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희인(李希仁)
[생졸년] 1526년(중종 21)~1572년(선조 5)
생가 증조부 증 예조 생원 부군의 묘지
[本生曾祖考贈禮曹生員府君墓誌] - 이유장(李惟樟)∙
부군의 이름은 희인(希仁)이고 자는 대원(大元)이며, 성은 이씨(李氏)이고 본관은 전의(全義)인데, 조선 중엽에 안동 예안(禮安)으로 본적을 옮겨 예안이씨가 되었다. 증조부 신(愼)은 군자감 주부를 지내고 손자 좌의정 명(蓂)이 존귀하게 되어 좌찬성에 추증 되었으며, 할아버지 필간(弼幹)은 충무위 부사직이다.
아버지 훈(薰)은 성균관 생원이고,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찰방 덕장(德璋)의 따님이며, 공은 가정 병술년(1526) 4월 21일에 태어났다. 문예(文藝)가 우뚝하였고 필력이 힘차고 굳세었다. 향시에 다섯번 뽑혔으나 대과에는 모두 합격하지 못하고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예조 생원에 추증되었다.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성균관 생원 태정(台鼎)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경(璟)이고, 둘째가 바로 나의 할아버지 진(珍)으로 숙부 처사 순인(純仁)의 후사를 이었고, 통훈대부에 올랐다. 딸은 정서(鄭恕)에게 시집갔다.
경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외동아들은 정옥(廷玉)이고, 맏딸은 오여의(吳汝檥), 둘째는 이문휘(李文徽)에게 시집갔다. 나의 할아버지가 낳은 외아들 정발(廷發)이 바로 나의 아버지로 통덕랑에 올랐고, 맏딸은 김시릉(金是棱), 둘째는 김종문(金宗文)에게 시집갔다.
큰아버지 정옥은 아들이 없어 우리 형 유강(惟橿)이 후사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유량(惟樑)과 둘째 유강은 모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셋째가 바로 불초한 나 유장(惟樟)인데 진사로서 외람되이 연신(筵臣∙1)에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익찬을 지냈고, 막내는 선비 유방(惟枋)이며 딸은 김여중(金呂重)에게 시집갔다.
부군께서 돌아가신 지 어느덧 100여 년이 지나 사람들이 공의 행적을 보거나 들을 수 없어 숨은 미덕이 드러나지 못했으니 아, 슬프도다.
삼가 세계(世系)와 자손의 약력을 적어 무덤 옆에 묻는다.
[原文]
本生曾祖考贈禮曹生員府君墓誌 - 李惟樟
府君諱希仁 字大元 姓李氏 系出全義 至中葉 移籍禮安 曾祖諱愼軍資監主簿 以孫左議政蓂貴 贈左贊成 祖諱弼幹忠武衛副司直 考諱薰成均生員 妣慶州李氏 察訪德璋之女 府君生于嘉靖丙戌四月二十一日 文藝蔚然 筆力遒勁 嘗五擧於鄕 俱不利于省試 不幸早世 贈禮曹生員 配順興安氏 成均生員台鼎之女 有二男一女 男長曰璟 次卽我先祖考珍 爲叔父處士諱純仁後 階通訓 女適鄭恕 璟一男二女 男廷玉 女長適吳汝檥 季適李文徽 我先祖一男 卽我先考諱廷發 階通德 二女 長適金是棱 次適金宗文 廷玉無子 以我兄惟橿後之 我先考四男一女 男長惟樑 次惟橿 俱中生員試 次卽不肖惟樟 以進士 猥爲筵臣所薦 曾任世子翊衛司翊贊 季惟枋業儒 女適金呂重 府君之歿 于今百有餘年 耳目不逮 無以發揮潛德 嗚呼痛哉 謹識世系子孫之梗槪 藏于墓傍 . <끝>
출전 : 孤山先生文集 卷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