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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 1145년(고려 인종 23) 김부식 등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 역사책이다.
현존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삼국사기 속지 모습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本紀)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삼국(신라·고구려·백제)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이다.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 궁내청(宮內廳)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金居斗)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逸失)되었다.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 임신본(中宗壬申本), 정덕 임신본(正德壬申本)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李炳翼)과 옥산서원(玉山書院, 안강)에서 소장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이 목판은 이 당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으로 추정되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그 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나타나나, 전본(傳本)이 없어 그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 이온문(李溫文), 허홍재(許洪材), 서안정(徐安貞), 박동계(朴東桂), 이황중(李黃中), 최우보(崔祐甫), 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編纂)되었다.
이들 10인의 편수관(編修官)들은 대개 김부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의가 내시(內侍), 간관(諫官, 諫議大夫·起居注)출신이었으며 김부식도 대간(臺諫)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현실비판의 자세가 삼국사기 편찬에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이들 편찬자가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郎世記), 계림잡전(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위서(魏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 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외의 실질적인 편찬 작업은 10명의 편수관이 수행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국사 편찬은 왕권강화의 기념적 사업인 동시에, 당시의 정치·문화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編纂)도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정치상황 위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때는 이미 고려 건국 후 200여 년이 흘렀고, 고려의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가 안정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다음으로,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契丹) 격퇴 이후 국가적 자신감과 여진(女眞)의 위협에 따른 강렬한 국가 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의 재 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民族意識)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지나친 사대주의 입장이라는 인식은 지양(止揚)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당시 고려사회는 문벌귀족 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특히, 김부식 가문과 윤관(尹瓘)집안의 대립, 김부식과 이자겸(李資謙)의 충돌 등 문벌가문 간의 격심한 갈등이 겹쳐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비리가 쌓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열과 갈등이 국가멸망의 원인임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고 후세에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역사 편찬은 불가피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를 통하여 그 편찬 동기와 목적 및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신하·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본기(本紀)·지(志)·표(表)·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本紀)
중국사서는 열전(列傳)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는 본기가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본기는 신라 12권(통일신라 7권 포함), 고구려 10권, 그리고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신라에 편중되어 있지 않다.
원래 본기는 주요 사실의 기록으로서 주로 왕의 치적(治積)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본기 내용을 정리하면 정치·천재지변·전쟁·외교 등 4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들이 시대에 따라 각기 일정한 비율로 증감되고 있다.
정치기사는 본기 중에서 가장 큰 부분으로서,
① 축성(築城)·설책(設柵)·수궁실(修宮室) 등 대규모 인력 동원에 대한 기록,
② 민심수람과 국민의 결속을 강행하려는 순행(巡幸)의 기사,
③ 관리의 임면(任免)이나 관청의 설치에 관한 기록,
④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와 풍흉에 따른 종교적 관례에 관한 기사,
⑤ 기타의 내용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정치기사의 내용은 삼국(三國)의 사회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축성과 궁궐 조성 기록은 백제가 가장 많아 일찍부터 대외전쟁에 시달렸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신라는 관리의 임면기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순조로운 왕권 성장과정을 엿볼 수 있다.
둘째의 순행기사는 135회의 기록(신라 52회, 고구려 47회, 백제 36회)이 있으나 삼국의 양상은 각기 달랐다.
즉, 신라는 구휼과 군사상 필요를 비롯하여 권농·영토 확인·수렵·구인(인재등용) 등을 목적으로 하는 순행이 많았고, 백제·고구려에서는
주로 수렵(군사훈련)이 목적이 되었다.
그 외에도 순행은 제사·구인·독려·지세파악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출행시기(出行時期)가 천재지변과는 큰 관
계가 없는 1·2월에 집중되고 있으며, 백제·고구려는 1∼3세기에, 신라는 9세기에 빈번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가
지고 있다.
즉, 왕권이 약할 때 왕이 지방출장을 많이 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셋째의 관리임면 기록은 태자·왕비의 책봉이나 관리의 임명 등으로,
왕권의 구체적 행사를 표시한다. 신라에서 제일 큰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의 종교적 기능에 관한 기록은 시조·종묘에 대한 제사, 풍
요의 기원 및 재난예방에 대한 기원을 내용으로 하며, 백제가 가장 빈번히 나타난다.
천재지변기사는 930여 회의 자연변이의 기록이다. 이는 600여 회의 천재와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상응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반하고 있다. 천재에는 혜성· 5성· 유성· 일식 등으로 대표되는 천변(天變)과 가뭄· 홍수· 벼락 등의 천재가 있으며, 지변에는 지진· 화
재· 동물변이· 수변(樹變)· 인변 등이 있다.
이러한 천재지변 중에서도 혜성·일식·지진·가뭄·용 등은 큰 영향을 주는 구징(咎徵)으로서, 특정 사건에 대한 예고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들은 사망·전쟁·모반 등을 예언하는 것으로 천재와 지변은 상호 연관성이 있어 그에 대응하는 대책이 요구되었다.
한편 정확한 천재지변의 기록은 고대과학의 발달을 가져와 일식(14.8년)·가뭄(9.2년)·지진(10.3년)등의 주기 산출이 가능하게 되었
다. 전쟁기사는 삼국이 존속한 10세기 동안에 일어난 28개국과의 440여 회에 걸친 전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은 삼국 간에 일어난 경우와 외국과의 싸움으로 구별되는데, 고구려는 대외 전을 주도하였고, 백제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시
련을 받았다. 그러므로 백제는 국가 발전이 둔화되었고, 고구려는 백제·신라와의 싸움을 적게 치렀기 때문에 중국과의 항쟁을 주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끝으로 외교기사는 연 34개국과 620여 회의 교섭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외교 기록은 거의가 조공(朝貢)으로 대표되는 한중 관계
가 중심이 되지만, 중국 측에서 온 기록도 상당히 많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외교는 정치적 안정과 짝한다는 사실로서, 장수왕과 후
위(後魏), 성덕왕과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공이 중화사상의 표시라고 하여도 결코 종속관계는 아니었고, 삼국의 자아의식은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외교관계 기록에는
조공(朝貢)이라는 광의의 개념 속에는 진하(進賀)·사은(謝恩)·인질(人質)·구법(求法)·숙위(宿衛)·숙위학생 등 다양한 외교사절과, 책
봉(冊封)·조위(弔慰)·책망(責望) 등 중국 측 사절도 포함되었다.
외교기사에서 특기할 사실은 16명의 숙위와 10여 명의 숙위학생들에 관한 것으로서, 이들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독특한 외교적 존재
였다.
●지(志)
삼국사기에는 잡지(雜志)라 하였으나, 그 내용은 지이다. 제1권은 제사(祭祀)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
사(屋舍), 제3∼6권은 지리지이다. 그리고 제7∼9권은 직관지(職官志)인데, 중앙관부(7권), 궁정관부(8권), 무관과 외직(9권)으로 되
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제도의 해설에 치중하였고, 특히 지리지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오행지에 중심을 둔 한서(漢書)나 예악지
에 중점을 둔 당서(唐書)와 다른 점이다. 우선, 제사지는 5묘(廟)·3사(祀)의 설명이 중심이 되며, 악지는 악기·가악(歌樂)·무(舞)·악공
(樂工)의 순서로 되어 있다.
복색조·기용조·옥사조에 나타난 금지 조항은 전 국민을 하나의 법규 속에 묶어 국민의 의미를 제시한 것이며, 4두품과 평민에 대한 동일
한 대우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지리지가 큰 비중으로 취급된 것은 일종의 영토의식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직관지에서는 중앙행정관
부에 있어서 14관부와 19전(典, 7寺成典 포함)을 균형 있게 배려하고 있으며 궁정관부가 110여 개가 넘는 것으로 보아, 강력한 왕권
유지의 제도적 뒷받침을 엿보게 한다.
●표(表)
표는 박혁거세 즉위년(서기전 57)부터 경순왕 9년(935)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중국문헌의 연표에 재상표(宰相表)·종실표(宗室表)·방진표(方鎭表)가 있는 경우와 대조할 때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간소하다.
●열전(列傳)
열전 10권은 중국 문헌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인물 기준도 항목별(名臣·循吏·酷吏·儒林·叛逆 등)로 된 것도 아니고,
왕후·공주 열전도 없다. 특히, 10권의 열전 중에서 김유신(金庾信) 개인 열전이 3권을 차지하며, 나머지 68인의 열전을 7권에 포함시키
고 있다.
특히, 7세기에 활약한 인물이 34인,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21인이나 되어,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인물 나열이 핵심이 된다.
제1∼3권은 김유신 전으로, 선조(武力^舒玄)와 후손(三光·允中·巖)의 업적을 강조하였고, 제4권은 을지문덕(乙支文德)·거칠부(居
柒夫)·이사부(異斯夫)·김인문(金仁問)·김양(金陽)·흑치상지(黑齒常之)·장보고(張保皐)·사다함(斯多含)의 전기이다.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후직(后稷)·밀우(密友)·박제상(朴堤上)·귀산(貴山)·온달(溫達) 등 10인의 전기이다. 제6권은 강수(强首)·최
치원·설총(薛聰)·김대문 등 학자의 열전이다. 특히, 최치원의 마한고구려설이나 백제의 해외 진출에 대한 견해는 설총의 화왕계(花王戒)
와 함께 대표적인 내용이다. 제7권은 해론(奚論)·관창(官昌)·계백(階伯) 등 19인의 전기이다.
여기에서는 찬덕(讚德)과 해론, 심나(沈那)와 소나(素那), 반굴(盤屈)과 영윤(令胤), 비령자(丕寧子)와 거진(擧眞) 등 부자가 순국한 충의열사의 기록이 중심이 된다. 제8권은 향덕(向德)·성각(聖覺)·김생(金生)·솔거(率居)·도미(都彌) 등 11인의 전기이다.
특히, 효(향덕·성각)·충의(劒君)·기예(김생·솔거·百結)·열녀(薛氏女·도미)·효녀(知恩) 등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제9권은 창조리(創
助利)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열전으로서, 왕을 시해한 반신(叛臣)의 기록이다. 제10권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열전으로, 결국
나라를 망친 역신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논찬이다. 논찬이란 역사 서술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 사론(史論)을 말하는 바, 삼국사기에는 논
과 찬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논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에 10측, 고구려본기에 7측, 백제본기에 6측, 열전에 8측 등 모두 31
측의 논찬이 있다.
내용은 예법준칙,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이 중심이 되지만, 그러한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견지
하면서도 우리 현실과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 그것은 내물왕의 동성취처(同姓娶妻)나 혁거세의 왕후 동반순행
을 옹호한 점, 신라 3보(寶)와 할고지효(割股之孝)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한 곳 등에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는 신채호(申采浩) 이후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유교 중심의 사대적인 개악서(改惡書)는 아니었다. 12세기의 시대정신
과 사회상을 고려할 때, 당시의 중국 중심의 풍조 속에서도 우리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학이 가지고 있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적 서술 자세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특히, 정부 주도하의 관찬(官撰)이라는 역사 편찬의 본을 정착시켜 조선 초의 역사 서술, 특히 고려사 편찬에 기여함으로써 전통 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첫째, 이 책은 처음부터 삼국을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았으며, 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파악하였다. 말하자면 1세기부터 삼국이 국가로 성
장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므로, 태조왕·고이왕·내물왕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보지 않았으며, 발전사관에 의해 역사 변천을 파악하여 신
라·고려의 교체(交替)를 당위성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역사 내용을 하늘과 땅 사이의 관념적 사고를 통하여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은 하늘의 변화(天災地變)와 인간의 활동
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역사 내용을 추출시켰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왕의 정치 행위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셋째, 이 책은 역사를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에 편찬 당시의 현실 비판을 특정한 과거의 사실인 백제·고구려 부흥운동의 내분과 결부시켜 지
도층의 분열과 학민자(虐民者)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김부식은 묘청(妙淸)일파의 패배나 견훤·궁예의 멸
망을 통일을 파괴하는 분열 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역사를 국민 교화와 계몽의 수
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넷째, 이 책은 강렬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사대성에 대한 반론으로서 우리나라 현실과 독자
성을 강조한 김부식의 사론에서 엿볼 수 있다. 끝으로, 이 책은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영웅주의 사관이 아니라, 고대사회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함은 물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공적인 윤리를 제시
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희생하는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가치는 그것이 지니는 사료로서의 의미와 그 속
에 반영된 역사의식의 객관성과 자아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전 자료의 인용이나 기타 자료의 내용으로 보아 광범한 자료 인용의 원칙 속에서 피휘법(避諱法, 문장에 先王의 이름자나 중국의
연호자, 聖人이나 선조들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 공란으로 두거나 또는 획의 일부를 생략하거
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이나 결필법(缺筆法, 避諱法에서 피해야 할 글자의 마지막 한 획을 긋지 않는 방법)을 적절
히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전거에서 분주(分註) 문제와 고기(古記), 그리고 구삼국사기의 관련 속에서 이 책의
사서로서의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구성체제와 서술방식
삼국사기의 서술방식은 신당서(新唐書)를 모방하였다. 기(紀)·전(傳)·표(表)·지(志)로 편성하여, 28권의 본기, 3권의 연표, 9권의 지,
10권의 열전으로 되어 있다. 본기는 신라본기 12권, 고구려본기 10권, 백제본기 6권으로 구성되었다.
본기에서는 서두에 왕과 왕비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후 1년 단위의 정치 업적, 자연재해, 자연현상, 중요 관리의 임면 기사, 전쟁기사, 외
국과의 사신파견 등을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자연변이는 인간의 활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실었던 듯하다.
그리고 1년 단위의 기술에서는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중국식 역사 서술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삼국의 본기에서는 삼
국간에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의 참혹함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과연 국가의 목적으로 자행될 때 일반 백성에게 주는 피해는 얼마
나 될 것인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부실하다.
연표에서는 삼국의 연표를 중국의 연표와 대비하여 만들었는데, 삼국의 본기가 모두 각 왕의 재위년도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연표가 없이
는 절대연대의 파악이 불가능하다. 지는 통치제도 등을 분야별로 기술한 것이다. 지를 잡지(雜志)라 명명한 것은 지에 서술할 자료가 많
지 않으므로 한 권의 지에 여러 분야를 합쳐서 기술했기 때문이다.
제사, 음악, 복식, 수레, 집에 대한 지 2권, 지리지 4권, 직관지 3권으로 되어 있다. 잡지에서는 삼국의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였으나 고구
려와 백제측의 자료는 본기 외에는 별도로 전하는 자료가 없어 중국측의 자료를 인용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열전은 왕의 통치를 보필한 신하에 대한 전기로서 삼국의 신하들을 분야별로 합쳐 기술하였다. 열전에는 명확한 구분은 없었지만 내용을
분석해보면 분류별로 기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신, 유학자, 화랑, 효자, 예술가, 반역 등의 열전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직접 쓴 사론 31편이 실려 있는데, 이는 일반 기록과는 달리 자신의 견해를 표현한 것이다. 이 사론은 그
의 역사관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그는 삼국을 각각 아국(我國)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삼국 모두를 고려의 전신으로 인식했
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강역 태반을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만약 고구려를
본기로 다룬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고구려 역사가 현재 한국사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삼국유사와 어떤 점이 다를까?
삼국사기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서술된 총체적인 역사서다. 또 김부식은 문헌존중주의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
는 삼국사기를 전제하고 쓰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가 삼국의 흥망에 관한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고조선시대로부터 삼국시대 말까지의 국가를 다뤘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김부식의 합리적인 역사관과 일연의 연기설 중심의 불교사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연은 설화를 자료로 취했기 때문에 역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김부식이 다루지 않았던 불교적 신앙과 고승의 이야기, 사찰, 불상, 석탑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유교적 관점에서는 배제되었던 당시
의 불교적 전통을 생생하게 기술하였다.
김부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역사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일연은 역사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은 힘을 강조하였다. 이를 신이
사관(神異史觀)으로 칭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김부식의 합리사관에 반발하여 인연설에 기초한 불교사관을 적용한 것이라
고 해석하는 편이 옳다고 본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대의 일화를 그대로 전해줌으로써, 한국의 고대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전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는 불교의 신앙사
라는 점에서 삼국사기와 크게 다르다. 그러나 단순한 신앙사가 아니라 삼국사기에서 제외된 신라의 각 왕들에 대한 설화를 많이 전하고
있어 삼국사기를 보충하는 역사서다.
삼국유사를 민족지(民族誌)의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見解)가 있다.
삼국시대 향가(鄕歌)에 대한 기록 등 아주 소중한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빼놓고 삼국유사만으로는 한국의 역사를 복
원할 수 없다.
한국의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 두 역사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성격을 전해주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두 고전의 이러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새롭게 해석할 때에야 앞으로 우리의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
다.
●기전체(紀傳體)
단순한 연대순의 서술이 아니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각 시대의 주요한 신하와 인물의 전기, 제도와 문물, 경제실태, 자연현상 등을 분류하
여 서술하여 시대의 특징과 변동을 유기적이고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각 시대에서 활동한 인간의 삶에 대
해서도 좀 더 생생하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기전체(紀傳體)는 왕조 전체의 체제와 변동을 서술하기 위한 정사(正史)의 기본
서술 체재로 자리 잡았으며, 그 때문에 정사체(正史體)라고도 한다.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에 임명된 벼슬에 감수국사(監脩國
史)가 있어 이 무렵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고, 김부식이 정계에서 은퇴한 1142년에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가 완성된 시기는 1145년(인종 23년)이다.
◇구성 : 기전체로 작성되었다.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는 신라본기 12권(1~12권), 고구려본기 10권(13~22권), 백제본기 6권(23~28권)으로 편년체로 서술하였으며, 총 28권이다.
연표는 중국 역대 왕조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국의 왕계를 표로 작성하였으며, 총 3권(29~31권)으로 구성되었다. 지(志)는 잡지로서 삼
국의 제도, 문화, 지리 등을 분야별로 서술한 것으로 총 9권(32~40권)이다. 1권은 제사(祭祀), 악(樂), 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3~6권은 지리(地理), 7~9권은 직관(職官)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기의 상태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다. 열전은 인물의 전기로 총 69명이 수록되어 있다. 1~3권이 김유신 열전
으로 가장 분량이 많으며, 나머지 7권에는 삼국의 충효·화랑·문인(文人)·반역인(叛逆人)과 관련 인물 등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내용 : 삼국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구성하였다.
기전체에서 본기는 정통성을 가진 중심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며, 이와 상반되는 부분으로 세가(世家)와 열전이 있다.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으로, 중국에 대해서 제후국으로 자처했던 조선 때 편찬된 고려사는 각 왕대의 역사를 세가로 구성하
였던 것과 비교된다. 이는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로 비판받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삼국은 모두 대등하게 다루어졌다.
삼국 모두 각각의 본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국의 본기에서는 해당 국가를 我(우리)라고 칭하며 나머지 2개 나라 및 기타 나라는 타국으로
다루었다. 삼국을 제외한 부여, 가야, 발해 등의 역사는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 이는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를 표방하고 있으며, 단대사
(單代史)임을 명백하게 밝힌 점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잡지는 삼국의 제도, 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이 신라의 기록이며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매
우 소략하다. 지리지와 직관지가 가장 분량이 많다. 특히 지리지는 총 4권으로, 앞의 3권은 신라의 지리로서 통일신라의 9주를 다루고 있
다.
각권마다 3개 주씩 총 9주의 연혁을 다루고 있는데, 1권은 신라, 2권은 고구려, 3권은 백제의 영역에 해당하는 주로 구성하였다.
4권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였는데, 앞의 세 권의 연혁에 등장하지 않았거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지명도 다루고 있다.
열전에는 김유신을 비롯한 69명의 전기를 실었다. 특정한 편명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각 권별로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3권은 김유신 열전, 4~5권은 무장 및 명신들의 열전, 6권은 학자 열전, 7권은 순국열사 열전, 8권은 효자 및 열녀 등 일반인
열전, 9권은 반신(叛臣) 열전, 10권은 역신(逆臣) 열전으로 볼 수 있다. 단, 중국의 정사에서 흔히 보이는 왕실 종친이나 후비 등의 열전
은 수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사들과 별도로 총 31편의 사론(史論), 일부 항목의 서문(序文), 기타 주석이 실려 있다. 특히 사론
은 김부식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평가를 내린 것으로서 이를 통해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본기에 23편, 열전에 8편의 사
론이 실려 있으며 이 사론은 성격에 따라 포폄적(褒貶的) 사론과 역사학적 사론으로 나눌 수 있다.
포폄(褒貶)적 사론은 역사적 사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것으로 전체 분량의 2/3 가량을 차지한다. 포폄적 사론을 통해서 역사를 비판적 안
목으로 바라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학적 사론은 사실의 규명이나 출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삼국사기를 저술하는 데 있어서 필요
한 원칙, 서술한 이유, 역사적 사건의 원인 및 결과, 사료의 부족, 역사의 해석 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사기는 고기, 해동고기, 삼한고기, 본국고기, 신라고기 등의 이름으로 한국의 고유 기록을 제1차 사료로 삼았으며, 중국 사료와 한국
의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는 한국 사료를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고조선,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등의 역사는 빠져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
가 먼저 출간된 구삼국사를 보다 간결하게 다듬은 형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의 관계는 구당서와 신당서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나 구삼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알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삼국사기를 약칭하여 삼국사(三國史)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삼국사기도 표지에는 삼국사라고 적혀 있다.
고려 시대의 간행본은 없어지고, 조선 시대에 와서 1393년부터 1394년 사이(태조 2~3년)에 진의귀·김거두가 고쳐 펴냈고, 1512년(중
종 7)에 이계복이 다시 고쳤다. 이후 목판 또는 활자로 수차 간행되었다.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
며, 이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편찬 등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사기를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점, 백제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고조선을 비롯한 가야(伽倻), 동예(東濊), 옥저(沃沮), 삼한(三
韓), 발해(渤海) 등의 역사가 빠져 있다는 점, 사대주의적이라는 점, 농민 및 피 지배층에 대한 서술이 없다는 점, 불교 및 전통사상을 기
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비판이 있다.
삼국사기는 초기 기록의 신뢰(信賴) 여부 때문에 학자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초기 기록을 신뢰하는 학자는 서강대를 중심으로 이종욱이
대표적이며, 풍납토성의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 결과가 삼국사기와 일치한다는 점과 초기 기록을 거부하는 것은 식민 사학에서 유래되
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이와는 반대로 신뢰하지 않는 학자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東夷傳)을 신뢰한다.
이는 무덤의 형태가 일치한다는 점과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후에야 중앙집권화의 흔적이 보이는 유물이 보인다는 점, 그리고 심지어
한반도 남부에 나타났던 편두(扁頭, 머리를 납작하게 만든 편두 문화)문화까지 상세히 기록된 점을 들어 삼국사기 초기의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항목 | 비판 | 반론 |
신 라 위 주 의 서 술 | 신라에 편중된 내용, 고구려·백제의 기록 부족 등을 근거로 비판한다. 후삼국시대를 삼국의 재건이 아닌 신라에 대한 반란으로 기록하였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사실과 관련지어 삼국사기가 신라계 문벌귀족의 신라계승의식 표출이라고 보기도 한다. | 당시 사료의 한계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본다.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한지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사료가 망실되었으나 신라는 고려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인계하였기 때문에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를 제외하면 오히려 고구려 본기가 신라 본기보다 분량이 더 많고, 신라 계승의식보다는 삼국 모두를 계승했다는 삼한일통 의식이 더 잘 나타나있다. |
사 대 주 의 적 사 서 | 신채호의 조선 역사상 1,000년래 제1대 사건(묘청의 난)에서 시작된 비판으로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을 자주와 사대의 대립으로 보아 개경파의 김부식이 승리함으로써 사대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에 대해서도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라고 혹평하였다. | 삼국의 역사가 중국 기전체에서 황제의 기록에 사용되는 본기로 기록되었고 황제를 칭하는 폐하(陛下)나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뜻하는 표(表)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사대가 현실적인 수준이다. |
불교․전통사상의 삭제 | 삼국유사, 동명왕편 등과 비교를 통해볼 때 삭제되거나 고쳐진 부분이 많다. | 김부식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에 따라 삭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실을 싣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받을 수는 없다. |
현존하는 판본 중 중요한 것으로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보물 제722호 : 권44∼50 1책(목판본).
13세기 후기에 인간된 것으로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되어 있어 성암본이라고 통칭한다. 이 책은 현존 삼국사기 가운
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판에서 찍어낸 후쇄본(後刷本)이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
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듯한데,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
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상태가 좋지 않고 잔존본이기는 하나 이것으로 중종조 간본(刊本)의 오류와 탈락된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2. 보물 제723호 : 50권 9책(목판본).
1512년(중종 7)에 간행된 삼국사기 완질본이다.
명나라 무종(武宗), 즉 정덕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판각된 보물 제525호와 동일한 판본으로 보인
다. 이계복이 중종 7년에 쓴 발문에 의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경주부(慶州府)에만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마멸되
어 1행에 겨우 4, 5자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이므로, 경주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부임한 자신이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주(權輳)
로부터 완본(完本)을 구하고 경상도 감사 안당(安瑭) 및 도사(都事) 박전(朴佺)과 의논하여 여러 읍에 나누어 새기게 한 다음 경주부에
돌려받았다 한다.
이 발문은 삼국유사에만 붙어 있으나, 여기에 삼국사기가 언급되어 있고 판본 또한 이 무렵의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간행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 판본에는 3종의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는데, 고려의 원각판(原刻板)으로 여겨지는 것과 1394년(태조 3)에 새긴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다.
권14 제1장 하반부와 권26 제2∼9장 하단의 일부분이 파손되어 본문이 결실되어 있고, 어떤 것은 새김을 생략한 것도 있다. 그러나 현
재 알려진 중종조 간본 가운데 완질본으로 인쇄가 가장 선명하다. 1931년 고전간행회(古典刊行會)에서 이를 간행하였으며 1984년 성
암고서 박물관에서 영인하여 증수보주(增修補註)하여 학계에 제공하였다. 서울의 이병익이 소장하고 있다.
3. 보물 제525호 : 50권 9책(목판본)으로 1573년(선조 6)에 찍어낸 것이다.
명(明)나라 무종, 즉 정덕 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고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간행된 보물 제723호와 동일한 판본인데, 권수
부분에 모필로 쓴 만력원년월일옥산서당(萬曆元年月日玉山書院上)이라는 기록이 있어 1573년 경주부에서 찍어내어 옥산서원에 보
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완질본(完帙本)의 삼국사기이나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다. 보물 제723호가 발견되기 전에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三國史記) 완
질본이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삼국사기(三國史記)|작성자 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