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40년 법흥왕의 뒤를 이어서 제24대왕으로 즉위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라고 한다. 540년 법흥왕이 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죽자, 일곱 살의 삼맥종이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 초기 10여 년간 신라를 다스린 것은 왕태후였는데, 즉위첫해 죄수들을 사면하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사부를 병부령, 지금의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여 국가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맡겼다.
이는 귀족들의 협의체인 화백 제도를 통해 정책을 결정해왔던 신라에서 병권을 전담하는 벼슬이 생기고, 왕이 이 벼슬을 임명했다는 것은, 왕에게 권력이 그만큼 집중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사부는 지증왕 대에 우산국을 점령한 바 있는 장군으로 어린 왕과 군사적 식견이 부족한 왕태후를 도와 진흥왕 초기 군사와 정치를 이끌었다. 신라 최고의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자고 건의한 사람도 이사부이다. 왕태후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또한 왕태후는 국가적 차원에서 지은 최초의 절 흥륜사를 완성하고, 일반 백성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등 불교를 장려했으며, 이후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는 화랑제도를 만들었다.
2. 551년 ‘개국’이라고 연호를 변경
551년 열여덟 살이 된 진흥왕은 연호를 개국으로 고쳤다. 친정이 시작됐음을 알린 것으로 자신을 황제에 비겨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태왕(太王)’ 또는 ‘짐(朕)’이라고도 했다. 이해에 진흥왕은 지방을 시찰하며 영토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문화적인 안목까지 갖추었던 영웅, 진흥왕은 지방을 시찰하던 중에 가야 출신인 우륵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했고, 552년 계고·법지·만덕 세 사람을 시켜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다. 우륵은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치고 나서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니, 왕이 기뻐하며 크게 포상했다고 전한다.
3. 553-561년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

친정을 시작한 그 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변경을 침략, 지금의 충주와 단양 등 남한강변에 있는 10개 군을 차지했다. 그리고 3년 뒤 관산성 전투를 통해 한반도 중부를 점령한 것이다 555년에는 가야연맹에 속해 있던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에 하주를 설치했고, 이듬해에는 함경남도까지 영역을 넓혀 안변에 비열홀주를 설치했다. 그리고 6년 뒤에는 이사부의 공으로 대가야를 평정하고, 이어 주위의 침입에 대비, 한강 유역에 주군과 강력한 군을 설치하고, 이들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창녕 ·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의 비가 지금까지 전한다.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가야의 영토를 완전히 신라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 땅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삼국통일을 위한 물적, 인적 토대가 되었다.
4. 565년 불교 장려책
중국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면서 아울러 불교의 경론 1,700여 권을 보내왔다. 566년 기원 ·실제의 두 절을 지었으며, 566년 황룡사도 준공했다. 또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었다.
5. 568년 연호를 ‘크게 번창하다’는 의미인 ‘태창’으로 다시 바꿈
진흥왕은 그동안 이룬 영토 확장과 신라의 번영을 자축하는 의미로, 서울을 거쳐 함경남도 함흥의 황초령, 이원군에까지 자신이 개척한 영토를 직접 순수하면서 백성을 위로하고 포상했다. 또한 이를 기념하고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비들을 세웠다. 북한산 순수비·황초령 순수비·마운령 순수비 등이 이때 세워졌었다.
6. 572년 크게 구제한다는 뜻의 ‘홍제’로 연호를 바꿈
연호에서 마흔 살이 된 진흥왕이 한층 깊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해 태자 동륜을 잃은 아픔에 진흥왕은 불교로 더 깊게 빠지게 되고, 크기가 5m에 이르는 황룡사 장륙존상을 조성하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은 뒤 승복을 입고 살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정치, 군사, 문화의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끈 영웅 진흥왕도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576년 마흔세 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7. 진흥왕순수비

'순수'란 천자가 제후의 봉지(封地)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순행(巡行)이라고도 한다. 순수비란 순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말하는데,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병합, 한강 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 영토에 편입한 뒤 척경(拓境)과 순수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 모두 4기로, 당시의 삼국관계와 신라의 정치상·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진흥왕순수비의 위치는 당시 신라의 영토 경계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비문 중에 나오는 '짐'(朕)·'제왕건호' 등의 용어는 신라의 당당한 자존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과거 일본인들은 마운령비와 황초령비가 고려시대 윤관의 9성 축조 때나 조선 초기의 북방개척 때 원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견해이다. 고려 고종 때의 승려 천인(天因)의 〈고석정기 孤石亭記〉에서 진흥왕의 비석이 철원 남쪽 30리 지점인 고석정 부근에 있었다고 언급한 것도 진흥왕의 또다른 비가 철원 근방에 있었을 가능성을 말할 뿐 비가 옮겨졌다는 견해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실제로 진흥왕대에는 활발한 영토확장과 함께 많은 비가 세워졌는데 단양신라적성비도 그중 하나이다. 또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신라 관직과 왕의 근시집단의 직명이 새겨진 비석이 조선 숙종 때 지금의 동래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진흥왕의 또다른 순수비일 가능성이 있다.(브리태니커사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세월의 흐름 속에 마모되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엉뚱하게도 무학대사 “비”라는 전설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1816년, 당대의 금석학자인 김정희는 31세 때 벗 김경연과 함께 이 비를 탁본해 연구한 결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듬해에는 벗 조인영과 다시 확인하고서 이 사실을 비 측면에 기록해 두었다.
비의 측면에 글자를 파서 새겨둔 그 행위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또 하나의 문화재훼손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습
이 비석은 비봉 정성에 홀로 서 있으면서 6.25 전쟁 때에 비의 뒷면에 20여발의 총탄 세례흔적을 남기기도 해 지금의 후손들에게 또 다른 가슴 아픈 기억상기 시킴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 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지붕돌까지 갖춘 격식 있는 비석이었다. 2006년, 복제비를 세울 때 이 지붕돌의 깨진 조각이라도 수습하려고 샅샅이 조사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의 도리가 진실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아니하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제왕은 왕위를 계승하고 스스로 삼가며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이 왔다. 이에 관경(管境)을 순수하며 민심을 살펴서 백성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며 충성과 신의를 갖추고 재주를 다해 나라에 충절한 공을 세운 자가 있다면 벼슬을 올려주고 공훈을 표창코자 한다. 이때 왕의 수레를 따른 이는 법장(法藏) 혜인(慧忍) 등이었다."
문장은 대단히 유려하고, 글씨는 해서체로 질박하면서도 굳센 느낌을 준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는 '광예주쌍집(廣藝舟雙楫)'에서 역대의 서품(書品)을 논하면서 이 비를 신품(神品)의 반열에 넣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현재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의 넷이 남아있는데, 당시의 삼국 관계와 신라의 정치상과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진흥왕 순수비의 위치는 당시 신라의 영토 경계를 잘 알려줄 뿐만 아니라, 비문의 내용 중에 나오는 짐, 제왕건호 등의 용어는 신라의 당당한 자존 의식을 보여 주는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