猶豫와 放逸
Pali Canon: Paracanonical, Nettippakaranam, book: 1, database record: 15175.
[BJT Page 024] [x 24/] [PTS Page 011]
Ken’assu na ppakāsatī ti pañhe
vivicchā pamādā na ppakāsatī ti vissajjanā.
‘무엇 때문에 보지 못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猶豫와 放逸 때문에 보지 못한다.’가 대답이다.
猶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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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하지 못하고 망설임. 머뭇거림. 시일을 늦춤. 주저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함. 遷延(천연)함.
의심이 많아서 매사에 망설이는 버릇이 있는 유와 예라는 두 동물의 이름에서 온 말이라는 설이 있음.
위키백과:
불교에서 유예는 의(疑)의 마음작용의 본질적 성질로, 망설임 또는 결정을 미룸을 뜻하며
특히 4성제와 같은 진리에 대해 망설여서 결정하지 않고 미루는 것을 말한다.
*의견:
흔히들 불.법.승.연기. 등에 대한 (특히 법에 대한) ‘회의적 의심’으로 설명하는 듯 합니다.
본 Netti.에서는 이것 저것 관심 가는 것만 많아서, (*즉 擇法할 수 없어서)
確信하지 못하고 決定하지 못하여 '망설임- 결정하지 못함- 확신이 없음'이라는 어감이 있는 듯 합니다.
비유하면 애기들 앞에 여러 가지 장난감을 보여 주면
이것을 집을까 저것을 집을까 두리번 거리기만 하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망설이고 주저할 때와 같은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猶豫의 상대어인 ‘결정’(←택법)에 해당하는 빨리어는
4종禪의 공통적인 心所인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精進),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
[欲---結---進-念-捨] = 作意>에서의 adhimokkho인 듯 합니다. 그 다음 心所가 精進으로 나타납니다.
adhimokṣa[adhimokkha] resolve, determination.
Adhimokṣa is the unshakeable adherence to the theory of nullity.
It is one of the mental concomitants (cetasika-s) which is associated with both good or bad citta-s.
It decides whether or not to do a particular thing, and also whether to do good or evil,
for example, whether to observe precepts or whether to act upon prohibited things.
Pakāsati [pa+kāś] to shine forth, to be visible, to become known
vicikicchā : 'sceptical doubt', is one of the 5 mental hindrances (nīvaraṇa, q.v.)
and one of the 3 fetters (saṃyojana, q.v.), which disappear for ever at Stream-entry,
the first stage of holiness (s. ariya-puggala).
As a fetter, it refers to sceptical doubt about the Master (the Buddha), the Teaching, the Saṃgha,
and the training; about things past and future, and conditionality (Dhs. 1004; cf. A . X, 71 ).
It also applies to uncertainty whether things are wholesome or not, to be practised or not,
of high or low value, etc. According to Vis.M. XIV, 177,
vicikicchā is the lack of desire to think (things out i.e. to come to a conclusion;
vigata-cikicchā, desiderative to √cit, to think);
it has the nature of wavering, and its manifestation is indecision and a divided attitude;
its proximate cause is unwise attention to matters of doubt.
It is associated with one of the 2 classes of unwholesome consciousness rooted in delusion
(Tab. I, No. 32). - See also kaṅkhā.
Vivicchā (f.) [Desid. of vid, cp. Sk. vivitsā] manifold desire, greediness, avarice DhsA 375;
Nett 11 (where expln "vivicchā nāma vuccati vicikicchā"). See also veviccha.
Yo puggalo nīvaraṇehi nivuto so vivicchati, vivicchā nāma vuccati vicikicchā,
덮개로 덮여있는 사람은 이것저것 원한다. 이것저것 원하는 것을 猶豫(疑心이)라 한다.
so vicikicchanto nābhisaddahati,
의심할 때 그는 확실한 믿음이 없다.
<*망설이는 자(=擇法 하지 못하는 자→ 欲하지 못함)는 확실히 (마음) 둘 곳이 없다/두지 않는다.>
anabhisadda hanto viriyaṃ nārabhati
확실한 믿음이 없으니 정진을 시작하지 않는다.
<*(마음) 둘 곳이 없는(=結하지 못하는) 자는 시작된 精進이 없다.>
akusalānaṃ dhammānaṃ pahānāya kusalānaṃ dhammānaṃ sacchikiriyāya,
不善法을 없애고 善法을 실현하기 위한 (정진을)
so idha pamādaṃ anuyutto viharati, pamatto sukhe dhamme na uppādiyati,
그는 거기에서 放逸에 빠져 지낸다. 방일하는 자는 樂法(=定?)을 생기게 하지 못한다.
tassa te anuppādiyamānā na ppakāsanti,
樂法이 생겨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
<*精進하지 않는 것이 放逸인듯 합니다.>
Dassanena tīṇi saṃyojanāni pahiyyanti: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
봄에 의해 세 가지 결박이 제거된다. : 有身見, 猶豫, 戒禁取.
M2
Tassa evaṃ yoniso manasikaroto tīṇi saṃyojanāni pahīyanti: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3 Ime vuccant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
M22
yesaṃ bhikkhūnaṃ tīṇi saṃyojanāni pahīnāni
sabbe te sotāpannā [PTS Page 142] [q 142/] avinipātadhammā niyatā sambodhiparāyanā.
이 세가지 결박이 제거 된 자를 預流者라 한다.
첫댓글 간만에 둑카님 글 올리신 것이 반가워 본 글을 씁니다.
조금이라도 지 눈에 이상한게 보이면 '그거이 맞나' 하는 病...
둑카님 글 내용이 그렇다는 것 아님... 봄봄은 의심병이 쬐끔 있습니다.^^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 쓴 글이니 가볍게 보십시오.
정확한 번역은 조금 기다리셔야 될 듯 합니다.
7覺支의 순서도..
념- 擇法- 精進- 喜- 경안- 정- 사각지... 순서입니다.
'봄봄'님 ...... 제가 반복하여 ..... 심술궂은 소리를 하여 '해맑은'님도 당황하게 하고 합니다만 ....
心所를 확장하면 <唯心論(오직 마음 뿐)>이 되고요 ....... 身所를 확장하면 <唯物論(오직 물질 뿐)>이 된다고 봅니다.
'그 둘(心과 物)'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담마論>이라고 저는 봅니다.
녜.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위자님의 <'그 둘(心과 物)'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말씀은 이해된 듯한... 착각인지 모르지만...
그 부분은 빨리 와 닿습니다. _()_
<禪的>인 표현으로 하면, 밖에 있는 것은 <경계(=法) 뿐>이고 고짜라(=안으로, 심의식의 고짜라)에는
<탐진치(=경계에 대한 탐진치)>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저는 봅니다.
우리는 '3界'라고 부르는 기가막히는(=묘한) <경계(=法)>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데요 ......
벗어나려면(=꿈을 깨려면) 일단 ....... <경계(=法)>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 ........
그래서 <身[=경계(=法)], 受[=경계(=法)], 心[=경계(=法)], 법[=경계(=法)]>이 모두 '위사야[=경계(=法)] 용법'이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 물론 당연히 <비판의 여지>가 있는 '개인적인 견해'이고요 ........그러한 '비판과 오류의 지적'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cakkhu(眼, 눈)에 界(dhaatu)라는 용어를 붙이어 ‘안계(眼界, cakkhudhaatu)’라는 복합어가 될 때, 많은 분들이 <눈의 요소>라고 해석합니다만, ‘아위자’가 생각하기에는 .................. 예를 들어 ‘무상상(無常想)’의 경우에는 ‘무상이라는 그러한 산냐’를 의미하듯이 ‘안계(眼界)’의 경우도 ‘안(眼)이라는 그러한 계(界)’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붕어빵이나 앙꼬빵이나 식빵은 모두 ‘빵’이듯이 ... A界든 B界든 C界든 간에 모두 ‘界’입니다. 따라서 대상인 ‘A, B, C’를 <‘界’로 보는 관점>이 ‘핵심’입니다. ‘界’라는 용어는 <심의식의 관점에서 대상을 볼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계(界), 처(處), 연기(緣起)’라는 용어가 모두 그러합니다. <심의식의 관점에서 대상을 볼 때> 사용하는 용어로는 ‘법(法)과 명색(名色)’이라는 용어가 또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법(法)을 관찰할 때[=3관]’ 사용되는 용어가 ‘계(界), 처(處), 연기(緣起)’입니다.
말하자면 ‘안계(眼界)’라는 용어는 <심의식의 관점에서 ‘안(眼)’을 볼 때 그러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식론적인 용어’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法)인 것을 명색(名色)으로 보는’ 그러한 우리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불교를 ........ (생략).
@아위자 정확하게는 명색을 법(메시지)이 아니라 오욕락으로 보는 것이 다양한 악순환을 낳는다가 아닐까 합니다.
불교공부를 하는 <기본시각>은 무조건 배워서 해결하여야 하는데요 ..... 그러한 <기본시각>을 자신이 스스로 깨우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실로 무지막지한 이야기입니다. ....... <기본적인 기초 관점>을 배우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 힘만 들어갈 뿐이지 ..... 성과나 성취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마타 싣달타>가 아니거든요 ..... <고마타 싣달타>의 경우에는 '스스로 발견하여' 깨우치신 것이고요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알프스 지하에 몇 십 킬로미터의 '터널'을 뚫는 사람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는 것이지만 .... '그 길(막가)'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
그런 고생이 불필요한 것입니다........ 굳이 <기왕에 뚫여 있는 터널>을 외면하고서 자신이 직접 알프스에 <터널>을 뚫고서 지나가시겠다고 한다면 ........ 하고 싶으시면 하여야 겠지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 우리에게 강조하시면서 남겨주신 말씀은 '단 두 가지'라고 봅니다.
<제행은 '무상한 것'(=본래부터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 =무명으로부터 연기 된 것)>과
<팔정도를 잃어 버리지 말라는 것>이라고 봅니다 ...........
그러하다고 저는 보는 것인데요 ........ 오늘날 <팔정도>를 수행체계로 삼는 종단이 불교 그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 나아가 '행'이라는 것을 파악하여 설명하고 있는 선지식이 오늘날 그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
그래 놓고도 <불제자>임을 자처하는 ...... 것이 웃습지 않습니까? ......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계>도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 양반들이 하는 말이 "오늘날 교회에 예수님이 오시면 <이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합니다만 ....... 불교도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불교계>에서 <진흙속의연꽃>님과 <원불사 '단현'>님을 주시하는 이유가 그러한 점인데요 .........
어찌되었든 간에 "정신 차리자!"라고 외치는 사람은 그 두 분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그 두 분'의 공통점이 <불교교리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한 '엉터리들'>이라는 점입니다만..... 불교는 <주둥아리>가 아니라 '신행적 측면'이 더 중요한 것이기에 ...... '엉터리'는 수정하면 그만인 것이기에 ...... 그 두 분이 '아위자'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눈 앞에 '막가'가 나타나지 않을 사람은 <아무리 '막가'에 대하여> 주둥아리를 까 보아야 헛 수고 ........ '아위자'의 체험입니다.
'엉터리'라도 <신행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분들이야말로 ......... 언젠가는 눈 앞에 <막가>가 펼쳐지는 이치이기에 그러합니다.
17일자... 해피법당에........'원시불교에서의 중에 대한 오해'라는........... 우리 까페에서 알 분들은 다 아는...........그 두분의 논문이 인용되어......괜히 딴지를 걸고... 답하는 말씀이 있네요.........^^
읽어 보았는데요 ...... 그 정도 지적을 '딴지'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 충분히 지적하실수도 있는 평범한 의문이 아닌가요? ...... 중(中)을 아예 중도(中道)라고 번역하시는 분도 계시는 세상인데 ........ <쌍요자나>라는 교리용어는 엄청 어려운 용어입니다. 최근에 들어서서야 비로서 '관련 논문'이 한 편 발표될 정도로 '미개척 분야'의 교설이 <쌍요자나>입니다.
그러한 <쌍요자나>를 들고 나와서 '중(中)'을 이야기하는 논문이니 ....... ㅋㅋㅋ...... 앞서 가도 너무 앞서간 이야기를 하는 논문이고요....... 지금도 많은 논란이 있고 ..... 문제점도 많은 논문입니다.
@아위자 당시에는 '유무중도, 고락중도, 단상중도' 등등이 판을 치던 시기였고요 ....... '팔정도'는 중도에서 밀려나서 구석에 쳐박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ㅋㅋ ...... 당시에는 그 논문이 <심사를 통과 한 것>이 기적이었던 시절이었음.......... ㅎㅎ........ 그 논문에 대한 반박 논문을 쓰시겠다고 호언장담 하셨던 분들이 한 분 두 분이 아니었었는데 ...... 아직 소식이 없네요 ........ㅋ.
@아위자 그 논문을 쓸 당시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요 ........ㅋ....
원래는 논문에 ....... 유무중도 등에 대한 <신란한 '비유와 비판'>이 있었었는데요 ... 삭제하고서 제출한 것입니다. ..... 어떤 '비유'였는가 하면요 .........
병원에서 환자들(=유무중도 등등)이 의사의 흰 가운을 입고서 의사행세를 하는 판이 벌어졌으니 '그 병원'에서 올바른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라는 '비유' .... ㅋㅋ... 진짜 의사와 간호사들은 '병원'을 환자들에게 점령당하고서 .... 구석에 쳐박혀있다! .....라고 하였었습니다만..... 당시 분위기를 고려한 어떤 분께서 ....... 이 '비유'는 삭제하기를 권고한다 ... 라고 하심. ㅋ.
@아위자 요즈음은요 ...... "나는 중도를 이렇게 이해한다."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여도 <미친놈> 취급을 받지 않습니다만....... 당시는 '유무중도'를 모르고서는 '불교학자'행세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ㅎㅎㅎ ... 있지도 않은 '기상천외한 중도'를 몇 십년간씩 연구하던 시절........ㅎㅎㅎ........ 그러한 연구를 접도록 한 것만 하여도 ........ 논문이 노리는 효과는 이미 달성한 것입니다....
@아위자 팔정도로 대표되는 <37조도품>이 중도!
@아위자 중(中)에서 드러내신 法이 12연기의 제법들!
그러하기에 그 < 12연기의 제법들>은 모두 '쌍요자나들'이다.....라고 말하는 논문.
지금도 ..... '아위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논문! ......ㅋㅋㅎㅎㅎㅎㅎ........ 쌍요자나가 무엇인가요?
@아위자 논문 발표 후에 ...... 필자들이 얻어 먹은 <욕>은 ...... 그 분량이 평생 얻어 먹을 <욕>을 거의 다 얻어먹은 것이었음........ 지금도 이를 갈고 계신 분들이 부지기 수....... ㅎㅎㅎㅎㅎ ..... "해보슈!"
@아위자 더구나 필자 두 사람이 다 ..... 지독한 <대승불교도들>이라는 점에서 ... 많은 분들이 놀라심.
요즈음은 더더욱 더 '대승불교'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고 있는 바........ 임. ......
모순되지 않습니다 ..... 니까야를 올바르게 이해하시면 <대승불교>가 보인다고 여깁니다.
@아위자 개인적으로는 '중도'가 <계정혜 삼학체계>라는 점이 ....... 통탄스럽지만요...... 그래도 사실은 사실인 것이지요....... 그 <계>라는 것을 무시하고 싶은 심정이야 ..... 그 누가 '아위자'만 하겠습니까만... '아위자'가 안 된다고 해서 '아전인수'하면 <무간 지옥행>인 것임. .... 지옥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지옥이 아님.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현실세계는 이미 '지옥의 보까시'가 어느 정도 깔려있는 세계이거든요 .... 여기에서도 충분히 <지옥의 한 단면>을 맛 보실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위자 어느 분께서 ........ ㅎㅎ.... 색계니 무색계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힌두교>에서 받아들인 것일 뿐이고 '원래 불교'에는 없었던 것들이다.........라고 하시는데요 .... ㅋㅋㅋ .... 그 이야기는 <지옥>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아전인수라고 봅니다........ㅎㅎㅎㅎㅎㅎ ....과연 그럴까요? ..ㅋㅋ......
8정도를 닦아 이룬 삼매를 기반으로....... 다시 사념처의 고짜라에 머무는 수행을 하면서............계 처 연기로 관찰하는 것이...................法을 보는 것이라고 정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