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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도피처
True Refuge
[13]
상실과 이별의 아픔
처음부터 우리가 사랑한 이들,
그들을 옆으로 밀쳐두거나 잊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죽은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확인한다.
……
그때 잃은 자는 스스로 뛰쳐나갈 수 있고
그 현존의 무수한 순간들은,
밤새 가문비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햇볕 아래 반짝이는 티끌처럼 흩날리듯이,
의식(意識)을 관통하여 흩어져 사라질 수 있다. ―갤웨이 킨넬
울어라!
아픔에 넋을 잃고 침묵하지 마라!
슬피 울어라.
그리하여 사랑의 젖이 네 안으로 흘러들게 하여라. ―루미
조금이라도 걸으려면 목발을 짚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먼저 무엇을 먹어야겠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무릎을 관통한다. 다친 몸으로 살아야 하는 하루의 아침이다.
나는 과거 내 몸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놓아버리려고 노력한다. 요가 올림픽에서 난이도 높은 수레바퀴 자세로 18분을 버티던 젊은 날의 나를 떠나보낸다. 매일 4킬로를 달리고 스키와 산악자전거와 테니스를 즐기던 여인을 떠나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집을 감싸고 있는 저 아름다운 숲과 언덕과 해변을 떠나보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를 떠났다. 그 모든 ‘상실’이 어느 날 달리기를 하다가 입은 무릎의 상처로 비롯되었다. 이어서 테니스와 자전거가 나를 떠났다. 수영으로 대신하려 했지만 수영 때문에 목 디스크에 탈이 났다. 지금은 걷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아프다. 마루를 걸레질하거나 조금 무거운 물건을 들면 며칠 동안 통증에 시달려야 한다. 근육에 힘을 주면 뼈마디가 쑤셔서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일종의 죽음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앞날의 나에 대한 상상이다. 손자들과 잔디밭을 뒹굴며 씨름도 하고 그들을 안아주지 못하는 나의 미래를 생각해본다. 상처 입은 몸에 포로가 된 모습을…
상실 공동체
내 몸의 증세가 워낙 희귀한 것이라, 발병 이후 얼마 동안은 통증 속에서 홀로 소외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 병은 나를 이끌어 “상실 공동체”(community of loss)라는 친구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무엇을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이해를 내게 안겨주었다. 내가 상대하는 환자들과 학생들이 늘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막상 내가 구체적인 고통을 경험하자 그들의 나약함을 더욱 절실하게 나눌 수 있었다. 한 여인은 자기의 고독감이 끝없는 죽음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인은 두려움이 너무 커서 아무래도 자기가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붓다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 잃고 만다는 엄연한 현실과 부닥쳤을 때 자유를 향한 모색의 길을 떠났다. 젊은 왕자 싯다르타 고타마는 안락한 궁궐에서 온갖 사치를 누리며 화려한 삶을 즐겼다. 하지만 내면의 불안이 결국 그를 움직여 궁 밖으로 나가게 했고 거기서 병든 자와 늙은이 그리고 시체를 보았다. 그러자 안락이라는 그의 혼수(昏睡)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름답고 헌신적인 아내와 귀여운 아들이 있고 장차 한 나라의 왕위에 오른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를 사로잡은 건 단순한 질문 하나였다, 고통과 상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런 인생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평화와 자유를 찾을 것인가?
착실한 불교신자인 내 친구가 심장마비에서 살아남아 회복기를 거치는 동안 붓다의 일생을 다룬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았다. 싯다르타가 세 종류의 인간들을 만나는 대목에서 그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사람은 병든다, 사람은 늙는다, 사람은 죽는다. 내가 왜 이 사실을 여태 몰랐단 말인가?” 물론 그도 개념상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진짜로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 언제고 바로 이 몸을, 내가 사랑하는 이 몸을 잃어야 한다는 진실을.
상실의 아픔을 피해보려고
우리 모두 불타는 집에서 놀이에 열중하여 타오르는 불길과 무너지는 벽과 흔들리는 바닥과 차오르는 연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이들 같다고 붓다는 가르쳤다. 하지만 인생은 불타고 무너지는 것으로만 되어 있는 게 아니다. 선시(禪詩)와 예술작품들은 꽃으로 피어나고 향기를 뿜어내고 끊임없이 춤추는 자연세계를 그려 보이고 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슬픔과 기쁨이 한 피륙으로 직조된다. 상실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바뀌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도 외면하게 된다.
물론 상실의 아픔에서 한 걸음 물러나려는 시도가 어느 정도 에너지와 균형을 회복할 시간과 공간을 우리에게 마련해줄 수 있다. 상실을 경험하고 나서 당분간 일과 책과 영화 따위에 몰입하는 것도 가짜 도피처라고는 할 수 없다. 정규적으로 참석해온 모임이나 사회활동에서 물러나는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구제받으려는 우리의 시도들 가운데는 건강하지 못하고 그나마 일시적인 것들이 많다. 그렇게 해서 자기 경험을 통제하려 하고 결국 상실의 슬픔에 마음을 열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비난과 원망의 갑옷
수 년 전, 십대 아들 론을 백혈병으로 잃은 두 부부와 작업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론이 죽기까지 3년 동안 두 사람은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지 않았다. 아내인 루이스는 직장을 아예 그만두었고 남편 토니는 파트타임으로 전환하였다. 그들의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청룡열차처럼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러다가 아들이 숨을 거두자 그들은 극심한 슬픔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머잖아 두 사람은 아들의 병이라는 공동의 적을 대신해서 서로를 원망과 비난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루이스가 말했다. “물론 토니가 일부러 무엇을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속 깊은 데서 ‘당신이 우리 아들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음성을 지워버릴 수 없더군요.” 토니도 처음엔 멍한 상태였지만 차츰 아내한테 분노를 쏟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8개월 뒤에 헤어졌다.
토니를 떠나보내고 나서 루이스는 원망과 비난의 대상을 바꾸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편드는 건 관두고 남편과의 이혼을 가벼운 얘깃거리로 삼는 데 대하여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들과 남편을 잃은 슬픔 위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아픔이 겹쳐서 루이스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비난과 원망은 우리 가슴을 무장시켜 슬픔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가짜 도피처다. 다른 여자를 만나 집을 나간 남편, 가정을 파경으로 몰아간 아내, 아들에게 마약을 건네준 십대 소년들에게로 우리는 분노와 증오를 고정시킨다. 아니면 내가 만난 저스틴처럼 자신의 상실경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회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저스틴과 도나는 대학생 때 자원봉사 현장에서 만났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결혼했다. 도나는 로스쿨에서 법을 가르쳤고 저스틴은 지방의 한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농구 코치를 겸했다. 젊은 부부는 서로 충분히 사랑하며 인생을 맘껏 즐겼다. 저스틴이 기대치 않던 전임교수로 발령받던 날, 도나는 다른 지역에서 학술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축하하기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형 트럭이 그녀의 차를 덮쳤고, 그녀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도나가 죽고 나서 거의 1년쯤 지났을 때 저스틴이 이메일로 전화 상담을 요청해왔다. “마음 모으기 수련을 다시 시작해야겠어요. 분노가 내 남은 삶마저 파멸시킬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통화에서 저스틴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자기의 반응이 불공평한 하느님에 대한 분노로 나타났다고 했다. “하느님을 저주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주먹을 내두르며 대답을 요구했지요. 하느님, 그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고 친절하고 이 땅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왜 하필 그 사람입니까? 그리고 나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 사람을 나한테서 데려갔어요?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겁니까?” 흑인 노동자 집안 출신인 저스틴은 농구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와서는 학생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누가 뭐래도 도나였지요. 그녀는 내 영혼의 짝이었고… 그리고… 그런데 가버렸습니다. 내가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착한 사람,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애쓴 것이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게 됐어요.”
도나의 죽음으로 하느님을 향했던 저스틴의 분노가 차츰 사회의 불의와 집권자들에 맞선 투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에도 사회문제에 관심하며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훨씬 더 공격적으로 과격한 투쟁의 선봉에 섰다. 서로 콤비가 잘 맞던 학장과도 소통이 잘 되지 않았고 어느새 거북한 사이가 되었다. 학장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적대감, 당신의 과격한 태도… 바로 그게 문제요.” 오랜 세월 저스틴을 뒷받침해주던 누나도 말했다. “만사에 의심과 증오가 네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구나. …마치 온 세상을 상대로 싸우려는 사람처럼.” 누나의 말이 사실이냐고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도나를 잃었을 때 나는 신앙을 함께 잃었습니다. 뭔가 선한 바탕이 세상에 있다고 믿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내 속에 강렬한 증오가 서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어요.”
상실에서 오는 아픔은 간혹 과격한 행동주의를 유발한다. 음주운전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은 음주운전 방지법 통과를 위해서 지칠 줄 모르고 로비활동을 벌인다. 총기사고를 줄이기 위한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 권리를 주장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그런 사회활동들이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수가 있다. 하지만 저스틴의 경우처럼 통제되지 않는 분노는 상실의 아픔을 소화시키는 과정 자체를 뭉개버리고 자기 자신을 처음엔 하느님, 그 다음엔 세상을 상대로 싸우는 전사(戰士)로 만들어 진정한 치유를 불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 화살, 자기-비난
큰 상실을 경험하고 나서 자기-아픔을 증폭시키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의 실책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자기가 남들한테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 자리에 내가 있었어야 했어.” 또는 “하필 그 무렵에 내가 너무 바빴어. 그래서 그 사람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지.” 그밖에도 우리는 파경으로 끝난 결혼생활, 실직, 발병(發病), 통제되지 않는 감정폭발 등에 대한 책임을 자기 자신한테 묻는다. 자기-비난의 두 번째 화살로 아픈 상처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어쩌자는 건가? 우리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무마하는 한 방편으로 자기-비난을 활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만사에 준비가 잘 되어있고 골치 아픈 일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실패하면 자기를 지키는 두 번째 방어선이 남들보다 먼저 자기를 채찍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달라지면 앞으로 올 더 많은 고통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한 전쟁은 고통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내 병이 이 사실을 거듭거듭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가파른 층계를 오르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러니까 좀 더 조심했어야지.” 아니면 “제 몸을 함부로 굴리는 못된 버릇을 언제 고칠 거야?”라고 중얼거린다. 그렇게 미리 조심하지 못한 자기를 비난하고 그에게 탓을 돌리는 거다.
케이프 코드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나는 몸에서 엔도르핀이 솟구치는 걸 느끼며 해변을 빠르게 달렸다. 그게 잘못이었다. 버지니아로 돌아오자 계단을 오르지 못할 만큼 무릎이 아프고 온몸이 쑤셨다. 통증은 몇 주간 계속되었다. 조나단이 나를 돌봐주어야 했고 나는 속절없이 의기소침한 병자가 되었다.
어느 날, 명상시간에 스스로 물어보았다. “나와 지금의 느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처음에는 어느새 익숙해진 통증과 신열(身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분노와 좌절의 파도가 느껴졌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날마다 나 자신을 가두어놓고 병을 앓았던 것이다. 내 머리에서 한 음성이 말했다. “이런 상태로 있는 게 싫다.… 내 인생이 싫어!” 이어서 같은 음성이 말했다. “나는 내가 밉다.”
오랜 동안 내 속에서 울리는 자기-혐오의 음성을 듣지 못했는데 그 순간 눈이 열렸다. 나는 탐색을 시작했다. 내가 미워하는 게 정확히 누구인가? 그것은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도록 비참해진 나, 유머가 없고 우울한 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약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만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그토록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 자신이었다.
자기-혐오가 절망의 홍수를 일으켰다. 나는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하는 나를 보았다. “이더는 잘할 수 없다. …더는 잘할 수 없어.” 마치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 안의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시도하고 다시 시도해보았지만 몸의 아픔 때문에 나 자신을 좀 더 괜찮고 덜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 수 없었다. 가슴이 말랑해지더니 그리로 한 줄기 슬픔의 개울이 흘렀다. 내가 자기한테 몰입하여 사랑하는 이들한테서 나를 격리시켰고 내 가슴으로부터도 나를 떨어뜨려놓았던 것이다. 나는 기도했다. “제발… 이 병을 앓는 동안 나 자신한테 친절을 베풀게 해주십시오.”
착한 사람 되려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의 모든 사람이 착한 사람 되는 것이 칭찬과 상 받는 비결임을 배운다. 무엇을 상실할 때도 우리는 같은 교훈으로 돌아간다. 내가 착하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내가 착하면 사랑과 평안을 얻을 것이다. 내가 착하면 누군가 나를 돌봐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또는 운명과 흥정을 하게 된다. 나쁜 음식 먹지 않고 열심히 수련하고 남들한테 너그럽겠다고 약속하면서 정규적으로 기도한다. “심장마비가 재발되지 않게 해주시면 식구들한테 화내지 않겠어요.” “그녀가 돌아오게 해주시면 술을 끊겠습니다.” 그런 일이 끝내 일어나지 않아도, 그런 상태로 죽어가면서도, 우리는 착한 사람, 괜찮은 사람, 깨달은 사람으로 (본인과 남들에 의하여)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한다.
당신은 왜 이것이 거짓 도피처인지 의아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거나 남들한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 나쁜 일인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는 것이 나쁜 일인가? 문제는 자기 인생을 근사하게 경영하느라고 오히려 그것을 꽉 채워 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스스로 만든 ‘착한 사람’의 기준에 자기를 맞추려고 에너지를 모두 써서 세상에 나눠줄 수 있는 자기 속의 위안과 친절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
줄리아는 우리 명상모임에 착실히 나오는 사랑스러운 멤버였다. 유방암이 재발되자 그녀는 명상수련에 더욱 열심을 내기로 마음먹고 치료가 계속되는 동안 나와 정규적으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녀는 우리 모임에 자원봉사자로 계속 참여했다.
어느 날 오후, 그녀가 벌거숭이 머리를 밝은 색 스카프로 가리고 힘없이 벽에 기댄 채 모임에 새로 들어온 신참 멤버를 격려하는 모습이 보였다. 휴식 시간에 그런 식으로 에너지를 써도 되겠느냐고 그녀에게 물어보니 그녀가 말했다. “누구를 도와주면 나 자신에 대하여 기분이 좋아져요.” 그리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느님은 아시겠지요. 내가 다른 사람 걱정 좀 그만할 필요가 있다는 걸…” 줄리아는 자기가 집에 도착할 때 거의 파김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줄리아는 병원 가까이 살았고 그래서 방사선 치료실까지 늘 걸어서 다녔다. 친구들은 남의 도움을 거절하는 그녀의 고집불통을 걱정했다. 한 친구가 말했다. “그 친구 병이 악화돼서 어쩌면 회복이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언제 우리가 자기를 도와줄 수 있게 해줄는지 모르겠네요.”
나와 만났을 때 줄리아가 말했다. “통증이 올 때에는 아무도 곁에 없으면 좋겠어요.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도록…” 내가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 엄청난 고통을 혼자서 겪다니.”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음… 아무튼 난 누가 곁에 있는 게 싫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독한 외로움이 느껴지지요. 내가 보는 세상은 모든 것이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세상이에요. 그리고 나는… 나는 암 걸린 몸속에 갇혀있지요.”
내가 물었다. “그럴 때 누가 당신 곁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줄리아가 침묵 끝에 조용히 말했다. “왜 사람들이 내 곁에 있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이러고 있는 내가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고 고단한 듯 등을 의자에 깊숙이 묻었다. 내가 말했다. “줄리아, 이런 이야기를 당신과 나눌 수 있어서 기뻐요. 당신한테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군요. 할 수 있으면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었으면 합니다.”
그녀가 한숨을 깊이 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용감하고 적극적인 줄리아, 영성 깊은 줄리아를 보고 싶어 하지요. …얻어맞아 녹초가 된 여자… 삶을 계속할 가치가 있는지도 분명치 않은 환자가 아니라…” 그녀는 다시 한숨을 쉬고 피곤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명상과 영적 성숙에 대하여 가졌던 신뢰들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때가 있어요. 나는 그저 상처 입은 고독한 환자일 뿐입니다. …그런 나를 사람들한테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거든요.”
감독관 마주 대하기
줄리아가 투병하던 같은 시기에 화학요법을 받던 다른 친구한테서 메일이 왔다. “나는 암이, 그리고 그 치료가, 그동안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던 것들을 하나씩 둘씩 제거해버리는 과정임을 발견하는 중입니다. 어제는 머리를 삭발했어요. 스스로 바닥에 떨어지고 모든 것을 놔버리는 절망의 코스였지요.”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은 착한 사람, 괜찮은 사람, 존엄한 사람, 영적인 사람이라는 자아상을 한꺼번에 거둬갈 수 있다. 그것은 내가 ‘감독관’(controller)라고 부르는 ‘우주복 자아’의 정체를 마주 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감독관은 우리가 중대사를 결정하고 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데 책임이 있다고 믿는 에고의 집정관이다. 그는 강박적으로 계획하고 염려하고 모든 일을 안전하게 하려고 애쓰며 그렇게 해서 일시적으로나마 자아를 인정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뼈아픈 상실은 이 감독관을 직위해제하고 만다. 우리는 결혼생활을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나 자신(또는 배우자)을 변화시킬 수 없다. 투병 과정에서 스스로 자기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아버지를 말릴 방법이 없다. 딸의 식욕감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없고 장성한 아들이 제 자식 닦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직장생활을 계속할 마음이 들 정도로 사장을 바꿔놓을 수 없다. 줄리아처럼, 희망이 허락되지 않는 질병 앞에서 신앙을 유지할 수도 없다.
자기-방어 기제가 무너질 때 우리는 형편없이 나약해진다. 아니면 분주한 일감 속에 숨거나 자기와 남들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감독관을 부활시키고자 허우적거린다. 하지만 거기에서 틈을 찾으면, 그래서 자기와 세상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현존한다면 오히려 치유가 가능할 수도 있다.
더 깊은 승복(承服)
나의 감독관은 한 번 시동이 걸리면 몇 달씩 당황하여 정신을 못 차린다. 내가 일할 수 있을 때, 학생들을 가르치고 명상수련 모임을 인도하고 남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 그럴 때는 발밑이 든든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수년 전, 겨울 명상수련 모임을 시작하기 직전에 내 몸이 부서졌다. 나는 곧장 병원으로 실려 갔다. 누구를 가르치는 건 관두고 글을 읽거나 산책을 할 수도 없었다. 맥박 측정기를 끌지 않고서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나는 늦도록 잠들지 못했던 입원 첫날밤을 기억한다. 새벽 3시, 간호사가 몸 상태를 체크하러 왔다가 내 차트를 보고는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속삭였다. “기분이 안 좋으시겠네요. 그렇죠?”
그녀가 방을 나가자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그녀의 친절이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인지를 실감케 해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악화될 것인가? 다시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명상교실을 계속 꾸려갈 수는 있을까? 자신의 미래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루미의 시가 다가왔다.
미래를 잊어라…
그럴 수 있는 이가 어디 있다면
나, 그를 숭배하리라.
그대가 “앞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러면 그대 앞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픔 안에 아픔의 치유가 있다.
나는 이 한 구절을 외고 또 외었다. “앞에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미래에 대한 모든 생각이 물러났다. 그 빈자리를 가슴 저미는 거친 두려움이 채웠다. 호흡과 함께 그 두려움을 지켜보자니 깊고 아린 슬픔이 느껴졌다. 나는 자신에게 말해주었다. “그냥 여기 있는 거다. ‘이것’에 나를 열어두자.” 아픔이 가슴을 당기며 찢어놓았다. 나는 같은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숨 죽여 흐느끼며 밀려드는 슬픔의 파도에 부서지고 또 부서졌다. 한 가련한 인생이 불타는 제 집에서 여리고 덧없는 자신의 불가피한 상실을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울음이 잦아들자 한 줄기 안도감이 느껴졌다. 완전한 평화는 물론 아니었다. 병들어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것이 여전히 두려웠다. 그래도 내 인생의 감독관이 되어야 한다는, 나의 미래를 운영하고 이 상실을 상대로 투쟁해야 한다는, 무거운 생각의 짐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어쨌거나 내 인생이 내 손에서 벗어난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1분에 마흔다섯 번을 넘지 못하는 맥박,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의사들,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음식,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날들… 그렇게 병원에서 보낸 엿새가 나에게는 승복(surrender)을 겸허하게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어떻게든지 자기 자리를 확보, 유지하려는 감독관의 끈질긴 노력이었다.
입원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심장병동 둘레를 걸으며 갈수록 쇠약해지는 나의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내 마음은 곧장 미래로 달려가 어떻게 하면 망가진 삶을 회복할 것인지, 무엇을 취소하고 어떻게 이 약해진 몸을 추스를 것인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감독관이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을 보면서 침대로 돌아와 그 위에 몸을 던졌다. 한참 누워있자 돌고 돌던 생각들이 사라지면서 수면 아래 깊은 슬픔 속으로 내 몸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티베트 교사 최걈 트룽파는 사람을 해방시키는 수련의 정수(精髓)가 “자신의 끝자리(edge)를 만나 거기에서 말랑말랑해지는(soften) 것”이라고 가르쳤다. 내 끝자리가 바로 거기였다. 아프게 느껴지는 외로움, 미래에 대한 절망,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두려움… 나는 내가 말랑말랑해질 필요가 있고 그래서 자기를 열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디에서 가장 예민하게 아픔이 느껴지는지 알아보려고 집중했지만 감독관이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아무래도 슬픔의 블랙홀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는 부드럽게 그리고 침착하게 몸의 감각을 느껴보자고 스스로 격려하며 나를 말랑말랑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슬픔의 끝자리가 아플수록 그만큼 내면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드디어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타라, 우리 그냥 말랑말랑해지자. …놔두는 거야. 괜찮아, 괜찮다고!” 나는 뼈아픈 슬픔의 나락에 떨어졌고 바로 거기에서 순수한 사랑이 가득 찬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사랑이 나를 감싸고 붙잡고 내 존재를 채워주었다. 자신의 끝자리로 밀려나 거기에서 말랑말랑해지는 것이 영원한 사랑의 현존 속으로 죽어 들어가는 길이었다.
어떤 점에서 병원은 훌륭한 수련장이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고 오래 혼자서 외로워야 하고 끊임없이 달려드는 무력감에 시달려야 하는 곳, 거기가 병원이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일러주었다. “사랑하는 타라, 우리 그냥 말랑말랑해지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긴장될 때마다 나는 그곳이 나의 ‘끝자리’임을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나 자신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자기한테 베푸는 친절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감독관도 여전히 오락가락했지만, 나는 열린 가슴의 현존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신뢰할 수 있었다.
슬퍼하지 않는 상실
슬픔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진정한 승복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때의 슬픔은 건강하고 깨끗하고 지성적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실의 아픔을 충분히 소화시켜 계속 살아갈 힘을 준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게 해준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경우, 그들의 감독관이 슬픔을 충분히 받아들이게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받은 학대, 성폭행, 이혼으로 헤어진 부모, 중독에 빠져서 보낸 세월, 가까운 친구의 죽음―이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그들의 몸과 마음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슬퍼하지 않는 상실(un-grieved loss)은 그 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삶에 온전히 결속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 결과 일종의 멍한 상태로 되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이나 소중함에 시큰둥하거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언짢은 일에 기계적으로 분노한다. 그렇게 해서 슬픔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다가 값진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저스틴과 내가 처음 전화로 상담하고 나서 몇 달 뒤에 그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보험회사와 통화하면서 부닥뜨린 옹벽(wall)에 대하여 말할 때 그의 음성이 분노로 떨렸다. 자기 어머니의 회복이 보험회사의 신속한 처리에 달렸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망할 놈의 관료주의…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아무것도!”
저스틴은 다시 한 번 상실의 그림자 앞에 서야 했다. 우리는 지금이 ‘레인’(RAIN) 수련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데 동의했다. 그는 신속히 자신의 감정에 ‘순수하고 정의로운 분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잠시 멈추어 그것이 거기 있게 했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가슴…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아요. 커다란 발톱이 움켜잡은 것처럼. …겁이 나요.”
“무엇이 두려워요?” 내가 부드럽게 물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용케 고비를 넘기실지 모르지만, 결국 어머니를 잃게 될 터인데, 그게 무서워요.”
우리는 전화기를 든 상태로, 저스틴이 자기 가슴의 두려움을 호흡과 함께 지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윽고 그가 주말에 다시 전화하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아픕니다. 아무래도 이 아픔과 함께 있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며칠 뒤 그가 말했다. “타라, 뭔가 왕창 부서졌어요. 엄마에 대한 걱정이 도나의 죽음에 얽힌 겁니다. 바로 엊그제 도나가 죽은 것 같아요. 내 안에 있는 누가 다시 죽어가고 있다고요.” 저스틴은 다음 말을 잇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도나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지 않았어요. 내 속의 누가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 없었던 겁니다.” 마침내 그가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리 안의 감독관이 일단 자리에서 내려오면 적나라한 현실이 문을 열고 다가온다. 그날, 저스틴의 감독관은 해고되었고 그는 받아들이기 싫은 ‘아픈 상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 뒤로 두 달 동안 저스틴은 어머니 보살피는 일에 집중하면서 가끔 벽에 대고 테니스공을 치거나 빈방에 홀로 앉아 잃어버린 도나를 다시 잃는 슬픔에 잠기곤 했다. 그녀의 죽음이 비로소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슬픔 또한 어쩔 수 없이 ‘때’가 있는 법이다. 아일랜드 시인 철학자 존 오’도노휴가 노래하듯이,
그대 지금 의지할 유일한 것은,
슬픔이 제 스스로 충실하리라는 사실이다.
슬픔은 그대보다 잘 알고 있다,
가야 할 제 길이 있음을.
눈물에 젖은 두 뺨의 둔덕이
마지막 한 방울을 삼키는 그날까지,
슬픔의 끈을 당기고 또 당기리라는 것을.
저스틴이 드디어 자기 눈물의 둔덕을 허물어뜨려줄 ‘현존’의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우리의 마지막 상담에서, 그는 일터로 돌아간다고 했다.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누이가 그러네요, 네가 이제는 세상을 상대로 전쟁하는 것 같지 않다고…”
맑게 깨어 있으면서 ‘상실’을 충분히 슬퍼하는, 여기에 영성의 길이 있다. 사람이 상실의 아픔을 피해보려고 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 상실이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실일 경우, 우리는 우리의 슬픔이 제 길을 충실하게 가도록 지켜볼 수 있다. 슬픔에 승복하고 그렇게 해서 가는 것을 떠나보내고 아직 남아있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제발 나를 사랑해줘요”
인도의 스승 스리 니사르가닷타는 말한다. “머리(mind)는 수렁을 만들고 가슴(heart)은 수렁을 덮는다.” 때로는 두려움과 외로움의 수렁이 너무 크고 깊어서 우리를 뒷걸음치게, 그리하여 아픔으로 얼어붙어 현존의 성소(聖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럴 때 우리는 해빙(解氷)을 위해 다른 어디에서 오는 따뜻한 사랑의 기운이 필요하다.
우리 명상모임의 멤버인 줄리아가 암 치료를 받으면서 그런 일을 겪었다. 통증과 외로움을 호소하며 불평하는 그녀에 대하여 친구인 안나는 “겨우 자리를 버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줄리아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의존해야만 했다. 친구들이 조를 짜서 그녀에게 음식을 마련해주기로 했다. 어느 날 밤, 안나가 수프를 끓여 가지고 갔을 때 줄리아는 벽 쪽으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줄리아가 낮은 음성으로 안나에게 고맙다고 수프를 난로 위에 두고 가라고 했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아는 한동안 그대로 누워있었다. 익숙한 고독감이 밀려오면서 자기가 죽어가는 몸으로 텅 빈 방에 혼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따뜻한 손길이 부드럽게 그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안나가 문만 닫고 그녀 등 위에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숨죽인 흐느낌이 소리 나는 울음으로 바뀌었다. 안나가 속삭였다. “그래, 울어라, 맘 놓고 울어.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자. …괜찮아.” 그녀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괜찮아, 줄리아. …우리 여기 함께 있어.” 마침내 줄리아가 자기를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슬픔에 저항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눈물 콧물로 휴지를 적시며 20분쯤 울고 나서 줄리아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여전히 속이 메슥거리고 기운이 없었지만, 본인의 기억으로는 “난생처음” 깊은 평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주에 줄리아가 나에게 말했다. “세상과 나 사이에 세워두었던 방패가 녹아버린 것 같아요. 안나가 떠난 뒤에도 그 친구 숨결을 느낄 수 있었지요. 외로움은 가버렸어요.” 하지만 며칠 뒤 그녀의 방패가 다시 견고해졌다. 의사한테서 암 덩이가 더욱 켜졌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전보다 훨씬 더 소외된 느낌이었어요.”
내가 물었다. “그 방패, 아직 있나요? 여전히 외롭다는 느낌이에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처럼 지독하진 않아요. 이렇게 우리가 함께 있으니까요. 그래도 내 속 어딘가에 두려움이 남아있어요.”
“잠시 시간을 내어 그 두려움이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알아봐요.” 줄리아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두려움에 연결된 감각이 몸의 어느 부위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지 알겠어요?”
한참 동안 줄리아는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랑을 원해요. 그냥 내 사랑만은 아니고…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그것이 ‘제발 나를 사랑해줘요’라고 말하는군요.”
“줄리아, 그 사랑에 대한 갈망을 키울 수 있는 만큼 키워요. 그러고는 밖에서 구경하듯이 느낌을 지켜보는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양미간에 주름이 잡히도록 눈을 감았다.
“누구한테서 그 사랑을 가장 원하는지… 그 사람이 마음에 떠오르면 그에게 말해요. 제발 나를 사랑해달라고. 그러고는 당신이 그에게서 사랑받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보세요.”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앉아 있다가 한숨 쉬듯이 소리 내어 속삭였다. “제발 나를 사랑해줘요.” 차츰 목소리가 굵어지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계속해서 누구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그려보라고, 그에게 나를 사랑해달라는 말을 하라고 부추겼다. 그녀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울음소리가 잦아들어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말과 소리가 모두 사라지고 깊은 침묵의 공간이 열렸다. 그녀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눈을 떴다. 눈에서 빛이 났다. “내가 축복받은 느낌이에요.” 그녀는 말했다. “내 몸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요.”
3주 뒤 줄리아는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녀가 죽기 전에 한 번 더 만났다. 안나가 아침 일찍 아직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은 공원으로 줄리아를 데리고 왔다. 우리는 담요를 깔고 명상에 잠겼다. 줄리아는 편안한 얼굴로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더 살는지 그건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더욱 이 순간이 소중하네요. 머잖아 헤어져야 할 나의 사랑하는 것들, 친구들과 명상모임 식구들… 그리고 당신 두 사람… 흔들리며 춤추며 노래하는 나무들…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녀가 눈물이 뺨으로 흐르게 놔두고서 애잔한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 내 등을 받쳐주는 참나무의 든든함이 느껴져요. 그날, 난 기도하기 시작했지요. ‘제발 나를 사랑해줘요.’ 그러자 곧장 거기 있던 사랑이 나를 감싸며 세상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나와 한 의식(意識)임을, 일깨워주었지요. 그러자 풀들과 잡목들, 새들, 땅과 구름… 안나와 타라,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게 느껴졌어요. 우리 모두 한 의식 안에서 하나인 사랑을 나누고 있지요. 내가 바로 그 사랑이었어요. 나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인 사랑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줄리아가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타라,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아요? 사람이 자기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때 그는 사랑을 향하게 되고 하느님과 자기가 하나임을 느끼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지요.”
우리는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렇게 앉아서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묵상하였다. 어느새 무겁던 대화가 가벼운 수다로 바뀌었다. 우리는 집에서 기르는 개들 이야기, 다가오는 명상수련 모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깊은 평안에 잠겨들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몇 번이고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만물이 하나임에 대한 줄리아의 깨달음이 깊고 달콤한 사랑으로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줄리아는 잊지 못할 작별선물로 아픈 사랑과 지혜를 남겨두고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상실의 커튼 너머로
인디언 부족 라코다 전통에서는 슬퍼하는 사람을 최고의 ‘와칸’(거룩한 사람)으로 대접한다. 어떤 사람이 갑작스러운 상실을 당하면 그 순간 그가 영계(靈界)의 문지방에 서 있다고 믿는다. 슬픈 사람의 기도에는 특별한 힘이 있어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보통이다.
당신도 깊은 슬픔에 젖어있는 사람 곁에 있어봤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보호할 무엇이 없고 그가 지켜야 할 무엇도 없다. 신비가 그의 눈을 통해서 드러난다. 충분히 슬퍼하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면 마침내 온전한 현존과 깊은 지혜가 그를 찾아온다.
틱낫한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준 방식으로 이 지혜를 표현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일생에서 겪어야 했던 가장 큰 불행이었다. 1년 넘도록 슬픔에 젖어있던 어느 날 그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꿈속에서 그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다. 그는 밤중에 일어나 자기가 결코 어머니를 잃지 않았다는 생생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자기 안에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움막에서 나와 차밭 길을 걷는 동안에도 계속 자기 곁에 있는 어머니의 존재를 느꼈다.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부드럽게 그리고 달콤하게 나를 어루만지는 달빛이었다.” 그는 걷기를 계속하면서 모든 조상들이 자기 몸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자기와 어머니가 “축축한 땅에 같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걸 알았다.”
내가 알기로는, 아픈 상실을 슬퍼하며 보낸 1년 남짓 세월이 그로 하여금 영원한 사랑 안에서 도피처를 찾게 했던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아무도 가져갈 수 없는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아픈 상실의 강(江) 앞에 승복해야 한다. 이 진실을 틱낫한은 이렇게 표현한다. “어머니가 늘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이나 발에 밟히는 흙을 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잃든지 아니면 다른 누구를 잃든지, 우리 모두 이별의 커튼 너머를 볼 수 있다. 우리 가슴이 하고자만 한다면 상실의 슬픔을 영원한 사랑으로, 깨어난 본성으로 들어가는 문턱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이 제 일을 모두 마치면
그대 상실의 아픈 상처는 치유되고
그대 눈을 허공에서 떼어놓을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그대 가슴 속으로,
귀향하는 그대를 사랑하는 이가 기다리는
그대 영혼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존 오’도노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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