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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를 가다.
글 쓴 이 棹 一 高 枓 永
10월10일, 묘시(卯時)에 일어나니 일출(日出)이 찬란하다! 간밤엔 오징어 잡이 배들이 집어등(集魚燈)을 밝히고 밤을 새우더니... 대양(大洋)은 바람한점 없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도다!
얼마간을 산책(散策)한 후 숙소(宿所)에서 조반(朝飯)을 들고는 다시 답사(踏査)의 길에 오름니다. 황박사님은 바쁜 일정으로 첫 새벽에 부산으로 귀국 하시고, 오늘은 황가이드(황대통)께서 안내를 하신다.
여덟시 반 쯤에 출발하여 대마도 남단 이즈하라항(嚴原港) 부근에서 최북단 ‘한국전망소(韓國展望所)’ 까지 382번 국도를 타고 이동하면서 하는 여정(旅程)이다. 20여 분을 달려 대마도공항(對馬島空港)을 지나 “오후나고시(대선월 大船越)”로 가는 계곡길 옆으로는 계획조림(計劃造林)을 하여 잎갈나무들과 인체에 이로운 ‘피톤치드’ 생산량이 가장 많다는 편백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우리도 하루 빨리 수종(樹種)을 개량하여 맑고 청정한 국토로 가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대선월(大船越)을 지나며 차내에서 황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대선월을 당시 조선(朝鮮)에서는 ‘오보라구시포(吾甫羅仇時浦)’라 부르며, 1672년 대마도 제21대 도주 종의진(宗義眞)에 의하여 대운하(大運河)를 건설 하였고, 동서를 연결하는 수로(水路)로서 폭이 50m, 길이는 240m이다. 문제는 동서해(東西海)의 수심이 낮아 군함이 다닐 수 없어 ‘만관교(万關橋)’가 다시 필요했다.
대선월을 지나 10여 분을 더 달려서 만관교에서는 하차(下車)하여, 다리를 걸어서 그 밑에 흐르는 세찬 물살을 바라보니... 아찔하여 현기증이 다 난다. 40여 미터나 되는 높이에서도 흐르는 물소리가 다 들리고, 유속(流速)이 얼마나 빠른지 쾌속정이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얼마를 멈추어 미끄러지다가 다시 진력(盡力)으로 달리는 것이 보인다.
189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을 하였으며, 1차 공사에서 다리길이가 300m, 폭 22m, 수심 3m 였었는데, 1951년 2차 공사를 거쳐, 1996년 3차 공사에서 다리길이가 300m, 폭 65m, 수심 6.5m로 건설돼 있다.
만제키 바시(万關橋:만관교)가 유명세를 탄 것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 “발탁함대”가 대한해협(大韓海峽)을 통과하지 않고 대마해협(對馬海峽)으로 가자, 당시 진해(鎭海)에 머물던 <도고헤이 하치로>가 <아소만>을 거쳐 바로 이 다리(万關橋) 밑으로 통과하여 5월27일 ‘도노자키’로 가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대선월 운하와 만관교 운하가 건설됨으로서 대마도는 3토막의 섬으로 나눠지는데... 대마도의 면적은 약 709평방킬로미터로 제주도의 40% 정도이며, 남북 82Km, 동서 18Km로 긴 고구마처럼 생겼다.
가운데 “아소만”이라는 큰 바다가 있어 두 마리의 말(馬)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대마도(對馬島)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인구는 약 35,000명(2010년 3월 현재)이고, 가구수는 15,300여 세대라 한다.
다시 20여 분을 더 달려 소선월(小船越) 부근에서 지명(地名)에 대한 설명이 낭낭하게 울려퍼진다.
소선월(小船越)은 작은배를 밀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목이 낮고, 동서해안 거리가 174m 밖에 안되는 대마도 최소협곡(最小峽谷)이다. 서기 1419년 6월29일 대마도 제8대 도주 “소사다모리(宗貞盛)”가 조선의 이종무(李從茂1360~1425) 장군에게 항복한 곳이며, 이은(李銀)과 이예(李藝) 일행이 잡혀 온 곳이기도 하다.
또한 검문소가 있던 곳으로 대마도 최고(最古)의 사적지(史蹟地)이기도 하며, 중국 왕래 교통의 요충지 였다고 한다.
고후나고시(小船越:소선월)를 지나 ‘에보시타케 전망대(鳥帽子岳 展望臺)’로 가는 길은 앞서보다 더 많은 숲들이 울창하고, 계곡도 협소하여 거의 협곡(峽谷)에 가깝도다! 도로가에는 그 어떠한 휴게소나 상점(商店)들이 보이지도 않으며, 태고(太古)의 원시림에 가깝도록 보존되어 있고,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구~불 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이요, 자연훼손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차량도 교행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
전망대(展望臺)에 오르니... 안광(眼光)이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탁 트여서 사방(四方)으로 조망(眺望)이 가능하고, ‘아소만(淺茅灣)’으로 펼쳐지는 작은 섬들이 참으로 장관이다. 전망대의 높이는 해발 176m에 이르고, 아소만의 107개 섬들이 점 점이 떠 있는 풍광(風光)은 보는 눈이 다 시리다!
하늘은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땅은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나!
반공중(半空中)에 우뚝 솟은 이 내몸이...
오늘은 가히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이로다!
모두들 밝은 표정이시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홍안(紅顔)이로고! 간단한 기념촬영을 마치고 서둘러 ‘와타즈미 신사(和多都美 神社)’로 향합니다.
구~불 구~불 순례(巡禮)길을 돌아 신사(神社)에 도착하니, 많은 답사객들이 붐빈다. 신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작은문(門)이 있는데, 햐얀 종이를 접어서 많이도 달아 놓았다. 누구나 자기의 소원을 적어서 달아 놓으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는 기원(祈願)의 뜻이 있다고 한다.
울창한 숲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조그마한 자연석에 “토요타마히메의 묘(豊玉姬之墳墓)”라고 금분으로 쓴 돌 비석(碑石)이 있다. 이 돌 제단(祭壇)은 풍옥희의 분묘가 아니라 자연숭배 신앙 사상에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반좌(盤座)로서, 신전(神殿)이 조성(造成)되기 전에 대해신(大海神:豊玉姬)에게 제사(祭祀)를 올리던 반좌 였다고 역사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다시 몇 걸음을 더 나아가면 아람드리 거목(巨木)으로 둘러 싸인 곳에 “와타즈미 신사(和多都美神社)”가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와타즈미신사’는 용왕신사(龍王神社)로서 대마도 4대신사 중의 하나이며, “히코호호 도미노미코토”와 “토요타마 히메미코토”를 제신(祭神)으로 모셔놓은 곳이다.
신궁(神宮)에서 바라보면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잘 감싸주고 있으며, 안산(案山)도 적당한 거리에서 마주하며, 게다가 청룡이 잘 발달 해 안산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으니... 신사(神社)로서는 더 없는 길지(吉地)라 하겠다. 다만 주산(主山)이 약간 멀고 거의 평지에 가깝게 조성(造成)돼 있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도량(道場)은 상당부분 얕은 바다를 메워서 조성된 것 같고, 백호(白虎) 기슭에는 작은 연못을 조성해 놓았으며, 연못가에는 “히코호호 도미노미코토”와 “토요타마 히메미코토”가 결혼하여 낳은 아기를 버리고 용궁(龍宮)으로 들어간 “<비늘바위>”가 놓여져 있다. 버려진 이 아이가 “우가야 후기야에즈<鵜茅茸不合>”로 훗날 자라서 이모(姨母:토요타마의 동생)와 결혼하여 “<진무덴노:神武天皇>”를 낳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일본의 초대 천황(天皇)이라 하니, 가야(伽倻)의 전설과도 유사(類似)한 점이 많으며, 또 그것이 일본 본토가 아닌 대마도에서 있었던 것임을 상기 해 보면 고대 한국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연(連)하여 길 너머로는 푸른바다가 깊숙이 들어와서 명당(明堂)의 국세(局勢)를 더욱 넉넉하게 해 주며, 바다 가운데는 5섯개의 수중(水中) ‘토리이(鳥居)’가 세워져 있는데, 인간이 세속(世俗)의 오욕(五慾:식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 성욕)으로부터 해탈(解脫)하라는 의미에서 세워 졌다고 한다.
또한 ‘와타즈미 신사’의 토리이(鳥居)가 한국의 김해(金海) 또는 옛 서라벌을 향하고 세워졌다는 것은, 과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도해궁(渡海宮)이 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한반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대마도(對馬島)는 잃어버린 우리땅”이란 말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님을 상기(想起)하면서... 바다에 세워진 토리이(鳥居)를 배경으로 단체촬영을 마치고, 원통사(圓通寺)를 향해 달림니다.
포저(浦底) 부근에서 39번 지방도를 타고 30여 분을 달려서 원통사(圓通寺)에 도착하니,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다.
원통사(圓通寺) 입구에는 “통신사 이예 공적비(通信使李藝功績碑)”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초대 대마도 경차관 이예(初代 對馬島 敬差官 李藝)’의 안내문(案內文)이 돌비석에 새겨져 있다.
이 비(碑)는 2005년 11월 21일 대마도, 일본 간의 외교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그의 공적을 빛내고자 학성이씨 문중에서 건립했다고 하며,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씨가 후손이라고 한다.
이예(李藝 1373~1445)는 울산에서 일본, 대마도, 오끼나와를 40여 차례 왕복하며, 1406년에는 국왕 회례사로, 1408년 통신부사로, 1410년 일본국 회례사, 1418년 4월 24일에는 대마도수호(對馬島守護) 종정무(宗貞茂)가 사망 때 대마도로 가서 치제(致祭)하는 등 수많은 외교사적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 공적(功績)이 참으로 크다 하겠슴니다.
간단한 예(禮)를 드리고 여러개의 돌계단을 오르니, 도량(道場) 입구 우측에는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고려종(高麗鐘)”이 댕그라니 종각에 매달려 있다. 용뉴(龍鈕)는 쌍룡(雙龍)으로 제작돼 있고, 유두(乳頭)가 9개 있으며, 몸통에는 4분의 보살좌상(菩薩坐像)이 새겨져 있다.
제작 연대는 고려 연복사(演福寺) 종(鐘)과 아주 닮아있어 고려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1408년 대마도 제7대 도주 종경무가 개청할 당시 조선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이 아닌가 라고 적혀있다.
원통사(圓通寺) 법당(法堂)에 들어 간단한 참배(參拜)를 드리고 모셔놓은 불상(佛像)을 친견하니, 고려시대(高麗時代)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조그마한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 모셔져 있다.
원통전(圓通殿)이라 하면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찌 약사불을 모셨는지...? 왼손에는 약합(藥合)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계신다. “모든 중생들이여! 두려움 없이 다가 와 일체 성불 할 지어다!”라고 무언(無言)의 장광설(長廣說)을 하시건만, 이 무지한 중생은 오늘도 미혹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나무약사여래불(南無藥師如來佛)! 나무약사여래불! 나무약사여래불!
문밖에 나와 잠시 도량(道場)을 둘러보니, 주산(主山)은 적당한 높이에 금성(金星)으로 아름답고, 백호(白虎)는 잘 발달하여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하고 있어 재물이 넉 넉 하겠고, 청룡(靑龍)은 허(虛)하여 아쉬움이 있으나, 적당한 거리에 바닷물이 푸근하게 들어와 대단한 길지(吉地)에 자리하고 있슴니다.
법당 우측으로는 거대(巨大)한 신목(神木)이 있어 불을 켠 흔적이 보이고, 우측(白虎쪽)으로 수많은 석물납골묘(石物納骨墓)가 모셔져 있으니... 대마도 사찰들의 역할이 별반 다르지 않슴니다 그려!
또한 원통사에는 대마도 7,8,9대 도주의 무덤이 함께 모셔져 있다고 하니... 그 위력을 짐작코도 남으며, 1대부터 6대까지 대마도주 역사는 도부(都府)가 대마도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7대 종경무가 도부를 열기전 까지는 대마도가 고려의 목(牧)으로 고려의 일부였을 것으로 말한다.
차내는 “황대통” 가이드님의 안내방송이 쟁쟁히 흘러나온다. 그는 2차대전을 중심으로 세계역사와 일본사, 한국사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나이(35세)에 걸맞지 않게 해박(該博)한 지식을 갖고 있는분이다. 부전자전(父傳子傳,나중에 안 일이지만)이랄까! 황박사님의 뒤를 이어 차분하게 가이드 역할을 잘하고 있어 감사를 드릴뿐입니다.
시원하고도 고즈넉한 계곡을 따라 30여 분을 달리니, 금(琴)이라는 마을에 1,500년이나 됀 은행나무가 보인다. 천년이 넘는 세월에 원목(原木)은 고목(枯木)이 되어 쓰러지고 새순이 많이도 자라 있다.
“풋나기 어린 소나무 저라사 우쭐대도, 숨기신 깊~은 뜻이야 늙은 고목(杏子木)이 알련마는...” 무언(無言)으로 전해 주시는 한(恨)많은 역사를, 이 중생들은 알 수가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맑은 주지천(舟志川)을 따라 얼마를 더 달려서 주지(舟志), 대증(大增), 빈구수(浜久須)를 지나 하카다항(博多港) 부근에서 중식을 들고, 오후에는 ‘미미우다 하마 해수욕장(三宇田浜 海水浴場)’에서 1시간 여를 휴식합니다.
‘미미우다 하마 해수욕장’은 1996년에 일본의 해변 100선에 선정됀 해수욕장으로 수심이 앝고, 고운 모래가 해안에 넓게 쌓여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적당한 곳이다. 태평양 가운데 이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볼 수 록 시원하고 정감(情感)이 간다.
지근(至近)한 거리에 조그마한 암봉(岩峰)이 있는데, 그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어 볼거리를 제공 해 주시고, 좌측 해안둑(靑龍)은 짧으나 우측 해안둑(白虎)은 길게 뻗어 감싸주고 있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겠도다!
여러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도 해 드리고, 다리를 걷어 붙이고 작은 바위섬으로 들어갔다 나오니, 지난 여름에 못다한 피서를 초가을에 하는 기분이다! 잔디밭으로 잘 가꿔진 소공원 언덕 밑에는 여러 곳에 석화(石花)가 만발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됨직 하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막바지 답사처인 “풍 포대 적(豊 砲臺 跡)”으로 달림니다.
‘풍 포대적’으로 들어가는 길은 깊은 계곡으로 인적이 없고,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요새(要塞) 중의 요새다!
포대는 1928년부터 5개 년간에 걸쳐서 완공했다 하며, 당시 이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강제 노역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입구는 좁으나 내부로 들어갈수록 넓고, 여러갈래의 굴을 파 놓아 많은 포탄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가운데는 원형으로 됀 넓은 공간이 있어 대포크기 45구경(口徑) 40Cm, 카농포 2문(포신 砲身이 긴 원거리 사격용 포) 등을 설치했으며, 당시 사정거리(射程距離)는 ‘대한해협’을 카버할 수 있는 50Km 였다고 한다.
또한, 대마도에는 2차대전 당시에 포대(砲臺) 숫자가 12곳이나 되었다 하며, 1945년 패망(敗亡) 당시에도 최대한 버텨서 1941년 진주만 기습 이전의 영토(즉, 독도는 물론이고 조선전체와 대만까지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람)를 차지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연합국은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原爆)을 투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고 분(憤)을 삭일 수 없도다!
우리 일행은 황가이드의 설명에 모두들 할말을 잃고, 고개만 끄~덕 끄~덕 하면서 진지(陣地)밖을 나와 오늘의 마지막 답사처인 ‘한국전망소(韓國展望所)’로 향합니다.
한국전망소(韓國展望所)로 가는 길은 상당히 높은 산봉(山峰)에 위치 해 있어 주위는 물론이고, 아주 맑은 날에는 부산항(釜山港)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행(一行) 중 어떤 분은 “마음이 착한 사람은 볼 수 있고, 어두운 사람은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모두들 한바탕 웃는다!
전망소는 1997년에 지어졌으며, 이층 구조로된 8각형 기와지붕이다. 한국인에게 자문을 구하여 한국에서 자재를 공수 해 와서 지었으며,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정자(亭子)를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 세우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대마도에 잡혀 온 한국인들이 망향(望鄕)의 설움을 달래던 곳이기 때문에 이 곳에 전망대를 세웠다고 하며, 내부에는 대마도에서 본 부산야경(釜山夜景)과 상대마정 관광명소인 ‘미우다하마’, 1500여 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 한국과 대마도의 직선거리 및 일본과의 직선거리를 비교한 지도가 있다.
실제 거제도항에서 대마도까지는 49.5Km이고, 일본 후쿠오카항에서는 137Km라 하니,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도 한국과 가까우며, 또한 앞서 열거한 모든 역사적 사실과 대마도에는 들논이 없어 쌀농사를 지을 수 없어 부산과 김해에서 쌀을 구입해 그들의 식량을 조달했다고 한다.
바로 이웃하여 ‘고려산(高麗山)’이 있고, ‘고려꿩’ ‘고려문’ ‘고려원’ 등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을 보면 “대마도는 한국땅”이라는 말이 사실일 것으로 느껴진다! 전망대 우측에는 “조선국역관병종자순국난지비(朝鮮國譯官並從者殉國難之碑)”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는 순국하신 역관들의 이름이 많이도 새겨져 있다.
기념촬영(記念撮影)을 마치고 모두들 부산항 방향으로 바라 보아도, 오늘은 부산항(釜山港)이 보이지 않는단다! 이틀간의 여행에서 분노(憤怒)와 슬픔이 쌓여서 그새 마음이 어두워 졌는가...?
바람소리는 들려도 보이지 않고
소리는 질러도 들리지 않는구나!
바람소리 함성소리 하늘에 닿으면
우리들의 소원이 성취될 것이로다!
단기 4343년(서기2010년) 10월 9일,10일 일본 대마도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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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경하고 문화 탐방하고,,,잘 보고 갑니다..
황까페지기님께서도 시간을 한번 내어서 다녀 오시길 추천합니다!
역사공부 잘 하고 갑니다.고맙습니다.
매산님께서 다녀 가셨군요! 김선생님께도 한번 다녀 오실것을 추천합니다! 졸문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슴니다!
기행문에 늘 감사하며 존경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대마도 전망대에서 섬들이 아름답게 보여졌던 대마도 여행과 산행을 한즉이 있었는데...
그때 인상깊었거든요.......
여러가지로 부족한점이 많슴니다. 더 좋은 글 올리도록 노력하겠슴니다. 건강이 좋아지시면 산행에 동참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