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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李鎰)
[생졸년] 1538년(중종 33)∼1601년(선조 34).
조선 중기에, 지중추부사, 비변사당상, 훈련원지사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重卿). 1558년(명종 13) 무과에 급제해 경성판관 등을 거쳐 1583년(선조 16) 전라좌수사 · 경원부사를 지냈다.
1587년 함경도북병사가 되어 이탕개(尼湯介)의 난을 평정하고, 녹둔도(鹿屯島)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이듬해 두만강을 건너 여진의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소탕해 가옥 200여 동(棟)을 불사르고, 여진족 380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1589년 전라병사가 되어 신립(申砬) · 정언신(鄭彦信) 등과 변방의 군비 상황을 의논하였다.
1592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순변사가 되어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에서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고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사잇길로 도망해 황해 · 평안도로 피하였다.
이 때 세자 광해군을 3,000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전투(王城灘戰鬪)에서 왜적 80여 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패주한 죄가 큰 것을 들어 처벌을 요청하는 신하도 있었으나, 경험이 많은 무장이라 해 용서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 · 비변사당상 · 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 군사들을 조련시켰으며,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 유지에 힘썼다.
또한 충청도에서 송유진(宋儒眞)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뒷수습을 맡았다. 1595년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도북병사가 되고, 지중추부사 · 행호군을 거쳐 함경도남병사가 되었다. 1601년 부하를 죽였다는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저서로는 『증보제승방략(增補制勝方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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廵邊使謚壯襄李公神道碑銘 --- 丁範祖 撰
我宣祖大王聖武天縱。誕啓中興之業。時則有文武諸臣左右協贊。各效其績。而咸推廵邊使壯襄李公爲當世良將。公諱鎰。字重卿。龍仁人。高麗太史吉卷。其遠祖。在國朝。開城留後諱士渭。爲公八世祖。而高祖諱會忠。僉使。曾祖諱承孝。承仕郞贈刑曹參議。祖諱環。副司直贈戶曹參判。考諱敏德。咸鏡道兵馬虞侯。累贈議政府左贊成。妣延安李氏。生員諱繼壽女。嘉靖戊戌七月七日擧公。幼奇偉。及長。業弓馬。戊午。登武科。拜宣傳官。歷試咸從令,碧潼端川守,慶興穩城府使,釜山僉使。擢拜全羅左水使。時北地藩胡尼湯介者。卛野人。陷慶源。掠會寧。勢甚猖獗。公前後以慶會府使。討平之。尋陞本道兵使。撰進守禦方畧一通。請令諸武士講習。又陳軍務禁條各二十餘事。請頒示諸鎭堡。使永久遵行。楸島時錢諸藩胡作亂。殺傷甚多。公督會穩諸鎭將。合擊之。焚穹廬三百餘所。斬首五百級。上遣使𩝝勞。命官公一子。移拜全羅兵使南兵使。時朝廷慮南倭釁。柳相成龍請以公代慶尙右兵使之老不任邊事者。爲豫備計。而廷議謂宿將不可去京師。遂止。翌年壬辰。倭賊大擧入寇。陷東萊。列郡瓦解。於是始以公爲巡邊使。使往禦之。公倉卒受命。行收兵僅八九百人。與賊遇於尙州。賊勢大。戰不利。時都元帥申砬。軍忠州。公欲邀與共守鳥嶺。而砬不至。遂不得已還詣砬。砬陳㺚水上。公屯丹月驛。而賊分道大至。砲皷震天。公突擊斬十餘級。而砬爲賊所擠。全軍敗沒。公馳至京師。而車駕西狩平壤。公欲引兵救諸將之守臨津者。未到遇賊。力戰斬三十餘級。上遣宣傳官。賜公御馬。復除公巡邊使。時臨津守軍已敗潰。公念平壤孤危。倍道馳赴行在。旣至。人心倚以爲重。賊漸逼平壤。將渡江。公令武士。以强弩射却之。而已。車駕向義州。而城遂陷。公至海西。欲募兵赴行在。而賊塞路不得進。遂檄諭守宰。兵民之逃竄者。使還集。乘機討賊。時光海分朝。駐伊川。公承召馳赴留護。策賊必來襲。遽奉駕移避。而其翌日。賊陷伊川。人皆驚服。大朝以公爲東邊防禦使。令遮遏平壤以北。累戰輒勝。斬獲甚多。皇朝褒賞公白金二十兩。將士各有次。公以本道兵使。兼廵邊使。卛諸軍。陣順安。於是。皇朝遣都督李如松。領大軍東救。進擊平壤賊。公爲前鋒。賈勇先登。天兵繼至。大破賊。賊不能支夜遁。六鎭亂民。縛兩王子及諸從臣降賊。殺兵使。又以公爲北道廵邊使。公至討殲巨魁。撫綏藩胡。北邊乃安。扈駕還京師。時賊據海堧。不肻退。又以公兼忠全慶三道巡邊使。以備之。尋還朝。上慮北胡餘孽。時時搆患。召公問計安出。公備陳賊衆寡。地險夷。防守便宜七八事。仍請添戍兵助戎械。無輕動以致悔。上覽之曰。予意以爲然。命悉依公奏施行。庚子。公備胡在南營而病。還至定平卒。壽六十有四。葬于龍仁慕賢村。從先兆也。景宗朝贈謚壯襄公。忠義出性。勇畧過人。藩胡逆化。則命公往討。島冦煽亂。則命公往禦。而公威戢惠綏。袵席我北鄙。羽翼東征之師。使社稷再安。疇非公之力哉。論者以鳥嶺之失守咎公。然此繇朝廷用公不早。非其智勇有不及也。當李忠武舜臣失律。罪將不測。力請貰其罪。以責來效。卒有露梁之捷。其鑑識又如此。國人之推公爲中興良將。有以也哉。前配大興令大春女。生一女。後配全州李巨孝女。生一男。男崇義。宗廟令贈左承旨。女宣傳官成文漑。崇義生四男三女。男涌禁府都事,沄,澍,汧慶尙左水使。女洪柬,權僴校理,安應聖。成文漑女參判洪命亨。涌男震瑞,震馦,震芳宣傳官。女縣監韓公億。餘不錄。公之五世孫希逸。嘗屬不佞爲神道之銘。盖諾而未果。近者。其猶子褧。繼而請益勤。不敢辭。銘曰。
桓桓李公。萬夫之特。左右穆陵。披竭忠赤。羯猘于邊。騷我北落。公奮其武。鉞崩距角。六鎭按堵。桑麻沙漠。狂蠻射天。
捲海而作。屠割生靈。毒被八域。公思捐軀。衝冐矢石。北尙䘐忠。其氣愈激。卒翊皇師。大膞箕賊。扈還漢京。鍾𥲤如昨。
赫赫忠武。公其匹敵。勳在宗社。名垂簡冊。駒城之陽。毅魄攸宅。載辭穹碑。用告千億。<끝>
海左先生文集卷之二十四 / 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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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변사 장양 이공 신도비명 병서(巡邊使壯襄李公神道碑銘 幷序)
저 옛날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이 시운(時運)을 타고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여 준걸스러운 인재를 등용해서 마침내 중흥(中興)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때 웅비(熊羆)와 같은 용사(勇士)들이 변경에서 힘을 바치고 위엄을 드날려 적을 무찌르니, 그 공적이 더욱 돋보였다.
《시경(詩經)》에 “내 말하기를 분주하는 자가 있으며 내 말하기를 어모하는 자가 있다 하노라.〔予曰有奔奏 予曰有禦侮〕” 하였으니,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북쪽 오랑캐는 우리나라의 함경도 지역에 인접하여 대대로 정성을 바쳐서, 이들을 번호(藩胡)라고 칭해 왔다. 그런데도 오히려 잠시 순종하다가 금세 배반하여 변경을 여러 번 침략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그 종족인 니탕개(尼湯介)가 은밀히 궁벽한 곳의 야인(野人)을 꾀어 난리를 일으키고 경원부(慶源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조정은 이를 염려하여 훌륭한 장수를 뽑아 가서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용인(龍仁) 이공 일(李公鎰)이 마침 곤임(閫任)에서 해임되어 집에 있었으므로 특별히 경원 부사(慶源府使)에 제수하니, 공은 지체 없이 임소(任所)로 달려갔다. 적이 다시 종성(鍾城)을 포위하자, 공이 수진장(守鎭將)이 되어 적절하게 막아내니, 오랑캐들이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듬해에 니탕개가 2만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회령부(會寧府)를 약탈하니, 조정에서는 공을 회령 부사로 발탁하여 진압하게 하였다. 적들이 길을 가로막고 고령진(高嶺鎭)의 군포(軍布)를 빼앗아 갔는데, 공은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적의 소굴을 공격하여 부락을 모두 불태우고, 적의 수급(首級)을 벤 것이 매우 많았으며, 그들이 약탈한 것도 되찾아 왔다.
또 다음 해에는 북도 병사(北道兵使)로 승진하였는데, 공은 북쪽 변방의 많은 일들이 순조롭게 처리되지 않음을 염려하여 오래전부터 병영(兵營)에 보관되어 오던 《제승방략(制勝方略)》을 가져다가 실정에 맞게 증보하였으니, 성지(城池)를 만들고 요새를 견고히 하고 적을 제압하고 변방을 견고히 하는 계책이 모두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한 본(本)을 성상께 올리고 이것을 여러 장수들이 익히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서 군무(軍務)와 금령(禁令)에 관한 수십 조항을 아뢰자, 성상은 공이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명하고 여러 진보(鎭堡)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변방의 일이 순조롭게 처리되어 병졸과 백성들이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추도(楸島)의 번호(藩胡)가 시전(時錢)의 번호와 함께 침략해 왔다. 공은 경흥부(慶興府)에 도착하여 시전의 번호들을 붙잡아 목을 베고, 우후(虞候) 김우추(金遇秋)로 하여금 추도를 습격하여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오랑캐들 중에는 무이(撫夷)와 시전 등의 부락이 가장 강성하여 제압하기 어려웠는데, 공이 자세히 아뢰고 토벌하여 섬멸할 것을 청하자, 성상이 칭찬하고 윤허하였다.
공은 마침내 군사를 크게 일으켜 회령 부사 변언수(邊彦琇)와 온성 부사(穩城府使) 양대수(楊大樹)를 좌우위장(左右衛將)으로 삼고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극량(劉克良)과 조방장(助防將) 이천(李薦)을 좌우선봉(左右先鋒)으로 삼아 시전을 함께 포위한 다음, 4개 부락의 궁려(穹廬) 3백여 곳을 불태우고 4백여 수급을 베었다. 이에 성상은 병조 정랑 이대해(李大海)를 보내어 공로를 치하하고 군사들에게 호궤(犒饋)하였으며, 공의 한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이 전투에서 공이 낯빛 한번 변하지 않고 일거에 적을 모두 섬멸하니,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함부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아 북쪽 변경이 이때부터 편안하게 되었다. 호사가들은 공이 오랑캐를 섬멸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공은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나 오랫동안 무신(武臣)의 우두머리였는데, 이때부터 위엄과 명성이 더욱 크게 알려지게 되었으니, 국가는 공을 장성(長城)처럼 굳게 의지하고 믿게 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 왜란(倭亂)의 조짐이 처음 나타날 무렵, 성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적을 막을 능력이 있는 장수를 추천하게 하자, 여러 신하들은 모두 공을 으뜸으로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영남(嶺南)의 병사(兵使)에 제수하려 하였으나 명장(名將)이 서울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마침내 중지되었다.
얼마 후 왜적이 국경을 침범하자, 조정에서는 공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였다. 공은 수백 명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을 거느리고서 사납게 몰려오는 수많은 왜적을 상대하였으나 대적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여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전투할 때에 공이 선봉이 되어 단월역(丹月驛)에 주둔하였는데, 신립이 패전하여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공은 천행으로 벗어나 서울로 달려왔다.
이때 성상은 이미 서쪽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한 뒤였으므로 유도 대신(留都大臣)이 공으로 하여금 대탄(大灘)에서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공이 도중에 왜적을 만나 30여 수급을 베니, 성상은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공로를 치하하고 어마(御馬)를 하사하였다.
공은 임진(臨津)에 이르러 싸우다가 다시 패하자, 사정상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수하(手下)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근왕(勤王)하고자 하였다.
이때 성상이 평양(平壤)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왜적들이 곧 치고 들어올 태세였으므로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가 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반가워하였다. 대신(大臣)은 공에게 강나루를 지켜 적을 막게 하였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공이 무사(武士)들을 지휘하여 대황(大黃)으로 쏘아 6, 7명의 적을 사살(射殺)하니, 적은 그제야 후퇴하였다.
성상이 의주(義州)로 향하였는데, 평양이 마침내 함락되어 길이 막혔다. 공은 황해도로 돌아와 장차 병사들을 모집해서 행재(行在)로 달려가려 하였다. 이때 조정의 명령이 단절되어 백성들 중에는 왜적에게 투항하는 자가 많았으며, 수령들은 모두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하였다.
공이 글을 지어 널리 타이르니, 도망한 자들이 다시 돌아와 인심이 차츰 진정되었다. 행조(行朝 행재(行在)의 조정)가 공을 동변 방어사(東邊防禦使)로 임명하여 평양 이북을 막아서 지키게 하였는데, 공이 적의 수급을 많이 바쳤다. 명나라 황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공에게 백금(白金) 20냥을 하사하고 장수와 병사들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얼마 후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지원하러 왔다. 공은 이때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되어 임원평(林原坪)에 나가 주둔해서 명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지키니, 왜적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 제독(李提督)이 이 지역에 주둔해 있던 왜적을 공격하자, 공이 선봉으로 돌격하여 대파하니 왜적이 밤에 도망쳤다.
왜적이 북도(北道 함경도)로 들어가자, 반란한 백성들이 왜적에게 붙어 두 왕자와 수행하는 신하들을 포박하여 바쳤는데, 공이 북도 순변사(北道巡邊使)가 되니, 북도의 문제가 비로소 마무리 되었다. 왜적이 바다를 장악하고 버티면서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공을 충청ㆍ전라ㆍ경상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를 겸하게 하고 순천(順天)에 주둔하여 왜적을 막게 하였다.
공은 다시 북병사(北兵使)가 되고 돌아와 무용대장(武勇大將)이 되어 서울에 부서(府署)를 개설하였다. 번호(藩胡)가 이 기회를 틈타 일어나자 그곳을 지키던 신하가 군대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성상이 공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경(卿)은 백전노장(百戰老將)으로 북쪽의 변방에 익숙하다.
오늘의 사태에 대하여 어떤 계책을 세워야 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조목조목 대답하고 또 적합한 시기를 살펴 출동해서 후회가 남지 않게 할 것을 청하니, 성상은 감탄하기를, “이는 참으로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에 맞는다.” 하고는, 이러한 내용을 그곳을 지키는 신하에게 급히 달려가서 유시(諭示)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북쪽 변방에 오래 있었으므로 북쪽 변방에 일이 발생하면 성상은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 오랑캐들도 공의 명성을 익숙히 들어서 수십 년 동안 결코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하였으니, 옛날 흉노(匈奴)들이 한(漢)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을 두려워한 것과 같았다.
남쪽의 왜구가 침범해 왔을 때에 조정에서 공을 일찍 기용(起用)하지 않고 사태가 위급해진 뒤에야 일을 맡긴 데다가 또 중과부적의 형세로 밀리다가 패하였으니, 이는 당시의 형세가 그러하였다. 공인들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공은 국가가 전투에서 패하여 밀리고 어수선해진 뒤에 일을 맡아 노년에 떨쳐 일어난 공을 세워, 명나라에서는 상을 내리는 은전(恩典)을 크게 베풀고 왜구들은 함부로 날뛰던 기세가 꺾였으니, 그렇다면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畵像)이 그려진 자나 기상(旂常)에 이름이 기록된 자에 비해서도 또한 많이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공은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크게 뛰어났다. 시전(時錢)의 전투에서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율(軍律)을 범한 죄로 무거운 벌을 받게 되었는데, 공은 이순신이 충성스럽고 용맹하여 쓸 만한 인물임을 알아보고는 우선 용서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뒤에 이순신은 마침내 훌륭한 장군이 되었다.
왜란 중에 광해군(光海君)이 세자로서 이천(伊川)에서 분조(分朝)하고 있었는데, 공은 왜적이 습격해 올 것을 염려하여 급히 강을 건너 전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공을 비겁하다고 꾸짖었는데, 광해군이 이천을 떠나자마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오니,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탄복하였다.
당시 이름 있는 공경(公卿)들이 모두 공을 신임하고 중시하여 큰일이 있을 적마다 번번이 공을 불러 의논하였다.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이 일찍이 오음(梧陰) 윤공(尹公 윤두수(尹斗壽)에게 편지를 보내어 변방의 기무(機務)를 공에게 자문하여 결정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으니, 대현이 남긴 소중한 한마디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공은 만력(萬曆)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이후로 함종(咸從)ㆍ벽동(碧潼)ㆍ단천(端川)ㆍ경흥(慶興)ㆍ온성(穩城)ㆍ경원(慶源)ㆍ회령(會寧)의 일곱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상토(上土)와 부산(釜山) 두 곳의 첨사(僉使), 전라도의 좌수사와 병사, 평안도의 병사가 되었고,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에서는 각각 두 차례 병사가 되었으며, 여러 차례 품계가 올라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내직(內職)으로는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지훈련원사, 도총부 도총관과 포도대장, 군기시 제조를 겸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 34)에 남병영(南兵營)에 재직하다가 병이 들어 사직하고 돌아올 적에 정평(定平)에 이르러 1월 그믐날 별세하니, 향년이 64세였다. 의정부 좌참찬을 추증하고 용인(龍仁) 모현촌(慕賢村)에 있는 선영(先塋)에 장례하였다.
경종조(景宗朝)에 ‘장양(莊襄)’이라는 시호를 내리니, 이는 ‘여러 번 정벌하여 적을 죽임〔屢征殺伐〕’과 ‘갑옷을 입고 싸워 공로를 세움〔甲冑有勞〕’에 해당하는 두 가지 시법(諡法)을 따른 것이다. 공은 자가 중경(重卿)이니, 고려(高麗) 태사(太師) 길권(吉卷)의 후손이다.
본조에 와서 유후(留後)를 지낸 휘 사위(士渭)와 관찰사를 지낸 휘 백지(伯持)는 부자가 연달아 문과에 올라 국초(國初)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관찰사공의 3세 후손인 승효(承孝)는 승사랑(承仕郞)으로 참의에 추증되고, 참의의 아들 환(環)은 부사직으로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판의 아들 민덕(敏德)은 병마 우후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그의 배위인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생원 계수(繼壽)의 딸이니, 이 두 분이 공의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이다.
공의 전취 부인(前娶夫人)은 종실(宗室)인 대흥령(大興令) 이대춘(李大春)의 딸로 1녀를 낳았는데, 선전관 성문개(成文漑)에게 출가하였다. 후취 부인(後娶夫人)은 전주(全州) 이거효(李巨孝)의 딸로 1남 숭의(崇義)를 두었는데, 숭의는 종묘서 영이 되었다.
사위 성문개는 양자로 익(杙)을 두었는데 벼슬이 별제이고, 딸은 승지 홍명형(洪命亨)에게 출가하였다. 숭의는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용(涌)은 의금부 도사이고 운(沄)과 주(澍)는 모두 출사하지 않았고, 견(汧)은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가 되었으며, 딸은 각각 사인(士人) 홍간(洪柬), 권한(權僩), 안응성(安應聖)에게 출가하였다.
감역 진서(震瑞)와 진혐(震馦), 동지 진방(震芳)은 용(涌)의 아들이고, 진태(震台), 진주(震柱), 진복(震馥)은 운(沄)의 아들이며, 생원 진시(震蓍)와 진재(震梓)는 주(澍)의 아들이고, 참군 진웅(震雄), 진화(震華), 진행(震行)은 견(汧)의 아들이다. 먼 후손과 서파(庶派)와 외손(外孫)들은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진방의 아들 규(葵)가 근래에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 남긴 사업은 마땅히 기록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글을 지어 묘도(墓道)를 빛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대답하기를, “나는 공의 종인(宗人)이니, 그대의 말이 아니더라도 서둘러 표장(表章)해야 할 터인데, 어찌 사양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가 엮은 가장(家狀)을 토대로 가감하여 위와 같이 서문을 지었다.
옛날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은 허국공(許國公)의 비문(碑文)을 지을 적에 동종(同宗)이라 하여 사적을 특별히 자세히 서술하였다. 지금 내가 공의 전후의 전공(戰功)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은 것도 또한 한 문공의 뜻과 같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내 일찍이 국조의 고사를 두루 열람하고 / 盖余流覽國朝故實
또한 장양공의 사적도 여러 차례 살펴보았네 / 亦嘗屢考壯襄公事蹟
공은 북쪽 변방에 있을 적에 위엄을 떨치고 무예를 드날려
/ 公在北欲奮威揚武
강성한 오랑캐 부락을 모두 소탕하려 하였네 / 盡蕩强胡部落
그리하여 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복종해서 / 使醜類讋服
감히 기를 펴지 못하여 / 不敢出氣
변경이 무사하고 / 邊境得以無事
병란이 영원히 끊어지게 만들었네 / 而兵塵永熄
이는 그 공이 거룩하고 높아서 / 此其功奇偉卓絶
염파(廉頗)와 이목(李牧)과 명성을 다툴 만하네 / 足以馳聲頗牧
섬나라 왜적이 쳐들어 왔을 때에 / 及至島夷之逞
처음 출전하여 상주에서 궤멸하였고 / 一出而有尙州之潰
두 번째 출전하여 단월에서 패하였네 / 再出而有丹月之衂
이 때문에 공이 용맹은 부족하지 않으나 / 因此人或疑公勇猛非不足
책략은 조금 모자라다고 의심하는 자들이 간혹 있네 / 而獨少歉乎策略
이는 꼭 그렇지만은 않으니 / 此未必然
용병하는 방법은 / 用兵之道
하나는 기세를 따르는 것이요 / 一則勢
또 하나는 지형을 따르는 것이니 / 一則地
이 둘을 잃으면 반드시 패하게 마련이네 / 失此必敗績
공이 두 번 출전하여 전공을 세우지 못했던 것은 / 公之兩出無功
한 번은 주장의 실책 때문이었고 / 或由主將失策
한 번은 중과부적의 형세 때문이었네 / 或因衆寡不敵
이는 참으로 공의 죄가 아닌데 / 斯固非公之罪
이 일로 공을 허물한다면 / 以此咎公
지혜 밝지 못한 자임을 알 수 있다네 / 亦見其惑矣
아! 공과 같은 분은 / 噫如公者
참으로 한 시대의 웅걸이요 / 眞可謂一時之雄傑
백부를 당해낼 뛰어난 자라고 이를 만하네 / 百夫之禦特
내 이제 늦게나마 명문을 지어 / 我追作銘
비석에 새겨 세우니 / 樹之貞石
뒤에 반드시 나의 글을 읽고서 / 後必有讀余之文
감개하여 크게 탄식하는 자가 있으리라 / 感慨而太息者矣
[주해]
[주01] 웅비(熊羆) : ‘사나운 곰’의 뜻으로, 흔히 용맹한 무사의 비유로 쓰인다.
[주02] 내 말하기를 …… 하노라 : 이 말은 《시경(詩經)》 〈대아(大雅) 면(綿)〉에 보인다. 분주(奔奏)는 임금의 덕을 알려 천하 사람들이
달려오게 하는 것으로 문신(文臣)의 일이고, 어모(禦侮)는 국가를 업신여기는 외적을 막는 것으로 무장(武將)의 일이다. 이 시는
문왕(文王)에게 이처럼 훌륭한 신하가 있음을 찬양한 것이다.
[주03] 계미년에 …… 함락시켰다 : 니탕개(尼湯介)는 함경도(咸鏡道) 회령(會寧)에 살던 여진족의 추장으로, 선조(宣祖) 초에 귀화하여
관작까지 받았던 인물인데, 1583년(선조 16)에 경원부(慶源府)에 살던 여진족들이 전(前) 진영장(鎭營將)의 허물을 들어 난을 일
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곧 신립(申砬) 등에 의해 소탕되었다.
[주04] 곤임(閫任) : 조선조에서 병사(兵使)와 수사(水使)의 직임을 통틀어 이르던 말인데, 여기서는 전라 좌수사의 직임을 이른다.
[주05] 제승방략(制勝方略) : 함경도(咸鏡道) 8진(鎭)의 방어를 논한 병서(兵書)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연려실기술(燃藜
室記述)》 등의 기록에 의하면 김종서(金宗瑞)가 세종(世宗) 중엽 이후 6진 개척에 종사하면서 처음 저술하고, 선조(宣祖) 때에 이
일(李鎰)이 이를 증보하였다고 한다.
권1의 머리부터 권2의 중반까지는 열진방어(列鎭防禦)가 실려 있으며, 권2의 후반부에는 군정(軍政) 29조, 금령(禁令) 27조, 육
진대분군(六鎭大分軍), 삼읍분군(三邑分軍),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 비국회관(備局回關), 방량식(放量式)이 수록되
어 있다.
[주06] 추도(楸島)의 …… 왔다 : 추도는 함경도(咸鏡道) 경흥(慶興) 북쪽 45리쯤에 있는 섬으로 마니응개(亇尼應介)가 거느린 번호(藩
胡)들이 살았으며, 시전(時錢)은 경흥 무이보(撫夷堡) 쪽의 두만강 건너에 있는 여진 부락이다. 1587년(선조20) 9월에 추도에 있
던 여진족 추장 마니응개가 수하들을 이끌고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의 둔전을 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주07] 궁려(穹廬) : 오랑캐들이 거주하는 위가 둥근 이동식 천막을 이른다.
[주08] 임진년 …… 중지되었다 : 당시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경상 병사(慶尙兵使)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재주가 없으므로 노련한 장
수인 이일(李鎰)로 교체시키자고 하였으나, 홍여순(洪汝諄)이 명장(名將)을 외지로 내보낼 수 없다 하여 저지되었다.
《宣祖修正實錄 24年 10月 1日》
[주09] 신립(申砬)이 …… 때 : 1592년(선조25)에 왜적(倭賊)이 쳐들어와 고시니 유끼나가의 2만 대군이 순식간에 부산성(釜山城)을 함
락시키고 충청도(忠淸道)를 통해 한양(漢陽)으로 진격해 오자, 선조(宣祖)는 신립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에 제수하고 8천 명
의 군대를 주어 왜군을 막게 하였다. 이에 신립이 충주(忠州)에서 적과 조우하여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대적하였으나 중
과부적으로 패전하여 전군이 몰살되었다.
[주10] 유도 대신(留都大臣) : 임금의 거둥 때에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울을 지키고 정무를 보는 대신을 이르는 말이다.
당시 유도 대신은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이었다.
[주11] 대황(大黃) : 활의 종류로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 보이는데, 남조(南朝) 때 송(宋)나라 배인(裴駰)이 지은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위소(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뿔을 깎아 붙인 쇠뇌이니, 색이 노랗고 몸체가 크다.”라고 주석하였다.
[주12] 반란한 …… 바쳤는데 : 1592년(선조25)에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가 회령(會寧)으로 육박해 오자, 토민 국경인
(鞠景仁) 등이 모반하여 이곳에 피난해 있던 두 왕자인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과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와 이들을 수행하
는 신하들을 포박하여 왜적에게 바친 일을 말한다.
[주13] 한(漢)나라의 비장군(飛將軍) : 한 무제(漢武帝) 때 북평 태수(北平太守)였던 이광(李廣)을 가리킨다. 그는 용맹과 지혜를 겸비하
였으며, 팔이 길고 활을 잘 쏘았으므로 흉노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날아다니는 장군’이라는 뜻으로 비장군이라 불렀다.
[주14] 기린각(麒麟閣)에 …… 자 : 국가에서 그 공훈을 기릴 만큼 큰 공로를 세운 자들을 이른다. 기린각은 원래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가 기린을 얻은 것을 기념하여 장안의 궁중에 세운 누각인데, 뒤에 선제(宣帝)가 공신(功臣) 11명의 화상을 그 벽에 그려 넣은 후로
는 공신각(功臣閣)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기(旂)와 상(常)은 모두 주(周)나라 때 천자가 사용한 깃발인데, 기(旂)는 교룡(交龍)을 그렸고 상(常)은 해와 달을 그린 것으로, 훌
륭한 공을 세운 신하의 이름을 여기에 기록하여 그 공을 기렸다고 한다.
[주15] 광해군(光海君)이 …… 있었는데 : 분조(分朝)는 전란(戰亂) 등으로 임금이 파천하였을 때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행재소(行在
所) 이외에 별도의 작은 조정을 두는 것을 이른다. 행재소를 원조(元朝) 또는 대조(大朝)라 하고 분조를 소조(小朝)라고 한다.
1592년(선조25) 선조(宣祖)는 요동으로의 망명을 염두에 두고 의주(義州)로 파천하면서 본국에 분조를 설치하여 왕세자인 광해군
(光海君)에게 관장하게 하였는데, 광해군은 영변(寧邊)으로부터 남하하여 7월 9일부터 7월 27일까지 이천(伊川)에 머물면서 의병
을 모집하고 의병장들을 독려하였다.
[주16] 허국공(許國公)의 비문(碑文) : 허국공은 당(唐)나라 헌종(憲宗) 때의 장수 한홍(韓弘)으로,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節度使)들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사도 겸 시중(司徒兼侍中)에 오른 인물이다. 이 비문은 한유(韓愈)의 문집인 《한창려문집(韓昌黎文
集)》 권7에 수록되어 있다.
[주17] 염파(廉頗)와 이목(李牧) : 모두 전국(戰國) 시대 조(趙)나라의 명장들로, 혁혁한 공을 세워 후대에 크게 존경받는 장군들이다.
[주18] 백부(百夫)를 …… 자 : 이 말은 본래 《시경(詩經)》 〈진풍(秦風) 황조(黃鳥)〉에 보이는 것으로, 이 시의 첫 번째 연에서는 “이 엄
식이여, 백부 중에 뛰어난 자로다.〔維此奄息, 百夫之特.〕”라고 하였고, 세 번째 연에서는 “이 겸호여, 백부를 당해낼 자로다.〔維
此鍼虎, 百夫之禦.〕”라고 하였다.
엄식과 겸호는 진 목공(秦穆公)이 훙서(薨逝)했을 때에 순장(殉葬)된 현신(賢臣)들이다. 주자(朱子)는 《시집전(詩集傳)》에서 “특
(特)은 걸출한 이의 칭호이다.〔特, 傑出之稱.〕”라고 하고 “어(禦)는 당해냄과 같다.〔禦, 猶當也.〕”라고 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이정은 사경화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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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廵邊使壯襄李公神道碑銘 幷序 -- 李宜顯 撰(이의현 찬)
昔我昭敬大王撫運圖治。才雋登庸。迄成中興之烈。乃若熊羆之士。效力邊疆。揚威敵愾。其功績尤彰。詩云予曰有奔奏。予曰有禦侮。豈不信哉。北虜在我國。隣於咸鏡一路。世納欵。稱爲藩胡。然猶乍順乍逆。侵擾多端。歲癸未。其種尼湯介潛誘深處野人作亂。攻陷慶源府。朝廷患之。將選將往討。龍仁李公鎰方解閫任家居。特拜慶源府使。星夜馳赴。賊又圍鍾城。公以守鎭將。備禦中機。虜遂解去。明年。尼胡率二萬餘騎。掠會寧府。乃擢公爲本府使以鎭之。賊邀奪高嶺鎭軍布。公引軍直擣巢穴。盡焚其部落。斬獲首級甚多。還其所掠。又明年。陞北道兵使。公慮北方事多齟齬。取營中舊藏制勝方略。商度增補。凡城池控阨制敵固圉之策。無不備載。仍以一本奏御。請以此試講諸將。仍陳軍務禁令累數十條。上命依奏施行。仍令頒示諸鎭堡。自此邊事得理。兵民大賴。楸島藩胡。與時錢藩胡來侵。公到慶興。捕斬時錢藩胡。使虞候金遇秋襲楸島。蕩其巢窟而還。撫夷,時錢等部落。最强難制。公具啓請討滅之。上褒諭允許。公乃大發兵。使會寧府使邊彦琇,穩城府使楊大樹爲左右衛將。高嶺僉使劉克良,助防將李薦爲左右先鋒。合圍時錢。燒其四部穹廬三百餘所。斬首四百餘級。上遣兵曹正郞李大海。宣勞犒師。命官公一子。是役也。公不動聲色。一擧盡殲。虜皆讋伏不敢肆。而北邊仍以無事。好事者爲圖畵其戰勦狀。至今傳焉。公勇敢饒籌略。久爲武宗。及是威聲尤大振。國家倚恃若長城矣。壬辰倭釁初啓。命諸臣薦禦敵才。咸以公爲首。將畀嶺閫。有謂名將不當離京師。遂止。已而倭犯境。廟堂以公爲廵邊使。公以數百烏合之卒。當大萬焱驅之賊。勢有不敵。遂不免左次。申砬之戰忠州。公爲前鋒。屯丹月驛。砬兵敗赴水。而公天幸得脫赴京城。上已西狩。留都大臣。使公檢督大灘兵。路遇賊。斬三十餘級。上遣宣傳官。奬諭賜御馬。及臨津兵又衂。公知不可爲。領手下兵勤王。上駐駕平壤。而賊勢將迫。人心危懼。聞公至。無不喜悅。大臣令公把守江津以遏賊。賊至。公麾武士。以大黃射殪賊六七。賊乃退。上前向義州。而平壤遂陷路塞。還至海西。將募聚人衆赴行在。是時朝命不通。民多投賊。守令皆雉兎逃。公爲文告諭。逃者還集。人心稍定。行朝以公爲東邊防禦使。把截平壤以北。多獻首馘。天子嘉之。賜公白金二十兩。將士有差。已而天朝提督李如松領四萬兵來援。公時爲平安兵使。出陣林原坪。聲勢相倚。賊不敢出。提督進攻留屯之賊。公以前鋒。奮身衝突。大破賊。賊宵遁。賊入北道。叛民附賊。縳納兩王子諸從臣。公爲北道廵邊使。而北虞遂妥帖。賊據海爲固。無意捲退。以公兼忠全慶三道廵邊使。鎭順天。使之遮遏。復爲北兵使。還爲武勇大將。開府京師。藩胡乘機跳梁。守臣請興師致討。上諭公曰。卿宿將也。老於北邊。今日之事。計將安出。公條對。且請相機而動。毋貽後悔。上歎曰。此眞得兵家勝筭。命以此馳諭守臣。盖公久於北。凡有北事。上必以詢公。虜亦熟聞公名。數十年間。終不敢肆意大逞。如昔匈奴之畏漢飛將也。至於南夷之警。用公不早。臨急始使。又以寡弱牽掣而敗。此其事勢固然。於公何有。然當喪敗顚頓之餘。克收桑楡奮翼之功。天朝侈賞賚之典。寇賊摧狂桀之氣。其視圖形麟閣策名旂常者。亦何必多讓。公鑑識絶人。時錢之役。造山萬戶李舜臣。以失律將被重辜。公知其忠勇可用。請姑貰以白衣從軍。後遂爲名將亂日。光海以世子。分朝伊川。公慮賊來襲。請急渡江前進。衆誚公爲怯。才離而賊大入。於是人皆驚服。當時名公卿皆信重大事。輒召公議。成牛溪先生嘗抵書梧陰尹公。要以邊機諮公以决。大賢一言之重。足以永世不朽矣。公萬曆戊午。中武擧。爲宣傳官。歷守咸從,碧潼,端川,慶興,穩城,慶源,會寧七邑。爲上土,釜山二僉使,全羅道左水使,兵使,平安道兵使。咸鏡南北道俱再爲兵使。屢進秩至資憲大夫。內歷漢城府判尹,知中樞府事。兼知訓鍊都捴管,捕盜大將,軍器提調。辛丑。在南兵營感疾辭遞。歸到定平。卒於正月晦日。享年六十四。贈議政府左參贊。葬于龍仁慕賢村先兆。景宗朝。賜諡莊襄。用屢征殺伐甲冑有勞二法也。公字重卿。高麗太師吉卷後。本朝留後諱士渭觀察使。諱伯持。仍父子登文科。爲國初名臣。觀察公後三世。曰承孝。承仕郞。贈參議。參議子環。副司直。贈參判。參判子敏德。兵馬虞候。贈左贊成。其配延安李氏。生員繼壽女。是爲公之考妣。公前夫人。宗室大興令大春女。生一女。適宣傳官成文漑。後夫人。全州李巨孝女。生一男崇義。宗廟令。成壻有繼子杙別提。女適承旨洪命亨。崇義生四男三女。男涌義禁都事。沄,澍俱不仕。汧慶尙左水使。女適士人洪柬,權僴,安應聖。曰監役震瑞,震馦,同知震芳。涌之出。震台,震柱,震馥。沄之出。生員震蓍,震梓。澍之出。參軍震雄,震華,震行。汧之出。後孫之遠者及庶派外裔不盡錄。震芳之子葵間嘗謁余曰。吾祖事業。宜有紀載而尙未也。盍爲文以賁墓道。余斂容曰。不佞卽公之宗人也。微子言。固將表章之不暇。其敢辭旃。遂取其所爲狀。櫽括而爲之叙。昔韓文公撰許國公碑。以其同宗也。叙事特詳。今余於公前後戰功。悉書具載。不避煩絮者。盖亦韓公之意也。其銘曰。
盖余流覽國朝故實。亦嘗屢考壯襄公事蹟。公在北。欲奮威揚武。盡蕩强胡部落。使醜類讋服。不敢出氣。邊境得以無事。而兵塵永熄。此其功奇偉卓絶。足以馳聲頗牧。及至島夷之逞。一出而有尙州之潰。再出而有丹月之衂。因此人或疑公勇猛非不足。而獨少歉乎策略。此未必然。用兵之道。一則勢。一則地。失此必敗績。公之兩出無功。或由主將失策。或因衆寡不敵。斯固非公之罪。以此咎公。亦見其惑矣。噫。如公者眞可謂一時之雄傑。百夫之禦特。我追作銘。樹之貞石。後必有讀余之文。感慨而太息者矣。<끝>
陶谷集卷之十 / 神道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