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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적인 맹인(Super Blind)
한때, 자기의
“기숙사용” 하얀 지팡이를 하수도 도랑 쇠창살 아래로 던져 버리곤 하는 한 십대 소년이 있었다. 요즈음 에릭 웨이헨메어는 '트레킹 폴‘이
꽤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나 또는 엘도라도 캐년의 윈드 타워를 내려오기 위해서.
출처: 클라이밍 誌, 2002
필자: 데이브 펙
콜로라도 엘도라도 캐년의 '칼립소'를 (5.6) 선등하는 에릭 웨이헌메어 |
에릭 웨이헨메어는 (Erik Weihenmeyer) 콜로라도 엘도라도 캐년의 ‘레게’ (Reggae)라는 두 피치 짜리 5.8 루트의 출발 지점의 몇 개의 동작을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왼손을 머리 위에서 좌우로 흝으며, 그 사암 위를 살피다가, 한 홀드를 손으로 감싸 쥔다. 오른손을 밑으로 뻗어, 상반신과 무릎 사이에 있는 바위를 손으로 꼼꼼이 만져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마치 곤충이 더듬이를 사용하듯 쓰고 있다. 무릎 높이에 있는 ‘에지’를 찾아내어, 그 위에 발을 올려놓고 일어선다.
내가 웨이헨메어의 로프를 잡고 있었는데, 내가 눈으로 본 것을 수긍하려고 애를 쓴다. 웨이헨메어는 장님이다. 그런데 와이헨메어가 선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정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가구가 천장에 붙박이로 설치된 어떤 방에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와이헨메어는 이제 내 위 10m 지점에 있고, 모서리에서 레이백 자세에 들어간다. , 발은 높이 올리고 팔을 쭉 핀다. 그가 박은 마지막 확보물은 그의 밑 약 2m 지점에 있다. 그가 나만큼 불안감을 느낀다 해도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의 움직임은 침착하고 일사불란하다. 한 팔로 매달린 채, 다른 손으로 그 크랙의 폭을 재어보고 7.5cm 캠을 단번에 꽂는다. 내가 에릭을 안 지 12 시간 밖에 안 된다. ‘골든’ 근처에 있는 그의 집에 가보니, 그의 부인인 엘런과 18 개월 된 딸인 에마는 이미 잠자고 있었다. 나는 눈먼 사람과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검은 색 안경을 끼고 있는 그가 물건들에 부닥치지나 않을른지? 스티비 완더처럼 목을 아래위로 움직이지 않을른지? 내 마음이 (이건 내 자신의 문제였다) 거북하지나 않을런지? 이런 일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와이헨메어와 내가 뒤꿈치를 들고 거실로 걸어 들어가서 등반에 관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내게 맥주를 마시면 어떻겠냐고 묻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려고 주방으로 갔다. 그의 움직임과 행동이 너무 정상이어서, 그가 나를 손님용 침실로 데려 가려고 아래층으로 갈 때까지는 그가 눈 멀었다는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를 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지하실 속으로 가다가, 몸이
기우뚱하면서 그만 나도 모르게 “어이쿠!”이라고 했다 .
“미안합니다” 하고 그가 변명했다. “여기에 불이 켜져 있는지를 내가 물어 봤어야 했는데 그만 그러지를 못했군요.”
그의 눈 역할을 해주는 첫 번째 개인 '위자드와 같이 있는 16 세 때의 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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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때 가족과 같이 있는 에릭(맨 오른쪽): 에디; 마크; 어머니 엘런; 아버지 에드. |
웨이헌메어는 최근에는 등반할 시간이 없었고 자기 부인에게도 이제는 “자랑하지” 않겠노라고 약속을 했었다. 그래서 오늘 그는 엘도라도에서 ‘레게’ 루트의 5.6 짜리 첫 피치 만을 선등하고, 그 루트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나의 세컨을 보기로 했는데, 그 30 미터 짜리 5.8 짜리 두 번째 피치를 뛰다시피 올라왔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라고 하지만 선등을 족히 하고도 남을 것 같이 보였다. 웨이헌메어는 전에도 ‘레게’ 루트 전체를 선등한 적이 있었고, 길 건너 쪽의 ‘바스티유’에 있는, 이름마저 적절한, ‘눈먼 믿음’ (Blind Faith. 5.10a)이란 루트를 포함한, 그 밖의 수많은 ‘엘도‘ 클래식 루트들을 선등했었다. 그러나 이런 인상적인 실적도 그의 다른 업적에 비해서는 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엘 캡의 노즈 등반을 했었는데, 스토브레그 크랙의 5.10a 피치를 선등했고, 앨버타에 있는 약 720 m 짜리 빙벽 루트인 ’폴라 서커스'를 (WI 6) 마이크 오도넬과 11 시간 내에 올랐고, 7대륙 최고봉 중 다섯 개를 올랐으면, 그 중에는 에베레스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에버레스트 등반이 작년 여름 그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Nose 정상 가까이의 헤드월을 선등하는 에릭 웨이헌메어. |
웨이헌메어가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올 당시 그가 "활주로 걸어나올 때 약 30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고, 영화배우라도 된 것 같았죠“ 라고 그가 말한다. 네팔에 머문 기간은 2 개월이었으나 ”투데이“ 텔레비죤 톡 쇼에 출연하기 위해 미국 동부로 비행기를 타고 가야했기 때문에 집에는 겨우 이틀 동안만 머물렀다. 그 후 몇 주 동안은 정신없이 바빴다. 기자 회견, 인터뷰, 그리고 그가 에베레스트 등반 전에 쓴 ‘The Top of The World' 싸인 회 등에 참석해야 했다. ’타임‘지 표지에도 등장했고 미국 대통령과 샤킬 오닐도 만났다.
디즈니랜드에서 와이헨메어는 ‘마터호른’을 올랐다. 페인트 칠했고 미끄러운 5.6 짜리 였다. 이것을 오른 후, 미키 마우스가 에릭에게 ‘메달 어브 카리지’를 선물로 주었고, 디즈니 사에서 와이헨메어의 원정대원들과 가족들에게 무료 휴가를 갖도록 해주었다. “나의 팀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었죠”라고 웨이헌메어가 말한다.
웨이헌메어는 장님이다; 웨이헌메어는 선등한다. 이 두 가지 정보가 서로 맞아 떨어지지를 않는다. 마치 가구가 모두 천장에 볼트로 고정되어 있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
웨이헌메어 팀, 즉 전국 맹인 협회 원정대는, 2년간에 걸쳐 에베레스트를 위한 준비를 했다. 웨이헌메어가 덴버에서 지구 물리학자이자 클라이머인 파스칼 스카루토를 만났던 1999년에 이 일이 시작되었다. 웨이헌메어는 이미 엘 캡을 오른 바 있었고 데날리와 킬리만자로와 아콩카과 정상을 오른 바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이드를 받으며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클라이머들에 비해서 더 경험이 많았다. 그의 경험 그리고 산에서의 그의 힘에 관한 그의 파트너들의 설명이 스카투로로 하여금 웨이헌메어가 세계 최고봉의 정상에 도달케 하는 원정대를 조직할 수 있는 믿음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확신할 수 없었다. .
1996년 당시의 에베레스트 참사에서의 생존자이자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저자인 존 크라카우어는 웨이헌메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이헌메어가 성취한 바에 대해 찬사를 표하는 한편으로는, 그의 걱정을 말하기도 했다: “내년 봄에 에베레스트로 귀하가 가겠다는 계획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 고 썼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데 필요한 귀하의 능력을 의심해서는 아닙니다 - 이미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무서운 위험들을 -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모든 클라이머들이 직면하게 되는 - 만나지 않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경험 많은 히말라야 클라이머에 속하는 에드 비스터는 ‘Men's Journal'의 기사에서 그의 유보적인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에릭에게] 좀 더 많은 파워를 주었으면 하며, 그가 가는 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직접 그를 데리고 올라가고 싶지는 않다. .... 내가 가이드 할 때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에릭의 경우에는, 가는 도중 사람들이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살펴주며,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 위험이 너무 크다.“
자신 보다 더 강하고 더 경험이 많은 파트너가 다음 피치에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동안 고립된 바위 턱 위에 앉아 있으면서 앞으로 닥칠 위험을 느끼고 떨어 본 적이 있다면, 크라카우어와 비스터 그리고 다른 경험 많은 히마라야 등반가들이 에릭의 에베레스트 등반 계획에 대해 해준 말을 들었을 때 웨이헌메어가 어떻게 느꼈을 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일부는 겁을 먹었죠,”라고 그가 말한다. “그들은 전문가다. 그들은 거기를 갔다 왔고 그것을 해봤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들은 안다. 그들이 나를 생각해서 두려워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웨이헌메어는 또한 사람들이 그를 낮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의 에베레스트 시도가 너무 위험하다고 믿는 여러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 웨이헌메어의 뒤를 따라 에베레스트를 올라가서 그의 시체를 가장 먼저 촬영하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말한 다른 원정대 대장까지 포함하여 - 이 산에 대해 대단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웨이헌메어에 대해서는 얼마나 잘 알았을까? 그들은 웨이헌메어와 등반한 적이 없다. 그러니, 클라이머로서의 그의 능력을 판단할 자격을 그들이 어떤 면에서 갖고 있겠는가? “그들이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는 것이죠,”라고 그가 말한다. 그들이 그 점을 (한 가지 사실 만을) 근거로 하여 여러 가지 가정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좀 모욕적입니다.“
와이헨메어와 맹인협회 멤버 18명은 열심히 트레이닝했고 치밀하게 준비했으며, 2000 년에는 트레이닝 등반으로 ‘아마 다블람‘을 시도했었다. 악천후로 인해 6000 미터 바로 위 지점에서 돌아서야 했으나, 웨이헌메어는 그 등반을 잘 해냈다. “그의 정신력, 스태미너, 그리고 강인성을 입증했다,”고 원정대장 스카투로가 말한다.
2001년 3월 말 경 와이헌메어와 그의 동료들이 ‘루클라’라는 출발기점 마을에 도착하고 에베레스트로의 트레킹을 시작했다.
와이헌메어는 만 34세다. 다부지고 단단한 체격이며 5피트 10인치의 신장이다. 체격이 크거나 체중이 많진 않으나, 웬만한 사람은 번쩍 들어 바닥에 내던질 수 있을 것 같이 보인다; 고교 시절 전국 청소년 레슬링 챔피언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옅은 갈색의 곧장 뻗은 머릿결 그리고 강인한 독일계의 얼굴 모습을 갖고 있다; 어느 저널리스트는 그를 “털 많이 난, 젊은 커크 다글라스”와 비슷하다고 했다.
웨이헌메어는 같이 지내기 편안한 사람이다. 사교성이 좋고
명확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 동기 부여 연설가 활동으로 생계를 삼고 있다. 유모어 감각도 있고 그가 장님이라고 놀리는 사람들
때문에 모욕감을 느끼는 적이 없다. 이 점은 텐트 속에 갇힌 채 지루함을 느끼는, 정상적인 시력이 있는 클라미어들과 수많은 날을 같이
보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할 것이다. 아콩카과에서 그의 친구인 크리스 모리스의 오줌 병에서 그만 실수로 오줌 한
모금을 마신 적이 있다고 내게 말한다.
“제기랄!” 하고 웨이헌메어가 낄낄대며 말했다.
“원 세상에, 너 장님이야 뭐야?” 라고 모리스가 대답했다. “그 병에다가 내가 ‘오줌’이라고 써놓아 쟎아!”
에릭은 그의 슬라이드 쇼에서 재미난 이야기들과 “장님 조크”를 말한다. “내가 눈이 멀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최대한 넓게 벌리기: 제프 에반스, 웨이헌메어, 셔만 불, 에베레스트 쿰부 아이스폴에서. |
지형이 복잡할수록, 웨이헌메어는 더 힘들게 노력해야 하며, 이 ‘아이스폴’ 지대를 처음 통과할 때 힘든 대가를 치뤄야 했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고 일정한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고 그의 문고판 “Touch the Top of the World"라는 책의 부록에 썼다. 이 책은 금년 여름에 출판되었다. ”한쪽 폴(pole)에 항시 단단히 의지한 채 다른 ‘폴’로 다음에 디딜 곳을 찾아야 했으며, 수천 번 걸음을 옳기는 동안 한 걸음 한 걸음이 절대 확실해야 했다. 단 한번 실수하면 발목이 부러지고, 무릎 뼈가 박살 나거나, 그 보다 더 심한 부상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웨이헌메어의 아마 가장 인상적인 점은 험한 지형에서의 그의 기민한 움직임이다. 내가 ‘레게’ 루트의 마지막 피치에서 루트 파인딩을 잘못하여, 정상적인 하강 시 이용하는 바위턱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고, 그 대신에 ‘윈드 타워’ 루트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여기서 내려가기 위해 날카로운 바위가 있는 암릉을 가로질러 기어내려 가고 5.4 급의 4.5 미터 정도를 도로 내려가 협곡까지 가야 했다. 이 두 구간 모두 추락사의 위험성이 있었다. 웨이헌메어가 앞장서서 나아갈 때, 로프를 매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래서 그가 선등으로 나아갔고, 확보물 설치하지 않고 그 암릉을 가로 질러 자신 있게 기어 올라갔다. clambering 로프 끝에 이르자, 몸에 맨 줄을 풀고 그가 계속 나아가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로프를 다 감고 그를 따라잡아 보니, 웨이헌메어는 다운클라잉 하는 곳의 바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선등으로 나서 그 가파른 바윗길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파트너들이 늘상 하듯이, 나도 벨을 (bear bells) 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또 다른 장님들이 하얀색 지팡이를 쓰는 방식과 똑같이 자기 앞쪽의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두 개의 트레킹 폴을 쓰면서 웨이헌메어가 잘 걸어 나아갔다. navigate 내가 큰 소리로 조언을 해준다:
“길 가운데, 4 피트 앞에 큰 바위덩이!”
“조심해! 왼쪽에 커다란 낭떠러지!”
거친 하산 길이었다. 무릎이 풀릴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불평할 수 없었다. 와이헨메어는 나 보다 훨씬 힘들게 노력하고 있었다. 한 걸음 옮길 때 마다 그의 다리가 발 밑의 예기치 않은 울퉁불퉁함에 잘 맞추면서, 커다란 충격 흡수기 (쇼크 업소버) 같이 움직였다. 그의 근육들이 수축하고; 무릎을 웅크리고; 발목이 괴상한 각도로 굽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페이스가 늘어지지 않는다. 그의 탐침용 트레킹 폴들에 내 발목이 찔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서둘러 가야만 했다.
금이 가고, 부서지고, 계속적으로 움직이며,, ‘쿰부’ 빙하가, 에베레서트 남면 밑으로 600 미터나 폭포처럼 쏟아진다. 사우스 콜 루트 상의 베이스 캠프(17,600 피트)와 캠프 1 (20,000피트) 중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빙하를 건너야 한다. 4층 집 만큼 큰, 기우뚱거리는 얼음 덩어리, 깊은 크레바스 등등의 위험이 있다. 그런 크레바스들은 뛰어가다가 점프하거나 흔들거리는 알루미늄 사다리를 이용하여 건너야 한다. 일찍 시작하고 빨리 등반하는 것이 최선이다; 낮 기온이 올라가면서 얼음덩이들이 불운을 가져오는 규칙성을 갖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지형이 복잡할수록, 웨이헌메어는 더 힘들게 노력해야 하며, 이 ‘아이스폴’ 지대를 처음 통과할 때 힘든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고 일정한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고 그의 문고판 “Touch the Top of the World"라는 책의 부록에 썼다. 이 책은 금년 여름에 출판되었다. ”한쪽 폴(pole)에 항시 단단히 의지한 채 다른 ‘폴’로 다음에 디딜 곳을 찾아야 했으며, 수천 번 걸음을 옳기는 동안 한 걸음 한 걸음이 절대 확실해야 했다. 단 한번 실수하면 발목이 부러지고, 무릎 뼈가 박살 나거나, 그 보다 더 심한 부상이 올 수 있었다."
어느 지점에서 웨이헌메어가 크레바스 위로 점프했는데, 그만 제대로 넘어서지를 못했다. 파트너인 ‘베니테즈’가 그를 잡아줄 때, 베니테즈의 스키 폴이 와이헨메어의 얼굴 위를 긁었다.
피투성이가 되고 지친 웨이헌메어가 캠프 1로 비틀거리고 들어간 것은 베이스캠프 떠난 지 13 시간 후였다. 그의 팀의 계획상으로는 그 곳을 일곱 시간 안에 그가 통과한다는 것이었다. “웨이헌메어는 글자 그대로 핏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라고 그의 동료 대원인 마이크 오도넬이 ‘타임’ 지에 후일 말했다. “그는 마치 죠지 포어맨처럼 보였고, 두 시간 동안 일체의 활동을 쉬어야만 했다.”
웨이헌메어의 동료 대원들은 걱정스러웠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서는, 하이 캠프까지 짐을 옮기는 한편, 아래로 내려와서 상대적으로 산소가 풍부한 베이스캠프에서 회복하기 위해, ‘아이스폴’ 지대를 많이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웨이헌메어가 나중에는 그 아이스폴 지대를 열 번이나 왔다 갔다 했고, 그 여정에 필요한 시간을 겨우 다섯 시간까지 줄였다.
웨이헌메어의 정신적인 강인성을 그의 어린 시절의 시련과 연관시키는 것은 쉬운 편이다. 그는 망막을 차츰 파괴시키는 망막 박리증(retinoscheses)이라는 유전적인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에릭이 만 세살 때 이 병을 의사들이 진찰을 통해 알아냈고, 에릭은 그의 나빠진 시력이 꾸준히 악화되리라는 것을 알면서 자랐다. 자신의 손가락이 어떤 손홀드에서 천천히 빠져나감을 느끼는 클라이머와 마찬가지로, 그도 벌어질 일을 process 처리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처음 몇 해 동안의 어린 시기는 어느 정도 정상적인 애들처럼 보냈다. 그가 책을 읽으려면 책에 코를 박다시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 엘런이 주지사에게 정규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주기를 청원했다. 비참하게도, 그의 어머니는 에릭이 만 16세 때 차 사고로 죽었다. 어머니의 상실이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지금까지도 어떤 등반을 할 때든, 그의 모친 장례식이 끝난 후 어느 친구가 그의 할머니에게 준 수호천사 핀(angel pin)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 ‘에드’는 적극적인 사람이었고 (go-getter), 사업가로서도 성공했고, 베트남에서 폭격기를 조종했던 해병 파이로트로 복무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아끼는 “Don't Quit"이라는 시를 인용하기를 좋아했으며, 에릭의 두 형, 마크와 에디와 함께 자전거 타고, 미식축구를 하도록 권하면서, 에릭을 세상 속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에릭은 정상적인 애가 아니었고 7학년이 되자 남들과 다른 점이 심각해졌다. 이제 그의 시력은 거의 사라지고 주변 시력 (peripheral vision) 만이 남았다; 앞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천장을 올려 보아야만 했다. 멀리 있는 물체를 보기 위해서는 단안(單眼) 망원경을 써야 했고 독서를 위해서는 퉁방울 모양으로 생긴 렌즈를 (bubble-lens) 써야 했다. 학교 불량배들이 그에게 “Binden-herimer"니 ”Googly Eyes"라는 별명을 붙였다. 언젠가 그는 창 앞에 서서, 방의 어두움과 그 밝은 사각형을 구별하기 어렵게 될 때까지, 뒷걸음질을 하며 숫자를 세어 보았다. 여덟 걸음.
그의 완전한 시력 상실을 처음으로 챈 것은 그의 할머니였다. 8학년과 9학년 사이의 여름 방학 중 식품점으로 가다가, 에릭이 진열대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할머니의 뒤를 따라가지 못했다. “네가 어떤 도움도 필요 없다는 걸 알지만,” 이라고 마음 상하지 않게, “내 늙은 무릎에 힘이 조금 덜 가게, 네 팔에 좀 기대고 싶구나.”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 다음 학기에 에릭은 그 학교 최초의 장님 학생이 되어 학교 계단을 비틀거리며 올라갔다. 몇 해 동안 그는 일종의 연옥(煉獄), 시각의 세계와 장님의 세계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시력 상실과 싸우기 보다는 그것을 받아 들이면서, 그저 그의 삶을 살아 나가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기 전까지는, 그의 거부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했다. 처음에 그는 집을 나설 때 하얀 “기숙사용” 지팡이를 갖고 다니기를 거부했다. 나중에는 고의적으로 지팡이들을 부서트리기도 하고 하수도 구멍으로 떨어트리곤 했다. 학교에서는, 교실 마다 그를 데려가기 위해 - 이 점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음 - 그에게 배정된 맹인 학생 지도교사인 미쎄스 먼디에게 나쁜 장난을 하곤 했다. 우리가 기억할 점은 에릭이 겨우 만 15 세였다는 점이다; 그 나이 때는 아무 불만이 없는 애들도 툭하면 화를 내고 성깔을 부린다. 그는 이 세상의 미쎄즈 먼디 타입들 그리고 그런 선량한 사람들의 감상적인 친절을 증오했다.
그의 친구들은 데이트도 하고, 차 운전도 배우고, 새로 발견한 온갖 종류의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십대의 고민, 그것이 에릭에게 필요한 진취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한 자유를 그도 간절히 원하기는 했다. 그러나 점자를 배우지 않으면 그런 자유를 도저히 누릴 수 없음을 깨달았고, 하얀 지팡이를 쥐고 자신 있게 걸었고, 맹인들이 세상 속으로 나아갈 자립적인 능력을 갖게 해주는 여러 가지 기술과 방식을 익히게 된다.
그 다음 해 여름 에릭 스스로 눈먼 소년들을 위한 여름 캠프에 가기로 했는데, 그 활동 중의 하나가 등반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루트를 오른 희열 그리고 자신의 코 앞에 있는 로프를 “죽을 힘을 다해” 웅켜 쥐었던 일을 그는 기억하고 있다. 즉시 그는 등반을 사랑하게 되었다.
왜 등반을 하는가? 나는 얼마 동안 웨이헌메어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얼음 등반은 팔다리에 연결된 면도칼처럼 예리한 물건들을 갖고 두툼한 장갑을 끼고 이리 저리 팔다리를 휘두르는 활동이다 (이것은 주로 촉각에 의지하는 사람의 경우다); 그리고 암벽 등반은, 대단히 다양한 분야가 있어, 각 분야 별로 많은 변수가 있으며, 시력 없이는 해내기 어렵게 보이는 퍼즐이다.
“많은 사람들이 ‘등반은 대단히 시각적인 것이야’”라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공이 공중을 날아와 우리의 머리에 맞는 경우도 있는 팀 스포츠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런 것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이죠. 농구는 분명히 ‘해프닝’이 아닙니다. 암벽 등반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은 안정적이고, 정적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우리이고, 가만히 있는 것은 바위입니다. 잘 살핌으로써, 눈으로 하든 손으로 하든 여하튼 조사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표면이라는 게 있죠. 그리고 바위로 올라갈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예측이 가능하고 또 일정한 패턴이 있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몸을 사용하죠.”
웨이헌메어는 등반할 수 있다. 그러나 등반 파트너들의 열린 마음가짐에 신세를 많이 져야 하기도 한다. 특히 그의 능력이 입증되기 이전인 초기에 그러했다. 오해에서 생긴 걱정이라 해도, 눈먼 사람과 로프를 묶고 모험을 하는 것은 상당한 믿음을 요한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샘 브리검이다. 웨이헌메어가 브리검을 만난 것은 이 두 사람이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어느 대학 입학 준비 학교에서 (preparatory school) 선생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였다. (새내기 교사인 와이헨메어가 시력이 정상인 5학년 학생들을 어떻게 콘트롤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이 글에서 제대로 다룰만한 지면 상의 여유가 없는 이야기이다.) 샘은 어려서 '주의력 결핍 장애‘로 겪은 바 있었고, 그 후 안정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직장을 여기 저기로 옮겨야 했다.
“샘은 말하자면 한번 해볼만한 뭔가 큰 일을 찾고 있었죠,”라고 웨이헌메어가 말한다. “그는 그런 것 위에 우뚝 서고 싶어 했어요.”
이 두 사람이 그 지역의 실내 암장에 꾸준하게 다녔고 주말에는 바위를 하러 다녔다. 이런 등반 여행을 하던 중, 언젠가 샘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데날리 올라가고 싶어?”
“그가 미쳤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라고 웨이헌메어가 말한다. 그 당시 그들이 같이 해본 가장 큰 등반이라곤 애리조나 사막의 한 피치 짜리 루트들 뿐이었다. 그러나 브리검의 열의에 지고 말았다. 웨이헌메어가 미국 맹인 협회로부터 그 등반에 대한 지원을 확보했고, 이들이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일이 끝난 후 매일 저녁 - 70 파운드 배낭을 메고 가던 도중에 멈추어 팔굽혀 펴기와 윗몸 일으키기를 하며 - 피닉스 도심에서 가장 높은 50 층짜리 빌딩의 뒤쪽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우리가 데날리를 등반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난 적은 전혀 없었다,”라고 오늘날 브리검이 말한다. “에릭은 마치 황소처럼 강하고....어떤 일에서든 용감하므로 여러 면에서 그는 이상적인 파트너죠. 무엇에서든 제일 나중에 물러나는 사람은 웨이헌메어이고, 가장 먼저 물러나는 것은 나였어요. 트레이닝 하도록 격려해줄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었죠.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웨이헌메어와 브리검은, 콜로라도 출신임 샘의 등반 친구인 제프 에반스 그리고 전문 가이드인 크리스 모리스와 더불어, 1995년 6월 27일 데날리 정상에 이르렀다. 웨이헌메어에게 있어, 폭 60cm, 길이 4 분지 1 마일, 그리고 양쪽으로 수천 피트의 낭떠러지가 있는 정상 능선은 비록 난이도 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그 등반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그 ‘리지’를 건너기앞서, 모리스가 대원을 자기 주위에 모았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라고 그가 말했다. “여기서 한 사람이 떨어지면, 우리 모두가 떨어집니다. 우리 전부가 이 산의 비탈로 끌려 내려가고 맙니다. 그런데, 내 설명이 분명하지않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추락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 능선을 건널 때, 웨이헌메어는 아이스 액스와 트레킹 폴로 그 좁다란 통로의 벼랑 끝을 확인하면서, 옆걸음으로 나아갔다. 정상에서는, 하산 준비를 하며,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계속 같은 질문을 했다. 낭떠러지가 정확히 어디인가, 어디에 또 벼랑이 있는가?
“그가 정말로 겁먹은 것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죠”라고 브리검이 말한다.
17,000 피트에 있는 ‘하이 캠프’에 돌아왔을 때, 웨이헌메어는 너무나도 몸과 마음이 지쳐서 그가 저녁 식사로 먹었던 냉동 건조 스파게티 전량을 그 '이글루‘의 입구 한가운데에 토하고 말았다. “우엑... 미안해,” 라고 중얼거리며.
“괜찮아,” 라고 그의 어깨를 만지며 모리스가 말했다.
에릭은 데날리에서 새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는 엘 캡에서 브리검 뿐 아니라 에반스와 한 팀을 이루었고, 남극 대륙의 마운트 빈손에서는 모리스와, 그리고 아콩카과와 에베레스테에서는 에반스 그리고 모리스와 팀을 이루었다.
또한 “수퍼 블라인드” 라는 새 별명도 얻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별명이 안경 없이는 안 보인다고 주장하는 근시를 가진 보통 클라이머들과 그를 구별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파트너들은 애정의 표시로, 클라이머로서의 그를 존경하는 표시로, 그 별명을 썼다.
바람이 에베레스트의 ‘사우스 콜’을 때렸다. 파도처럼 굽이치는 거대한 돌풍이 몰려오는 소리를 웨이헌메어가 들었다. 바람이 텐트를 강타하자, 마치 눈에 안 보이는 거인이 텐트 설치한 곳에서 텐트를 강제로 뽑아내어 ‘웨스턴 쿰’으로 던져 버리려는 것 같았다.
에베레스트의 쿰부 아이스 폴에서. 제프 에반스,웨이헌 메어, 셔만 불.
어떤 사람이 텐트 문의 지퍼를 열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부터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스카투로와 브랫 불이 나중에 웨이헌메어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그 전날 정상을 향해 떠났던 다른 원정대 대원이었다. 그 사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쳤고 약간 혼미 상태였다. 그가 에릭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산소 마스크와 그의 다운 재킷후드(hood)로 얼굴이 덮인 채, 웨이헌메어가 그 텐트 뒤편에 앉아 있었다.
“정말로 길고 끔찍한 날이야”라고 그가 말했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어. 그러나 정말 당신이 부럽지는 않아. 그 눈먼 친구를 거기까지 데려가는 동안 지옥 같은 시간을 갖게 될 걸.”
몇 시간 후, 오후 8시 45분에, 그 N.F.B 팀이 정상을 향해 떠났다. 웨이헌메어는 선등을 맡은 크리스 모리스와 팀을 이루었다. 모리스는 아이스 액스를 바위에 탕탕 두들기는 소리를 냄으로써 에릭이 그 소리를 듣고 따라오게 했다. 두 사람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35도 각도의 설사면 위로 힘들게 올라갔고, 부서지기 쉬운 바위가 띠를 이룬 곳을 기어올랐다.
“우리는 기분이 좋았다; 엄청 굳세게 나아가고 있었죠,”라고 오늘날 웨이헌메어가 말한다. “내가 이제까지 산에서 지낸 것 중, 가장 최고에 속하는 날을 - 아니, 이 경우에는 밤을 - 보내고 있었다.”
밤중 내내 불길한 번개가 수평선을 밝게 비추었다. 오전 2시가 되자, 힘이 최고조에 달한 폭풍이 몰려왔다. 번개가 바로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바람이 너무나도 강하게 채찍질 하듯 눈을 위로 날려서 모리스는 자기 발도 볼 수 없었다; 그 화이트아웃 속에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고, 겨우 몇 피트 거리 이내의 클라이머들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선뿐이었다. 이 팀이 정상까지 반 정도 남은 곳에 있는 차고 정도 크기의 플랫폼(platform)인 ‘발코니’에 (the Balcony) 모였고, 과연 등반을 할 것이냐 아니면 하산을 할 것이냐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 대신에 그들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45분 후 웨이헌메어가 하산이 불가피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려가야 하는 날씨였다”고 오늘날 그가 말한다. “그런 식의 폭풍은 잠잠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죠.”
“여러분, 아직 중단하지 말아요,” 라고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동료 대원 케빈이 무선을 통해 갈라지는 목소리를 말했다. “일기 예보에서 폭풍이 북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답니다. 5분 전 만 해도 여기를 맹렬하게 공격했었는데, 지금은 개었어요.”
“여기도 날이 개고 있어요,‘ 잠시 후 캠프 2의 카미 셀파도 보고를 해왔다.
모리스가 와이헨메어를 흘깃 쳐다보니, 그의 어깨 너머로 티벳 위에 떠있는 단 하나의 밝은 별을 보게 된다.
동틀 때쯤 클라이머들은 맑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사우스 서미트’에서 제프 에반스가 - 데날리를 같이 등정한 이후 늘상 웨이헌메어와 같이 등반한 파트너들 중의 한명임 -자신이 탈진 상태이며 하산해야 한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웨이헌메어의 사기가 꺾였다. 그러나 28,700 피트에서는 남자의 뱃장을 논할 장소가 아님을 인식하고, 정상으로 나아가자고 친구에게 조르고자 하는 유혹을 참았으며, 에반스가 정신이 말짱하고 자기 자신을 돌볼 능력이 있음을 거듭 확인한 후, 안전하게 하산하라고 인사했다.
모리스의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버렸다. 그래서 웨이헌메어는 루이스 베니네즈라는 다른 대원과 파트너를 이루었다. ‘사우스 서미트’에서부터는 탁자 정도 넓이의 능선을 건너야만 했다. 이 능선의 한쪽에는 8000 피트 아래에 네팔이 있고 다른 쪽 밑으로 12,000 피트에는 티베트였다. 웨이헌메어는 정신을 극도로 집중하면서, 데날리의 ‘서미트 리지’에서 했듯이, 지형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아이스 액스와 트레킹 폴을 사용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씩 움직였다. 수직 30 피트의 ‘힐라리 스텝’에서, 고정 라인의 상태가 형편없다는 말을 듣고, 웨이헌메어는 마치 딱딱한 줄(cord)처럼 느껴지는 로프에 그의 주마(jumar)를 걸고, 반은 등반하면서, 그리고 반은 잡아 당기면서, 정상으로 올라갔다.
웨이헌메어 보다 하루 앞서 등정한 낸시 피긴이 말하기를, “그 록 밴드를 등반하면서, 이곳을 에릭에게는 훨씬 더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작은 턱들 위에 나는 내 크램폰 포인트들을 올려놓을 수 있지만, 그는 (눈으로 보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할 텐테! 그러니 훨씬 더 많은 힘을 비축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정상 밑의 마지막 설사면은 영겁의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웨이헌메어는 그가 마치 조청 속을 molass 를 허우적 거리며 나아가는 것처럼 느꼈다: 다섯 번 숨쉬고, 한 걸음; 다섯 번 숨쉬고, 한 걸음. “도대체 얼마나 더 이렇게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그의 어깨 위에 누군가의 손이 닿음을 느꼈고 누군가 그를 강하게 껴안았다.
“이제 네가 이 세상 꼭대기, Big E 위에 서게 되었어!”라고 하산 중인 모리스가 말했다. 그런 후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그의 엉망이 된 목소리가 눈물로 바뀌었다.
베니테즈와 웨이헌메어가 함께 앞으로 나섰고 경사가 점차 완만해지더니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되었다. kick back 했다. 웨이헌메어는 티벳의 기도용 깃발의 펄럭임과 온 사방의 툭 트임을, 즉, 소리 그 자체가 공간을 통해 무한히 뻗어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곤 또 어떤 손이 어깨에 올려짐을 느꼈다. 믿을 수 없게도, 그건 에반스였다. 사우스 서미트 너머의 나이프 에지 능선을 트래버스하는 웨이헌메어를 보자 후퇴하겠다는 마음을 바꾸고 따라 잡기 위해 서둘러 올라 온 에반스였다.
수평선 위로 구름이 끓어올랐다. 또 다른 폭풍이 북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자, 여러분들 지금 내려와야 합니다!” 라고 스카투로가 무선으로 말했다.
웨이헌메어가 떠나기 위해 돌아서려고 할 때까지 그가 정상에서 보낸 시간은 겨우 몇 분 정도 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에반스가 자신의 친구를 멈추게 하고 조금만 더 머물자고 설득했다. “Big E, 잠간만 기다려,” 라고 그가 말했다. “여기 있는 건 평생에 딱 한번이야. 주위를 둘러봐. 우리가 어디 있으며 무엇을 해냈는지를 생각하자.”
에릭과 (중앙) 아버지 에드, 형 에드 주니어와 함께 에베레스트에서. |
우리는 ‘레게’ 루트의 밑에서 장비를 배낭에 챙겨 넣고 있었는데, 그의 에베레스트 등반에 관한 다른 어떤 반응들에 대해 언급했다. 바닥을 더듬어 장비를 찾고 배낭에 장비를 넣으면서, “로라 쉴레징거 박사는 그 산을 오르려고 내 집사람과 어린 딸을 남겨두고 가는 것에 대해 비난했죠,” 라고 그가 말한다, “재미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상 채팅 룸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웨이헌메어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시력이 정상인 19 명의 가이드가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정상까지 로프로 끌어 올려 줄 수 있으니까.”라고 했다.
미국 맹인 협회 원정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상, 이제까지 있었던 에베레스트 원정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 19 명이라는 기록적인 대원이 2001년 5월 25일 정상에 도착했는데, 그 중에는 만 64세인 셔먼 불이라는 사람도 포함되었으며, 아들인 브랫과 함께 등정함으로써, 이 산을 오른 최고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에베레스트가 맹인이 갈 곳이 못된다는 생각을 반증하지 못했다. 이 원정대는 좋은 날씨를 만났다. 살인적인 폭풍도 닥쳐오지 않았다. 클라이머들의 한계가 시험되지는 않았었다.
그것은 웨이헌메어가 이길 수 없는 하나의 순환 논리이다. “그래서 아마 크리스가 내게 해준 말이 가장 최선의 반응일 것 같습니다; 각자 자기 일이나 신경 쓰는 게 옳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저 ‘그를 위해 잘 된 일이지’라는 말만 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에베레스트 등반은 안전하지 않다. 아무리 시력이 좋다 하드라도 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장수를 위해 좋은 일이기 때문에 그 산을 등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방정식의 다른 측면, 즉, 그 모든 위험 부담에 대한 보상은 어떨까?
웨이헌메어가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오자 학교에서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200 개나 받았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이 해주려고 노력한다). 몇 달 동안 그는 하루에 백여 통 이상의 이메일을 받았는데, 특히 시력 상실을 체념하려고 애쓰는 애들로부터 온 것이 많았다. 어느 NFB 행사에서, “용기있는 리더쉽과 뛰어난 봉사 활동을 인정하여” 이 미국 맹인 협회의 최고상인 Newel Perry Award(어느 맹인 사회 활동가의 이름을 딴 상임)를 받았다. 오천 명의 맹인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웨이헌메어는 상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 등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하는 것이 눈 먼 사람들과 잘 보는 사람 모두를 위해 하나의 긍정적인 사례가 됨을 알고 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다고 나도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가 배낭을 어깨에 맨다. “눈먼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등반했습니다. 거기까지 가는데 사람들이 끌어올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속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고정 관념에 덜 빠지게 하므로 기회를 창조한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브 펙은 클라이밍 지의 수석 기고 편집자다. 이 기사를 쓴 후, 라이플 마운틴 파크에서 와이헨메어와 빙벽 등반을 했고, 금년 여름에 같이 암벽 등반을 할 계획을 했다.
shlee 抄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