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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88년부터 현재까지 21년간 국선도 매니아..이원태 기획재정부 관세정책관
88년부터 현재까지 21년간 국선도 매니아로 과천 청사에 있는 국선도 동호회에 활동중인 이원태 기획재정부 관세정책관을 매일신문 서봉대기자가 만나보았다. 다음은 2009년 4월 20일 매일신문 기사전문이다.
과천청사 TK 실·국장들의 '맏형'…이원태 기획재정부 관세정책관 |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언제 합격할지 기약하기 어려운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가, 1980년 초 대학(경북대)을 졸업하고도 1년여 동안 직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3남매 중 맏이여서 집안의 기대가 컸던 만큼이나 그의 고민은 더욱 깊었을 것이고 부모님의 걱정도 더했을 듯하다. 게다가 같은 학과(경영학과) 친구들은 모두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게 돼 혼자만 백수 신세였단다. 이원태(56) 기획재정부 관세정책관에게는 '80년의 봄'이 또 다른 의미에서 힘겨웠던 시절이었던 셈이다.
이 정책관은 과천 정부청사에서 대구·경북 출신 실·국장들 중 맏형으로도 불린다. 대학을 늦게 들어 간데다 고시도 늦어 다섯살 안팎의 연장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무관 때 그의 신혼집은 이들 후배의 잠자리가 된 적이 적잖았으며, 후배들의 각종 고민들을 들어주고 조언도 해야 했다.
그는 대구 동화사 아래 도학동 고시촌에서 공부를 했는데, 이곳에서 함께 공부했던 김화동 한나라당 수석전문위원(전 기획재정부 재정정책국장)과 이현동 서울지방국세청장은 행정고시(24회) 동기이자 경북고 후배들이다.
29년째인 공직 생활 중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며, 1997년 벨기에 대사관의 재경관으로 파견돼 세계관세기구(WCO)에서 한국 대표로 활동했던 게 큰 보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는 공직자로서 갈등도 겪었단다. 김영삼 정부가 막 출범했던 1993년에는 경제기획원의 경제기획국 사무관으로 근무했는데, 맡은 일이 노태우 전 정부의 경제정책을 뒤엎고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는 실무자 역할이었다. 이 정책관은 "이전까지의 생각을 뒤바꿔야 하는 만큼 개인적으로 갈등이 이만저만 했던 게 아니었다"며 고충을 토로한 뒤 "그러나 정책이 정권에 따라 바뀌더라도 경제 선진화를 지향한다는 궁극적인 목표에서는 어느 정부든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왔다"고 덧붙였다.
'수처작주'(隧處作主)라는 글귀를 항상 수첩에 적어두고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주인 의식을 갖는다는 뜻인데 공직생활을 지탱해온 버팀목이 됐을 듯하다.
정부의 경제 정책을 입안했던 만큼, 대구경북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묘안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지역민들의 경제 활동이 지극히 보수적인데, 다소 엉뚱하다 싶을 정도로 발상의 대전환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 뒤 "소비 패턴과 투자 패턴을 확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볼거리나 쓸거리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지역민들과 대구시·경북도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 대구와 경주 간 '역마 이어달리기 경기'를 갖고, 이와 병행해 역 주변 축제를 함께 개최하는 것도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단다. 또한 포항의 제철산업 등 지역 내 주력 산업들을 기반으로, 대구와 인근 시·군을 망라하는 산·학·연 클러스터를 구축한 뒤 수도권의 관련 기업들을 유치해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이 정책관은 관세 분야에서 과장을 지냈고 현재는 국장까지 맡고 있어 이 분야에서는 전문 관료로 꼽히고 있다. 작년 조세연구원에 파견 나가 있을 때는 대구세관장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으나 며칠을 고민하다가 고사했단다.
국선도를 배운 지 21년째다. 88 서울올림픽 이후 국내 경제 여건이 좋아지면서 웰빙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을 때 주변의 권유로 시작한 게 벌써 그렇게 됐단다. 과천청사 지하에 마련된 국선도 동호회 모임에 참여하고 있으며 친구들과 함께 등산도 자주 한다.
대구시 태전동(옛 칠곡군 태전동)에서 태어난 이 정책관은 매천초교·경북대 사대부중 경북고·경북대를 졸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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