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새해 첫 모임의 주인공은 강봉정 회원이었다. 신년의 어수선함이었던가, 코앞에 닥친 설 명절의 분주함이었던가, 평소보다 참석회원이 저조하였다. 모두들 저만큼씩의 사연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던 회원들의 안부를 건네며, 오히려 소수정예의 인원으로 빡세게(?) 해보자는 심정에서 시작한 열번째 시창작교실이었다. 이야기는 강봉정 회원의 인생론부터 출발하여 글쓰기론, 시론, 조직론까지, 1월의 밤 깊숙한 곳으로 거침없이 우리들을 끌고 들어갔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2009년 2월 10일, 그녀는 여전히 오일장에서 이불을 팔고 있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의 목청과 오가는 손님들의 웃음소리, 멀리서 또 누군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았는지 목청이 높아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왁자지껄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라디오 소리는 오일장의 소음을 비집고 오느라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하고, 다른 소리로 변질이 되어 들리기도 한다. 그 오해의 소리 행렬을 바르게 풀어내느라 그녀는 이미 일손을 멈춘 상태다. '인문학 독서모임', '리포트 작성', '매달 마지막 수요일 10시 제주도서관' 결론적으로 기억에 남은 이 몇개의 단어들만을 가지고 무작정 제주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직원도 알지 못하는 모임을 찾기 위해 방송국 담당 피디를 찾아갔고, 결국 거기서 전화번호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해 2월 마지막 수요일은 25일이었다.
2009년 2월 25일은 그녀가 다시 태어난 날이다. 햇수로 치면 이제 막 네살, 그녀의 나이는 지금 육십하고도 육년이 더 지났다.
거기서 그녀는 문학이라는 것과 처음 만났다. 물론 거기에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학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세계로 바꿔놓았다. 무작정 찾아가 앉아서 들었던 독서토론의 장, 그 시간의 토론 주제는 '엄마를 부탁해'였다.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난 뒤의 대화를 통해 그간 단절되다시피 했던 엄마와의 관계가 회복되더라는 어느 회원의 이야기,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울며 속상해 하던 회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세상에는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를 느꼈다. 그건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그 모임을 시작으로 다른 강의들도 다 챙겨 들었다. 그녀의 2009년은 제2의 인생, 문학인으로 출발하는 해가 되었다.
그녀의 직업은 이불을 파는 상인이다. 제주시 오일장과 함덕장을 오간다. 두 군데 오일장이 없는 날은 그녀의 고향인 김녕에서 좌판을 벌인다. 이불을 팔아야만 생계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이 일에 전력을 다한다. 작년 여름, 태풍 '메아리'가 제주도를 상륙하던 그 날 밤, 우리 회원들은 모두 봉개동 산 중턱에 있었다. 폭우로 길이 막히고 바람이 거센 탓에 모두들 다음날 아침을 걱정하며 산속에서의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땐, 다행히 비바람은 멈추었지만 밤새 태풍이 휩쓸고 간 사방은 처참했다. 그러나 거기에 그녀는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허름한 트럭을 몰고 함덕장을 향해 떠난 것이다. 그 난장판을 뚫고 말이다. 그런 일은 그 후 종종 있었다. 밤새 회원들과 토론을 하고, 수다를 떨며, 다른 젊은 회원들이 먼저 체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 떨어지고 나서야 조용히 이불을 챙겨주고는 길을 나섰다. 제주시 오일장이나 함덕장을 향해서... 인생 60을 넘기고나서 새로 시작하는 글쓰기가 얼마나 그녀를 젊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지만, 그것보다도 그녀가 갖고 있었던 성실성과 근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그녀의 이런 성실성과 근면성은 앞으로 그녀의 글쓰기에 지대한 호조건이 될 것이다.
살아온 시간의 길이만큼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전개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인생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뒤이어 그녀가 준비해 온 작품을 꺼냈다. 지난 번 교래자연휴양림에서 처음 접한 회원들간 작품 품평회에 대한 인상 때문이다. 지도선생님한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도 중요하지만 동급인 회원들의 눈으로 듣는 자신의 작품평도 글쓰기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데 충분히 공감을 했으므로...한 편만 골라보자
길 떠나는 고물차
강봉정
울고 있는 낯선 여자 백미러에 보였지
앉은 자리 선 자리 찍어 놓은 마침표
굽은 길 돌고 돌아도 가로 막는 담벼락
어제도 오늘도 뒤로한 채 달리는
긁히고 찌그러진 상처투성이 내 얼굴
하얀색 와이드 봉고 함께한 지 십오 년
주행거리 이십이만키로미터 헐떡헐떡 거리며
한 바퀴 달릴 때 마다 곰삭은 사연 풀어
저녁 달 이정표 삼아 길 떠나는 고물차
오일장을 오가며 그녀의 수족이 되어주는 와이드봉고와 60평생을 살아온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작품은 계단하나를 넘고 있었다. 이어 고심어린 회원들의 비판과 충고, 조언들이 오가고, 그녀는 한 마디 말도 놓치지 않고 다 받아적고 있었다. 아직 미완의 작품과 미완의 시인들이 모여 완성된 세계를 추구해 가는 진심이 방안에 가득차 올랐다. 남편을 생각하는 애틋함이 절절하게 묻어나던 <두 사람 2>와 그녀의 삶의 터전인 오일장에서 겪었던 일을 산문으로 풀어낸 <오일장 이야기3>를 읽고 토론하며 표현의 의도와, 그 의도를 극대화시켜줄 작품의 구조와,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까지, 그리고 지속적인 글쓰기를 위해서는 가장 자신있는 내용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그러기 위해 그녀는 두말없이 오일장 풍경을 그려야 한다는 결론까지, 이야기가 거기까지 흘렀을 때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미 너나 구분이 없어져버렸다.
그녀의 나이가 네살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이제 막 사물에 눈을 뜨기 시작한 네살박이 꼬마 그대로다. 사물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선입견 없듯이 그녀가 문학을 받아들이는 머릿속 도화지는 눈밭처럼 하얗다. 그래서 그녀는 바쁘다. 그녀가 접하는 모든 것이 새삼스러운 것들이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지나칠 수가 없다. 그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해소시키려는 절실함이 다른 누구보다 더 빠르게 그녀가 원하는 고지에 올라서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녀와 같이 있는 까마득한 인생 후배들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나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건 이미 그녀 내면에 체질화된 배움의 자세와, 수용의 자세가 주는 편안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요일 저녁 일곱시반부터 시작한 토론 시간은 열한시가 가까워오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회원들이 그토록 아무런 꺼리낌없이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녀가 주는 편안함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처음에는 인생과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기쁨이 늙어가지, 인간, 이 가련한 존재도 무엇을 하든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면 육신이 늙어가지, 단번에 늙지는 않아, 처음에는 눈이나 다리, 심장이 늙네, 단계적으로 늙어가네, 그리고 별안간 영혼이 늙기 시작하지...' 최근 그녀가 읽는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의 한 대목이다. 2009년도에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면, 2010년도부터는 태어남의 흥분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고심하고 있다. 아직 무엇이라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내면의 깊이가 더 깊어짐을 느낀단다. 남들처럼 등단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의 채움을 위하여 계속 이 길을 갈 것이고, 그럴 수 있음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화려하지도, 얼핏, 눈에 띄지도 않은 갯국화 무리가 돌담 사이에서 자기만의 꽃망울을 피운 채 겨울 밤을 넘기고 있었다.
첫댓글 그 날밤의 대화를 멋지게 재현했네요...수고 많으셨습니다...^^
천만대군을 부러워하지 않는 소수정예 부대.... 선배님들의 힘이 무섭고 팀웍이 부럽습니다. 장장 세 시간 넘는 뜨거운 토론에 제 마음이 더 두근거립니다. 담에 저도 동참하고 싶네요. 허락해 주신다면... 그림 그린듯 어젯밤의 제 상상에 도움을 주신 한라산님! 고맙습니다.
단숨에 읽고 내려와 한 숨을 툭 뱉습니다. 트림도 올라 옵니다. 너무나 잘 빠진 제목 '열 번째 이야기...' 그 속에 같이하지 못하여 속상해 죽을 지경입니다. 사소한 것들이라고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봉정언니이야기를 제일 듣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은 오일장에 다 있습니다. 봉정언니가 오일장입니다. 같이 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무슨말을 할까 고심하다 입술까지 부르텁다며 엄살을 피우시더니 줄줄, 좔좔, 촬촬....쏟아내던 향기로운 말씀들이 내내 가슴에 울립니다. 산다는 것,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쭈~욱 가는게지요.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 손해막심일겁니다. 알차게 정리하신 한라산님 수고많으셨습니다.
여의주님, 진짜 속상합니다. 함께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봉정언니의 이야기보따리 무지하게 궁금했는데, 이제 다 풀었으니 어디가서 듣지? 개인적으로 날을 잡아야겠습니다. 오일장 가면 꼭 들러서 눈도장 찍는 우리의 봉정언니, 5일마다 한번씩 들르는 오일장에 봉정언니가 있어 좋습니다. 한라산님, 진짜 빡세게 하셨다더니, 참석하지 않은 우리들을 위해 정리도 빡세게 해주셨습니다.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
갯국화 언니 이야기 단숨에 잘 읽었습니다. 함께하지 못하고, 글로 잘 정리된 단물만 빼먹으려니 죄스럽기만 합니다. '길 떠나는 고물차' 아직 쌩쌩하고, 이제 네살배기 백지같은 눈으로 그려내는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사뭇 궁금해집니다. 건강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설 대목 준비에 물건도 다양하게 신경 써서 진열하고 많이 팔려는 욕심에 조금 무리했습니다. 늦게 시간을 내서 읽어 보니 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했었나 하고 놀랐습니다. 두서 없이 늘어 놓은 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신 한라산님 감사합니다. 댓글 올려 주신 여러분 감사 합니다. 지금도 익숙하지 못한 손놀림이 많이 부족합니다. 제가 주저 앉고 싶을 때도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는 봄볕 문우들, 함께 할 힘을 주신 고정국선생님,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연습을 하려고 노력 하고 있습니다. '열 번째 이야기 덕분에 올 설대목은 대박입니다. 단번에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아니 정말 부자입니다. 버리지 말고 끝까지 이끌어 주십시요.
댓글까지 쭈~욱 읽었습니다. 갑자기 기분이 막 좋아집니다. 화이팅!!
뒤늦게 이 글을 읽습니다.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시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볼 때마다 겸손과 앎의 갈망을 배웁니다. 그 사람 얼굴을 보면 살아온 삶이 보인다 하지요. 삼사라님과 함께여서 저 역시 기쁨니다.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