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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남도답사를 해 보리라 맘먹은 지 언 십여 년이 흘렀다. 월출산과 도갑사. 월남사지. 무위사. 영랑생가. 다산초당. 백련사. 녹우당과 윤고산 유물전시관, 대흥사. 미황사. 땅끝마을. 남도 들녘, 그리고 곳곳에 소문난 맛집 등등 어림잡아 1주일은 짬을 내야만 가능한 답사다. 어떤 품목의 유물이든 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전문가는 제쳐 놓고서라도 취미를 가질 수준만 되어도 한 번쯤 읽었을 법한 공개된 내용들이다. 나 또한 오래전부터 서책으로 읽어서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진경(眞景)을 본다는 것은 목마름에 냉수 한 그릇 마시는 것처럼 갈증 해소와 마음에 포만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문화유산 답사란? 약간의 예비지식을 갖추고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가야 그곳에 서려있는 인공적 아름다움과 문화 미의 알갱이를 취할 수가 있다, 하나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이유는. 도보여행을 빙자해서 문화답사를 한다는 것이 잃어버린 옛 정취를 담아 오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또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흥사에는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한 유물이 셋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가치일 뿐 예술적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예술적 감동은 그 시대 문화 미라 할 수 있는 정신적 가치가 포함되어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답 사적 가치가 낮은 것은 물론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눈 뜨고 나면 늘 시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대상이기에 四계절마다 느낌은 다르지만 별다른 설명 없이도 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예술미라는 인공적 아름다움과 문화 미라는 정신적 가치는 그 나름의 훈련과 지식이 없으면 쉽게 감동받기가 어렵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대흥사 당우(堂宇)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관심 가졌던 몇 가지만 얘기하고자 한다, 각 당우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 서예의 집약이기도 한 대단한 명품 들이다. <대웅보전,원교 이광사의 글씨> <무량수각,추사 김정희 글씨> <천불전, 침계루, 원교 이광사 글씨> <가허루, 창암 이삼만 글씨> 대웅보전(大雄寶殿). 천불전(千佛殿). 침계루(枕溪樓)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며. 표충사는 정조대왕의 친필이고 가허루(駕虛樓)는 소위 호남에서 물 흐르는 것처럼 자유로운 필체를 구사하여 유수체(流水體)를 만들어 낸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글씨고. 대웅보전 옆 승방에 걸려 있는 백설당(白雪堂) 현판 글씨는 구한말 명필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편액이다. 그리고 백설당과 같이 좌측에 걸려 있는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께 써 주었던 글씨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 명필들의 작품이 한 곳에 모여있는데도 서예의 예비지식과 안목이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방문객 대부분이 그냥 지나친다. 대흥사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인 이 건물은 1667년(조선 헌종 8년)에 지어졌으나 1899년(대한제국 광무 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심수(心粹) 스님이 3년에 걸쳐 중창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불이며 부처님 뒷면에 있는 탱화는 1901년에 봉안되었다. 귀기둥을 제외한 전면 기둥 상단에는 용머리를 새기고 쇠서에도 연꽃을 새겨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면에는 각 칸마다 빗살무늬의 2분 합문을 달았다, 그리고 대웅보전 돌계단 머릿돌에는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어 나의 눈길을 끈다, 돌계단 머릿돌에 이처럼 호신수를 새기는 것은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에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호신(護身) 역할을 하기 위한 상징적 장치이다. 전국 사찰 중 몇 안 되는 곳에서만 불 수 있는 이 돌사자는 인상이 아주 매섭게 생겼다. <천불전> "천불전" 2013년 8월 5일 보물 제1807호로 지정됨,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인 천불전의 내력을 보면 (千佛造成略記)에 1811년 (嘉慶16년) 2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지장전, 팔 해당, 용화전, 적조당, 천불전, 대장전, 약사전, 가허루 가 하룻밤에 모두 불에 탔다고 기록하고 있다. 2년 후인(1813년)에 다시 건물을 지었는데, 당시 중건 주는 초의선사의 스승이었던 완호(玩虎) 스님이었다. 또 완호 스님은 경주 기림사로 가서 화원들에게 옥돌로 천불을 조성토록 하였으며, 1817년 11월 두 대의 배를 이용하여 해남으로 운반 도중 풍랑을 만나 배 한 대가 일본에 표류하였다가 돌아와 1818년 8월 15일에 천불전에 봉안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일본 표해록.日本漂海錄) 천불전의 창살은 사방연속무늬의 꽃 살창으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궁궐과 민가 문살은 대개 우물井자 띠살문을 써서 단아하고 절제된 문양과는 달리 절 법당 문살은 꽃무늬로 매우 화려하게 꾸민다, 그 이유는 부처에 바치는 공양 가운데 제일 으뜸이 꽃이기 때문이다, 내부 천장은 빗 천장과 우물천장의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꽃살 무늬의 극치를 장식한 천불전은 우리나라 절간에 현재 남아 있는 천불전 중에서 단연 최고를 자랑한다, 띠살문을 45도로 기울여 조금 멋을 낸 것이 빗살문이고 빗살 교차점에서 수직으로 창살을 관통시켜 조금 더 복잡한 문살무늬가 솟을 빗살문이라고 한다, 부안 내소사 창살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작들이다. <13대종사와 13대강사들의 납골당, 부도밭> 대흥사 입구 피안교를 건너 "두륜산 대흥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천왕문을 지나면 길 오른쪽으로 고승들의 사리탑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 밭이 있다. 여기에는 서산대사 이래 13대 종사(大宗師)와 13대 강사(大講師)의 납골이 모셔져 있다. 이 한 시대의 고승 스물여섯 분의 삶과 사상을 다 배워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중 한 분 초의 스님만이라도 알고 싶은 것이다. <내용 중 일부는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인용하였다.> 안쪽 부도 탑이 훤히 보일 정도의 낮은 긴 담, 그 중간쯤에 문이 달렸지만 아뿔싸. 들어가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어느 누가 일 없어 고승들의 납골당에 해코지할까? 담 밖에서 초의 스님의 부도 탑과 탑비(塔碑)를 눈을 비벼가며 겨우 찾았다, <초의선사의 종탑 부도이다> 초의 스님 비(碑)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가 썼다고 배웠는데, 가까이서 확인 못한 것이 아쉽다, 다만 비(碑) 전(鋑)만 "초의 대종사 탑명"라고 확인된다, "대흥사의 유래" 두륜산의 원래 이름은 "한듬" 이였다. 국토 남단에 불쑥 솟은 그 형상에서 생긴 말이란다. 이것을 한자어와 섞어서 "대듬"이라고 부르더니 나중엔 대둔산(大芚山)이라 불리게 됐고 "한듬 절"은 "대듬절"에서 "대둔사"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중 또 유식한 자가 나타나서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여기서 다시 뻗은 태백산 줄기의 끝이라는 뜻에서 백두산과 곤륜산에서 한 자씩 따서 두륜산(頭崙山)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일제 때 전국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륜"자를 바꾸어 두륜산(頭輪山)이라고 하고 대둔사는 대흥사로 바꾸어놓았으니 이제 와서 두륜산 대흥사라는 명칭 속에서 "한듬 절"의 의미와 이미지는 영영 사라지게 되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치장하다가 나중엔 원래의 뜻마저 잃어버린 그야말로 족보 없는 미아가 되고 말았다. 대흥사 내력은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등,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등. 그 창건 설화가 구구하다. 그런데 대흥사 12대 강사로 강진 백련사에서 다산 정약용과 가깝게 지냈던 혜장(惠藏) 스님은 <만일암 고기(輓日菴古記)>에서 이 모든 설화가 터무니없음을 증명하고 나섰다. 혜장 스님의 이런 실증은 초의 스님에게 이어져 그는 (대둔 사지)를 쓰면서 종래의 기록은 "실록(實錄)"이 아닐까 두렵고" 누각 당우가 번성함을 기록하고 있으나 "옛 초석과 섬돌이 하나의 자취도 없으니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라면서 설화를 부정했다. 그리하여 학자들 대부분은 한듬 절의 유래는 나말여초의 어느 때로 짐작하고 있으며 지금 확실한 물증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도 나말여초의 유물들뿐이다. <북미륵암. 마애불,국보 308호,> <응진전 앞 3층 석탑,보물320호> 대흥사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보물 320호). 두륜산 정상 조금 못 미쳐 있는 북미륵암의 마애불(보물 48호)과 삼층석탑(보물 301호). 그러니까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한 대흥사의 세 유물이 모두 나말여초의 시대 양식을 지니고 있다. "서산대사의 유언과 표충사" "한듬 절"이 대흥사로 일약 변신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휴정 서산대사"의 유언 때문이었다. 1605년 1월 어느 날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제자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당신의 의발(衣鉢)을 두륜산에 둘 것을 유언하였다. 두륜산은 해변 한구석에 있어 명산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뜻이 있느니라. 첫째는 기화 이초(奇花異草)가 항상 아름답고 옷과 먹을 것이 끊이지를 않는다. 내가 보건대 두륜산은 모든 것이 잘될 만한 곳이다. 북으로는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괴는 기둥이 되고 남에는 달마산이 있어 지축에 튼튼히 연결되어 있다. 바다와 산이 둘러싸 지키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을 땅이다. 둘째는 나의 공덕을 누가 말할 만하다 않겠는가?(나로 인한 국가에 대한 충성) 이 때문에 보이고 느껴진다면 후세에 저 무표정한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소린들 어찌 우매한 세속을 경고하지 않겠는가. 셋째는 처영과 여러 제자들이 모두 남쪽에 있고 내가 출가하여 머리 깎고 법을 들은 곳이 두류산(頭流山. 즉 지리산)이니 여기는 종통(宗統)의 소귀처(所歸處)이다. 그러고 나서 서산대사는 두 제자 앞에서 자신의 영정을 꺼내서 그 뒷면에 마지막 법어를 적었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八十年前 渠是我. 八十年後 我是渠> 붓을 놓은 서산대사는 결가부좌한 채로 조용히 입멸하셨다. 그의 나이 85세, 법랍 67년이었다. 그리하여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시신을 다 비하여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에 안치하고 영골(靈骨)은 수습하여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하고, 스님의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발우는 대흥사에 봉안하였다,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봉해진 이후 대흥사는 문자 그대로 크게 일어났다. 임진왜란 이후 민간신앙으로서 불교가 중흥했던 그 시대적 추세에 힘입어 수많은 당우가 세워졌다. 절집의 기록에 의하면 1669년에 정면 3칸 맞배지붕으로 표충사를 지어서 여기에 서산대사, 사명당, 처영스님 등 세 분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백여 년이 넘은 후 호조판서를 지내고 있던 서유린(徐有鄰,1738~1802)의 진언에 따라 정조대왕은 표충사라는 어필 사액(御筆賜額)을 내려 해마다 예조에서 관리를 내려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니, 지금 표충사 정면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의중당(義重堂)은 제사 때 제물을 차리던 집이다. 1811년에 대흥사에 큰 불이 나서 극락전. 지장전. 천불전 등 여러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2년 후 완호(玩虎) 스님이 다시 복원하였으니 현재의 대흥사는 그때의 모습이 전해지는 것이다. 서산대사 이후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배출하는 명실 공히 조선의 명찰(名刹)이 되어 6.25 동란 중에도 피해가 전혀 없었는데 해방 이후 어느 날 아름답기 그지없는 탱화 한 점이 사라졌고, 1988년에는 신구(新舊) 주지의 싸움으로 집달리 차압 문서 경고문이 당우마다 붙여지는 과히 아름답지 못한 해프닝도 기록에 남았다, "초의(艸衣)스님" 이제 초의 스님 살아생전의 상주처로서 대흥사의 문화 미를 읽어보자, 초의 스님의 속세 성명은 장의순(張意恂)이며, 1786년 나주 삼향면에서 태어나 5세 때 물에 빠진 것을 어느 스님이 살려준 것이 인연이 되어 16세에 나주 운흥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초의는 월출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 명산을 유람하며 선(禪) 지식을 찾아다니고 불법을 구하다가 대흥사 조실 완호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는 종교로서 불교의 굴레를 벗어 학문으로서 선교(禪敎)를 연구하고 유학(儒學)과 도교(道敎)에까지 지식을 넓혀갔다. 다산 정약용, 자하 신위,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대학자. 문인들과 교류하여 유림(儒林)에서도 큰 이름을 얻었다. 초의는 24세 때 다산 정약용을 찾아가 차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맥이 끊어져가던 차(茶) 문화를 일으켜 "동다송(東茶頌) 같은 명저를 남기었다. 초의는 모든 것을 "있는 것"에서 생각하고 풀어나가고 생활하였다. 범패와 원예와 장 담그기까지 일가를 이루었던 초의, 시(詩), 차(茶), 선(禪)을 모두 하나의 경지로 통합하는 다선 일여(茶禪一如)의 자세로 사셨다, 초의는 자신의 명성이 차츰 세상에 알려지자 은거에 뜻을 두고 대흥사에서 두륜봉 쪽으로 걸어서 족히 3.4십 분은 걸리는 산 중턱에 일지암을 짓고 거기서 두문불출하며 40여 년 지관(止觀)에 전력하니 스님께 사미를 받은 스님이 40명, 보살계를 받은 스님이 70명, 선교와 잡고(雜工)을 배운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른다, 일지암(一枝庵)이란? 당 나라 시인 중(詩僧) 한산(寒山)의 시(詩)에 "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 때문에 나무 끝 한 가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 "라는 시구에서 一枝를 따와 일지암이라 지었다고 안내 푯말에 쓰여 있다, 허나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당대 불학(佛學)은 말할 것도 없고 유학(儒學), 도학(道學)까지 박학다식했던 학승(學僧)인 초의(艸衣) 쯤 되면 방대한 중국 고전에서 인용했겠지 일개 시승(詩僧)의 시(詩) 말에서 따 왔겠는가? 장자(莊子) 소요유 8(逍遙遊)에 이런 말이 나온다, (鷦鷯巢於深林不過一枝, 초료 소 어심림 불과 일지) (鼴鼠飮河不過滿腹, 언서음하불과 만복)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튼다 해도 불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 데 불과하다, "라는 글에서 따온 말로 여겨진다, 고행(苦行)을 하고 불법(佛法)을 연마하여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의리 떵떵한 법당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뱁새가 둥지를 트는데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배를 채우는데 물 한 모금이면 족하지 큰 강물이 필요할 이유가 없다, 실제 초의 스님의 삶의 자세가 그러했다, 초의가 거(居) 했던 일지암은 사방 아홉 자도 채 안 되는 작은 암자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원래의 일지암을 우리는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초의 스님이 입적하시고 난 후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어 버렸다, 지금 우리가 본 일지암은 여러 뜻있는 다인들의 각고의 노력에 힘입어 초의 사후 1백 년 만에 복원한 암자이다, 1979년 6월 5일 공사를 시작하여 1980년 4월 6일 낙성식을 가졌다, 모실(茅室) 6.5평 1동과 15.3평 모정 와가(茅亭瓦家) 1동이다, 이 모실이 지금의 일지암이다. <강암 송성용 글씨> 일지암이란 현판 글씨는 전주에서 주 활동을 하신 강암 송성용 선생께서 쓰신 글씨이며 십여 년 전에 타계하셨다, 생전에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그리고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 전시장에서 몇 번 뵙고 인사드렸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초의는 만보 전서의 채다론을 지리산 칠불암에서 등초(騰抄)하였고 1830년 이곳 일지암에서 정서(正書)하였다, 이것이 차생활의 지침서인 "다신전(茶神傳)이다, 이후 1837년 차생활의 멋과 방법, 그리고 우리 차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해 동다송(東茶頌)을 편찬했고, 이곳 도량에서 40여 년간 거(居)하면서 다선 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실천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셨던 초의선사는 1866년 8월 2일 향년 81세, 법랍 66년에 이곳 일지암에서 조용히 입적하셨다, 이후 일지암은 다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차를 아는 스님만을 주인으로 모신다, 나는 모정 와가(茅亭瓦家)"자우 홍련사" 축대에 걸터앉아 일지암을 바라보고 또 저 아래 드넓은 대흥사의 가람[伽藍]을 바라보며 잠깐 동안 이렇게 읊조렸다, "선사(禪師)님! 당신 같은 분 때문에 이 땅의 불교가 그래도 실낱같은 명맥이 이어집니다, 오늘날 많은 학승이 배출되고 있지만 가엽은 백성에게 나침판 역할을 하는 승(僧)을 보지 못 했습니다, 연보 돈 거둬 의리 떵떵 건물만 지어 대고 환경 파괴만 일삼으니 어찌합니까? 꿈속에서라도 이 무식한 중생들을 살펴 주소서."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주변에 있는 소나무, 대나무, 수양버들, 상수리나무, 봄이면 피어나는 각가지 꽃들, 여름이면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오는 울창한 숲, 암자 뒤편에 졸졸 흐르는 유샘(乳泉), 등등 모두가 초의의 차의 도구이고 무언의 말벗이었다, 일지암 툇마루에 앉아 들어온 좌측으로 보면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 사각진 돌로 쌓아 올린 돌기둥 네 개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정자식(亭瓦家) 누마루 기역 자식 모정 와가(茅亭瓦家)을 한 채 지었다, 당우는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 안에는 다기(茶器)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방으로 들어가는 문틀 위에는 초의 스님의 작은 초상화가 한 점 걸려있다, 원래는 초의의 살림 집이였지만 지금은 "차향기 나는 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찻집이다, 방안 벽에는 일지암을 그린 조그만 묵화 한 점이 걸려 있고 그림 옆에는 "밝은 달과 촛불과 벗을 삼다'라는 초의 스님의 동다송(東茶頌) 글귀가 적혀 있다. (明月爲燭兼爲友.명월위촉겸위우) 밝은 달과 촛불을 벗으로 삼고 (竹籟松濤俱蕭凉.죽뢰송도구소량) 대소리 솔소리 물소리 모두 서늘하니 (唯許白雲明月爲二客.유허백운명월위이객) 객이래야 오직 흰 구름 밝은 달 둘 뿐이니 (道人座上此爲勝.도인좌상차위승) 신선의 자리라한들 이보다 더 좋겠는가, "초의스님과 추사 그리고 차" 초의는 당대 명인, 시인, 묵객, 등등 많은 사람들과 폭넓은 교류가 있었지만 무어라 해도 그의 평생지기는 추사 김정희였다. 두 사람의 나이는 동갑내기였으며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웠다고 한다. 초의는 추사 유배시절 내내 차를 보내줬고, 추사는 그 답례로 말년에 "명선茗禪"(차를 마시며 참선에 든다)이란 글씨를 써서 초의에게 보내 주는데, 이 글씨가 오늘날 추사의 예술품 중에서 백미로 꼽히는 희대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나라 때 비문 글씨에서 그 근본을 구하여 웅혼한 힘과 엄정한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필흭(筆劃)의 변화가 미묘하게 살라 움직이는 추사 예서체의 진수를 보여주는 명작품이다, <명선,茗禪> 양 옆으로 작은 글씨는 작품을 쓰게 된 내력인데 이런 말이다,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다, (중국의 유명한 차인) 몽정과 노아보다 덜하지 않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하는바, (한나라 때 비석인) 백석 신군의 필의로 썼다, 병 거사 예. 草依奇來自製茗, 不減蒙頂露芽, 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隸." 마지막 "병 거사 예"라고 쓴 이유는 아마도 글씨를 쓸 당시 고뿔이라도 걸려 몸이 불편했던 것 같다. 이렇듯 두 사람의 우정은 깊어만 갔다,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1786년 6월 28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금석학자, 고증학 자이며 정치적으로도 출세를 한 분이다, 경주가 본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 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 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조선 금석학, 고증학의 일인자였으며 조선과 중국의 옛 비문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는 또 문인화에도 남다른 일가를 이루었다, <추사의 부작난도.不作蘭圖> 특히 난초를 잘 쳤으며 제주 유배 시에는 불후의 명작 "세한도"를 그렸다,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1830년 아버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헌종 6)에 남녘의 섬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해배(解配)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그가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 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 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추사는 청나라에 외교사절단으로 갔다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고 비문(古碑文)을 찾아 조선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북한산 비봉에 신라진흥왕순수비, 原碑> 원래의 비, 마모가 심하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이다,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입증하는 판독을 해 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예당 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기록되어 있으며,《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등과 같은 저서도 남겼다. 누구든 북한산을 오르는 등산객이라면 한번쯤 "비봉"을 오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비봉 꼭대기 암반 위에 신라진흥왕 순수비가 모조품으로 서 있다, 바로 그 비(碑)이다, 추사는 친구인 김경연과 조인영 등과 함께 비봉 아래 "승가사" 주지스님께 놀러 갔다가 스님에게 고비(古碑)가 하나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추사는 날 듯이 기뻤다, 오랜 풍상과 탄흔(彈痕)으로 인한 균열과 마모가 심해 20여 년 전에 원비(原碑)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관리 중이며 원래의 자리에는 모조비가 세웠졌다, "국보 제3호(1962.12.20.)로 지정되었다, <2006년10월에 세운 모조 비> 나는 희미하게 기억한다, 원래의 순수비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추억을 ……. 후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추사 발견 당시 순수비는 한옥 기와지붕 같은 옥개석이 있었는데 여러 번의 국란과 전쟁의 소용돌이로 인하여 지붕석이 사라져 버렸다, 이 지붕석이 북한산 비봉 아래 어디엔가 묻혀 있는데. <추측> 누구든 발견하여 문화재청에 신고하면 아마도 상당한 포상금의 행운도 주어진단다,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1705∼1777) 원교는 조선 후기(숙종 31) 문인이자 서예가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이며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眞儉)의 아들이다, 아버지 이진검은 당시 소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대대로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지만 영조 등극과 함께 소론이 실각하자 당쟁 속에서 집안이 몰락하기에 이른다, 원교는 51살 때인 1755년 조정을 비방하는 나주괘서 사건에 연루되면서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이후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으나 그 지방 젊은이들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남녘의 외딴섬 신지도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리고 끝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남도에 있는 절 중엔 유배 중이던 그에게서 편액 글씨를 받아와 건 절이 적지 않다. 아래 초상화는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이 그린 원교 초상화이다.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이 그린 원교 초상화> 조선 후기 4대 명필, 한양의 추사 김정희, 평양의 조광진, 전주의 창암 이삼만,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인 원교 이광 사이다, 서예가로서 『원교 필결』란 이론서를 저술하며 원교체라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서체를 이룩한 서예가이며 강화도 정제두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워 강화학파를 형성한 사상가이다, 그의 서체는 당시 중국 영향 아래 있던 서체를 토착화하여 훗날 동국진체(東國眞體)로 만들었다. 그는 그림에도 솜씨를 보였으며 현재도 10여 점의 그림이 전한다. <대흥사, 침계루> 원교 이광사 글씨다, 원교 이광사(1705-1777)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남도 절집 곳곳에 원교 이광사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대흥사를 비롯하여 내소사 대웅전, 선운사 천왕문과 정 와(靜窩),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백련사 대웅전과 만경루. 모두 원교의 글씨다. 당대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음을 반증한다. 그는 강화학파 정제두(鄭齊斗)에게서 양명학을 배워 아들 영익(令翊)에게 전수하였으며,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워진(眞)·초(草)·전(篆)·예(隸)에 두루 능하였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완성하였다, <<원교 필결>> 그의 나이 33세 되던 1737년(영조 13년) 서대문 밖 원교(圓嶠:둥그재)라고 불리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집을 구하여 살았다, 그리고 이곳의 지명을 취해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또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編)에 보면 신선이 산다는 다섯 곳의 산 가운데 봉래(蓬萊). 원교(員嶠)·방허(方虛)·영주(瀛州)·대여(岱輿)에서 원교(員嶠)를 호(號)로 취하였다,
추사는 당대에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학[考證學]의 일인자였다, 그의 스승 박제가의 훈도를 받고,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그 학문과 예술의 번성함을 보고는 더욱 확신을 얻어 여기에 매진하게 된다, 글씨에 있어서도 한나라 때 비문 글씨체의 준경한 법도에 근거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조선의 서체는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개성적이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추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추사는 신학문과 신예술의 기수가 되어 기고만장하게 30대와 40대를 보내고 54세에는 정치적으로도 출세하여 법무부 차관(형조 찬 판)까지 올랐다, 당시 조선에서는 관례상 매년 동짓날 청나라에 외교사절단을 보내는데 이때 추사는 부단장이 되어 꿈에도 잊지 못하던 북경을 30년 만에 다시 발을 딛게 된다, 어찌하랴! 그사이에 정변이 일어나 추사는 급기야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다행히 친구인 영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절해고도인 제주도 귀양길에 오르니 그의 인생의 허망과 그리고 역사에 찬란히 기록되는 출발점이다,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나게 된다, 유배 가는 처지이지만 그의 기개는 살아 있어 대흥사의 현판 글씨들을 비판하며 초의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이광사인데, 어찌 학문을 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 "라며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한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 이겨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가 즉석에서 써준 글씨를 달았다, 이 글씨가 대웅보전 옆 승방 백설당 건물에 걸려 있는 그 유명한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 글씨이다, 추사 글씨 무량수각이 이런저런 이유로 유명세를 타다 보니 전국 각지 사찰들 치고 모각(模刻) 하나 안 걸린 절간이 없다, 제주도 귀양살이 7년 3개월, 햇수로는 9년, 추사는 유배 중 부인의 상을 당하고, 유배 중 회갑을 맞았으나 축복해주는 이 아무도 없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의 외로움을 맛보았다, 처음에는 자주 찾아주던 제자들의 방문도 뜸해졌다, 그런 중 변치 않고 서책을 구해다 주는 "이상적"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헤진 몽당붓으로 그림 한 점을 그려준다, 바로 이 그림이 훗날 천하의 명품 되는 세한도(歲寒圖)이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추운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 외로움, 억울함,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추사는 글씨를 쓰고 또 썼다, 한나라 비 문체 등 각체를 두루 섭렵한 추사는 여기서 자신의 감정을 듬뿍 실은 개성 실은 글씨를 만들어내니 그것이 곳 추사체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 예술품은 큰 고통을 체험한 후에 탄생되는 것이다, 1848년 12월 63세의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햇수로 9년 만에 해방이었다, 추사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동안 物心兩面(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초의를 만나 회포를 풀던 자리에서 추사는 초의에게 이렇게 말한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는가?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 못 보았어" 나는 고인들의 글에서 이런 대목을 읽으면 감동이 복받쳐 눈물을 아니 흘릴 수가 없다,
원교와 추사는 노론과 소론의 서로 다른 정적의 입장이고, 추사는 9년의 유배살이를 마치고 이제 중앙무대에 서면 승승장구할 사람인 반면 원교는 종신유배인 처지며 몰락해 가는 가문의 늙어가는 한 선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추사는 유배 9년만에 지난 날 자신의 옹졸했던 행동을 후회했다.
고금(古今)에 권력을 잡거나 공부깨나 했다는 인간들 보면 대체로 아집에 똘똘 뭉쳐 자기만 옳고 상대방은 인정치 않는데 비하여, 추사는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신지도에서 얼마나 울분을 토하며 살까를, 외로운 귀양살이 9년을 살면서 깨달은 것이다, 그는 분명 영광의 북경도 필요했겠지만 아픔의 제주 유배도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존경받는 추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원교의 현판 글씨가 걸려있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승방인 백설당 건물에 추사가 귀양 가며 썼다는 "무량수각"이 걸리게 되었으니 우리는 여기서 조선의 두 명필이 보여준 예술의 진수를 비교하며 원 없이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해탈문> 원교의 글씨체는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뾰족한 송곳으로 땅을 그는 아릿아릿한 느낌이라면, 추사의 글씨는 획이 살지고 아무 기교도 부리지 않았지만 개성이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하면 원교의 글씨는 한여름 시원한 오이냉국 같은 더위를 식혀 주는 맛이라면, 추사 글씨는 두툼하고 투박한 한겨울 뜨끈뜨끈한 된장찌개 같은 구수함을 준다, "침계루 외벽에 그려진 호랑이와 가재의 설화" <대흥사 침계루 외벽에 그려진 호랑이와 가재 그림 이야기>
일반적으로 호랑이 그림은 우리 민화(民畵)에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다, 헌데 어찌 부처님 모시는 절간에 등장했을까? 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무에 매달려 있을까?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도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하다. 노송에 네 다리가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호랑이, 방정맞기까지 한 호랑이 그림이 왜? 그것도 위엄 서린 사찰에 그려져 있으니 더 궁금하다, 대흥사 산신각에 있는 호랑이는 위엄이 넘치는데 이 호랑이에게선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배시시 웃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얄밉기까지 하다. 가재 그림은 또 무슨 의미일까?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날 아마도 호랑이들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나 보다. 대흥사에 큰 스님과 호랑이가 살고 있었단다. 호랑이는 부처님이 계시는 사찰에 나쁜 악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한마디로 절을 찾아오는 중생들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매일같이 반복되다 보니 일이 따분했던 모양이다, 때가 되어도 고기 한 점 맛보지 못하고 채식만을 해야 하니 절 생활이 고달프기까지 했다. 지천에 널려 있는 산짐승들. 저것들을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입맛만 다시며 바라보고 있는 호랑이 앞을 작디작은 산짐승들은 보란 듯이 지나간다. 침이 고이는 본능을 억제하기 힘든 호랑이, 지나가는 산짐승을 냅다 입에 물고 말았다. 이 맛을 꿀맛에 비하라. 딱 한 번뿐이라고 다짐했건만 이미 맛봐버린 고기인지라 몰래 먹는 횟수는 늘어만 갔다. 바늘도둑 소도둑 된다고 했던가. 물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이러한 속담이 없었겠지만 처음엔 작은 짐승만 잡아 먹다가 나중에는
대범하게 큰 짐승도 서슴없이 잡아먹었다. 어느 날 입맛 다시는 호랑이를 큰 스님이 보고 말았다. 무엄하기도 하지. 부처님 도량에서 산 짐승을 먹다니 스님이 대노하여 호통을 쳤다, 그래도 스님은 부처님 앞이라 자비를 베풀며 앞으로 채식만 할 것을 명하고 또 명하였다. 호랑이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채식만 할 것이라고 굳게 또 굳게 약속한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산고기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은 늘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도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계곡 바위에 조용히 앉아 꼬리를 살짝 물속에 넣는다. 물속에 꼬리를 넣으면 즉시 꼬리를 물고 따라 나오는 가재를,ㅎㅎㅎㅎ. 산 짐승에 비할까마는 이 맛도 제법 쏠쏠하겠지, 산짐승도 아닌데 무슨 죄가 되겠는가. 라며 계곡물속에 꼬리를 넣은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매일 물가 바위에 앉아 있는 호랑이, 스님은 이놈이 요즘 용맹정진하는구나 싶어 가상히 여겼다, 수행방법도 여러 가지 있다지만 큰 스님이 봐도 어찌 좀 해괴했다, 호랑이의 태도를 유심히 관찰한 큰 스님, 드디어 호랑이의 해괴한 가재 잡이는 들통이 나고 말았다. 화가 단단히 난 큰 스님은 계율을 범한 호랑이를 칡넝쿨로 네 발을 꽁꽁 묶어 큰 소나무에 매달아 버렸다. 큰 스님은 화가 났는데 나무에 매달린 호랑이 녀석은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가재 좀 잡아먹는 것 가지고 해도 너무한다는 비웃음인지, 기발한 가재 잡이를 생각해낸 자신에 대한 대견함에서 오는 웃음인지, 하여간 귀엽다, 대흥사 침계루 벽 나무에 매달린 호랑이와 나란히 그려진 가재 그림의 설화다. 절간 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나름 다 얘기꺼리가 있다, 다만 우리들은 모르고 지나친다, 대흥사에는 호랑이 그림이 또 있다. 산신각에 도인과 함께 있는 호랑이 그림이다. 민간신앙에서는 호랑이를 산에 사는 영물로 여겼지만 산신은 언제나 호랑이를 옆에 거느리는 것으로 표현한다. 대체로 종교라는 것이 유일신을 기조로 한다, 다른 나라들은 어쩌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심하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은 믿지 마라" 그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다, 그렇다고 내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고, 이 땅에 전래된 불교는 기존에 있던 모든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불교 속으로 수용했다, 그 결과 절간마다 뒤쪽 언덕에 작은 각(閣)을 한 채(三神.山神) 지어 신들을 모셔 주는데 이때 호랑이 그림은 산신(山神)을 보호하는 의미로 위엄 있게 등장한다. 역사적인 내용은 사실만을 기초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이미 공개된 팩트글이다,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재 해석하여 글을 쓰는 것은 순전히 내 개인의 생각이며 같은 대상이라도 보는 이에 따라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꿈의 동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