스, 흰 별들의
목자 등의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모두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이름이다!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동일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고 히폴리토스는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모두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고 한다. 그들은 미스테리아
의식을 통해 재생의 비밀을 배웠다.
대모신(大母神)은 고대세계를 지배한 여신이었다. 이 여신이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시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데메테르로 알려져 있었다. 이 여신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이거나
누이이거나 배우자였고, 흔히 그 세 가지 모두였다---신화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 두 사람은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탐구하며 여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조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이교 사이의 유사성을 조사했는데 정통 그리스도교에는 여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다소 막연한 양성적 성령만이
있고, 여성 신격은 없다. 영지주의 신화에서는 좀더 자연과 균형이 맞도록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모라는 삼위 일체가 있다.
영지주의 문헌에서 여신은 '만물의 어머니', '살아 있는 것의 어머니', '빛나는 어머니',
'더 높은 신', '성령', '우측의 그이'와 대응하는 '좌측의 그녀'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성모 소피아는 이교도 여신처럼 신성한 천상의 존재이면서도,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구원자/남매/연인인 예수를 찾는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여신 이시스도 자신의 구원자/남매/연인인 오시리스를 찾는다.
영지주의자들은 시적으로 상상한다---'모든 습한 것'은 소피아가 흘린 눈물이라고, 그런 상상은
이교도 현자 엠페도클레스의 상상을 반영한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5세기 앞서서 모든 물이
페르세포네 여신의 눈물이라고 말했다.
소피아는 일부 영지주의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어서, 공개적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는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영성체 의식만을 거행하고 소피아는 언급하지 않았다.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영적'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성체 의식 때에 비로소 여신 소피아의
수난을 환기시켰다!
플라톤의 신
앞서 언급했듯이, 이교도 현자들은 여러 남신과 여신을 얘기하면서도 전적으로 신비하며
초월적인 최고신에 대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플라톤의 시대 이후, 그들은 하나님을
'인격신'으로 보는 것을 비관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최고신은 모든 특성을 초월한
하나Oneness이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영지주의자들 역시 이처럼 추상적이고 신비한 신에 대한 개념을 채택했다. 하나님God을
하늘에 있는 어떤 위대한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만물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보편 정신
Mind of the Universe(우주의 마음)으로 이해한 것이다(만물을 통한다고는 하지만 만물을
'종'으로 보고 정신을 '주'로 보는 것이 서구의 주류사상이다. 이 사상에는 음양의 상보
개념이 없다. 그래서 God은 역시 '땅님'을 배제하는, 혹은 지배하는 '하늘님' 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는 mind를 별 고민 없이 정신이라고 번역하게 되었지만, 동양사상에서는 땅의 음기를
精과 하늘의 양기를 神이라고 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된 것을 정신이라고 했다.
mind에는 땅의 음기, 곧 물성이 담겨 있지 않다: 옮긴이 주).
문자주의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상(像)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구약에서 파벌적이고 변덕
스러우며 때로는 전제군주 격인 부족의 신으로 나타나는 유대인의 신god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상을 횡포한 제우스로 그리는 것을 플라톤이 공격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여호와만을 참 하나님이라고 가르치는 유대인의 전통
적인 하나님상을 공격했다. 영지주의 현자 발렌티누스는 플라톤의 용어인 '조물주demiurge'
라는 말로 여호와를 설명하며, 여호와는 참 하나님의 도구로서 봉사한 종속적 신격이라고 규정
했다. 여호와가 하위의 신격인데도 주제넘게 자신을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고 칭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애굽기 20:3-5).
그러나 영지주의의 <요한의 비밀서>에서는 그것을 '광기'라고 일컬으며 이렇게 평했다.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그는 다른 신God여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다른 신이 없다면, 질투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다른 영지주의 문서에서 스스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여호와는 그의 어머니 여신
소피아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건방진 애들처럼 주제넘게 굴지 말라고!
영지주의자에게 예수는 유대인의 작은신 여호와의 예언자가 아니었다. 플라톤과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 곧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하나님의 예언자였다. 영지주의 교사 케르도는
이렇게 설명했다.
법으로 선포된 하나님이나 예언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알려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는 유대인의 전통 관점인 신인동형동성설과는 정반대로, 이교도
교리를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도 일종의 형언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명명된 모든 이름 위에 계신다'.
미스테리아 의식의 히에로판데스
문자주의자들의 예수는 여호와가 약속한 메시아로 그려진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의 예수는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의 히에로판테스를 닮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라는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부활한 예수는 사도들에게 위대한 빛의 천사로 나타난다. 그는 사도들이 공포에
떨며 경악하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그들에게 '비밀Mysteries'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 <피스티스 소피아>(피스티스pistis는 믿음faith, 소피아sophia는 지혜wisdom를 뜻한다
: 옮긴이 주)라는 영지주의 문서에서 예수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너희를 순결케 하는
비밀을 발견할 때까지 밤낮으로 찾기를 멈추지 말라'. 그러자 막달라 마리아가 그를 찬양하며
이렇게 말한다.
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정녕 빛의 왕국의 비밀Mysteries 열쇠를 가져오셨음을,
이제 우리는 거리낌없이, 분명하게, 정녕코 아나이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round danad'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 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낸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 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예수를 중심으로 해서 사도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Mystery'이
라고 부르도록 했다.
한 학자가 썼듯이, 원무는 '분명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의식을 반영한 신성한 입문식 춤'이다.
입문식 춤에 수반되는 찬송가는 분명하게 세 가지 목소리를 낸다. 세 목소리를 잘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히에로판테스인 그리스도, 그의 보조자들, 그리고 입문자로 나뉘어 있어서
이것이 입문식이라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입문자 "나는 구원 받으리라"
그리스도 "내가 구원하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든 자유를 얻으리라"
그리스도 "내가 자유를 주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는 못 박히리라"
그리스도 "내가 못 박으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는 태어나리라"
그리스도 "내가 태어나게 하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는 먹으리라"
그리스도 "내가 먹히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는 들으리라"
그리스도 "내 말이 들리리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바는 그대의 등불이니, 나를 들어 올려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나는 그대의 거울이니, 나를 보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나는 그대의 문어니, 나를 두드려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그대 여행자여! 나는 그대의 길이니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이제 내 춤에 응답하라. 말하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을 보아라. 내가 하는 것을
그대가 보았거든, 내 비밀에 입을 다물어라"
은밀한 미스테리아
이교도 미스테리아에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오랫동안의 영적
준비와 순결 기간을 거친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만 공개되는 은밀한 미스테리아가 있었다.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초보자를 위한 작은 미스테리아와
더 고차원의 비밀 지식인 큰 미스테리아가 있었고, 후자는 완전한 '입문식'으로 이어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참된 영지의 비밀 전통'은 '문자로써가 아니라 스승의 구전으로써
소수에게' 전수되었다.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갖는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이교도의
본을 받았다는 것을 오리게네스는 시인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 너머에 있는 교리, 대중에게 전수하지 않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만의 특성이 아니다. 모든 철학의 특성인 것이다. 이교도 철학자들도 공개적인
교리와 은밀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교도 입문자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입문자들도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이단자 사냥꾼 히폴리토스의 말에 따르면,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미스테리아를 큰소리로 말할 수 없고, 침묵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처음 5년 동안 묵계를 지켰는데, 이교도 미스테리아 신앙 가운데 하나인
피타고라스 신앙의 입문자들도 그랬다.
<위대한 로고스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들 미스테리아는 엄격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 들을 만한 자가 아닌 자에게 발설하면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누이와 형제에게도, 어떤 친척에게도 발설하면 안되며 고기나
술을 얻기 위해, 여자나 금이나 은이나 세상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도 발설하면 안 된다.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꿈에서도 영혼이
순결해 본 적이 없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신성모독을 하는 자에게도
로고스의 미스테리아를 가르쳐 주면 안 된다.
또 다른 영지주의 현자는 이렇게 요구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인간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고, 모든 좋은 것들 위에
존재하는 하나the One(유일자)를 알고 싶다면, 장차 알게 될 미스테리아를 비밀에 부치겠다고
맹세하라. 맹세는 다음과 같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하나, 최고의 선을 두고 맹세한다.
이들 미스테리아를 비밀에 부치겠으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으며, 최고의 선에서 벗어
나지 않겠다.'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마가는 신약에 나오는 복음서 하나만 쓴 것이 아니라, 입문 수준에
따라 내용이 다른 세 가지 복음을 전했다. 신약의 마가복음은 믿음을 갖게 된 초보자에게
어울리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다른 복음서인 <마가의 비밀 복음서>는 완벽해지려는 자,
곧 '입문자'를 위한 것이다. 그노시스를 전하는 다른 한 가지 복음은 구전으로 전해졌다.
클레멘스에 따르면, 마가의 두 복음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씌어졌으며, 계속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 담긴 가르침은 워낙 비밀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클레멘스는 이 복음서가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부정해야 한다고 제자에게 충고했다.
'모든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의 빛은 정신적으로
눈먼 자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맹세코'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는,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그노시스를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온갖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영적인 복음'인 이 책에서도 마가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폭로'하지 않았으며 '주님의 은밀한 가르침을 기술하지도 않았고, 다만 이미
씌어진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고, 나아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격언과 해석을
삽입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은밀한 성소로 인도하고자 했다'.
마가는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만 복음서 이상의 가르침, 곧 그노시스를 구전으로 전수했다.
이러한 최후의 복음은 너무나 신비해서 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일부 파편을 참조하면, 신약 내용 가운데
모호한 구절의 의미가 아주 명료해진다. 이 복음서에는 예수가 이미 죽은 한 젊은이를 살려
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학자들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려 낸 요한복음 1장 이야기의 초기 버전으로 간주
한다. 그런데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서 되살아난 젊은이는 즉각 입문식을 치른다---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 또한, 원래는 입문식의 비유였음을 시사한다.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은 입문식을 통한 영적 재생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자,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아주 이상한
말을 한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요한복음 11:16) 죽은 나사로를 살리겠다는
예수를 도우러 가자고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한다!
이상야릇한 이 구절이 '입문식'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의미가 명료해진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속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나사로의 이야기도 원래 입문식을 비유한 거라면
도마의 해괴한 말이 명료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 듣게 한
말의 의미는, 가서 입문식을 치르자---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나자---는 것이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서, 입문식을 치르려는 젊은이는 나사로처럼 알몸에 베옷만 걸치고
예수에게 다가온다. 그날 밤 '예수는 하나님 왕국의 미스테리아(비밀)를 그에게 가르쳤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마가복음의 또 다른 이상한 사건도 이해할 수 있다. 예수가 배신을 당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는 순간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옷(linen cloth 혹은 linen sheet.
개역 <성서>에는 '베 홑이불'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만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옷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 (마가복음 14:50-52).
이상한 이 인물은 신약에서 딱 한 번, 이 대목에서만 등장한다. 수세기 동안 <성서> 독자들은
알몸의 이 청년이 도대체 누구이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는 이 청년이 입문식 후보자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믿음 너머의 앎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테이토스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소신이란 어린이 장난감 같은
것이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현자들은 단순한 믿음이나 소신을 멸시했다. 그들은 앎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주장했다.---믿음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는 반면, 앎은 이면의
실재를 꿰뚫어 본다고. 정신이 앎의 대상과 일체가 됨으로써 앎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이해의
최고 수준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러한 이교도의 가르침을 물려받아서
피스티스, 곧 믿음을 멸시하고 그노시스, 곧 앎을 중시했다.
그노시스는 확신을 갖지 않고 의심을 하는 사고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진리에 대한 앎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노시스는 즉각적이며 확연하고 전적으로
비개념적인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맹목적 믿음의 가치를 찬양하며, 주교가 한 말을 의심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교도 현자들처럼 영지주의 스승들은,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식을
치르면 입문자가 직접 그노시스를 체험하고 스스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영지주의자들에게 믿음이란 그노시스에 이르기 위한 디딤돌일 뿐이었다. 영지주의 교사
헤라클레온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은 처음에 다른 사람의 증언을 믿음으로써 진리를 믿기
시작하지만,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클레멘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믿음은 초석이다. 그노시스는 그 위의 건축물이다. 믿음은 그노시스를 통해 완벽해진다.
안다는 것은 믿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노시스는 믿음을 통해 받아들인 것의 증거이다.
이교도 현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교리가, 다만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진리 자체는 말과 개념을 뛰어넘으며, 스스로 그노시스를 체험함으로써만 발견될
수 있다. <빌립의 복음서>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말은 기만적일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을 정확한 것에서 부정확한 것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God' 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정확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것을
인식할 뿐이다. '성부', '성신', '성령', '삶', '빛' , '부활', '교회', 기타 모든 말 또한 그렇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정확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것을 인식할 뿐이다.
너 자신을 알라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명령이 적혀 있다.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너 자신을 알라.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가 찾는
그노시스는 자신에 대한 앎Self-knowledge(자각)이었다.
영지주의의 <옹호자 도마의 책>에도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알게 된 자는 동시에 모든
것의 심연에 자리 잡은 그노시스를 이미 얻은 것이다.
<진리의 증언>에서 예수는 한 사도에게 충고한다. '진리의 아버지'인 '자기 마음의 사도'가
되라고. 영지주의 현자 실바누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문을 두드리듯 너 자신을 두드리고, 곧은 길을 밟고 가듯 너 자신을 밟고 가라. 네가 그 길을
간다면 결코 길을 잃지 않으리라. 네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스스로 그 문을 열어젖혀라.
그런데 자기 자신이란 무엇일까? 이교도 현자들은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할 낮은 수준의 자아인
에이돌론eidolon과 높은 수준의 자아인 불멸의 다이몬Daimon(Daimon은 고대 그리스어이다.
고대 로마어로는 Daemon으로 표기된다. 이것이 영어로는 demon, 곧 악마이다.
그리스어 Daimon의 사전적 의미는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이다.
초기에는 '신성한 힘, 신' 등의 뜻으로 쓰였고, 다음 본문에 나오듯이 나중에는 '수호천사',
'수호령' 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악마나 악령이라는 뜻은 전혀 없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이 말이 악마나 악령, 혹은 이교도의 신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백과사전에도 이와 비슷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다만 '문자주의'라는 말을 사용
하지 않는다 :옮긴이 주)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에이돌론은 육체적 자아이고 몸뚱이이며, 한 개인이다. 다이몬은 영혼이며 누구나 하나님과
영적으로 이어진 참된 자아이다. 에이돌론은 거짓 자아이며, 불멸의 다이몬이야말로 자신의
참된 정체성임을 입문자가 깨닫도록 돕는 것이 바로 미스테리아 의식이었다.
에이돌론의 관점에서는 다이몬이 한 개인의 수호천사로 보인다. 아직 에이돌론과 동일시되는
입문자는 다이몬을 자신의 참된 자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목적지로 자기를 인도하는
영적 안내자라고만 생각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가르쳤다. '사람soul에게서 가장 믿을만한
부분은 수호 영혼임을 알아야 한다'. 수호 영혼은 하늘의 고향으로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하나님이 부여한 것이다'.
영지주의 성자들은 미스테리아의 교리와 정확히 똑같은 것을 가르쳤다. 발렌티누스는 인간이
자신의 수호천사로부터 그노시스를 받지만, 이 천사는 사실상 자신의 수준 높은 자아라고 풀이
했다. 수천 년 동안 고대 이집트에서는 다이몬을 에이돌론의 거룩한 쌍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영지주의에서도 발견된다.
영지주의 현자인 마니는 4세부터 수호천사를 의식했으며, 12세에는 그것이 거룩한 쌍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나 자신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한, 또 다른 모습'이
라고 불렀다.
<요한 행전>에서 요한은 예수가 이따금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쌍둥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
주님의 모는 사도가 게네사렛의 한 집에 잠들어 있을 때, 나 홀로 잠들지 않고 주님이 무엇을
하는지 몰래 지켜보았다. 먼저 나는 주님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요한, 너는 가서 자거라.'
그래서 나는 거짓으로 잠든 체했다. 나는 주님과 닮은 자가 주님께 다가가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예수여, 그대가 선택한 자들이 아직도 그대를 믿지 않는가?' 그러자 주님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도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피스티스 소피아>에서는 처음으로 거룩한 쌍둥이와 만난 아기예수에 대한 매력적인 신화를
언급한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회상한다.
어렸을 때 네가 요셉과 함께 포도밭에 있을 때, 성령이 아직 너에게는 임하지 않았을 때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집 안에 있던 내게 왔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너와 똑같았기에,
나는 그가 너인 줄 알았다. 그가 내게 말했다.
'나의 형제 예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마리아는 예수에게 말한다. 예수의 거룩한 쌍둥이가 마침내 예수를 발견했을 때 그가 너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너 또한 그에게 입을 맞추었고, 너희는 하나이자 동일한 존재가
되었다'고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입문식의 목표는 수준 낮은 자아가 수준 높은 자아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는 '하늘에 속한 것도 아니고
땅에 속한 것도 아니며, 수호천사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믿는다고
이레나이우스는 기술했다. 위대한 영지주의 스승인 발렌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인간적 자아와 신적 '나' 가 서로 연결될 때, 그들은 완벽한 영원성을 얻을 수 있다.
보편적 다이몬
'자각'을 추구함으로써 이교도와 영지주의 입문자는 경이로운 발견 여행을 떠나게 된다.
처음에 입문자들은 스스로를 에이돌론---육체를 가진 개인---으로 여기며 다이몬을 수호천사,
곧 거룩한 쌍둥이로 여긴다. 입문자는 더욱 성숙함에 따라 다이몬이 수준 높은 자아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 완벽한 자각, 곧 그노시스를 체험한 축복 받은 자에게도 다이몬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로 여겨진다. 발렌티누스가 말했듯이, 이때의 다이몬은 진실로 '신성한 나' 이다.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다이몬, 곧 수준 높은 자아를 지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깨달음을 얻은
입문자는 만물에 내재한 하나의 다이몬---보편적 자아--- 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만물에는
하나인 보편적 자아가 깃들여 있다. 각 영혼은 하나인 하나님의 영혼의 일부이다. 따라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가르침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종교와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에 모두 나타난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다(I am Thou, and Thouart I)'라는 고대 이교도 현자의 가르침은 영지
주의 문서인 <피스티스 소피아>에도 나타난다. 신약의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요한복음 6:56).
이교도 현자 섹스토스는 이렇게 썼다. '네가 너를 만드신 그분을 알게 되면 너는 너 자신을
알게 되리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철학자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모든 사도들 가운데
가장 큰 자는 자신을 아는 자이다. 인간이 자신을 알 때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클레멘스는
그리스도교 입문자에게 '하나님이 되는 연습'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참된 영지주의자는 '
이미 하나님이 된 자'라고 가르쳤다(클레멘스의 <파이다고구스>3장 1절 : 저자 주).
영지주의 그리스도교가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통해 물려받은 신비한 가르침 가운데,
영지주의 현자 모노이모스의 이런 가르침이 있다.
자기 자신 안에서 그분을 찾아라. 그대 안에 지닌 모든 것,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영혼spirit,
나의 앎, 나의 사람됨soul, 나의 몸뚱이'에 대해 배워라. 그리고 슬픔과 기쁨, 사랑과 미움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발견하라. 원치 않아도 잠에서 깨어나고, 원치 않아도 잠이 들고, 원치
않아도 화가 나고, 원치 않아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어디서 비롯하는 것인지 깨닫도록 하라.
그대가 그 모든 것을 관조하면, 그대 안에서 그분을 발견할 것이다.
영지주의자Gnostic는 '아는 자'라는 뜻이지만, 영지주의자가 아는 것은 단편적인 영적 정보가
아니다. 영지주의자가 한 가지를 알게 되면 다른 모든 것---아는 자, 체험하는 자, 수준 높은
자아, 신적인 '나', 다이몬---을 저절로 알게 된다. 참된 영지주의자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계몽된 입문자처럼 다이몬이, 사실상 보편적 영혼---우리 모두에게 깃들여 있는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각을 얻은 이교도와 영지주의 현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마침내 알게 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우리는 오직 신God만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환생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는, 한 영혼이 여러 생애를 살며 그노시스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되풀이한다고 믿었다. 이교도 입문자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에 따르면, 계몽되지 않은 영혼은
습관의 힘 때문에 거듭해서 환생하게 된다고 한다.
영혼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영혼이 육체를 입는 것은 새가 새장 속에 들어
가는 것과 같다. 영혼이 육체 속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이번 생에 길들게 되면, 일종의 인연
involvements과 오랜 습성 때문에 거듭해서 다시 태어나 육체로 돌아오게 되고, 세속적 욕망과
인연을 끊어 버리지도 떨쳐 버리지도 못하게 된다.
주류 그리스도교는 이교도의 이러한 관념을 배척했지만, 초기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관념을 받아들였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는 그노시스가 수많은 환생을 하며 노력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요한의 비밀서>에서는 한 영혼이 계속해서 환생한다고 가르친다. '영혼의
무지에서 벗어나, 그노시스를 얻어 온전해질 때' 비로소 환생을 멈추고 '더 이상 다른 육체에
들어가지 않는다'.
<피스티스 소피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영혼은 수많은 생애를 거치며 모든 미스테리아를
이해할 때 비로소 빛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번 생애에서 영적 여행을 하며 성취를
이루면, 다음에 환생할 때에는 '진리의 신과 수준 높은 미스테리아를 발견할 수 있는 올바른
육체'를 얻게 된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죽은 자가 '기억의 샘물'을 마시고 오른쪽 길로 가면 하늘에 이르고,
'망각의 잔'을 마시고 왼쪽 길로 가게 되면 환생하게 된다. 영지주의의 <구원자의 책>에도
같은 교리가 담겨있다. 즉, 올바르게 산사람은 이번 생에서 배운 지혜를 잊지 않고 환생하게
된다. 환생하기 전에 '망각의 잔'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산 사람은 환생하기
전에 '망각의 잔 대신 '직관과 지혜의 잔'을 받는다. 그 잔 덕분에 올바르게 산사람의 영혼은
잠들거나 망각하지 않게 되고, '빛의 미스테리아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 영적 여행을 하게 된다.
플라톤은 환생할 때 필요한 인간의 몸뚱이를 일종의 감옥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의
<요한의 비밀서>에서도 환생이 '차꼬(족쇄)를 차는 것' 이라고 가르친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영혼은 죄 값을 다 치를 때까지 벌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환생이 일종의 형벌이라고 가르쳤다. 죄의 비중에 따라 영혼은 여러
유형의 육체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혼은 순결해질 때까지 거듭해서
'형벌을 위한 여러 몸뚱이에 봉인'된다. 그래서 영혼이 '원래의 순결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완전히 몸뚱이와 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교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의롭고 동정적인 하나님이 어떤 인간에게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내린다고는 차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라도 환생을 되풀이함
으로써 궁극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모든 영혼이 태초부터 존재했다. 따라서 영혼은 이미 여러 세상을 거쳤으며, 최종 완성에
이를 때까지 또 다른 여러 세상들을 거치게 될 것이다. 영혼은 지난번 생애에서의 승리로
강화되거나 패배로 약화된 채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오리게네스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장 권위가 있던 인물이었지만, 사후에는 가톨릭
교회의 이단자로 몰렸다. 위와 같은 고대의 교리를 가르쳤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위와
같은 사상이 신약에도 담겨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엘리야의 환생이냐'고 묻는다(요한복음 1:21).
또 마가복음(8:27-28)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세례 요한의 환생인지, 선지자 엘리야의 환생인지,
다른 선지자 가운데 하나의 환생인지를 논의한다! ( '논의한다discuss'는 것은 다소 비약이지만,
여백 읽기를 통해 충분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예수를 누군가의 환생
으로 보았고 예수도 그것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그 시대에 환생 사상이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성서>에서 직설적으로 '환생'이라는 낱말을 쓰지는 않았다 : 옮긴이 주)
남녀평등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식은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디오니소스를 가장
중심으로 섬긴 사제는 여성들이었다.---그들은 마이나스maenas라고 불렸다. 이탈리아 지방
에서는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을 전적으로 여성이 주관했다. 옛 그리스의 올림포스
신들 숭배 하에서는 여성이 가사만 돌보며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했지만, 디오니소스 의식의
도래와 더불어 여성은 고삐가 풀리게 되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종교에서는 유명한 여사제와 여자 예언자가 수없이 많았다. 레스보스 섬의
위대한 시인 사포와 그녀의 자매들은 아도니스 미스테리아의 여사제였다. 디오티마는 소크라
테스를 가르쳤다는 전설적인 여사제(무녀)이다. 고대세계의 유력한 정치가와 유명 철학자들은
델피의 아폴론 신전 여사제인 피토네스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놀라운 업적을 이른 이교도 여성들의 목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유명한 여성 시인과
화가는 물론이고,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여성 철학자 1명과 플라톤과 동문 수학한 두 여성
철학자를 비롯해서 아리그노테, 테미스토등의 여성 철학자들을 언급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존중한 것으로 유명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문헌에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아리스톡세누스의 말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테미스토클리아라고 불린 델피의 여사제에게서
윤리적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크로톤의 여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타고라스는 '여성은
선천적으로 신앙심이 더 깊다'고 언명했다.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쓰는 일을 맡긴 것도
여성인 그의 딸 다모였다. 그의 여성 제자인 아리그노테는 <디오니소스 의식>등의 철학서를
집필했다.
이교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 또한 여성을 존중했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여겼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여성들과 공개적으로 얘기를 나눔으로써 유대 전통을
어긴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예수의 가까운 수행자 가운데 항상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처음 발견한 것도 여성들 이었다. 클레멘스는 겸손이라는 용어가 남성과 여성 모두
에게 적용된다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이 따로 있지 않다'.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여성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구원자의
대화>에서 마리아는 '완전히 깨달은 여성'이며 예수와 특히 가까운 사이로 그려져 있다.
현명한 막달라 마리아는 어리석은 여성 혐오자인 베드로와 자주 다툰 것으로 그려진다.
<피스티스 소피아>에서 베드로는 마리아가 예수와의 대화를 독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우선권과
다른 남성 사도들의 우선권을 빼앗는다고 투덜거린다. 그는 예수에게 그녀가 입 좀 다물게
해 달라고 탄원하지만, 예수는 오히려 그에게 화를 낸다. 나중에 마리아는 감히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다고 예수에게 말한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내 말을 막았고, 나는 그가 두려웠
으며, 그가 여자 족속을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남자든 여자든, 성령이
임한자는 말을 하라는 신성한 명을 받은 것이라고.
이레나이우스는 여성들이 특히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에 매료되는 것에 분개했다. 영지주의자들
가운데 영적 권능을 지닌 여성 리더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에 문자주의자들의 교회에서는 여성이 이류급의 인간 취급을 받았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 현자 마르쿠스가 여성들에게 영성체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 역을
맡겼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한편 테르툴리아누스는 권위를 지닌 '이단자들 속의 여성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그들이 남자를 가르치고, 토론에 참여하고, 귀신을 몰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그는 여성들이 주교처럼 행동하며 세례를 베풀기까지 하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글을 남겼다!
자연 도덕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에서,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를 '숭배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법도
지키지 않도록 하는 신'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모독하려고 했다. 그러자 디오니소스가 답했다.
'그러한 너의 모독이 디오니소스에게는 찬사이다'.
이교도 미스테리아는 흔히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노시스를 체험한 사람에게
전통적인 도덕 개념은 하찮은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미스테리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적 자유였지, 도덕적 예속이 아니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또 '선하거나 악한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인습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비난했다. 또,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영적 자유가 사실은 방탕하게 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모든 세속의 권능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두려워할 자가
없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심판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신비한 의식을 통해 참하나님인 예수를 체험함으로써 영지주의자들은 전제적인 여호와가
유대인에게 부과한 온갖 계율과 여호와의 권능으로부터 '해방', 혹은 '방면' 되었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 입문식 과정에서 입문자는 거짓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영지주의 현자
시몬 마구스의 말에 따르면, 여호와의 권능에서 벗어나 참된 아버지Father를 알게 된
입문자들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현대의 권위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바실리데스와 그의 후계자 발렌티누스, 이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영지주의 스승들은 엄격한
무도덕성amorality(도덕적이지도 않고 비도덕적이지도 않은 것)을 좋아했다. 유일한 계율은
계율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수 입문자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선호했는데, 그의 성향이 금욕적
이라면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지없이 방탕하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미스테리아의 현자들이건 영지주의자들이건 간에 비도덕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밖에서 부과된 윤리적 계율보다 더 심오한 영적 깨달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성한 본성과 교섭하는 인간이라면 직관적, 자발적으로 총체적인 삶과
조화를 이루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는 '영적'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천성적'으로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덕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그노시스에 이르는 정화 과정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일단 그노시스에 이르게 되면, 입문자가 자연스럽게 올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윤리 규범도
불필요해진다는 것이다---올바른 행동이 반드시 전통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영속적인 조화의 상태에 이른 자에게는 외부적 규범의 준수가 더 이상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으며, 더 이상 욕망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명상하며 쉰다. 이러한
상태야말로 다함이 없는 축복이며 영원한 축복일 것이다. 따라서 그노시스를 지닌 자의 모든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다. 그노시스를 지니지 못한 자의 행동은 그릇된 행동이다.--
-그가 규범을 준수하더라도
결론
영지주의자들은 로마 교회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초기 그리스도교의
실상을 전해 준다. 우리는 예수의 전기와 신약의 가르침이 고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화와
가르침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지주의에서 우리는 다른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에서는 그 요소들---그노시스의 추구, 여신의 역할, 여성의 중요성, 다이몬/에이돌론 교리 등
---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요소들은 물론 미스테리아의 핵심을 이룬 것이기도 했다.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와 이교도 미스테리아 종교 사이의 주목할 만한 유사성 일부를 되짚어
보자.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이교도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난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 철학을 가르쳤고, 예수와 더불어 이교도 철학자들도 존경했으며,
자신들의 모임에 이교도를 초대했고, 심지어 이교도 미스테리아에 입문하기까지 했다.
영지주의 문헌에는 이교도의 신화적 주제가 포함되어 있으며, 영지주의자들은 그런 주제를
통해 보편적인 철학을 통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여러 모습을 지닌 아티스', 곧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예수를 동일시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소피아라는 여성 신을 숭배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현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은 정통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인동형동성설을
비판했다. 그들은 유대인의 신 여호와를 거짓 신으로 간주했고, 예수는 여호와의 아들이
아니라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쳤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
하나인 하나님은 플라톤과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최고선과 동일시되었다
영지주의자에게 예수는, 춤과 노래를 통해 사도들을 미스테리아에 입문시키는 이교도의
히에로판테스와 닮은 존재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초보자를 위한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입문자를 위한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지니고 있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입문자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마가는 신약에 나오는 복음서 하나만 쓴 것이 아니라 입문 수준에
따라 내용이 다른 세 가지 복음을 가르쳤다. 신약의 마가복음은 '초보자'를 위해 쓴 것이다.
다른 복음서인 <마가의 비밀 복음서>는 온전해지려는 자, 곧 '입문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노시스를 전하는 다른 한 가지 복음은 구전으로 전해졌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의 목표는 그노시스 곧 '앎'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노시스는 단순한, 혹은 맹목적인 믿음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이교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방편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쳤다
이교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다이몬(수준 높은 자아)과 에이돌론(수준 낮은
자아)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처럼 영지주의자들은 다이몬이 일단 수호천사로 나타나며,
그 후 입문자 자신의 수준 높은 자아로 체험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만물에
깃들여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교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환생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처럼, 영지주의에서도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교도와 영지주의 현자들은 모두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들은 신비한 자연 도덕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와 같은 압도적인 증거에 맞닥뜨린 우리 두 사람에게는, 영지주의 그리스도교가 분명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각색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찾고 있던 단서일까? 영지주의가 원래의 그리스도교일 수 있을까? 죽었다가 부활한
미스테리아 신인의 신화를 유대인식(式)으로 각색한 예수 이야기를 밑바탕으로 삼은 이교도
미스테리아가 그리스도교로 발전한 것일까?
그것이 사실이라고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정확히 예수 이야기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정밀 검토
하기로 결정했다.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은 문자주의자들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실존
인물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예수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다만 신화적 비유의 주인공이었을까?
<빙혼>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은 오늘날 불교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